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1년 1월 29일 월요일 오전 12시 27분 12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 김 진 호 때 : 통일염원 57년 팔백번째 예배에서(2001.1.28) 본문 : 마르코복음서 8장 33절/ 곳 : 한백교회당 마르코복음서 8장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공동번역 성서) 한 청년이 삶을 저주하며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약간 술에 취한 그는 부엌으로 가서 조리용 렌지에서 가스가 새가 새어나오도록 장치하고는 식탁 의자에 몸을 의지합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이제 잠시 후면, 그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엌문이 열립니다. 조금전 그의 모습에 미심쩍어하던 여자 친구가 이상한 느낌에 그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에 모든 걸 간파한 그녀는 신속하게 환기를 시킵니다. 그리고는 청년의 코에 식초냄새를 맡게 하고, 찬물로 세수를 시킵니다. 이윽고 청년은 정신이 돌아옵니다. 청년과 여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웁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너무나도 간절한 그녀의 호소에 청년은 감동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여자친구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녀를 위해서 다시 한번 뭔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사태가 좀 안정되자 여자는 남자에게 먹을 것을 해주기 위해 동네 가게로 달려갑니다. 혼자 남은 청년은 담배 한 대 피우며 살 궁리를 해보기로 합니다.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청년은 그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얼마전 신문에 나온 조각기사를 제 임의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유가족과 보험사간의 사고사냐 자살이냐를 둘러싼 법정 논쟁에서 유가족이 승리했다는 보도였습니다. 코미디 같은 얘긴데,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선은 청년의 죽음이 저의 귀에까지 들려오기 위해선, 그'의' 죽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관한' 보험금 지급 논쟁이 필요했다는 데서 저는 깊은 허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신문을 통한 이야기의 전승은, 그의 죽음의 의미를 보험사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이익이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만 주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곧 이러한 사회적 기억 방식에는 청년 자신의 인생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사연도 깊은 심연 속으로 처박혀 버립니다. 그도 한때는 아름다운 꿈의 소유자였을 겁니다. 한때는 수많은 추억이 그의 품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을 것이고, 한때는 이루고 싶었던 많은 소망이 그의 발길을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번번이 세월은 그를 배신했고, 그 좌절의 순간마다 혹독한 세상의 심판을 받았겠지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절망하다, 한 순간 죽음의 강렬한 유혹을 느꼈을 겁니다. 한데 그는 죽는 순간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죽고자 했으나, 운명의 신은 그 순간까지도 그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극적으로 여자친구를 등장하게 했고, 순간이나마 삶의 의욕을 되품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죽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억 방식에서 우리가 이 청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때는 반전이 가져다 주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에서 뿐입니다. 그는 반전의 미학이 들어 있는 코미디의 주인공으로만 우리의 기억을 때릴 뿐이고, 그만큼 그 속에 들어있었을 그의 꿈과, 그의 좌절은, 그의 비극적 운명의 사연은 사회적 이야기 구성 과정에서 추방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인류 문명의 악마성을 읽으려 하는 것은 저의 쓸데없는 과민함 때문일까요? 논리적 비약이 없이는 그런 상상력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그럼에도 저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저 자신도 그 신문보도에서 한 편의 코미디를 발견했고, 잠시나마 그것에 실소하는 자의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 대한 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전적 드라마에의 향략 그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세상의 악마성에 공모하는 자로서 그 이야기를 읽었던 것입니다. 이때 제 머리 속을 사정없이 진동시켰던 시가 바로 김수영의 [먼 곳에서부터]입니다. <먼 곳에서부터 / 먼 곳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 조용한 봄에서부터 / 조용한 봄으로 / 다시 내 몸이 아프다 // 여자에게서부터 / 여자에게로 // 능금꽃으로부터 / 능금꽃으로 //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 도대체 시인은 왜 몸이 아프다고 할까? 이 시를 처음 접할 때 제가 품었던 의문입니다. 조용한 봄, 여자, 능금꽃 ...,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들과 시인의 몸의 아픔과의 인과관계가 떠올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절의 이미지에서 '겨울'이라면 모르되 봄이 왜 아픔의 정서를 낳아야 하는가요? 남자에게서 여자는 짜릿한 호기심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것 아닌가요? 꽃사과의 신맛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요? 도대체 왜 시인은 이런 것들을 열거하면서 몸의 아픔을 말하고 있는지요? 이 시가 1961년에 발표된 것이고, 이 시기의 그의 여러 시들이 4.19 혁명의 허무한 귀결, 개혁의 그림자도 이루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비겁한 정치몰이배와 암울한 사회 상황에 대한 절망의 기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먼 곳에서부터]의 '시인의 몸의 아픔'이 필경 그러한 사회정치적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를 포함한 김수영의 전체 시작(詩作)들 속에는 인간에 관한 존재론적 천착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에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 시인의 아픔은 여전히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요? 어제 하루 종일 그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자살에 관한 신문기사를 통해서 그 숨은 뜻을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신문기사에서처럼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은 주로 타산적 가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빈부의 문제이고, 그것은 잉여가치의 배분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발전 논리가 개입되어 있고, 거기에 평등의 가치가 관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더 잘 살기 위해서 자신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사회적 발전의 논리와 자신을 일치시켜야 함을 뜻합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무한대의 자유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이 처세하는 방식이 형성되고, 합리성이라는 추상적인 규범이 구체화됩니다. 이런 류의 합리성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를 '근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근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합리성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요소는 지난 시대보다 근대가 훨씬 풍요로운 사회가 된 비결임은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데,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이든 남의 일이든 아픈 현실을 보면서 그것에 '자기도 모르게' 공감하는 법을 우리는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절망하던 청년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보고 그의 고통에 우리의 몸이 반응하기 전에 우리는 타산적 판단을 먼저 합니다. 그것이 옳으니 그르니, 어떻게 하는 게 더 그에게 유리한 것이니 아니니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실은, 사실을 말하면, 그렇게 말할 때도 대개는 우리의 몸은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일에서조차 우리의 반응이 그렇게 되곤 합니다. 요컨대 인류의 문명사는 우리에게 몸의 언어를 앗아간 것입니다. 한데 시인은 세상의 일 하나하나에 먼저 몸이 아파합니다. 별것 아닌 것에도 아픈 몸을 느낍니다. 아니, 그렇게 아파해야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서 아픔을 느껴야만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느닷없이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종말의 때가 다가왔다는 신호입니다. 하느님의 최종적 심판과 축복의 때가 임박했다는 암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초입에서 예수님을 제자들을 향해, 그때는 당신의 좌절과 버림받음과 죽임당함을 전제해야 도래하는 것이라고, 폭탄 같은 말씀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행은 그러한 몸의 고통을 극한적으로 체현하려는 길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가 말립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계획을 세우고 잘 추진하라는 뜻이겠지요. 허나, 예수님은 그를 향해 독설을 퍼붓습니다. 이 사탄의 새끼야, 저리 비켜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네 계산만 앞세우느냐, 라고.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죄와 세상의 고통을 하느님 자신이 함께 괴로워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몸에 그 고통을 체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즉 십자가는 하느님의 몸의 언어인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길, 예수님의 삶의 길을 따르는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곧 시인이 시를 쓰는 바로 그 자세와 맞물립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에서 몸의 아픔을 체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