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길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 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 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 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 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 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 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 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 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열왕기하 2장 1절부터 6절 말씀까지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릴 호수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와서 예 수의 안수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장면이 마가복음 7장에 나온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대시며 '에바다'라고 하시는데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서 말이 분명하게 되었다. 또 마가복음 8장에도 벳세다에 이르렀을 때에 사람들이 소 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는데 예수께서 소경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신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예수님께서 침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데 과연 그가 씻고 밝은 눈 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와 소경과 귀신들린 자를 고치 시는 이야기가 있다. 방금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몇몇 병자를 고치 실 때에 침을 뱉아 고치셨다. 능력 많으신 주님이 꼭 침을 뱉아야만 그들을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 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침을 뱉는다는 것은 경멸의 표시이다. 예수님께 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침 뱉음을 당하셨다(마 26:67)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께서 말할 수 없는 경멸을 당하신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 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 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5-6) 지금 살펴본 이 사람들은 자신의 눈이 뜨여지기 위해서, 자신의 어눌한 혀를 고치 기 위해서 침 뱉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들이 그러한 수욕을 당하였지만 한 마디로 불평의 말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침 뱉음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볼 수만 있다면, 말할 수만 있다면 그것 보다 훨씬 더한 수욕도 능히 당할만한 마음의 소유자이었던 것이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제자 들이 너무 시끄러우니까 와서, "여자가 우리의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도다"(마 15:26) 즉, 너는 개라는 것이다. 성경에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신 23:18)고 했다. '너는 개다' 이 말은 유대 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욕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여자의 태도를 보라! "주여 옳 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개라고 하면 어 떤가? 죄를 씻을 수만 있다면, 정말 내 영혼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지옥의 판 결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 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예수께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후 1:8)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우리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 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 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이다. 죄에서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믿지 않은 것 과 다름이 없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 것이다. 당신은 분명히 거듭 났는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3) 길갈 - 구원 우선 먼저 신앙인이 거쳐야 할 경로에 대하여 알아보자.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난 이후에 줄곧 엘리야를 좇았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예 수님과 구원함을 받은 자와의 관계를 여러가지로 설명해 주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 형제, 구속자와 피구속자, 머리와 몸, 친구, 목자와 양, 해와 달, 포도나무와 가지 등 여러가지로 우리와 예 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의 비유에서 공 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을 '하나'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이지 결코 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함을 받은 성도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죄가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사 59:1-2) 죄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며 그 죄의 담이 허물어지지 않 는 한, 당신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실 수 없 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죄가 있다면 당신의 하는 기 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는 절대로 들으실 수가 없다.(요 9:31)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면 그 기도에 대한 응답도 절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만약 응답이 왔다면 그것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고후 11:14)의 속임수일 뿐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 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 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데후 2:9-10) 그러나 당신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히 9:12)를 경험하고 당신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살아계시다면 당신의 이제 그리스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하나임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확실히 당신의 모든 죄를 그리 스도의 보혈로 씻음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의 구속자인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 라! 당신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영혼까지 버리셨 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진정 당신과 하나이기를 원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당신을 그렇 게 당신을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 쏟았던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그리스도 는 당신을 절대로 그렇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 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 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 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6-7) 엘리사가 엘리야와 처음으로 갔던 곳 이 길갈이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시작은 길갈이다. 길갈이 없다면 벧엘도 없고 여리고도 없고 요단도 없다. 길갈은 우리의 영적인 구원의 그림자이다. '길 갈'은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이다(수 5:2-9)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 넘으로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홍해물에 그들을 뒤따르던 애굽의 병사들이 수 장이 되는 것을 보았다. 홍해의 물은 이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길을 막아 버렸 다. 영원히 애굽과는 이별이었다. 돌아갈려고 해도 돌아갈 길이 없는 완전한 분리, 이것이 구원이다. 길갈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받았다. 이제는 영원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모든 수치를 벗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죄의 종 에서부터 구원을 받았다. 길갈은 죄의 수치가 굴러간 곳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진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는 이제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목전에 기억함이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히 10:17) 그리스도와의 동행은 길갈에서 시작된다. 당신은 분명한 길갈의 경험이 있는가? 당 신의 죄의 수치가 굴러가 버린 그 날이 있는가? 여섯번째 남자와 살고 있던 사마리 아 여자, 죄의 수치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한낮에 우물가에 물을 길러 왔던 인생의 허무함에 몸부림치던 여자, 잡으려고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바람을 잡는 것 같아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텅빈 가슴을 안고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해 영혼 의 생수를 찾던 그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의 수치를 벗고 영혼의 갈증을 해갈했다(요 4장) 이 여자에게는 분명한 길갈이 있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죄의 수치를 벗은 그 날이 있는가? 당신의 길갈은 언제인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골 1:6) 길갈이 없 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아무리 멋지게 짓는다 할찌라도 홍수가 나면 엄몰해버릴 기초없는 집이다. 길갈(구원)을 경험한 자를 하나님은 벧엘로 인도하신 다. 구원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출발이다. 구원은 옛생활의 끝이며 새생활의 출발 이다. 영원한 삶의 시작인 것이다. 엘리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엘리야가 엘 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데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 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열하 2:2)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야곱 이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갈 때 날이 저물어 유숙하려고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누워 자게 되었다.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으며 또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약속하시기를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 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던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너를 다시 이곳을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셨다(창 28:10-) 야곱은 놀라 일어나 자기 아버지의 집에만 계신 줄 알았던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고 하면 서 이곳이 여호와의 집인데 내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베개하였던 돌을 취 하여 기름을 붓고 그 곳의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하였다. 확실히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다음은 벧엘로 인도되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다. 길갈을 통과한 후 벧엘을 만나지 못한다면 믿음의 연단을 받을 여 리고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속의 그리스도를 경험할 요단도 없다. 벧엘은 하나 님의 집 즉 교회를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최초의 하나님의 집은 모세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성막이었다. 그 성막 안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그리고 솔로몬시대에 들어와서 자주자주 옮겨야 했던 성막은 성전으로 바꾸어졌고 그 곳에 하나님은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아계실 때, '너희가 이 성전을 헐 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마 26:61)고 하셨다. 이것은 성전이 예수 그 리스도 자신임을 나타낸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이제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남겨 놓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집이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디전 3:15)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하나님의 집: 성막->성 전->그리스도-> 교회가 되겠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 이 있다. 그것은 벧엘 후에 길갈이 아니라 길갈 후에 벧엘이라는 것이다. 확실하 게 구원함을 받은 자만이 교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함을 받지 못하고는 교회를 발견할 수도 없고 또 예배당을 다녔다고 할지라도 그 곳은 예배당은 될지언 정 교회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당은 예배당이고 교회는 교회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란 '거룩하여진 성도가 모여 있는 무리'를 말 한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을지라도 그 곳은 인간적인 모임을 될지언정 하나님의 교회는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 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의 조건이 거룩해야 한 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성령은 두루 교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한 사람은 교회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발견했는가? 이 것은 당신의 영혼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영혼은 죽어 있거 나 병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막 - 쉬는 곳 벧엘은 쉬는 곳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자의 비유를 하 신 적이 있다. 강도만난 자는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 사마리아 인이 나타나서 그를 구원하게 된다. 강도만난 자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우리를 말하고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자 의 상처를 치료한 후에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다.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주라'는 것이 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요, 주막 주인은 교회 의 인도자이다. 다시 오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사마 리아인은 주막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교회로 다시 오신 다. 그래서 교회가 공중으로 들림을 받는 것이다. 주막에는 음식과 술이 있고 쉴 수 있는 방이 있다. 주막은 잠시 쉬어가는 곳이지 영원히 거할 처소가 아니다. 교 회에는 영적인 양식이 있다. 영적인 기쁨이 있다. 영적인 쉼이 있다. 주막주인의 보살핌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 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한번도 무엇을 요구하신 적이 없다. 인간은 무엇을 할 때마다 말썽만을 일으킬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주막에서 당신의 영적인 병을 고치기 위해 머물고 있는가? 당신은 벧엘을 발견해야 한다. 벧엘이 없다면 여리고도 요단도 없다. 교회를 발견하고 그곳에 머물지 못한 다면 당신은 여리고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믿음의 연단을 쌓을 수 없고 당 신이 얼마나 무익한 존재인가를 확인할 요단도 경험할 수 없다. 이유야 어떠하던지 간에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의 소욕을 좇는 자이다(잠 18:1) 그리스 도에게로 돌아오라! 참된 하나님의 교회로 돌아오라! 이것이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 의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