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1년 3월 11일 일요일 오후 11시 45분 49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01년 3월 11일 한백의 소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황 용 연 때 : 통일염원 56년 팔백 여섯번째 예배에서(2001.3.11) 본문 : 창세기 32장 23~28절/ 곳 : 한백교회당 창세기 32장 ○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분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 그 분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 그분이,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표준새번역) 흔히 히브리 성서에 대해서, 그 중에서 특히 창세기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모세5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의 조상'들에 대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약점'까지도 솔직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말이지요. 더군다나 이 이야기들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 '신화'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의미는 더더욱 커지게 됩니다. 히브리 성서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사회 집단 자체가 모두 공유하고 받아 들이고 있는 이야기란 말이 되니까요. 결국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등의 인물들은 고대의 신화의 세계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영웅'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고 인격적으로도 결점이 어느 정도 있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말이 될 겁니다. 특히 그런 '보통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약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름부터가 '남의 것을 가로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이 야곱이란 사람은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챈 사람으로 히브리 성서에 맨 처음 등장합니다. 그야말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일하던 곳에서 일종의 '수법'을 써서 그의 일터의 가축들을 모두 자기 몫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민중신학자는 최근의 어느 잡지에 발표한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충직한 사람이라면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서는 다소 흠이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이다. '아버지'와 '하느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은 야곱에게서 형 에사오와의 불화는 그다지 대수로운 문제가 되지 못했던 경우와 같다'({당대비평} 14호)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 원래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이란 게 '장남'에게만 특권으로 내려지는 가부장권이거든요. '차남'에게는 아무 보장도 없는. 거기다가 야곱이 '사기 수법'을 썼던 일터의 주인(그의 장인이기도 한데)은, 야곱이 자기 딸을 좋아한다니까 '어차피 시집도 못 갈 거 이참에 처분(?)해 버리자'면서 강제로 언니까지 떠맡기는 그런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야곱이 나중에 자기 보수를 달라고 할까 두려워 야곱에게 병든 가축들만 맡기기도 하구요. 그러니 어떻게 보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오늘의 본문에서, 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바로 그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나중에 히브리 성서를 전승하는 '이스라엘' 집단의 이름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야곱을 어떻게 볼 지는 참 쉽지 않은 문제가 됩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최근에 개봉된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입니다. 한백식구분들 중에서도 보신 분이 있으실 겁니다. 이 영화는 80년대 영국의 가장 악명높은 노동운동 탄압 사건이었던 광산노조 파업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그래서 영화 곳곳에서, 파업하고 있는 광산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일하러 들어가는 대체근로자들에게 '배신자'라고 욕을 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이 곳의 광부들은 아들들에게는 권투를 가르치고, 딸들에게는 발레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역시 똑같은 광부의 아들인 빌리 엘리어트는, 권투를 배우다 말고 발레에 매력을 느껴 몰래 발레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에 의해 왕립 발레 학교에 가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흔히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영화평론가에 의하면 아예 이런 식의 발레 영화 공식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몰래 발레 수업을 받다가 들키고, 그래서 아버지랑 싸우고, 그러나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가 전폭적인 후원자로 바뀐다는. 거기다가 먹고 살 길이 없어 파업 중인 아버지에게 '왕립 발레 학교'를 가기를 꿈꾸는 아들이라니 당장 경제적인 문제까지 겹치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주목한 것은 좀 다른 지점입니다. 빌리가 발레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와 형은 물론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아버지는 '발레는 여자나 하는 거지 남자가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공식'대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빌리의 아버지를 설득하러 중산층인 발레 선생이 집에 찾아 왔을 때, '발레는 여자나 하는 거지'는 빌리의 형에게서 이렇게 발전합니다. '어린애 발레 가르쳐서 뭐하게요? 배신자나 만들려고?' 발레를 배움으로써 '남성성'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배신자'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일단 생각해 보면 '남성성'이라는 잣대에 얽매여서 자식의 꿈을 짓밟으려 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남성성'에서 어긋나는 것이 '배신자'의 지름길이라고 생각되는 걸까요? 어쩌면 그 답은 '남성성'이라는 게 '강함'의 상징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요. 공공연히 '노조는 내부의 적'이라고 내뱉는 '대처 수상'이 이끄는 폭압적인 정부에 맞서려면. 더군다나 파업을 해도 금새 '배신자'들을 데려 와서 잘만 광산을 굴리는 그런 정부에 맞서려면, '우리'도 '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강함'을 위해서는 어렸을 적부터 '권투'를 배워서 '강한 남성'이 되어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들이 깔려 있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영화의 막바지에서, 빌리가 왕립 발레 학교의 합격 통보를 받는 그 순간은, 동시에 광산노조 파업이 최종적으로 참패로 귀결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왜 남성성에 얽매여서 야단이냐?'라고 '윤리적'인 비난을 가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빌리에게는 아버지와 형의 행동은 자신의 꿈을 짓밟아 버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빌리는 역시 자신의 꿈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오디션을 포기하고 몰래몰래 춤추는 걸로 만족하다가, 그것마저 아버지에게 들키자 오히려 아버지 앞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춤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빌리를 반대하던 아버지는 마음을 돌리고, 그토록 규탄하던 대체근로자의 대열에 끼면서까지 아들의 오디션 비용을 구하려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빌리는 결국 오디션에 성공합니다. 아들의 꿈을 실현해 주기 위해서 아버지가 '배신자'가 될 수 밖에 없고, 아들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 아버지와 형은 '패배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 그러나, 빌리는 형의 레코드를 몰래 들으면서 춤을 추고, 빌리의 형도 그 레코드를 들으면서 춤을 춥니다. 사실은 빌리의 꿈은 빌리만이 아니라 노조 위원장을 하는 열렬한 투사인 그의 형도 공유하고 있는 꿈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삶의 힘', 바로 그것 때문에, 광산노조도 그렇게나 파업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비록 광산노조의 파업은 패배로 끝났지만, 그 '삶의 힘'은 빌리를 통해서 작지만 끝끝내 승리를 일구어 냅니다. 다만, 그 승리를 위해서는, '남성성'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적'들에 맞서 싸우기 위한 '강함' 자체를 일정하게 넘어서야 했습니다. 야곱에게 하느님이 다가와서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조차도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기지 못하니까 엉덩이뼈를 치는 반칙까지 할 정도로 야곱이 강하게 버티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 가려고 하니까 '축복해 달라'고 붙잡고 늘어져 '축복'을 해 주고 나서야 하느님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기'를 치고 '수법'을 쓰면서 억척같이 삶을 개척해 온 야곱다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받은 이름 '이스라엘'은 '하느님한테까지도 맞상대를 해서 이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금까지 '사기'를 치고 '수법'을 써 온 야곱에게 일체의 도덕적인 책망을 하지 않습니다. 또, 감히 '불경스럽게도' 하느님인 자신과 겨루어 이긴 '불손한' 야곱에 대해서 일체 그 불경을 책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기'를 치고 '수법'을 써 온 그 야곱을 그대로 '이스라엘'이라고 축복해 줍니다. 하느님 자신이 어쩌면 망신스러울 수도 있을 '하느님한테까지도 맞상대를 해서 이긴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러기 전에, 야곱은 '사기'를 치고 '수법'을 써서 모은 재산,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그 아내들에게서 낳은 한 힘이 될 만한 자식들까지, 그가 지금까지 쟁취한 '강함'을, 모두 떠나 보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 되찾게 되긴 합니다만, 일단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어쩌면 싹쓸이당할 수도 있는, 그런 불안 속으로 모든 것을 떠나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그 동안 살아온 '삶의 힘'으로 하느님과 씨름을 해야만 했습니다. 80년대의 영국 더램의 광산노조 노동자들과 2001년의 인천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무척 많은 면에서 닮았다는 것. 이것은 2001년의 우리를 무척 암울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서, 야곱이 되었건, 빌리가 되었건, 어떻게든 그 그림을 다시 고쳐 그리려 하는, 아니,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 그림을 다시 고쳐 그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의 힘'이 끊임이 없으리라는 것. 그런 사람들의 '삶의 힘'이 어디선가 어떻게든 그 그림을 다시 고쳐 그리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적어도 한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자신들의 '삶의 힘'이 무엇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힘'이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혹시나 '강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오직 '힘' 그 자체로 온전히 발현되기를, 그래서 마침내 그 발현의 결과로 '강함'을 쟁취해 내는 그런 '힘'이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한백식구들의 '삶의 힘'을 보고 싶습니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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