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2년 3월 21일 목요일 오전 02시 22분 32초 제 목(Title): 김민웅/ 예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 출처: 길벗교회 예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조금 뒤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 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확실하오." 그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마태복음 26장 72절-75절) 부활주일을 앞둔 40일, 즉 "수난절"이라고도 하는 사순절의 기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기를 그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생명의 무게에 버금가는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의 편에서는 죽음과 마주하는 <십자가의 기로>가 버티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와 마주함은 하나님의 생명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입증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패배를 목격했다고 여기고, 생명의 길 바로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베도르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위기에 처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들판의 바람을 견디기 어렵고, 평지만을 걷던 사람이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기가 숨차며 잔잔한 호수에서만 배를 젓던 사람은 거친 풍파가 몰아치는 바다를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난의 역경을 통과하는 세월이 없으면, 인간은 그 정신이 어느새 게으르고 허약해지며 육신에는 창조적 긴장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양지만 밟고 다니려는 사람은 야전(野戰)의 시각이 닥치면 냅다 꽁무니를 빼기가 십상이고, 대세에 대한 기회주의적 눈치만 발달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그릇이 얼마나 되는가, 그 사람의 내면에 담긴 생명의 능력이 어떤 수준에 이르고 있는가, 그 사람의 한계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는 역시 고난의 시간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는데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무너지고 병이 드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와는 반대로 더더욱 강건하고 깊이 있게 성숙해집니다. 같은 폭풍 앞에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어떤 사람은 예상치 못한 능력으로 돌파해냅니다. 그 경계선에는 그 사람의 내면에 생명의 능력이 얼마나 풍요한가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과 능력이란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만 버티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결과가 나옵니다. 독해지던가 아니면 견디다 못해 스러지던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독해지면, 사람이 못쓰게 됩니다. 지금은 이런 고생을 하면서 멸시를 당하고 우습게 여겨지고 있지만 때가 오면 남보란 듯이 기를 펼 것이다, 그때 나를 깔 본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살면 그 영혼에 선한 능력이 자라나기 어렵습니다. 이미 그 영혼에 오만과 독선이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미움과 냉정함이 자리잡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다른 사람이 편안하게 들어설 여지는 없습니다. 자기도 고생을 했으니까 남 고생하는 것도 깊이 헤아려줄 줄 기대했지만, 도리어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더 냉혹하게 굴게 됩니다. "고생한 사람이 더 무서워"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결국 천하를 얻고도 자신의 생명을 잃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고생을 많이 하고 바라던 바를 성취하긴 했으나 결국 인간성을 버리는 이유는 그 영혼에 악한 마음이 스며들어 독해졌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서 구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버티는 줄 알았지만 어느새 그의 영혼이 악의 힘에 의존하는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고생을 하면서 인상이 고약하게 또는 사납게 구겨지면 그것은 다 그 영혼에 악의 손길이 뻗친 증거가 됩니다. 고생한 대가란 마침내 이룬 성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성취는 그 자신의 존재가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우치지 못하면, 이것을 얻지 못하면 그의 성취는 도리어 그를 패망하게 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악한 영혼이 되면서 얻게 되는 물질과 명예와 지위, 그리고 세상의 영광은 그의 삶이 사탄의 것이 된 것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자기 힘만으로 버티려 들면 얼마 못 가 쓰러지고 말기도 합니다. 그의 영혼은 고갈되고 그의 육신은 지쳐 더 이상 견디지 못합니다. 생명의 근원과 통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마음에 남는 것은 원망과 좌절, 그리고 불운으로 인한 탄식 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과정에서 이렇게 안간 힘을 쓰면서 버티는 일에만 집중하는 마음에는 지혜의 여유와 감사의 안목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는 자가 되고 말뿐입니다. 인생에 대한 용기는 찾아볼 수 없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하려는 의지는 소멸해가며 희망을 품는 일을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인생을 속는 과정의 연속으로 생각하기조차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사가 부정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 마음이 비비 꼬여 냉소적이 되고, 그 냉소가 지나쳐 이웃의 행복에 상처를 내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순수하게 기뻐하고 순수하게 즐거워하며 순수하게 축복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그의 생명을 압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과 편안하게 지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열등감이 깊어 있기 때문에 별 것 아닌 말에도 원한을 품고, 넉넉하게 받아들여도 될 일을 저의가 있는 것으로 앞질러 판단하고 파괴적인 대응을 하려 들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변에서 동정과 이해를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됩니다. 결국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병든 영혼의 몰골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이란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영원한 생명을 대치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의 발로 일어서고 자신의 믿음으로 나음을 얻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로 세상과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뻔한 역량으로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자기 자신의 진정한 체험과 자기 자신의 굳건한 확신을 발판으로 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만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실과 참된 자아를 걸고 만나지 않는 하나님은 자신의 진정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을 위해 꼭 필요한 내용과 방식의 생명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가령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얻기 위해 형 에서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아버지 앞에 나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향해 준 축복이지 야곱의 진정한 자아와 만나진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들판에 홀로 서서 어떻게도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진정한 면모를 내걸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영혼과 육신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새롭게 약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자신의 진실한 자아를 앞세워 만나지 않는 관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계산과 위장,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서로 간에 아쉬울 것 없이 결정하는 결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너 자신을 진실로 내어 맡겼다, 그런 너의 진심에 하나님이 뜨겁게 응하셨다" 하는 이야기이지 우리 안에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아무런 과정이나 조건도 없이 곧 생명을 구하는 능력과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이란 바로 이 하나님의 생명과 만나는 진심이 될 때 비로소 놀라운 힘으로 변모하는 출발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우리 자신의 진심을,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하나님의 생명에 내어 맡길 때 우리에게 매우 치명적인 위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혹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괜히 나만 당하고 말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전적으로 걸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겁니다. 빠질 궁리부터 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 줄이 현실의 대세가 아닐 것 같으면 튀자, 하는 기회주의적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합니다. <초심(初心)의 원칙>을 지킬 의지는 물론이고, 의도조차 아예 없는 것입니다. 거는 척하고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 하시는 바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여기도 기웃거리고 저기도 기웃거립니다. 껍데기는 하나님 앞에 모양으로 갖다놓고, 진짜배기는 어느 판이 더 좋은가 유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이 진정으로 평안할 리가 만무하며 그런 사람의 생명에서 세상을 바로 이겨낼 힘이 강력하게 솟구칠 수 없습니다. 엉거주춤하는 사람의 자세에서 집중된 힘이 나올 수 없고,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눈치만 살펴보는 사람의 판단이 안정될 수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피할 생각부터 하고, 풍파가 거치면 납작 엎드릴 방도부터 연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결국 언제나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꼴이 되기 때문에 내면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밤낮 외부의 힘에 휘둘려 지내다가 날이 샙니다. 그런 사람을 믿고 일하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배신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면, 상황에 따라 배반 할 준비를 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이에게 진실을 기대하는 것은 위험해집니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진심을 걸지 않는 사람은 인간사에 있어서도 자기가 했던 말을 졸지에 뒤집고 언제 무슨 일로 돌변할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수제자로 일컬음을 받는 베드로는 스승 예수에게 고난이 닥치면 자신의 생명을 걸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베드로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내놓지 못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위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투로 인해 그 위장의 껍데기마저 벗겨져 버리지만 그는 여전히 예수와 자신의 인연이 없음을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하는 자가 됩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 들어간 예수를 뒤따르다가 그만 불심검문에 걸려든 그는 자신이 했던 장담과는 달리 예수를 홀로 고난의 현장에 내버려두는 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확실하오" 하자 그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합니다. 스승 예수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패배를 예감하는 마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앞에 내놓았다고 여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철수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세 앞에 조아리고 섭니다. 그것이 자신을 지켜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배반과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모든 패망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세상의 권세와 힘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절망과 좌절과 선한 마음을 잃어버린 독선의 뿌리는 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에 자신의 진심을 거는 일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세 번째의 검문을 통과해서 이제 다행히도 살아났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때마침 닭이 우는 소리를 듣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스승 예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는 마음이 비통해져 가야바의 집 밖으로 빠져나가 몹시 웁니다. 겨우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생명이 끝없이 통곡하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베드로는 이미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 그 이름대로 생명의 길을 향한 반석이 되기를 포기한 일개 범부일 뿐입니다. 예수의 생명, 하나님의 마음과 인연이 없어진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붙어있다고 하는 것이 이제 베드로의 베드로다움에 아무 유익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가 살아난 것이 살아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이 될 줄이야 그가 미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통곡은 하나님의 생명과 인연이 사라진 자의 슬픔을 말해줍니다. 고난의 창끝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면, 사탄은 그 영혼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에게 사탄의 권세는 무력해집니다. 이후 부활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베드로는 이 모든 비통함을 극복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약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만회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승리하는 것을 증언하고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충만한 능력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에 도리어 생명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기르는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그러면 그 고난은 우리 인생에 무한한 감사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는 마음이 자라나기를 축원합니다. 일체의 악의와 일체의 좌절이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우리를 악하게 변모시키며 우리를 결국 패배하게 만드는 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예수를 고난의 계곡에서 생명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과 생명이 중심에 서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존재로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뿜어져 나오는 힘을 세상이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그의 능력은 이미 그 자신의 힘과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가 되어 누구도 패망시킬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로서 우뚝 서서 용기와 지혜와 선과 의, 그리고 생명의 빛을 힘차게 발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