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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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1996년04월03일(수) 15시34분07초 KST
제 목(Title): [한백설교] 충족 히스테리, 그리고 질병


3월 24일 설교

                       충족 히스테리, 그리고 질병

                                김진호
                       준목/한백교회담임교역자

   고린도후서 12장
  1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
다. 2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교인 하나가  십 사년  전에 세째 하늘까지 붙
들려 올라 간 일이 있습니다. 몸째 올라 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 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3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 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5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6내가 다
른 것도 자랑할 마음이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사실대로만 말할  것이
기 때문에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듣고 한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게 될까봐 나는 자랑을 그
만하겠습니다. 7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
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
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8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
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하고 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10나는  그리스
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
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
니다. [공동번역]
   일반적으로 지켜지는  교회력에 따르면 4월   첫째주일이 부활주일입니
다. (우리 한백은, 아시다시피, 매년  4월 항쟁을 기리는 예배를 부활절로 
삼아 왔습니다. 올해는 4월 21일을  부활절  예배로 드릴 예정입니다.) 어
쨌든, 일반 교회력에 따르면  부활절의 40일 전부터 '사순절기'가  시작됩
니다. 부활절 전날까지의 이   40일간의 기간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
래서 교회력을 충실히  지키는 교회는 온통 고난이라는  상징을 예배 곳곳
에,  신앙 생활 곳곳에 담아내려  합니다.  목사들만 설 수 있다는 설교단
상에는 고난의   상징색인 보라색 천이   드리워지고, 예배당 앞쪽 중앙의 
성서 양편에는  보라색 초가  꽂힙니다. 설교 내용도  계속 고난을 주제로 
되풀이됩니다. 이 기간동안 신도들에게   금주 금연 등을 포함해서,  자칫 
생활이 방만해질 수   있는 요소들을 자제하도록  하는 캠페인성의 권면이 
계속됩니다. 여러 집회들, 특별히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의  참석이 강
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금요일,  즉 부활절로부터 바로  사흘전인 금
요일,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을 상징하는 이 날에는 금식과 경건한  기도의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것이  계몽됩니다. 신앙의 열정이  불타오르는 어떤 
이들은 마지막 한 주간을  금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순절기 내내 40일 
금식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생각하면서 40일을 충실히 보내고 부활절을 맞이하면 부
활절의 '축제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빛을 발할 것입니다.  이천년전의 예
수님의 고난이  지금의 나/우리와는 별개의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징들
을 반복함으로써 오늘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 속에는 
고난이라는 신앙의 이미지가   각인되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믿겨
지지 않는 전설이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기쁨이라는 이미지로 우리의 뇌리 
속에 확고한  자리를 틀잡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은 현실로서 체험됩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생존해 온,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그  영향력을 지나치
리만큼 발휘할 수  있게 한 그리스도교의 비버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처럼 이런 '노하우'에 익숙치 못한  개개의 교회들, 혹은 그  밖의 여
러 모양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유
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원인진단을 제대로 한다고  해서 
금새 발바닥에 땀 나도록 성장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쯤은 여러분 
모두가 잘 아실 겁니다.  '상징 만들기'가 냉철한 분석과 비례한다면 소위  
성공한 목회자는 모두 학자였겠지요. 이것은 마치 뛰어난 경제학자나 경영
학자가  당연히 훌륭한 사업가가 되리라고 볼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
니다.)아무튼 그리스도교의 성공의 비법은  상징을 창출해 내는 비상한 능
력에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로  든 부활
절 상징만 해도 그렇듯이,  그리스도교의 상징 만들기에는 어떤 하나의 법
칙이  있습니다:  상징 속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양극적인 두 요소가 
들어 있고, 이 둘이 서로 대결하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중 하
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극화해서 나타내고  있다면, 다른 하
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철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
도 이 두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선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전제해서만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세계의 타락과 하
느님의 창조 등의  상징처럼 말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타락이 없으면 창조도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절망적이지 않으면 부활
의  기쁨이 별 것 아닌  것이 되며, 타락의 모습이  극으로 치닿지 않으면 
창조도 간절한 소망의  범주에  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이 
전제가 되고, 그것이 극복되면서  희망이, 기쁨이, 환희가  솟아오를 공간
이 생겨납니다. 부정적인  것의  횡포가 극에 이르러서야,  철저히 절망의 
수렁에 떨어뜨리고서야,  '아이쿠  죽겠네'라는 탄식이, 울부짖음이  비명
처럼 터져 나오고서야, 비로소   극적인 반전이 갑자기  도래합니다. 이런 
법칙에  따라 정교하게  상징이  구성되었을 때, 그리스도교는 성공이라는 
궤도에 들어설 교두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극적
인 반전을 유도해 내는 상징의   마술이 흥행에 성공하는 비법으로 자리매
김을 하는 그  곳에, 역사적으로 이상스런  효능을 발휘하는 약제가  발견
되었던 것입니다. 그 약제의  이름은 '최면제'입니다. 이 약의 효과로  부
정적 측면, 절망적 측면을 망각케 하는 징후가 나타난 것입니다.
   본래 수난주간은  고난을  집중적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살이의 뼈저림을 새삼 인식하게 해 줍니다. 간혹  잊어버렸거나 포
기했던 그것을 다시 자각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아니  그 억누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지를 갈갈이 찢을 듯이 마구 잡아당기는 세상살이의 고문이 한없는 통증
으로 다가옵니다.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통의 강도는  더  해 
갑니다. 그 힘이 너무나 강한 반면,  그것에 저항하는 내 힘은  너무나 형
편없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절망의  수렁에 빠집니다. 한가닥 남은 실오라
기같은,  기적같은 희망의 원천을   향해 구원을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것은 약속된 결과가  아니라, 실존적인 고투의 자연
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요컨대  수난주간은 고난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게 합니다.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난주간과  부활절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성공적인 제의화는  '
최면제'라는 이상스런 약제를 통해 고통을 희화화합니다. 제의의식을 통해 
뻔히 도래할 '희망'을,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맺음되리라는 것을 염두
에 두면서 '고난'을 시연하게   합니다. 각본에 짜여진 대로 '가짜'  고난
을 시행합니다. 고난의  삶을 직면하는 대신 하릴없이  밥을 굶고, 욕정을 
억제하려 하는 데에만 온통 관심을 집중합니다. 고난은  삶이 아니라 하나
의 연기(퍼포먼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현실의 세계  
속에서 고난의 제의는 하나의 코메디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요컨대 사람
들은 이  제의를 통해서 현실의 고난을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망
각의 세계의  더욱 깊은  곳으로 쳐박아  두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흥행에  성공을 거두게 한  비법인 상징  만들기는 뜻하지 않은 결
과로 와전되게 되었습니다. 부정의 현실을 잊어버린  긍정, 최면제에 마취
된 넋나간 즐거움이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인 '충족 히스테리, 그리고  질병'이라는 표현에서 무
언가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으셨는지요? '충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
지는 낙관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여기에는  희망의 분위기가 서려 있고, 그
것을 향한 힘찬 의지의 발걸음이 시시되고 있습니다. 무언가  하면 한만큼
의, 아니, 그 이상의 성과가 되돌아오리라는 자신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낙관주의가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 '히스테리'는 역사 속
에서 소수자, 무력한 자들의  행동을  비하하고 질병화하는 표현으로 활용
되어  왔습니다. '히스테리'라는 말은  본래 '히스테리아'라는, 여성의 성
기를  가리키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가령 욕구불만, 신경질, 분
노 등의, 인간이면 누구나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정신적 현상을 여성에
게는 성적인 특성과 결부시켜서 하나의 질병처럼 이해하려는 시각이 이 용
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중세유럽의 역사를 보면 이른바  '마녀들'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
습니다. 얼마나  편견에 찬  기록들인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그네들의 능
력에 대한 터무니없이 과장된  부정적인 묘사와, 그네들에 대한 공포심 등
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녀'들의 히스테리를 두려워합니다. 
그네들의 능력이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덮쳐오리라고 상상
합니다.  그래서 중세는 '마녀사냥'이라는,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스런  
만행 가운데  하나를 역사의 무대 위에  새겨놓고 말았습니다. 마녀사냥은  
마녀들의 히스테리를 두려워한 중세인의   집단적 히스테리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녀의 히스테리는  가상적이고 수동적인 반면, 중세
인의  히스테리는 실제적이었고 또 무서울 정도로 가학적이었다는 사실과, 
이  현실적이고 파괴적인 히스테리의 한 가운데에는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런데 '마녀들'에  관한 재판기록을 검토하면서  역사학자들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녀'라  하여 화형에 처해진 이들  가
운데 많은 사람들이 중세의 '여성의료인'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녀
들은 중세의 의료과학을 담보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많은 경우 산파
였고, 이들에 의해  낙태약과  낙태시술법, 그리고  산고의 진통을 이기게 
하는  진통제가 개발되었습니다.  중세의  공식적 과학의 보고였던 수도원
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일상생활적인 제약기술, 의료기술이 이들
에  의해 담보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많은 경우 이윤추구를 목
적으로 하지 않는, 이른바 '결과적 박애주의'의 주역이었던 것입니다.  그
런데 교회는 낙태금지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또한 출산의 고통이라는 창
조질서를  어겼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  여성과학자들을 마녀로서 처형
하도록 선동해  댑니다. 그리고 그 무자비한 잔혹극으로  말미암아 공백이 
생긴 의료영역을 대체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남성 이발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근대적인 의료술이  발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위대한 성과를   이룬 의학기술의 발생 초기에는,   여성에 대해 무지하고 
여성의 고통에 무감각한  이발사들의 끔찍스런 히스테리적인 의술에  의한 
무수한 여성과 태아의 희생이 그 댓가로 치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마녀'의 의술은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던 현실의 고통에서  출발합니
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며, 그 고통의 결과가  얼마나 위험천만
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과  
태아가 출산과정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사산율이 거의  50%에 이르는 그렇
게 고통스런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안전한 출생의 문제는  그야말
로 절박한  현실이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은  '충족'과는 반대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발사 의사들의  의술은 고통의 공유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제3자의 것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즉 고통을  대상화할 수 
있는, 고통을 가상현실로서만  체험하는 이들의 의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잔인한 치료법'들이 개발됩니다.  이렇게  생체의학의 발전과정에
는 생명에 대한 존중심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희화화할 수  있는, 사체해부
학적인 자세에 기초한  냉혹한 이성주의가 그 시발점을  형성했던  것입니
다. 이발사  의사들로부터 시작된 사체해부학적   냉혹성을 특징으로 하는 
의술은 '충족'의 정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제3
자적인 자신감을 반영하는 충족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무수한  시
행착오를 무감각하게 감내할 수   있었던 충족의 히스테리라는, 권력 추구
적인 무자비한  광기가 전제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을  비울 것과,  그 비워진 자리에 타인
을, 즉 타인의 고통을   자리잡게 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위대하길래 남의   고통의 기록을 나의  
고통으로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만큼 오만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정  내 속에 타인을 넣으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그는 결코 '충족'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
부족'한 자신이 드러납니다.  ㎖어난 육체와  천재적인  지식을 갖춘 이라 
하더라도, 타고난 센스로   지혜로운 처신을 할 줄   아는 이라 하더라도, 
질병을  치유하는 특권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이라 하더라도, 방언의 은사
를 받아 천사의  소리를 발하듯 이야기하는 이라 하더라도, 뛰어난 화술로 
온  세상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질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그 누구도 예외
는 없습니다. 진정 내 속에 남을 넣고자 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담아내고
자 하는 이라면, 그리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절망의 강도는 커지는 것입니
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고통입니다. 
   금식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신앙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고난  절기
를 맞아서 고통을  시연하려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심지어  손과 발에 못을 
박는 자학행위를 하는 것이  신앙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전도하는데, 혹은 
교회를 하는데, 혹은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성과가 잘  
나타나질 않아 힘들어 하는 것이  신앙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고
통은, 우리의 힘겨워   하는 말 속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거명되든 않든, 
교회  안에서  발설된 것이든  아니든,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적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내  안에 담기 위해, 그 사람의 입
장에서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를 부정하려는,  될 것 같지 않은 노력을 
계속하는  데서 오는 좌절의 고통인 것입니다.
   신앙적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담아낸다고 말하면서도 타인을 영원히 
타인의 자리에 남겨두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치관으로, 나
의 소견으로, 나의 신념으로 타인을  내 안에 넣으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타인을 타인의 자리에 영원히 남겨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발사 의사들
'의 의료행위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
는 종교제의적인 상징행위일 뿐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직면하지 않고  가
상현실에서만 고통스러움을  흉내내려는  이른바  '고통의 오락'일 뿐입니
다.  이런  대상화된 고통의 오락을 추구하는   이의 신앙적 광기는, 그의 
히스테리는, 그가 열성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려 하면 할수록, 권력 
지향적이고,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풍족한 은사로 인해 어느 누구에 비해 자랑할 것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충족을 체험하는 
것만으로 신앙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신앙의 원천을  
자신의 아픔에서  찾습니다.  자신을  가시로 찌르는 듯한  질환에서 그는   
신앙의 진리를  발견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랑하려는 것을   
찾으려 온갖 은사만을 추구하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
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도 살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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