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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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9장


마태복음 9장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

들이 데려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

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

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

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 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께서 거

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

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21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

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

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28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

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6절 말씀까지 중간중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은 은혜의 장입니다.

제일 처음 나오는 이 중풍병자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처절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의 세리 마태는 동족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받으며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그 생애가 놀라웁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이 어떤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죽은 딸을 살려주는 이야기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 뒤 계속

해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에 걸려 여러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고 약을 썼지만 고

생만 하고 어려움을 당했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 병에서 놓임을 받는 이야

기, 앞을 보지 못해 답답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어두움

에서 해방을 받고 밝은 빛 가운데서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을 우리는 마태복음 9

장에서 봅니다. 귀신 들린 사람, 각색 병과 또 연약한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

이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고 약한 부분이 강해지고 그들이 매여있는 모든 어

두움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아서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장면이 계

속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그들을 인도할 목자가 없어서 고생하며 유

리하던 많은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더 이상 고생하며 방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마태복음 9장이 끝납니다. 9장에서 예수님을 빼버린다면 그

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문제를 다 가지고 소

망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통 속에서 해방을 

받고 고침을 받아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예수께서 그 길을 떠나 지나 가시다가' 하는 장면으로 마태와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살았던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중풍병

자를 고치신 일을 하시고 떠나가시다가, 하필이면 마태가 일을 하고 있는 세무소 

앞을 지나가셨습니다. 마태가 근무했던 세무소가 어디쯤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세무소가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을 보면 그곳은 아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곳일 것입니다. 동네가 꽤 컸을 것이고, 길도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고, 건물들

도 많이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 곳을 지나시다가 마태가 일을 하고 있는 세무

소 앞을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그때 세무소 앞을 지나가지 않고 

다른 가게 앞을 지나갔더라면 마태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그 

세무소 앞을 지나지 아니하시고 다른 곳을 지나셨다면 마태의 삶은 거기서 끝이 

나는 겁니다. 소망없는 인생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은 세관 앞을 지나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세리 마태가 

앉았다는 것은 자리를 잡고 이제 자기 터전을 잡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의 소

망이 무엇입니까? 세리라는 직업은 동족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는 직업

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돈이 그의 소망의 전부였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다 해

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말미암아 욕망을 채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

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그는 일어나 예수

님을 좇았습니다. 아주 간단한 장면이지요? 우리가 마태를 생각해 보면, 만일 예

수님께서 마태가 일하고 있던 그 자리에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마태의 인생이 어

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너무도 놀라운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이요, 

섭리요,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큰 사랑이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야

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9장에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쟎아요. 중풍병자를 온전하

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가 없으면 이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누

가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았습니까? 중풍병자, 세리 마태, 그외의 여러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전부 다 그렇습니다.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온전치 

못한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들에게 육체의 저주를 내려서, 이 세상에서의 연약함과 

여러가지 고통스러움과 불행한 환경으로 그들의 마음을 낮추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9장 1절에서 8절 사이에 있는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주변에 있던 서기

관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시험이 들었습니다. "참람하도

다. 하나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을찐대.."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나사렛 목수였습니다. "이름없는 한 나사렛 청년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주님이 하시더

라고요. 주님이 그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네 죄사함

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

냐?" 제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그 질문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중

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그 말과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

는 이 두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습니까? 능력 많으신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있는 것은 없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그 주님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그 말씀이 뭐가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그 말이나 "네 상을 들고 가라"는 그 말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될 때 이 사람이 정말 죄를 사함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나왔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약으로도 병을 고칠 수 없으니까 병 

좀 고치기 위해서 나왔겠습니까? 중풍 병자가 나온 목적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

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병을 고쳐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우리 인

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죠. 그러니까 어

떤 문제 가운데서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과는 

핀트가 잘 맞지 않습니다. 자, 중풍병자와 네 사람의 친구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

게 될 때 죄사함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

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의 상을 달아내리는 그 믿음을 보시고 무슨 말씀을 했

어요? 예수님이 보시는 그 기준은 중풍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는 그들의 형편

이나 상황이 아니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부분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을 낫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은 

오지 아니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

습니다. 그러면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반드시 죄의 

값을 지불하셔야만 사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의 죄를 사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할찌라도 그분이 피를 흘려 죽지 않

으시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빼놓고 인간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셨다면,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 구태여 십

자가에 못박혀 죽을 필요까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단도, 

또 많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의 신도 어떤 부족한 부분이나 육신의 어떠한 필

요를 어느 정도는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신을 따

르고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고 하는 불치의 병인 

암이나 기타 많은 질병이 꼭 기독교에서만 고쳐지는 전유물은 아닙니다. 미신을 

믿어도 아니면 다른 종교에서도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을 고치는 역사가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도 다른 많은 이방 종교와 이방 

신도 병을 고치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죄에서 구

원하고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의 값을 지불해 주지 아니하면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

다. 그런 의미에서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그 말과 "네 상을 들고 걸어가

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습니까?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그 말이 훨씬 쉽

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담보로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그 말은 아무나 할 수 없

는 거예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 줄 만한 능력과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이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죽음을 거치

지 않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쉬운 길이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

님 앞에 제물로 드리고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여려운 길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 

예수님은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는 겁니다. 당연히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

느니라" 하는 그 말이 어렵고 "네 상을 들고 가라"는 말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아

셨고 또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쉬운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시고 그 말씀을 하

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자가 이땅에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 앞에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을 때, 어려운 길이라 할찌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

는 길이고 그것이 죄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데리고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주님이 순종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

간들이 원하는 그런 쉬운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멍에

를 받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 없이 자유롭고 인간 스스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을 추구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의 목적은 인간중심입니다. 좀 더 편리하게 행복하게 안락하게 살아

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 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분, 인간이 하는 일은 되도록이면 쉽고 펀리한 삶으로 길들이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항상 쉽고 펀한 길을 찾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9장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무엇입

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습 그대로 나왔더라고요. 중풍병자는 정말 들것에 

누워서 그대로 나오게 되어을때 예수님이 그의 중심을 보시고 주님이 그를 고쳐 

주시더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고생에서 끝나는 삶이고 유리하는 것에서 끝나

는 삶입니다. 이 중풍벙자가 왜 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방황했습니까? 예수님 앞

에 그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형편과 환경을 보고 이야기하시지 않

습니다. 이 중풍병자가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을 때 그 모습니 아주 추했을 것입

니다. 침상에 누워서 살았기 때문에 침실이고 화장실이고 그곳이 그의 삶의 터전

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보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집에 지붕

을 뜯고 들어와도 그것 때문에 주님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방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탓하지 않은 것을 봅니다. 주님은 자신

을 당신께 맡기려는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 앞에 자신의 모

든 삶을 맡기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쉼을 성경 속에서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겁니

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라고 했을 때, 그는 이제 자리를 잡고 자

기 일생을 거기서 끝내리라고 생각한 그 위치에서 떠나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따랐을 때 마태를 주님이 어떻게 변화 시켜 놓았습니까? 마태가 

주님을 따르게 될 때, 주님이여 나는 처자식이 있고 장래는 이러이러한데 정말 

주님께서 내 장래를 책임져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정말 마

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저분이야 말로 내 일생을 맡길만한 진실한 분

이고 신실한 분이고 믿을만한 분이고 내 구주로 모실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

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

을 비롯하여 그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와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다른 제자의 이름을 부를 때는 누구 형제의 누구 아

무개 아들 누구 이렇게 기록을 했는데 마태를 기록할 때는 세리 마태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마태가 10장을 적으면서 베드로라하는 시몬을 위시하여 이하등등 하면

서 나오는데 자기 이름을 적으면서 세리였다고 적었어요. 세리인 마태를 누가 하

나님의 사도로써 주님의 종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예수님이 바꾸어 놓았어요. 마

태가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을 

맡기고 주님을 전적을 따라 간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목자가 되셨습니

다. 주님이 길을 잃어버린 양인 마태를 부르셔서 이끄셨는데, 사도의 위치에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 위치에 두셨습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을 기

록하여서 얼마나 많은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렸습니까? 누가 그렇게 했느냐는 거

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정말 이 세리 마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

이었습니까? 어느 집에 가서 세금을 어떻게 받는가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

었습니까? 마태가 전도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설교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교제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베드로를 보십시요. 고기 잡는 것 외에 무엇을 그렇게 잘 했

겠습니까? 재물이 있습니까? 지위가 있습니까? 배경이 있습니까? 사람을 설득할 

만한 외형적인 모습을 갗추었습니까? 그저 고기잡는 기술밖에 없는 그가 모든 것

을 버리고 주님께 맡기게 되었을 때, 주님이 베드로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번 

말씀을 전하니까 삼천명 또 오천명이 구원을 받고 정말 수 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세계 역사를 바꾸는 귀한 그릇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그의 삶을 주님께 모두 맡겼기 때문에 변화되었습니

다. 우리가 속해져 있는 그 사실을 우리의 마음에 깨닫고 그분에게 맡겨진다면 

마태를 변화시키고 베드로를 변화 시키고 그 외 모든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을 변화시켰던 그분께서 우리를 변화 시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10장 1절 예

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불렀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

셨는데, 고린도 전서 1장에 나오는 것 들입니다. 미련한 것 들, 약한 것 들, 천

한 것 들, 멸시받는 것 들, 없는 것 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이름

을 부르시는데 국회의원인 베드로, 판사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하지 아니하고 

전부다 그렇고 그런 사람이예요. 이 말씀을 보면서 위로받고, 베드로의 부르심을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요한이,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도마 이들을 보면 하

나님의 은혜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전도하며 더러운 귀신

을 좇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기 위해 불렀고 주님

이 세상에서 그의 피값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분은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

니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너희의 것을 맡기라고 하시고 버리

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신령한 것으로 그분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님이 변화시

켜 주셨어요. 베드로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어요. 도마 여전히 의심이 많고, 마태 

역시 여전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따라가다 보니까 때가 되니 그들

에게 말씀을 주시고 주님을 알게 해 주시고 그 마음을 바꾸어서 그들로 하여금 

정말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건설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세리 마태와 같았고, 중풍병자와 같았고, 소경과 같은 사람이었고, 

목적없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정말 방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권세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이 부르셨다는 겁니다. 왜 자기 소유를 삼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제자를 부르셔서 나중에는 가라 하시더라고요. 주님은 우리

를 보내시게 될 때 절대로 맨손으로 보내시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오천명이 굶주

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보시고 미리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이 백성이 기

진하고 굶주려 먹을 것이 없구나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데 "야 이거 

먹을 것을 줘야겠는데 먹을 것 좀 갖다 주어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이 줄 것이라

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줄 것을 아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기 우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굶주려 있을 때 그

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목마른 자를 그대로 보내지 않았고 헐벗은 자를 결코 그

대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 당신이 입고 있던 옷으로 우리를 입히셨고 당신

의 강함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의 헐벗은 영혼을 당신의 생

명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다음에 또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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