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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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25일 일요일 오후 07시 21분 24초
제 목(Title): 조연현/ 교회, 욕망의 기적과 사랑의 기적 


출처: 한겨레 
조연현 - 교회-욕망의 기적과 사랑의 기적 2000.12.20 

요즘 여의도가 소란합니다.

금기시되어온 종교문제를 방송이 거론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늘상 문제가 된 
곳들은 `성령 치유의 은사'를 발판으로 대성공을 이룬 곳들입니다.

종교인들이 자랑하는 능력의 상당수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속임수이거나, 
서로의 욕심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대부분이라 여겨지긴 하지만,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하는 일도 있지요.

그런데 통상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정 장소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사람을 흔치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무당은 날선 작두위에서 춤을 추고, 어떤 인디언들은 빨갛게 달궈진 돌 위를 
맨발로 걷고도 전혀 화상을 입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말 그러한 능력 자체가 신이고, 진리이고, 가장 위대한 것이라면, 모두 그 
앞에서 경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병을 고친 사람의 수를 보면 어찌 서울대학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이나 
고대병원 등 병원들이 고친 사람의 숫자보다 많은 곳이 있겠습니까.

일부 종교기관들이 소수 몇사람의 병고침의 간증으로 신도들을 현혹하는 것을 
볼 때, 그 보다 수백배, 수천배 많은 병을 고친 이 병원들을 서울대학병원신, 
세브란스병원신, 고려대학병원신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현상'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원시인들이 
처음 불을 보고, 이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거나, 인디언들이 처음 총을 보고, 
모두 귀신이라며, 그 앞에 엎드리는 일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영역을 `신의 
영역'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올 때는 당연한 원인과 이치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병을 
낮는 사람은 그 원인이 외부의 자극이든, 내면의 심신의 변화이건 그런 조건이 
조성됐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불교계에서 불상위에 우담바라꽃이 피웠다고 해서 상당히 요란했지요. 
그러나 결국 `이적'으로 묻힐 뻔한 우담바라는 `풀 잠자리 알'로 밝혀졌습니다. 
.

기독교는 선교때 불교계의 신행에 대해 우상 숭배와 기복종교로 비판하곤 
했지요. 그러나 우담바라 사태에 대한 강한 내부 비판을 보면, 오히려 기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불교계가 기독교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불교정보센터 등이 우담바라 사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데 이어 불교계의 
실력자인 도법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직무대행은 지난 12일 자 <불교신문>에 쓴 
칼럼에서 불교계의 모습을 강하게 질타했지요. 그 글의 일부입니다.


이런 중노릇을 해야 하고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종단의 처지가 구구하다.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불교계 스스로가 정직하고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담바라꽃 소식 이후 불교계가 보인 태도는 보는 사람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진짜다. 가짜다. 혹세무민이다. 종교는 성역이다" 본질과는 
거리가 먼 시시비비만 있었을 뿐 그 어디에도 진실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세상을 기만하는 위선과 사찰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맹목적인 탐욕만 
넘실대고 있었다. 불교계를 휩쓸고 지나간 우담바라꽃 사건은 포교과 경제의 
이름으로 부처님 도량에서 비불교적 행위인 점, 사주, 관상 따위를 자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설명이 되질 않는다.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을 잘 모시고자 한다면 우담바라 다라니를 외울 것이 
아니라 재산, 명예, 권력을 내던진 부처님처럼 청빈한 삶을 혼연히 선택해야 
옳다' 

이것이 어찌 불교계의 일 뿐이겠습니까. 기독교도 온갖 방언과 이적이 횡횡하며 
소란의 극을 이루는 국적 불명의 부흥회가 이젠 전통이 되어가고 있지요. .

두레교회 김진홍목사의 고백서가 생각나는군요. 신학대학교 재학시절 모두가 
뒷산에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껄이며 방언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자신은 도무지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아 답답했는데, 시험을 치르는 날 보니, 
성령으로부터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학생들이 하나같이 책상에 새까맣게 글을 
써놓고 컨닝을 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 함께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아 
신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더군요.

만약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겠지요. 성경과 불경에 등장하는 많은 마귀들도 예수와 석가모니를 
위협할만큼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곤 했지요.

불교에서도 욕망의 화신인 파순은 불교의 육신통가운데 오신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귀의 왕인 파순도 신족통과 천안통과 천이통과 타심통과 
숙명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려지지요. 육신통 가운데 이런 다섯 신통은 삿된 
도를 믿는 외도들이나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능력에 대한 욕심조차 모두 버려 번뇌 망상을 완전히 여읜 
누진통을 이룬 자라야 부처라고 하지요.

정말 진실로 믿음과 진리와 도를 추구하는 분들은 이런 능력과 신통에 대해 
크게 경계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한국의 수도-수행자들이 일명 구루 
아이덴티니(스승 행세, 구세주 행세, 부처행세)가 가장 강해 이런 능력을 
개인의 욕망에 악용하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또한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지성이면 감천'이고, 
`정신일도하사불성'(정신을 통일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성실히 수행-수도하면 그 과정중에 특이한 능력이 나타나긴 하지만, 
이런 능력의 재미에 빠지면, 정말 수행-수도를 시작했던 본 뜻을 잃어버리고 
마귀-마구니의 길로 빠지기에 이런 능력에 대해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원불교같은 곳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할 경우 마귀의 장난과 신통의 
재미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아예 참선을 할 때 눈도 감지 말고 
눈을 똑바로 뜨고 하라고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진실한 수도-수행자들은 자신의 능력이 남의 눈에 띄어 사람을 현혹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보통사람과 똑같이 행세하며, 상대가 모르게 고통을 
해결해주고, 구원해주어 불교식으론 `무주상 보시'를 기독교식으론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기적을 보인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을 지닌, 그 분이 눈에 보이는 
당사자의 고통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눈 앞에 몇사람만을 위해 그런 
능력을 보였리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

그가 어차피 시간이 다하면 육신을 벗을 사람들의 욕신을 치료하기 위해, 
그것도 눈 앞의 소수 몇사람만을 위해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마음의 
치료자이고, 영혼의 치료자이지요. 그의 기적 또한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닐까요.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얘기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적에서 예수께서는 "너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달리말하면 결국 병의 원인도, 병의 치유의 능력도 자신의 믿음에, 즉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권능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권능 있음'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요.

특히 그가 보인 가장 큰 기적은 우리 모두가 물고 뜯고 이기고 죽여야할 적이 
아니라 한 형제 자매라는 것이요, 우리의 행복의 길이 욕망에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한두사람을 살리는 
사역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기적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요. 과연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진짜 기적일까요.

불경엔 석가모니의 이적에 대한 얘기도 많지만 죽음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런 
경우 다른 방편을 사용한 것같습니다. 석가모니 생존 당시 불시에 손자가 병에 
걸려 죽은 한 할머니가 손자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었지요. 석가모니는 
그 할머니에게 사람이 전혀 죽지 않은 열집에서 쌀을 얻어오면 손자를 
살려주겠노라고 했다지요.

그러나 어찌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있겠습니까. 당시는 어른 아이 할 것없이 
사람이 죽어나간 것은 다반사고 아무리 오래살아야 100년을 넘기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생명이니, 그 할머니는 사람이 전혀 죽지 않은 집을 단 한집도 발견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태어나는 것은 죽고, 생긴 것은 사라지고, 또 다시 태어난다는 이치를 
스스로 발견했지요. 그 손자를 잃은 인간적인 아픔이야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주어지느냐'고 신과 세상을 원망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던 전의 상황에 비해 그의 마음은 훨씬 평안해졌겠지요.

살아있는 동안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매사에 마음을 편히하고, 섭생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리고 최적의 치료 방법으로 본인의 마음과 육신의 건강을 되찾고, 자신과 
주위의 고통을 해소할수 있도록 해야하겠지요. 그러나 불가피하게 병을 얻게 
되거나 죽음에 처하게 되었을 때 큰 두려움과 고통없이 평안하게 육신을 벗는 
것만큼 큰 축복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영성지도자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예수원 대천덕신부의 
말을 들어볼까요. 지난 3월 <나를 찾는 사람들> 취재를 위해 태백 예수원에 
갔을 때, 대천덕 신부와 약 3시간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때는 미처 
지면 사정상 인터뷰를 싣지는 못했지요. 질의 응답가운데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방언과 은사는 정말 성령으로 부터 온것입니까? 개인의 경험, 지식, 문화, 
고정관념, 욕심의 소산입니까? 방언과 은사 체험이 넘치는 한국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의 상당수는 사랑의 언행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하나님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 문화를 사용하십니다.

은사를 받아도 이기주의가 없어지지 않고,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은사를 
자기 이익과 자기 영광을 위해 쓰려는 마음이 생기기 쉽습니다.

마태복음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왔을 때 사람들이 `우리가 
말씀으로 대언하고, 귀신을 쫓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때 예수께선 그들을 
모른 채 합니다. 성령은 은사에 있는 게 아니고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내적 성령을 얘기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성령은 은사와 관계가 없습니다.

외적 은사는 기계와 마찬가지입니다. 기계는 생명이 없습니다. 나무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기계는 능력은 많지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가야 합니까.

=내적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합니다. 외적인 것은 다 있는데, 사랑이 
부족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청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일제시대에는 
크리스찬이 되는게 어려웠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깊이 없이 기관화 되었습니다. 기관을 유지하는 일을 합니다. 
성령없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적 성장을 강조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한번 교회안에 참된 사람이 나타나면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기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대천덕 신부는 사랑으로 열매맺지 않는 능력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이용하는 욕망의 기적은 사람의 영혼을 죽음으로 이끌고, 
사랑의 기적은 우리 모두를 함께 살리지요. 

살인자의 가슴을 녹여버리고, 싸움을 중단케하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적끼리 
손을 잡게 하고, 노숙자를 살리고, 실직자를 가슴으로 안아 절망하지 않게 하는 
사랑의 힘만큼 큰 능력과 큰 기적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요.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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