| [ ComicsAnim ] in KIDS 글 쓴 이(By): Ugaphite (우가) 날 짜 (Date): 1996년06월10일(월) 21시24분33초 KDT 제 목(Title): <반딧불의 묘>에 대한 평 하나... .. 이건 bbmania님의 글에 반해서 올린 건 아닙니다. 그저 이런 시각도 있다는 거지요. 아시겠지만 아랫글은 이번 영화제 팜플렛에서 발췌한 겁니다... ... <반딧불의 묘>는 전쟁에 관한 영화다. 그것은 분명 전쟁의 어느 암울하고 비극적인 구석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반딧블의 묘>는 흔히 발하는 '반전'(전쟁의 비참함과 인명살상의 죄악을 고발하는 따위의)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기분 나쁘고 묘한, 슬픔보다는 안타까움이라는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은 그 '무엇'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의미심장하게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반전의 시각을 전쟁과 인간의 대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 이것도 전형 적이고 진부한 휴머니즙의 태도다. 너도, 나도 모두 희생자라는 식의.. ), 인간과 사회의 대립에서 찾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비판 이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비록 셕연찮은 구석이 없지는 않으 나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적 야망에 대한 향수 또는 복귀로의 해석이다. (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군국주의도 흔히 말하곤 하는 '어떻게 침략자로서 우리도 희생자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그것도 일종의 정당화 아닌가? ' 식의 군국주의는 아니다. 그 같 은 비판은 <반딧불의 묘>가 같잖은 "휴머니즘"적 태도를 취했 을 때나 적절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반딧불의 묘>의 초반 존개는 충실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바쳐져 있다. B29의 공습과 폐허가 된 도시( 이때 그려진 도시의 풍경은 Animation의 진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장관 이다. 때문에 Ending 장면에서 '반딧불'과 공존하는 고층 빌딩의 '숲'은 짧은 쇼트임에도 불구하고 매구 강한 상징적 효과를 연출 한다.), 구더기가 스물거히는 엄마의 시체, 엄마를 찾으며 우는 어린 소녀와 그를 달래는 , 역시 어린 소년, 그의 무한히 이어 지는 롱 쇼트의 황혼녁 철봉 재주넘기까지, 그것은 전쟁의 참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 이후로 극의 양상은 급변한다. 그것은 최초로 친척 아주머니 와의 관계에서 모습을 두러낸다. 여기서부터 전쟁/인간의 대립적 형상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사회)/개별적 인간의 형상으로 구체화된다. 이 대목을 '아주머니'의 인간성 문제로 축소하여, 우리 의 주장을 과장으로 치부해버릴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작가는 많은 대답들을 작품 속에 준비해 두고 있다. 사실상 이 이후의 극은 사회 와 개별적 인간, 특히 전쟁에 의하여 버려진- 엄마는 전쟁통에 죽고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죽은 ㄱ중의 남매와 같은 -인간사이의 대립적 형상을 묘사하는 데 바쳐진다. '세이다'가 먹을 것이 없냐고 물어봤던 선량한 농부의 대답( " 아주 머니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에서, 동생이 아파서 그랬다는데도 '세이다'를 두들겨 패며 경찰서로 데려가 버리는 농장 주인, 선량한 척 하다가도 "배구프면 물이나 먹어라." 하고 돌려보내는 경찰, 오빠가 맞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저만치서 울부짖으며 바라보던 '세즈꼬'( 이 대목에서 성우의 소름끼칠 듯힌 연기와 작가의 연출력은 가히 '작품'으로서의 예우에 걸맞는 그것이다. ), 공습이 시작 되면 오히려 신이 나서 죽음을 무릅쓰고 도둑질을 하는 '세이다', 전쟁 의 와중에도 얼음을 들여다먹으며 사는 사람들, 무관심한 의사, 귀신이 나온다며 남매의 보금자리를 비웃는 아이들, 그리고 - 가장 압권인 대목인데 - 전쟁이 끝난 후 화려한 옷차림으로 돌아온 부유한 가족의 모습과, 그 집에서 풍금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죽은'세즈꼬'의 환여이 그들의 남루 한 보금자리 주변을 이리저리 뛰도는 장면까지, 작가의 시선은 폭넓게 전쟁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묘사한다. 이를 통해 남매를 죽을으로까지 내몬 실체를 대책없이 주어지는 '전쟁'이나 '성격 고약한 아주머니'가 아닌 '일본 사회'로 확대시킨다. 그럼으로써 극의 구성은 유유히 '싸구려 휴머니즘'으로부터 벗어 난다. 작가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남매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남매를 죽인 것은, 저 전쟁 으로 상처받고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죽인 것은 그들 스스로가 벌여 놓은 전쟁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는 '어른들의 사회'이다. 작가는 전쟁을 통렬히 비난한다. 불타는 도시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는 패잔병의 역설과 "국가 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친척 아주머니의 가식적 태도, 전쟁의 패배를 무덤 덤히 지껄이던, "군함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지"라며 냉소적으로 넘매 아버지의 죽음을 단정지어 버리는 어른들, 작가는 그들의 이율배반을 어린이들의 눈으로 보여준다. 그러하기에 그들 - 살아남은 어른들이 재건시켜 놓은 일본 사회의 '빌딩숲'과 어우러진 반딧불 불빛은, 전쟁과 '사회'에 희생당한 '어린 반딧불'들의 영혼이며, 사회적 이율배반을 고발하는 전언이며 그리하여 <반딧불의 묘> - '죽은 자'의 기록은 '죽은 자'들을 위한 장엄한 진혼곡이 된다. 이 진혼곡을 어찌 우리가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해서 '도덕'으로 단죄할 수 있으랴...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두 번째 견해가 제시된다. 차라리 두 남매의 죽음을 전쟁의 비극으로 몰고 갔더라면 손쉽게 " 저런 뻔뻔 스러운 녀석들"이라는 도덕적 비난( 대동아 전쟁의 장본인이므로 )이 나올 수 있으며, 그 정도라면 '도덕'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작품'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위와 같은 구성으로 작품은 '다른 차원'의 의혹을 빚어낸다. 작가는 왜 전쟁당시의 사회를 저토록 냉소적으로 그려냈을까? '세즈꼬'의 죽음이 공교 롭게도 '전쟁의 패전'과 겹쳐 있으며, 그들의 아버지는 말로만 ( 유난히 말로만 국가를 위하는 사람들이 극중에 많이 등장함을 비교하여 ) 애국자가 아니라 진정한 대일본제국의 군인이라는 점은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 또한 전혀 상반된 해석도 가능한 Ending장면의 '번영한 대일본제국'의 반딧불, 반딧불, 반딧불... 그러나 우리는 단언할 수 없다. 어쩌면 여태까지도 뿌리박은 우리들 스스로의 일본에 대한 강박증일 가능성도 많으므로, 강박증이 재구성한 얼토당토않은 분석 일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그것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작품을 감상한 기분은 묘하 다. 한편으로는 한없는 슬픔, 안타까움이, 또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도 역시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 뿐인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럼... 우 가 덧붙임 : 다른 건 몰라도 '세즈꼬'역의 성우 연기는 정말 소름끼칠 정도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