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안식 출애굽기 1장 8절부터 14절 말씀까지 읽겠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 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지혜롭게 하 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 와 싸우고 이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 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 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사람이 이스 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 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으로 첩을 찾으려 갔다가 돌아오는 길 에 베냐민 기브아에 이르러 하룻밤을 우거하게 되는데 그 때 기브아 사람들이 그 첩을 밤새도록 욕보이고 그 사람이 우거하는 집 앞에 버려두게 된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이 그 첩의 시체를 열 두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내게 되었 는데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 지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하면서 모여 베냐민과 싸우 게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묻기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 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일찌니라" 하고 응답하신다. 분명히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싸우려 갔는데 그날 이만 이천 명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다음날 다시 하나님께 물었다.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하나님은 다시 응답하시기를 "올라가서 치라"고 하셨다. 그 날의 싸움에서 또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 삼일째 되는 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울면서 올라가서 다시 여호와께 물었다. "내가 다시 나의형제 베냐민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하나님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고 하셨고 말씀대로 그날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명을 죽이게 된 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분명히 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처음과 두번째는 패배하 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베냐민 자손이 악을 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 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물으실 일이었고 백성들이 처단할 문제는 아니 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을 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 신 것이다. 처음부터 싸울 것인지 싸우지 말 것인지를 물어야 했던 것이다. 싸우 는 것을 기정사실로 두고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하실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민수기 22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십볼의 아들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꼬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할려는 계 획을 세우고 신하를 보내어 발람을 초대한다. 발람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여호와께 물었다. 하나님은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셨고 처음에 발람은 발락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발락이 다시 더 높은 귀족들을 보내어 그를 초청 했을 때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다시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은 "가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가라고 하셔놓고 왜 사자를 보내어 그를 막았는가? 발람이 이미 갈려고 마음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라고는 하셨지만 하나님은 발람이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이미 어떤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 발람은 영적인 눈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빈 마음을 가지고 나아 오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나아갈 때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비워져 있는 마음 속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화가에게는 백지를 주어야 하고 음악가에게는 침묵을 주어야 한다. 하나 님에게는 빈 마음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것이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채워주실 수도 없고 또 무엇을 주셔도 우리의 것과 섞여서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탄 배가 파선 이되어 멜리데라는 섬에 들어가서 불을 쬐다가 독사에게 물리게 된다. 독사가 바 울의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언제나 죽을까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진 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게 하지 못하게 하심이로다"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죽지 않으니까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행 28:6)고 하였다. 문제는 형편이 어떠하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 각하느냐에 있다. 똑같은 사실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때는 성경이 꿀맛같게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그렇게 성경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순정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소설을 좋아하는구나'하 고 무협소설을 한 보따리 사다 주었다고 하면 과연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협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순정소설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결코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와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돈 버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출세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것은 우리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며 오직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신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 대한 관심으 로읽게 된다면 정말 성경은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 리가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유익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은 없을 것이다. 죄인은 자기의 영혼의 가치를 모른다. 그 들은 자기의 영혼을 돌아보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아무리 입으로는 육체보다 영 혼이 중요하다고 말할런지 몰라도 결코 그들은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 단은 인간의 영혼을 상품 중에서도 가장 가치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데(계 18:13) 어떻게 그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인들이 영혼의 가치를 알 수 있으며 자기의 영혼을 돌아볼만한 눈이 있겠는가? 따라서 죄를 가진 사람이 이 성경을 읽게 되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책이 없을것이다. 영혼의 가치를 아는 분은 하나님 과 거듭난 그리스도인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돌아보고 있는 가? 그리고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 고 있는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계신다.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게 될 때, 우리가영혼에 대 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일치 하게 되어서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꿀맛같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나다나엘 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볼 줄 아는 참 이스라엘인이었다.(요 1:4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오셨는가? 아니다. 진실로 그 분은 우리영혼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지 않은가? 마가복음 2 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용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모였는가? 자신의 병을 고치고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귀신을 쫓 아내기 위해서 즉,자기에게 있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 은 천국가는 길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는가? 침상채 달아내린 중풍병자 의 병을 고쳤을 때는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자들이 "소자야, 네 죄 사 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에는 "참람하도다"하며 예수님을 배척하지않던가? 예수 를 판 유다가 은 30을 가지고 가서 뉘우치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 였도다" 했을 때, 대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 라"고 하며 전혀 그의 영혼을 돌아보지 않았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한 영혼 의 부르짖음을 외면한 것이다. 그것이 제사장의 할 일이란 말인가? 영혼에 관심 이 없는 그들은 이미 제사장의 자격이 없는 자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 실때, 언제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 있었다. 누가 예수님을 배척했 는가? 이 땅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해먹으려고 하는 표면적 유대인 이 아니었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자들은 영혼을 돌아보지 않는 육신 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러했다. 당 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다투 고 있었고 누가 좌편에 앉으며 누가 우편에 앉느냐로 수근거리지 않았던가? 전혀 예수님과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당신은 읽어본 적이 있는가? 자 신의 영혼을 돌아볼 줄 알고 타인의 영혼을 살펴볼 줄 아는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며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당신은 얼마나 자신 의 영혼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자신의 몸이 아플 때 민감하게 반응을 일으키면서도 자신의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에 대 하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영적 건강상태가 어떠한지 생 각이나 해 보았는가? 우리가 거듭나고 난 이후에도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해결할려 고 하는 것이 우리 육신의 문제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 아야 할 것이다. 내 영혼이 병 들고 내가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 문에 주님 앞에 들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대개 우리가 들고 나가는 문 제가 '병을 고쳐 주십시오' '직장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 하는 그러한 문 제들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주님은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는 것이 아 니라 우리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간구할찌라도 그것이 우리 육신의 일 때문이라면 그것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혼에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육 신에 문제와 곤고함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면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느니라'(시 107:10)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때에 우리에게 곤고와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곤고와 문제가 닥쳐올 때,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그 곤고와 문제 자체를 해결해달라고 간구하 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이 그 고통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인데 말이다. 그 고통 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문제 자체를 해결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으니 어떻게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하나님은 '눈이 너로 범죄케 하면 뽑아 버리고 팔이 너를 범죄케 하면 찍어버리라'(마 5:29)고 하셨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우리 의 육신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기 위해 우 리의 육신을 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영혼에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사업 을 망하게 하실 수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능히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 다. 얼마전, '이런 행복을 주시려고 나를 불구자로 만드셨다'고 써 놓은 간증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능 히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영혼에 참된 복을 주시기 위해서 ... 우리는 영혼 쪽으로 마음이 돌이켜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기 1장을 통해서 그러한 부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430년 간의 애굽에서 의 종살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의 생활이 몸에 배여 있었다. 오히려 그 것이 그들에게는 편했을지 모른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까 구 소련에 14억 7천만 달러를 차관해 준 것이 있는데 러시아 연방에서 그것을 갚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그돈이 회수불능 상태에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나라가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있다는생각을 했다. 현대화가 되고 독립국가가 된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데 말이다. 앞뒤를 따져보지 않고 그저 큰 나라이기 때 문에 덕을 볼려는 마음으로 그 엄청난 금액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 서 430년을 종살이한 이스라엘을 본다면, 그들도 철저하게 종살이에 숙련(?)되어 져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 속에 애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먼저 일으 켜서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하게 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전혀 애 굽에서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하셨다. 우리가 그렇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하셨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이 부 리는 충성스러운 종(?) 사단을 통해 바로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그리하며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짓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무 거운 짐을지우면 그들의 숫자가 많아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여 창성하였다. 바로는 그들 의 고역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 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1:14) 고통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그들의 삶은 견딜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되 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리 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 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기 위함에서 이었다. 우리에게 고통을 더하신것은 우리 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즉 그들이 두려워 한 것은 이 스라엘이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지 않 았는가? 사단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국 떠났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사단 이 방해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일 을 사단이 막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고 믿어도 좋다. 예를 들 어, 우리가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했는데 사단이 그 영혼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그가 구원함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면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단이 막고 있다면 반드시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속하는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 였다. 사단은 이제는 이겼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어떤가? 무덤은 열렸고 예 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사단이 막으려 했던 인류의 구속사업을 사단이 오히 려 이루어주는 결과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구원함을 받고 난 후에 모든 일이 우리의 원대로 이루어진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는가? 우리에게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게 되고 우리의 영혼을 축 복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 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정말 행복했는가? 그들은 정말 만족을 누 리며 살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곳, 가나 안 사람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끝났을 때, 다시 그들은 동족끼리 싸우지 않았는가? 히브리서는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히 4:8)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안식은 육신 의 안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했던 안식은 우리 영혼의 안식이다. 이스 라엘에는 안식일이라는 것이 있었다. 6일 동안 힘겹게 일하던 종들이 그날은 편 하게 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는 쉬었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들의 마음도 쉬었는가? 내가 학교생활을 할 때,제일 좋았던 날은 토요일이었다. 내일이 일요 일이기 때문에 내일도 하루 더 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가장 마음이 편한 날이 었기 때문이다. 정작 일요일이 되면 내일 또 등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육체는 편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심히 피곤한 날이 되고 말더라는 것이다. 육체 의 안식과 영혼의 안식은 다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안식, 영혼의 안식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참된 안 식은 없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진정한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 다. 그것은 안식의 그림자이었을 뿐이다. 진정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 나님 안에 있었다. 안식은 하나님 그 분 자체이시다. 우리 영혼의 안식 되신 하 나님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거듭거듭 확인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 하나 님이 계시지 않은 가나안은 이미 안식처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안에 깊숙히 들 어간 사람일수록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구원함을 받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삶속에서 발견되지 못한다면 피곤한 삶을 살 것이다. 신앙생활이 재미가없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영혼을 향하여 돌려져야 한다. 당신이 죄 속에 있다면,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당신의 생각 은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을 향하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