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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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4월 23일 화요일 오후 02시 44분 43초
제 목(Title): 김민웅/ 아, 팔레스타인 


출처: 길벗교회


아, 팔레스타인!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 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출애굽기 23장 9절/레위기 19장 2절, 34절) 


"성서 속의 이스라엘"은 고난의 백성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어떤 단일한 
혈통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성서 속의 이스라엘은 애초에 핏줄에 
따라 형성된 민족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영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서의 하나님은 유태인을 위한 특정 
부족신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지 이민족의 종족종교에 불과한 것을 자신의 정신적 혈통 대신 
금과옥조로 삼는 얼빠진 인간이나 백성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니, 이 점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이 신앙을 전해준 미국이나 유럽 
또는 그 뿌리가 되는 오늘날 현실로 존재하는 국가 이스라엘의 정신적 노예 
내지는 무조건적인 추종자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노예 생활을 했던 이들이 마침내 거대한 탈출과 해방의 
행진을 하는 과정을 기록한 출애굽기에는, 노예생활을 했던 여러 족속들이 
광야의 시련기를 함께 겪어내면서 생각과 신념의 차이를 극복하는 가운데 
새로운 꿈을 품고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국의 고기가마 옆에서 
떨어지는 고기나 국물이라도 얻어먹으면 그것이 최고인줄로 알았던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삶의 내용인 <젖과 꿀>이라는 목표가 생기고, 이것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결단과 은총이 곧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이리 채이고 저리 짓밟히면서 고달파 했던 힘없는 세상의 나그네들이 <하나님 
나라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세워나간 새로운 공동체의 원리이자 
미래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과 함께, 그 고난을 뚫고 하늘의 생명이 
마침내 이기는 역사를 동시에 상징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가 
고난이면서도 동시에 생명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그래서 역사의 벼랑에 몰려 지냈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손길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뜨겁게 불러일으키는 단어였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암담한 처지 앞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겨루어 그의 마음을 끝내는 붙잡고 
축복을 얻어낸 자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그에게 준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좌절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가도, "아, 
나는 이스라엘"이지 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저력이었습니다. 그 어떤 혹독한 시험과 
도전이 닥쳐도 무너지지 말라는 신호였고, 하나님은 결코 자신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확신의 구호였습니다. 강자들의 횡포와 폭력에 시달리는 때에도, 
누군가 "이스라엘"하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면 이들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강하게 먹었고, 다시는 누구도 이렇게 억압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미래를 건설하자는 의지와 용기가 이들 사이에 소리 없이 퍼지도록 
만드는 정신적 뿌리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식민지 현실에서 독립과 해방을 꿈꾼 
사람들이 "조국, 독립, 해방"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또는 옥에 갇힌 사람들이 "자유, 석방"이라는 말을 듣기를 몽매에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한때의 잘못으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이 
상대로부터 "용서"라는 말 한 마디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가능성이 가로막히고, 일체의 희망이 끊어지며 그 
어디로부터도 도움이 없는 지경에 몰려 있을 때에도, 하늘에서 땅으로 뚫린 
길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와 같은 것이었고, 그들의 삶이 결코 저버림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실로, 이들 노예집단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광야에서 길러낸 꿈과 희망과 
새로운 삶의 원칙들은 세상이 알고 있던 현실의 생존방식과 전혀 다른 
것이었었습니다. 그것은 한 때, 과연 그런 세상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고 
포기했던 생각이었습니다. 언제 자기들이 그런 세상을 맛볼 수 있을까 하면서 
그냥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이지 하고 그냥 접고 살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반드시 와야 할 터인데 하고 소수의 꿈을 품었던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영혼에 새로운 
생명의 기력이 충만해지면서 이들은 그것이 다만 꿈만은 아니로구나 하고 깊이 
깨달았고, 이들은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즉 인간이 인간을 짓밟고 인간을 
욕망과 이기심의 수단으로 삼는 세상과 시대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결단하고 뜻을 모았습니다. 모세가 이끌었던 광야 공동체의 진실은 이렇게 
다져져 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땅에서 그들이 이룩해나갈 나라의 
모습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그려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 나라의 지침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지침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만방에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거듭 거듭 일깨웠습니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즉, "너희는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세상이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따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명의 시대를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의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아, 이런 길을 놓고 내가 엉뚱한 곳을 돌면서 세월을 보냈구나 하고 
가슴을 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생이 심해도 악한 방법에 몸을 
내맡기지 말며, 아무리 힘이 강해져도 약자를 박해하지 말고, 오로지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세다고 약한 자의 것을 빼앗지 말고 밉다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며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기 욕심을 차리는 짓을 정녕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사이에 서로를 아끼고 나누며 평화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너무도 힘들게 살았으니까 이제 
살만해지니 옛날에 못해봤던 것들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욕심 껏 살라든가 
또는 마침내 힘을 키웠으니 남들이 함부로 깔보지 못하게 콧대를 세우면서 
살라든가 아니면, 너희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잘 먹고 잘 살아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혹 힘이 없다고 멸시 당하거나 
억울하게 가진 것을 빼앗겨 의지 가지 없거나 생김새와 출신과 혈통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 당하는 이들의 삶에 가 있으신 것입니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이들의 혈통적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삶이 곤경에 처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 이스라엘이 어려운 시기를 벗어나 자신들이 꿈꾸며 바라던 세상을 
살아갈 만한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개구리가 올챙이 적 모르고 
새로운 억압자가 될까 하여 이들의 마음에 진작부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박대하고 짓밟지 말아라. 너희도 한때는 그렇게 억울하고 힘없이 살아본 적이 
있으니 그들 나그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는가? 그들을 너희 식구나 
다를 바 없이 여기고, 그들을 너희 몸처럼 사랑하라." 이 말씀을 그들이 받은 
때는, 이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남들을 억압하고 멸시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남들에게 그런 푸대접과 학대와 경멸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해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상황으로만 보면 너무 앞질러 걱정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출발부터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 지금은 이렇게 고생하지만, 형편이 피면 어디 보자, 나도 
떵떵거리면서 내로다 하고 기를 펴고 살 날이 있을꺼야. 그 때 가서 내가 
거느릴 노예도 수십 명이 되고 내가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이들이 내 앞에서 
설설 기면서 내가 왕 노릇 할 날이 올 꺼야" 하는 마음이 행여라도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을 해두는 것입니다. 고생한 사람이 더 무섭다고, 그 고난의 
경험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남들 위에 올라서서 
군림하고 싶은 욕심을 기르는 조건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약자의 자리에 서시는 하나님과 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하나님은 그야말로 마음이 비통하게 되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들이 고난과 절망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이들에게 생명과 사랑, 구원과 해방 그리고 새로운 꿈으로 다가가셨던 것을 
일깨우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깊은 서러움에 몸을 떨고 빼앗김의 연속인 
생활을 해야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 희망과 감격이 
되어주신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못하거나 힘이 없는 이들을 
보면서 깔보거나 그 무력함을 이용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백성이 세상에 보일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비틀거리고, 믿을 구석이 한군데 없으며 
생명이 위협 당할 때, 자기 몸처럼 돌봐주고 자기식구처럼 받아줄 때가 딱 
한군데 있으니 거기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이다, 이런 
희망을 이 세상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했을 때, 세상은 아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백성들을 결코 외면치 않으신다, 그들을 구원해내신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에 처한 백성들을 구하시는 일의 시작이였구나 하는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구한 것이, 사실은 나머지 
99마리의 생명 역시 위기에 처했을 때에 자신의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정작 1백 마리 전체의 생명에 안위와 평강과 
확신을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어내야 할 바를 우리에게 거듭 거듭 
환기시켜주는 생명의 표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무력으로 약자 팔레스타인 민족을 점령하고 짓밟고 학살하고 있는 국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의 깃발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한때 억울하게 학살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온 세상을 나그네로 유랑하면서 
아무런 권리도 없이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과거를 생명의 원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폭력과 군림과 억압의 힘을 기르는 일에 쏟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인들을 자신들의 땅에서 나그네와 노예가 되고 있고, 점령당한 
백성의 비통함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의 땅에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들이밀고 
들어와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예닌을 이스라엘은 폭격기로 공격하고 군대가 들어가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층 마저 이 일이 세상에 그대로 알려진다면, 
이스라엘은 세계 여론의 지탄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미국은 오랫동안 
지원해왔습니다. 미국은 이 나라에게 엄청난 무기와 정치적, 외교적 지원을 
해오면서 팔레스타인 백성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가급적 외면해왔습니다. 지금 
잠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지만, 미국이 쏟아내고 있는 비난의 초점은 
팔레스타인의 테러에 더 비중이 있습니다. 모든 폭력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생존의 벼랑에 몰린 사람들의 폭력에는 절규의 메시지가 있는 것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오늘날, 성서 속의 이스라엘, 노예로 
비참하게 살면서 하늘의 도움만을 간절히 바란 사람들의 표징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오늘의 이스라엘입니다. 모든 인류의 양심을 치는 존재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기도와 어떤 외침과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폭력을 앞세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비극과, 
강자의 군림과 억압이 원리가 되는 세상이 겪는 비통함을 우리는 여기에서 
봅니다. 


오늘, 팔레스타인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평화의 함성을 외쳐 주십시오. 
팔레스타인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인류의 고통을 의미하는 
신호입니다. 이것이 희망의 구호로 바뀔 수 있도록, 모든 인류의 약자들과, 
짓밟히고 있는 오늘의 팔레스타인들이 더 이상 서러움을 겪지 않도록 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마음을 모아 간구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까이는 
조선족 동포들의 한, 히스패닉 형제자매들의 서러움 이 모든 것을 우리가 
껴안고 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며, 그로써 세상은 희망의 등대가 또 하나 밝혀지는 
것을 보고 감격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사라져도, 이 지상에 단 한군데, 그곳에만 가면 평화와 생명, 
그리고 희망과 사랑이 솟구치는 곳, 그런 곳이 있다는 기대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입니다. 무고한 
이스라엘의 민중들과, 핍박받는 팔레스타인 인들의 눈물이 모두 거두어지고 
진정 평화의 인류가 되는 시작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스라엘이 되는 결단과 기쁨이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아멘. 




무우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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