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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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luvhurtz (  송 훈)
날 짜 (Date): 2003년 7월  3일 목요일 오전 03시 52분 46초
제 목(Title): 청부론과 청빈론 토론 전문 




청부론과 청빈론 토론 전문
편집부  

방송내용 
"크리스천은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최근 교계 핫 이슈가 되고 있는 "청부론과 청빈론" 논쟁을 공개토론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청부론자는 부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받을 수 있는 
은혜와 상급이며, 정직하게 번 돈에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떼고 난 다음 
나머지에 대해서 자유롭게 써도 좋다고 주장합니다. 청빈론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깨끗한 부자라는 말 자체가 허구이며, 부는 영적인 생활의 목을 
조르고 진리를 못보게 한다며 이에 맞서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는가?"는 한국교회의 경제 윤리의 현주소와 
성경적 경제관을 탐색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패널] 
청부론측: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전 동안교회 담임목사) 
높은뜻숭의교회 김남호 집사(기윤실 운영위원, 허쉬초콜릿 한국지사장) 
청빈론측: 빈들교회 허종 목사(전 미문장애인교회 담임)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고세훈 교수(교회개혁 실천연대 집행위원) 
MC: 박영근 박사(전 한세대 교수, 현 아이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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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은 과연 부자로 살아도 되는가? 지금 한국교회에는 부와 가난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물질적 부를 누려도 좋다는 청부론! 부는 영적 생활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 가난을 삶의 태도로 삼아야 한다는 청빈론! 일약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에 맞서 한국 교회의 물질적 
축복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크리스천의 논쟁을 넘어서 이젠 사회적 
논쟁의 주제로 떠오른 청부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물질관은 과연 
무엇인지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경제 윤리는 어떠해야 하는지, 
CBS 집중 토론에서 함께 얘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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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지금 교계에 청부론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돈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받을 수 
있는 은혜와 상급이다' 하는 청부론과, 이에 맞서서 '부는 영적 타락을 
가져오는 맘몬신이다, 예수의 삶을 따라 청빈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청빈론의 목소리도 높다. 과연 크리스천은 깨끗한 부자가 되어도 좋은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겠다. 먼저, 청빈론과 청부론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와 
지금 왜 이런 주장이 필요한 지 의의를 설명해 주기 바란다. 

김동호/ 청부론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돈은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복적 물질론, 물질적 축복론과 틀이 전혀 다르다. 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에 대한 책임에 관심이 있는 논리다. 둘째, 
깨끗하고 바르게 돈을 버는 것을 강조한다. 셋째, 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삶을 
강조한다. 하나님 몫과 가난한 이웃 몫을 얘기하고, 마지막으로 유산 안 
남기기를 하면 깨끗한 부자가 될 것 같다. 

사회자/ 그 주장을 지금 이 시점에서 하신 데에는 뭔가 현실에 대한 진단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김동호/ 청빈은 누구나 설명 안 해도 훌륭하다는 것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청부론자는 핸디캡이 있다. 청빈론은 훌륭하다. 그러나 극단으로 흐르면 
잘못이다. 청빈 그 자체만 가지고 기독교 윤리와 철학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청빈론의 한계를 느껴서 청부론을 얘기하게 됐다. 

사회자/ '자발적 가난' '영성적 가난'의 개념 정립을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왜 
이 시대에 청빈론을 다시 주창해야 하는지.. 그 의의를 설명해 달라. 

고세훈/ 청빈도 적절한 어휘 아니다. 청빈론도 사실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청부든 청빈이든 인간은 깨끗함을 얘기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래서 
김용봉 교수님이 쓰셨던 영성적 가난을 중요한 대체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영성적 가난이란 '깨끗함이란 도달된 상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비워지고 낮아지는 영적 과정'을 뜻한다. 둘째, 깊은 영적 성찰에 
들어가면 물질에 대해 일정한 태도와 자세를 갖게 된다. 바로 그것이 영성적 
가난이다. 물론 그 영성적 가난이 물론 내용 없는 것은 아니다. 도무지 
깨끗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부?라는 것은 
형성?축적 과정에서 끊임없이 영성과 교우하는 것(끊임없이 영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어떤 상태라던가 인간과 독립된 객관적 실체라고 이해한다면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사회자/ 이 시대에 청빈론을 주창하는 이유는? 어떤 위기감을 느끼는 건가? 

고세훈/ 두 가지를 얘기하겠다.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 '청부론' 담론은 
위험하다. 이미 출판물을 통해 공론화됐다. 물질?부?가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중요한 영적 문제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 하나는 우리 
사회뿐 아니라 이 세계가 깨끗한 부자를 얘기하기에는 가난이 너무 넘친다.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 그 책은 더럽고 지저분한 부자에 대해서 쓴 것보다는, 
부자도 깨끗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부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지저분한 부자들이 아닌가 싶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한국의 GNP 
수준이 12-13위인 데 비해서 복지 수준은 순위권에서 벗어나고 있다. 세계 
선진국이 GNP의 25-30%를 복지 관련 지출에 쓴다면 우리 나라는 3% 미만이다. 
국가의 지출이 부자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누진세에 의한 것이다. 이런 시대성을 
생각할 때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자/ 지금까지 김동호 목사, 고세훈 교수에게 각각 청빈, 청부론의 개념과 
의의를 부탁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이것을 간단히 청부론, 청빈론이라 
상표를 붙이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논의를 편의를 위해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김남호/ '일하는 부자'라고 말하고 싶다. 근면하게 일을 하느냐에 관심이 있다. 
굳이 경제적으로 나누자면 가치를 만드는 사람이냐, 가치를 분배하는 
사람이냐에 대한 두 가지 혼동이 섞여 있다고 늘 생각한다. 오늘날 이 시대에 
?부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별히 기업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볼 
때 2003년 한국경제 규모에서 바른 윤리가 제시되지 않으면 우리의 갈 길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성적 가난을 말씀에 비추어볼 때 분명한 진리이고, 
누구나 추구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개인윤리를 
강조하게 되고, 그로 인해 교회 부패와 사회로부터 분리가 야기된다. 새로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깨끗한 부자'의 논리적 한계를 지적하지만, 청부론은 
굉장히 중요한 시작을 한 것이다. 직업윤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도피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젊은 세대들이 부를 만들고 깨끗한 부를 나누는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다. 한국의 경제규모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12번째다. 천불시대와 만불시대가 달라야 하고, 만불시대와 
이만불시대가 달라야 한다. 내가 보기에, 지금까지 이것을 감당할 만한 
철학이나 윤리적 기준이 없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어 있지만, 직업 현장이나 부를 생산하는 기업 현장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어떤 윤리로 살아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미진하나마 이제는 
준비해야 할 때다. 굳이 말하자면 청지기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사회자/ 지금 김남호 집사님은 깨끗한 부자를, ?일하는 부자?이면서 동시에 
가치를 만들고 분배하는 부자라고 정의했다. “부를 축적해가면서 이에 걸맞는 
물질에 대한 철학의 정립이 필요한데, 바로 이것이 청부론이다” 이렇게 
말했다. 

김남호/ 맞다. 보충을 하자면 ‘청지기’라는 개념을 우리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자/ 그러면 이번에는 허종 목사님에게 청빈론에 대한 논의를 들어보자. 

허종/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의 삶을 따르는 자다. 예수를 
믿고 따르다 보면 영성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영성의 문제에 들어가 보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에 대한 현실적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보육원, 
재활원에서 원목으로 생활했을 때의 경험을 하나 얘기하겠다. 그곳 사람들은, 
원장이나 직원들을 돕는 자, 혹은 돌보는 사람으로 보기보다 자기들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래서 아무리 큰 친절과 사랑을 제공받아도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내가 무언가 소유하고 있으면, 저들에게 접근하기가 더 
어렵겠다’ 하고 생각했다. 신앙을 심어주고 예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버려야했다. 내가 무보수 원목으로 몇 달 간 일하면서 그들에게 
교훈을 얻었다면 바로 이것이다. 영성적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세상의 
부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 해도 그것을 포기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자/ 영성적 가난, 자발적 가난이라고 명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제 
각자의 입장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살펴보자. 서로의 입장을 공격하는 
시간. 

고세훈/ '일하는 부자' 그렇게 얘기할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동호 목사가 
청부론 담론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띄웠다. 그 영향이 크다. 성경에 비춰볼 때 
이것은 위험하다. 복음이 우리를 해방시키듯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율법주의로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청부론의 
치명적 위험성이다. 깨끗한 부자(청부론)를 이야기하려면 ‘깨끗하다’는 것을 
일정하게 상정해야 한다. 깨끗함을 판단하려면 어떤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기준에 부합하면 깨끗한 부자의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율법이 
우리를 기만하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깨끗함은 우리가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 아니다(부단히 추구하고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현미경으로 
들어다볼수록 지저분한 먼지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물리적), 우리의 
내면도 지저분할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깨끗함을 쾌도난마 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정신과 어긋난다. 산상수훈을 봐도 
예수님은 살인이나 간음을 재해석하신다. 거기서도 우리는 인간이란 살인과 
간음을 일상적으로 범할 수밖에 없는 부정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깨끗함은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태다. 깨끗함은 절대적,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가치다.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부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기 의의 표출이고, 이것은 복음의 정신과 배치된다. 

김동호/ '깨끗함'이 걸리나 본데, 그 얘기를 하려고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부에 
대한 책임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부는 사회적 현상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 성경은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해서 모두 얘기해야 한다. 부자에게 바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기준을 정해주어야 한다. 고 교수님이 
얘기한 대로, 우리 사회는 부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아 부패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청부론을 썼다.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기준과 책임을 
가르친다면 좀더 부끄러움 없는 부자가 가능하지 않을까. 

고세훈/ 부자와 빈자를 분리하여 ‘부자는 깨끗할 수 있다. 부자는 많이 
존재하니까’ 하고 말하는데... ‘부'는 동적 개념이다. 다이내믹하다. 부를 
형성하고 축적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영성에 영향을 미친다.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부자가 된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물과 
물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부지기수다. 

사회자/ 현실적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자. 

고세훈/ 그런데 김 목사님의 문제가 바로 이론과 현실을 섞어버리는 거다. 
이론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론을 얘기하면서 현실적 문제를 공격하고.. 
이러한 오류를 몇 번 발견했기 때문에... 

김동호/ 고 교수님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 같다. 

사회자/ 나머지 패널의 의견을 듣기 전에... 두 분에게 느끼는 의문을 좀 
말하겠다. 먼저 고 교수님은 청부론의 위험성이 ‘깨끗함’에 대한 객관적,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청빈론도 마찬가지 
아닌가. 

고세훈/ 그래서 앞에서 이미 말하지 않았나. 청부론이나 청빈론 모두 
‘깨끗함’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똑같다. 그래서 난 청빈론 자체도 
지지하는 입장이 아니다. 김영봉 교수가 말한 영성적 가난을 바람직한(좋은)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동호/ ‘영성적 가난’이란 표현을 쓰시는데.. 그렇다면 ‘영성적 부함’은 
어떻게 생각하나? 

고세훈/ 영성적 가난은 동시에 영성적 부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영의 
측면에서..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곧 영적으로 풍요로워진다는 것인데.. 

김동호/ 아, 그 얘기가 아니다. 영적인 의미의 부함이 아니라.. 실질적 부함에 
대한 영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영성적 가난을 얘기할 때는 마음의 
가난뿐 아니라 물질적 가난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 

고세훈/ 그렇죠. 

김동호/ 그렇다면 영성적 부함을 얘기할 때 마음의 부함뿐 아니라 실질적 
물질의 부함도 얘기되어야 하지 않는가. 

고세훈/ 난 그것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 가난’이다. 영적 가난을 추구하다 보면 부하거나 부하지 않는 
문제는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거다. 

김동호/ 내 말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자/ 그즈음에서 하시죠(상황 수습). 개념 정의를 위해 김동호 목사님에게 
질문하겠다. 부자가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부자도 깨끗할 수 있다, 없다’를 
문제 삼기보다 ‘부자도 깨끗해야 한다’를 강조하기 위해 책을 쓴 것인가? 

김동호/ 부자가 깨끗하기 힘들다. 인정한다. 그러나 전면 부정하면 가능성은 다 
무너진다. 그러면 가르치지 말고 포기해야 하나. 너희는 도둑놈이라고 하면서 
끝내야 하는가. 부자가 되었을 때 이런 부자가 되라 하고 성경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허종/ 몇 가지 위험성을 발견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보다 내 
주장이 성경적이라는 점을 강하게 말하다 보니.. 성경 인용에 있어서 목적에 
부합하는 구절을 인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배제된다. 그러다 보니 책제목도 
‘깨끗한 부자’라고 잡았는데.. 그것은 상당히 비복음적이라 생각한다. 
깨끗하다는 것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표현이다. 자기 의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것인데, 자기 의를 강조하다 보면 
교만해질 수 있고,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보았다. 또 부라는 것은 소유 개념의 언어다. 많이 가졌다는 말이다. 책에 
보니까.. 김동호 목사는 소유형 인간, 존재형 인간이란 표현을 했고, 
부자이면서 존재형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져야 하기 
때문에 소유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형 인간이 될 수 있나. 
존재형 인간이 되려면 소유한 것을 버려야 하는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내 제자가 되려면 네 소유를 다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소유지향적인 삶을 살면서 어떻게 존재형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을 
이중적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김남호/ 책에 대한 리뷰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대개 서두에 책의 핵심이 
담겨 있다. 김용호 교수가 썼던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부는 은사와 소명에 가깝다는 구절이 있다. 은사는 주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소유냐 아니냐에 대한 구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부자는 당연히 소유였다. 거기서 재산이 나왔기 
때문에. 오늘날 부자는 관리에 가깝다. 우리 나라 고액 연봉자는 소유가 아니라 
관리에서 나온다. 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부를 늘리기 위해서 
일하다 보면 그에 따라 생기는 부를 갖게 된다. 그것을 소유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또 한 가지.. 김영봉 교수는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인생을 지배한다고 말하면서, 돈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진리를 가린다고 
전제한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가난(가난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하는 명제가 과연 맞을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영성적 가난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영성적 가난으로 물질적 가난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하는 구체적인 문제는 좀더 
살펴야 한다. 

사회자/ 김남호 집사님은 부자에 대한 색다른 정의를 소개한 것 같다. 개인적 
소유를 늘리기보다 사회적 부를 늘림으로써 다른 이의 가난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 같다. 맞는가? 

김남호/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고세훈/ 김 목사님은 책에서 소유형 인간과 존재형 인간을 얘기하는데, (에리히 
프롬을 인용하면서) 나는 이런 식의 접근이 문제라고 본다. 소유는 반드시 
존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소유를 많이 하고도 존재형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건 무책임한 얘기다. 이원론적 접근이 이 책에 넘쳐난다. 이미 존재하는 
부자에게 깨끗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건 언뜻 보기에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돈은 돈이다.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돈은 중립적인 것이다, 돈에 
대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된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옳지 
않다. 돈은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영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축적한 과정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고, 지금이라도 돈의 문제에 대해 
깊이 영적으로 성찰하라고 얘기해야 한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다. 재리의 유혹은 
(킹제임스버전에서) 부의 기만성(deceitfulness)을 얘기하는 것이다. 성경도 
부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가르친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영성이 변하기 쉽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와 
하나님 나라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김동호/ 기만적인 부가 있다. 부에는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 그러면 모든 부는 
다 기만적인가. 

고세훈/ 그렇게 질문한다면 문제를 좀 피해가는 것 같다. 

김동호/ 그럼 하나님이 주신 부는 어떠한가? 

고세훈/ 하나님이 주신 부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김동호/ 하나님이 주신 부는 있나, 없나? 

고세훈/ 하나님이 주신 부는 물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주신 부인지 아닌지를 ‘내가’ 정의하려고 할 때 내 의가 나타나게 
된다. 

김동호/ 기만적인 부는 어떻게 정의하나. 

고세훈/ 모든 부에는 기만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경계하라고 하신 것이다. 

김동호/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과 모든 부가 기만적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다르다. 

고세훈/ 조심하라는 의미다. 

김동호/ 조심하라는 것은 좋은데, 거기서 단정으로 가면 논리의 비약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부자는 소유지향적인가, 또 모든 가난한 자는 존재지향적인가. 
그렇지 않다. 두 부자가 있다. 소유지향적인 부자가 있고 존재지향적인 부자가 
있다. 욥이 성경의 모델이다. 그는 소유가 무너졌을 때도 넘어지지 않았다. 
소유한 사람, 부자였으나 영적인 사람이었다. 가난한 사람 중에 소유형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소유형인데 기회가 오지 않고 능력이 없어서 그냥 가난할 
뿐이다. 정말 존재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있지만, 솔직히 몇 안된다.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나 가능하다. 특별한 
은사 가진 사람의 경우를 보편적 진리인 것처럼 얘기하면 세상이 다 무너진다. 
가난한 사람은 다 의롭고 부자는 다 불의한가. 그렇지 않다. 성경을 내 논리에 
따라 해석, 인용했다고 하는데.. 그건 누구나 범하는 오류다. 재리의 유혹을 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레위기 19장 15절을 참 좋아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가난하다고 편들지 말라는 
것이다. 가난이 정의는 아니다. 있는 사람이라고 두호하지 말라. 비겁하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가난함과 부함으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고세훈/ 가난은 선하고 부는 악하다고 아무도 얘기 안한다. 극단적 허수아비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계속 공격하며 부도 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김동호/ 부는 악하고 기만적이라는 전제로 먼저 시작하지 않았는가. 

고세훈/ 부가 악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자/ 여기서 정리하겠다. 예외없는 법칙은 없듯이, “모든 부는 
기만적이다”라는 발언으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난 것 같다. 욥의 경우,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부에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성경에서도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그러므로 특수한 예외를 들어 얘기하는 
것은 별로 생산적인 대화가 아니다. 허종 목사님을 끝으로, 성경에서 보는 부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다. 

허종/ “욥이 존재형 인간이다, 깨끗하다”는 것에 의문이 있다. 욥이 
고백한다. “두려워했던 일이 미쳤도다.” 욥은 자기 재산과 자녀가 어떻게 될 
것이 두려워 번제를 드렸다. 그는 비록 존재지향적 삶을 추구했지만 여전히 
소유에 대한 강한 개념(집착)을 갖고 있었다. 또 욥은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항변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죄인됨을 고백했다. 
깨끗하다는 것을 행위적 의로움과 연결하는 것은 위험하다. 

김동호/ 우리가 ‘의로움’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허 목사님이 말한 그 
의로움을 인간이 어떻게 말하겠는가. 인간이 의로움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기본이다. 내가 말한 의로움이나 깨끗함은 그 다음 단계, 즉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의로움을 의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노아는 의인이었다. 앞에서 말하는 
의인과 뒤에서 말한 의인은 다른 의인이다. 내가 얘기하는 의로움이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할 때의 그 의로움이 아니다. 그건 나도 안다. 
율법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라고 책을 쓰는 목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말한 깨끗함(의로움)은 ‘노아가 의인이었다’의 의로움을 말한다. 욥에서 
볼 수 있는 의로움이다. 하나님은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다.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자로 인정했다. 욥이 죄가 전혀 없고 재물에 대해 욕심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로움에 대한 개념 정의가 중요하다. 거기서 일치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긴다. 청부론은 부자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부자가 청부론의 기준을 지키며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그들에게 청부론은 
무거운 짐이다). 청부론을 이제껏 얘기하는 물질적 기복신앙이나 축복론과 
비교(혼동)하면 억울하다. 

고세훈/ 깨끗한 것을 얘기할 수 없는데, 인간 수준에서 깨끗함을 규정하니 
문제다. 이러한 논의가 도덕 교과서라면 상관이 없지만 기독 신앙 서적에서 
그런 식으로 깨끗함을 얘기한다면...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똑같다. 
저술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것이 일반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는 
진지하게 추적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교회에 나가는 부자들을 전혀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김동호/ 내가 제시한 것들을 보라. “깨끗하게 벌어야 한다. 유산을 안 남겨야 
한다. 하나님이 나눠주라고 하는 몫을 계산하면 최소한 34.8%다(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했는지 모르지만)” 그걸 지킬 부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걸로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면 면죄부를 주고 싶다. 

사회자/ 토론이 열기를 띠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부와 가난... 그것의 현실적 
의미가 부각되는 것 같다. 본격적 논의를 시작하자. 김남호 집사는 허쉬초콜렛 
한국지사장이다. 대한민국 경제구조상 자영업자가 세금을 제대로 내고 부자가 
될 수 있나.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김남호/ 현실적으로 아주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로 어려운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리라 본다. 좋은 예가 있다. 
이랜드. 그 회사에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금을 제대로 내려고 
애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지난 4월 18일 금요일, 산업 한국경제신문 1면 
톱기사가 이랜드에 대한 얘기다. 아마 이 기사를 이랜드가 돈 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이 기사가 나왔는가? 얼마 전 이랜드가 상당히 높게 평가될 
만한 일이 있었다. 수익의 1/10에 해당하는 106억 원을 (교회가 아닌) 사회에 
십일조로 냈다. 게다가 직원들이 힘을 합쳐서 총 130억 원을 사회에 기증했다. 
그 회사를 비난했던 시민단체들이 있었다. 참여연대가 대표적인 단체다. 130억 
원 중에 10억 원을 참여연대에 주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회사가 
업그레이드됐다. 세금 문제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포기할 것은 아니다. 
세금은 분배에 관한 매우 작은 요소 중 하나다.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좋을 것이다. 

고세훈/ 이랜드가 처음부터 기독교 기업임을 드러내지 말고, 세금을 착실히 
내다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록펠러와 카네기는 돈을 잘 벌고 잘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노동운동사에서는 노동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나중에 
소비는 잘 했다. 그렇다고 해서 축적 과정을 정당하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랜드도 마찬가지다. 노사 문제에 있어서 정당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랜드가 기독교 기업임을 전면에 내거는 것부터 난 위태로움을 느꼈다. 세금은 
도덕적 기업가로서 착실히 내는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끼쳤는지에 대해 잘 모르겠다. 그냥 도덕적 기업가로서 
세금을 착실히 내고, 그 다음에 기독교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라고 본다. 

김남호/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회사가 기독교 기업임을 표방했기 때문에 
세금을 잘 냈느냐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라고 본다. 사회 구조적으로 부자를 
추구할 수 있는가, 또 세금을 제대로 내고도 부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국한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고세훈/ 기독교 이랜드는 세금 문제로만 얘기할 수 없다. 생산, 홍보, 판매에 
있어서 철저히 자본주의의 논리, 구조에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문제를 깊이 돌아봐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내가 얻은 소득이 깨끗하고 
정당하다고 할 수 있나. 술집 나가서 번 돈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듯이 내가 
대기업에 나가서 번 돈은 정당한가. 남의 집 담을 넘어야만 도둑질인가. 지금 
백주에 엄청난 도둑들이 교회에서 집사, 장로가 되고 있다. 목사 수입도 
헌금에서 받는다. 내 소득에서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있는가.. 나는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호/ 청부론을 교만한 것으로 몰면 극단적이다. 무례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렇게 하면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고세훈/ 따라서 청부론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는 거다. 

김동호/ 무슨 소리인가(약간 흥분하신 듯^^) 

허종/ 언어 사용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내용의 본질은 다 이해할 수 
있다. 부는 소유 개념인데... 깨끗하다는 표현보다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충성되다, 부지런하다 이런 표현은 어떤가. 당신들은 청지기다, 하나님의 
소유물에 대한 관리인이다. 이런 식으로 설득하면 어떻겠는가. 

김동호/ 책 제목을 가지고 토론하겠는가, 내용을 갖고 토론하겠는가. 책 제목은 
그럴지 몰라도 내용에 들어가면 목사님 얘기랑 다를 것이 없다. 표현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지적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하면, 
그럴 수 있겠구나 할 수 있다. 책에서 얘기하는 ‘깨끗함’이란 무엇인가. 
나름대로 기준들이 다 있다. 그렇다고 의로워지는가? 아무도 못한다. 

사회자/ 이렇게 바꿔서 얘기해 보자. 우리 나라의 왜곡된 경제구조 상황에서 
가진 자는 더 갖고 가난한 자는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기왕에 있는 
부자들을 위해 쓴 책인데, 왜곡된 구조에서 뭔가 이득을 가진 이들을 책망하고 
책임을 논했다면 좋을 텐데, 잘못 보면 면죄부를 준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김동호/ 면죄부를 받으려면 부자라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 나라에서 
왜곡된 부자는 이 책에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기복적인 물질관에 의해서.. 
‘아, 예수 잘 믿었으니까 복 받은 거다’고 한다면 면죄부가 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긍정하지 않는다. 부자라고 복 받은 것 아니다. 돈은 복이 아니다. 
돈은 돈이다. 

고세훈/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얘기하겠다. 목사님 책에서, 깨끗한 부 혹은 
정당하지 않은 소득의 네 가지 기준을 얘기했다. 첫 번째로 정당한 직업이냐 
아니냐를 얘기했다. 겉으로는 정상적인 듯이 보이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직업이 
엄청나게 많다. 기업에 다니는 사람이라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을 심층적으로 보고 성찰하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예컨대 
술집에 나가서 버는 돈은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술집 
나가서 번 돈을 하나님이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소득(번 돈)의 문제는 
하나님과 술집 사람 사이의 내밀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무수한 기업들, 하나님의 원리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기업들,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 돈을 벌고 축적하는 월급을 주는 기업... 이 
문제를 정상적인 직업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도둑질을 예로 
들었다. 남의 집 담을 넘거나 가짜 영수증을 쓰는 것은 적절한 예가 아니다. 
대기업들에서 엄청난 도둑들이 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런 엄청난 
도둑들이 교회에 있는데 언급을 안한다. 또 하나는 불로소득을 언급했는데, 
그건 옳지 않다. 한국 부자의 소득의 80%가 불로소득이다. 그것이 더 심화되고 
있다. 

김동호/ 그게 바뀌고 있다는 걸 아는가? (웃음) 

고세훈/ 아니요.. 그게 심화하고 있다. 

김동호/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지 않았는가? 

고세훈/ 아니다. 세계의 자본 흐름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한국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주주 자본주의 형식으로 가고 
있다. 

사회자/ 청빈론도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발적 가난은 어느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중산층이나 
절대 빈곤층에게는 사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허종/ 목회할 때 가난한 사람과 함께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봤다. 그럴 때 
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설명할 것인가 질문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가난이 선은 아니다. 
악하고 게을러서 가난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구조에서 출발부터 
기회가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그들에게 접근할 길은 
교회가 가난해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부를 갖고 있으면서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접근이 안된다. 교회 안에서라도.. 그들을 위해서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가능하지 않는가. 나는 생활인이니까, 가난이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아내가 늘 불만이죠). 아까 김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완전한 가난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인생의 방향성은 분명히 가져야 
한다. 쉽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그쪽으로 가야 한다. 원론부터 “가난은 
안된다. 가난은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부가 궁극적 목표다” 하는 발언은 참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김동호/ 책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몇 페이지? (웃음) 

허종/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웃음) 

김동호/ 나중에라도 찾아달라. 그냥 넘어가면 잠 못잔다. 

고세훈/ 꼭 그런 말이 아니라도, 이런 말이 있지 않느냐. “난 가난이 싫다. 난 
부자 되는 것이 좋다.” 이런 담론이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김동호/ 나는 가난이 싫다. 가난은 은사라고 생각한다. 허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누가 저들을 도울 것인가? 목사님 말씀이 100% 옳다. 돈 가지고는 
안된다. 충분히 심정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가난해져서 살았더니 다른 사람이 
감동받는다, 거기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없다. 누구는 부둥켜 안아야 한다. 그리고 이왕 부자가 된 사람 있으면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가서 줘라, 깔고 앉아만 있지 말고 가서 나눠주라 하고 
얘기를 해야 한다. 부의 양 측면을 얘기해야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안된다. 청빈.. 누가 그것에 반대하겠는가. 점수 따고 들어가는 것이다. 반대할 
사람 아무도 없다. 부 자체의 기회를 박탈한다면, 불행한 건 (부자도 부자지만) 
북한이다. 북한의 가난은 심정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 남한의 물질을 갖다 줘야 
한다. 부란 나눠줄 수 있는 역할(몫)이다. 

(방청객) 제안 & 질문 
[질문1]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을 섬기는 박창수 
욥은 노동자의 임금이나 가난한 자의 땅을 빼앗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고 불린 것 같다. 우리 시대 부자들이 
욥처럼 부의 축적 과정에서 정의롭지 않았다면, 오늘날 욥의 모델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도서를 바탕으로 정의의 개념을 얘기하고 
싶다. 땅의 이익은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게 성경적 토지 정의다. 이것을 
기초로, 모든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실업이 없는 
사회 구조가 회복되어야 한다. 해 아래 수고하여 그 열매를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성경적 노동 정의가 먼저 충족된 상태에서 그 다음에 구제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공의 문제를 간과한 채 구제부터 
얘기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두 번째, 빈민의 생계를 위한 무이자 대출 조합, 혹은 기독교 은행에 대해서 
한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한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신 바가 
있으면 얘기해 달라. 

[질문2] 오류동에 사는 장세칠 
김동호 목사에게 질문하겠다. 깨끗한 부자에 대해서 강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삭개오 얘기를 깨끗한 부자에게 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자들에게 예수를 만난 삭개오처럼 행하라고 설교하는가?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는가? 어떤 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라고 하는가? 

김동호/ 청부론이 완벽하진 않지만, 결국 내가 의도한 것은 ‘삭개오처럼 사는 
것’이다. 부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 부자가 되었다면 삭개오처럼 나누라는 것. 
그리고 박창수 형제의 제안... 바로 그것을 위해 청부론을 얘기했다. 무이자 
대출 조합(? ---> 확인해야, 59-60분 시점에서 나옵니다^^;;)이 부자들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가난한 자는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이 불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가 그렇게 만든다. 
사회가 그렇게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을 회복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물질은 축복이 아닌 은사다. 물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해야 한다. 
***조합, ***푸드뱅크... 이제 시작한다.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이제까지 
한국의 사회 구조에서 욥과 같은 사람이 있었나?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혀 없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만불 시대, IMF를 지나면서 느낀 것은, 외국 기업이 우리보다 깨끗하다는 거다. 
외국 기업은 다 의롭겠는가? 깨끗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투명성, 
정직함을 얘기한다. 한국에서는 투명하면 안 풀리지만, 선진 기업에서는 
거짓되게 하면 안된다. 서구의 기독교 문화가 물락했다고 하지만 정직, 투명, 
나눔의 문화는 남아 있다. 그것 때문에 저들이 부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한국도 옛날처럼 장사해서는 안 된다. 고소득 사회가 되면서 기업도 
투명하지 않으면 한번에 무너질 수 있다. 기준을 마련하고 교육해야 한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부자가 되었다면 기복적 물질관에 합류하지 말고 부를 
나누라. 부는 복이 아니라 책임이다. 삭개오처럼 하라. 내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저술 의도가 오해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좋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좋은데... 청부론 자체가 아니라고 말하면 토론이 안된다. 

김남호/ 가난한 자에게 그냥 도움을 주면 주는 사람은 즐겁지만 받는 사람은 
자존감이 무너진다. 제대로 도우려면 직업을 통해서 자기가 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청빈론의 기준은 무엇인가. 얼마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세훈/ 바로 그런 질문이 잘못이다. 어떤 기준을 세워서 충족시키면 바로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죄의식을 갖고 사는 것인가. 그저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 물질, 삶에 대해서든... 그때그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자세(마음)를 견지하는 것이다. 청빈론은 어떤 기준을 갖고 사는 
것인가? 성경은 기준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칼로 찌르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모욕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명확한 언어로 
기준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우리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준이 있으면 그때부터 위험해진다. 왜? 자기 의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감히 율법이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우리를 율법으로 
가둘 수 있다. 

김남호/ 공감은 되지만, 빠져나가기 쉬운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고세훈/ 대안은 성경에 있다. 살지 않아서 그렇지. 

김동호/ 고 교수님, 혹시 율법과 율법주의를 어떻게 구분해야 되나? 

고세훈/ 율법은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명령, 신탁이다.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정신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배척해야 한다. 

사회자/ 토론이 궤도를 이탈하는 것 같다. 우리는 청부론, 청빈론의 현실적 
가능성을 점검하고 있다. 방청객 질문에 이어서 얘기하고 싶다. 김 목사님도 
왜곡된 대한민국의 경제 구조에서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책을 읽고 삭개오처럼 찔림을 받고 깨끗한 부자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연락 온 사람 있는가. 

김동호/ 있다. 사례를 들어보자. 일부러 찾지는 않았다. 아마 30대 의사의 
부인인 것 같다. 부천인가 부평에서 개업한 의사인데... 그분이 이삭줍기를 
얘기했다. 한 달에 하루 수입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자. 그런데 고 교수님, 
‘그렇게 해야 의롭다’ 하면 율법주의지만 ‘그렇게 해보자’ 거기서 끝나면 
문제 없다. 그건 해야 한다. 그분이 감동을 받고 시작했는데, 계산해보니 
하루에 50만원. 처음엔 기쁨으로 했지만 막상 해보니까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갚아야 할 빚이 1억 8천 만원인데 그것을 갚고 하면 안되냐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갚아나갈 가능성이 있습니까? 하루 순소득이 
50만원이라면 1억 8천 만원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게 하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이 한 케이스만 얻어도 
수지맞은 거 아닌가? 그런 의식을 젊은이에게 준다면... 이 책을 읽고 부를 
합리화할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부를 
합리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건 기복신앙이고 그것은 분명히 
배격해야 한다. 이 책에서 도전받을 사람들이 꽤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충분히 출판 의의가 있다고 본다. (웃음) 

고세훈/ ‘그런 케이스도 긍정적으로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사실 
점검해 봐야 한다. 책에서 십일조를 강조했는데, 물론 그것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사회적 책임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 겪은 일이다. 대형교회에 나가는 친구랑 저희 학교에서 얘기를 하는데.. 
십일조 얘기를 하려고 했더니 그 친구가 대뜸 한다는 소리가 “너, 십일조 해? 
십일조하지 않으면 얘기하지 마” 즉 이 친구는 내가 십일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십일조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십일조가 자기 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태도가 적지 않다. 

김동호/ 다분히 고 교수님이 회의론자에 가깝지 않나 (웃음) 아무것도 
못하겠다. 

고세훈/ 그렇다. 기본적으로. 물론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선 회의하고 
있다. 

김동호/ 고세훈 교수님처럼 사는 게 고수다.. (모두 웃음) 

사회자/ 청빈론에 대해서 참 좋은 얘기라고 긍정하나, 일생을 하나님 위해 
드리겠다고 하는 목회자에게 해당되는 얘기지, 일반 성도에게는 무리라는 
의견이 있다. 

허종/ 김 목사님은 부가 은사다, 부자가 되는 게 부끄럽지 않다고 얘기하는데.. 
난 조금 달리 생각하고 싶다. 부자가 될 수 없는 직업이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직업이 있다. 그래서 부를 은사라기보다 소명, 천직이라 본다. 예를 들어 
청소부다, 하나님이 주신 직업이다, 그러나 청소부로 살면 전혀 부자가 될 수 
없다. 부의 문제는 은사라기보다 하나님이 부탁하신 천직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신다. 나는 그동안 ‘가난한 목회’를 했다. 근데 이걸 
하고 싶어서 했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셨으니까 충성을 다한 것이다. 
평신도들의 직업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직업인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에 맞게 사는 것! 그게 중요하다. 직업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부를 소유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난 자발적 가난이라 본다. 영성적 가난, 자발적 가난은 
그리스도인이 꼭 해야 할 일이다. 

김남호/ 영성적 가난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얘기가 자꾸 겉도는 것 
같다. 가난에 대해서는 나도 할말이 많다. 대학시절, 하루에 한끼로 (그것도 
라면으로) 1년을 지냈다. 소위 운동권에서 얘기하는 노동투쟁도 부산 
FRP공장에서 해 봤다. 그렇게 얘기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스크린을 빠져나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710만 명의 일용직 근로자가 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3개월 간 450도 끓는 FRP를 만드는 일, 위장취업을 했다. 
아마도 여기에 앉아 계신 분들 중 왕년에 운동권 아니었던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거기서 14시간을 꼬박 일하면서 배운 
교훈은... 나도 충분히 이와 같이 살아야겠지만 이것으로 이들이 겪고 있는 
경제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거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영적 삶을 통해서 
가난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내 고민은 여기서 출발했다. 그래서 기업으로 
갔다(그렇지 않으면 선교사로 갔겠죠). 학교 다닐 때 선교단체의 전국 대표로 
있었는데, 당시 모든 유행은 신학교를 가는 거였다. 20년 지난 후, 회사로 간 
내가 그 신학생을 먹여살리게 되었다. 자랑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구조적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사람 있고, 소득이 많은 사람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그리스도인들이 현장의 체계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면서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금 비약인지 모르지만) 
지난 30년간 한국교회는 개인윤리, 개인복음만 강조하다가 교회는 철저히 
부패했다. 사회보다 못하다고 지적되는데, 그런 것 같다. 개인윤리를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영성적 가난에 대해서 전혀 이의가 없지만, 영성적 
가난에는 개인윤리로 돌아가자는 회귀성이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과연 현재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의문이다. 여기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제가 
20년 전에 선택을 잘못해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거나, 그래서 영원히 ‘망할’ 
부자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회자/ 목사는 부자가 될 수 있는 직종인가 될 수 없는 직종인가. 목사도 
청부를 내세우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김동호/ 목사는 은사다. 가난한 목회를 한다고 해서 가난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은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목사에게 청빈을 요구하면 다 삯꾼이 된다. 
나는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모셨는데, 모든 기준을 한 목사님에게 
맞추니까 대한민국에 목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분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이다. 귀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기준을 거기에 맞추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목사를 그냥 직업으로 생각한다. 회사 형편에 따라 생활비는 
알아서 주는 것이다. 쓰는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목사이므로 얼마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오류다. 또 은사는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 부자가 
되는 직업도, 부자가 못 되는 직업도 있다. 이것이 은사의 개념이다. 부자가 
못되었다고 복을 못받은 게 아니다. 가난하면 부자가 못 하는 것이 있다. 
가난의 힘이 있다.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물질의 은사를 주신다. 
물질의 축복이 아니라. 따라서 자랑할 수 없다. 허 목사님도 만일 ‘내가 평생 
가난한 목회를 했습니다’ 하고 무의식적으로 자랑한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부를 자랑할 수 없듯이 가난을 자랑할 수 없다. 내가 한번도 큰 
교회하려고 한 적 없으나 큰 교회로 간다. 술수나 욕심을 부려서 큰 교회로 간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게 은사가 아닐까? 자랑할 일이 아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은사가 아닐까. 모든 것을 얘기할 때 보편적 기준으로 해야 하는데, 
청빈을 주장하면 극단적 기준을 잡아서 보편적인 사람을 죄인 만든다. 

허종/ 방향성과 지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목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두어야 
한다. 과정에 있어서 미치는 사람도, 못미치는 사람도 있다. 그즈음에서 이해를 
하자. ‘이게 진리이냐’라고 할 때, 이성과 성경, 교회 전통, 성령 체험 
4가지가 일치할 때 진리라고 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교회가 물질을 가질 때 
부패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는 과연 예수 영성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는가? 의문이 생긴다. 소유할수록 영성에 이르는 데 부족해진다. 예수의 
영성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는 것이다. 난 방향성과 지속성을 말하고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신앙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부는 아니다. 다만 은사나 천직에 대한 관리자의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셨으니까 최선을 다하는, 적은 일에 
충성한다는 그 개념으로 가야 한다. 

김동호/ 그렇다. 목사님 얘기가 이 책의 내용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작은 일에 
충성하니까 큰일을 주었다. 그럼, 큰일을 하는 것도 인정해 줘야 한다. 삐딱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면 그건 부자가 되었지만 잘사는 건 아니다. 부자를 
잘사는 사람이라고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허종/ 목사님 책에서 우려했던 건 ‘몫 나누기’인데... 몫을 나누기는 힘든 
거다. 자기 몫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김동호/ 나도 청지기 개념을 아는 사람이다. 그걸 건드리면 내가 참 
비참해진다. 신앙인의 기본인데... 이 책에 ‘청지기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지적한다면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도 소명받고 하나님이 
좋아서, 주의 몸 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걸 건드리면 나는 어디로 
가나? 

고세훈/ 목사님,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목사님과 신앙적 수준이 매우 다르다. 
그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책의 전반적 흐름이 그렇게 
가고 있다. 

김동호/ 그건 고 교수님의 해석이다. 그렇게 흘러갔는지, 흘러갔다고 
해석하는지는 구별해야 한다. 

고세훈/ 아니, 김용봉 교수님도 그렇게 책에서 말하지 않는가? 

김동호/ 그 분이 얘기하면 다 진리인가? 

사회자/ 가난한 것도 은사라고 하면 논리적으로 맞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듣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동의가 안 된다. 

김동호/ 말장난 같은데, 돈을 복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은 상당히 상처받는다. 
옛날에는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기복적인 신앙관이 가져온 폐단이다. 
부자이면 모든 게 합리화되었다. ‘저 사람은 예수를 잘믿고 잘살아서 
복받았다.’ 그러나 나는 복이 아니라 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로 
해석하면 가난한 자가 자유할 수 있다. 방언도 은사다. 나는 방언을 못 한다. 
나는 방언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이다. 나는 방언을 못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가난도 마찬가지다. 

사회자/ 그러나 문제는 가난하면 불편하다. (방청객 웃음) 

김동호/ 가난하면 불편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부자는 
행복한가, 편안할 뿐이다. 

사회자/ 이즈음해서 방청객에게 질문을 받겠다. 

(방청객) 제안 & 질문 
[질문1] 난경(?) 교회의 이필환 목사 (83-84분쯤 나온다) 
먼저 느낌부터 말하겠다. 시골 교회 목사로서, 책이나 인터넷에서보다 훨씬 
상처를 받았다. 뭔가 모르게 씁쓸하다. 패널들이 논박을 할 때 김 목사님이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모습(태도)에도 상당한 아쉬움을 느낀다. 목사님도 오늘날 
교회가 매우 부패했고, 개혁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적 문제라 보기도 하고, 인간성 문제라 보기도 한다. 나는 물질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문제인 것 같다. 부패와 타락의 근본 원인이다. 목사님도 
교회 개혁을 바라고 있고, 나도 교회 개혁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똑같이 
개혁을 지향하는데, 내가 문제 원인이라 보는 것을 목사님이 긍정적으로 
인식한다는 데 (당황했다)... 그런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질문2] 대학원에서 공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고 교수님께 질문.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축적 과정이 문제라고 지적하셨다. 적합한 기준을 
제시하자는 청부론 입장에 대해, 어떤 기준을 내세우는 것조차 율법주의적인 
것이라고 부정했다. 나는 학생이기 때문에 과외 활동이 소득원이다. 적절한 
보수 수준을 책정하는 것이 고민이다. 그런 고민이 해결되어야 부의 형성 
과정이 공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안을 얘기해 달라. 

고세훈/ 고민하지 말라. 거기서 고민이 끝나면, 다른 사람은 또 그 기준을 
가지고 고민을 시작한다. 복음은 그런 식의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요즘 대학들이 아주 상업화했다. 대학이 학생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물질적 소득의 대상으로 본다. 그곳에서 내가 녹을 
받는데 거기서 얼마나 정당한 소득을 받고 있느냐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얼마나 불로소득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신 없다. 어떤 수치를 얘기해도 
거기에 언뜻 동의를 하지 못할 거다. 대학이 이럴 정도다. 자본주의 체제 
곳곳에 엄청난 쟁점들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청부론이 원천적으로 내가 
깨끗함을 전제한다면, (그 깨끗함이 인간이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도) 위장된 
만족은 줄 수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성적 일을 할 수 있는 
만족을 줄 수 없다. 영성적 가난은 사회적 무관심으로 연결된다고 보지 않는다. 

사회자/ 김 목사님, 이필환 목사님(방청객) 질문에 답해 달라. 

김동호/ 돈 빼놓고 교회 개혁 운운하는 것은 말장난이라 본다. 고 교수님은 
어떤 기준 만드는 일을 동의하지 않지만, 난 그것이 없으면 그냥 말만으로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기준과 표준은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만 하고 끝난다. 물론 그걸 지켰다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교회운동을 하면서 건강한 교회의 목표를 세울 때 투명한 
교회 재정을 빼놓지 않는다. 돈에 대한 철학은 서로 다른 것 같다. 그것은 다를 
수 있지 않는가? 난 돈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잘못된 것은 바로잡자는 
입장이다. 한국 교회가 무너진 것은 돈 때문이다. 투명한 교회 재정, 그리고 
돈을 어떻게 바로 써야 하는가...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한다. 그냥 
아무것도 정하지 않으면 막막하다. 기준이 없으면 개혁 성과도 가늠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해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는가. 완성은 없다. 과정이고 
시행착오도 겪어야 한다. 표준과 기준을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자/ 아직 열지 못한 뚜껑이 많으나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한마디씩 
해주기 바란다. 이번 토론을 계기로 한국 교회의 경제관 내지 물질관이 제대로 
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무리 발언해 달라. 

김남호/ 구체적인 케이스를 다루지 못해서 아쉽다. 실제 케이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런 일을 통해 나 같이 평범한 (성경에 대한 깊은 영성이 
없는) 크리스천 직장인을 위한 지침이 생기기를 바란다. 그래서 1,155만 봉급 
생활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지침 필요하다. 820만 자영업자들이 세금 
내는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기는 너무 어렵다. 회사는 날마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규칙을 만들게 
된다. 그게 너무 실제적인가? 그러나 내가 알기론, 2천만의 한국 경제 
소득자들이 동일한 고민을 하고 살아간다. 그 구조를 무시하고 얘기하면 참 
어렵다. 차차 토론 이후에 구체적인 케이스를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세훈/ 깨끗한 부자는 없고, 청부론은 굉장히 위험하다. 복음적이라고 하기 
힘들다. 사실 편견이 토론 과정에서 해소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했다. 
[깨끗한 부자]를 서점에서 보고 그 자리에 서서 보았다. 그리고 샀다. 이 책이 
제 영적 생활에 유익할 거 같아서 산 게 절대 아니다. 토론을 위해 좀더 확실히 
읽어봐야 하기 때문에 샀다. 들고 나오면서도 사실 부끄러웠다. 누가 이 겉장을 
볼까봐.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의 ‘김동호 목사’가 저자라는 게 
상당히 걸렸다. 그렇게 우려할 정도로 이 ‘깨끗한 부자’ 담론에 대해서 많이 
걱정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책이 완화되어서 전달될 다른 방법 없을까, 
김동호 목사의 의도와 달리 이 책의 영향력과 독자의 편견을 심각하게 
고려해서, 이 책이 대폭 수정되어서 목사님의 참 의도가 드러나길 바란다. 

사회자/ 고 교수님 기세를 보니까, 이 프로그램 뒷풀이가 길어질 것 같다 
(웃음) 

김동호/ 저 정도 발언이 되면 뒷풀이는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열려 있으면 
모르겠지만, 너무 강하시다. 만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정확한 문항의 
설문조사를 해서 ‘이 책에 대한 느낌, 읽고 난 느낌’ 데이터를 갖고 얘기하면 
받아들이겠다. 어디까지나 고 교수의 개인적 생각이다. 좀 모욕받은 것 같다. 
요즘 개그콘서트에 보면 ‘세바스찬, 천한 것들, 나가 있어’ 그런 대목이 
있다. 그건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코미디가 아니다. 부자들의 
교만함을 말해 준다. 그러나 부자들의 교만함 못지 않게 가난한 사람도 '부자 
저 도둑놈들' 한다. 양 극단은 제쳐놓고 그 가운데서 뭔가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서로 마음을 열어놓고 얘기를 해야 하는데. 부자들은 ‘천한 것들, 
가난한 것들, 형편없는 것들’/ 빈자들은 ‘저 도둑놈들’이라고 한다. 조금은 
여지를 남겨주어야 하지 않겠나. 사회가 합일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허종/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늘 이 질문 
속에서 살았다. 어떡하면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의 삶이 가능한가. 그걸 
어떻게 도울 수 있나...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 고기 잡는 얘기가 나온다. 
베드로가 하루 종일 고기를 낚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베드로가 순종했더니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다. 한국교회는 여기에 
머물러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기 잡는 어부 말고 사람 낚는 어부 되라고 
했을 때, 배와 고기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랐다. 가치관과 삶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신앙인의 자세다. 부의 기준을 정하기 어렵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내 삶의 자리가 어디인가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어떤 방법,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나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 

사회자/ 가난은 수치가 아니라 불편일 뿐이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같은 
논리라면 부자로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편리일 뿐이다 하는 얘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돈 
앞에서 철저히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까닭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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