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ca (----용----) 날 짜 (Date): 2000년 11월 13일 월요일 오후 11시 54분 16초 제 목(Title): [한백설교] 바보예수 2000년 11월 12일 한백의 소리 바보예수 김 진 호 때 : 통일염원 56년 칠백 여든아홉번째 예배에서(2000.11.12) 본문 : 요한복음서 12장 24절/ 곳 : 한백교회당 요한복음서 12장 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공동번역 성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안됐을 때입니다. 그해(1986년) 늦봄에 인천에서 이른바 '5.3 사태'가 일어났고, 이후 전두환 정권이 민중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갑니다. 그 어간에 동기생들끼리 학습을 하던 중에 전태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논쟁은 뒤풀이 때까지 이어졌고, 그날 술 취한 상태에서 우리는 주먹다짐까지 할 뻔했습니다. 논쟁의 발단은 한 사람이 '전태일은 예수다'라는, 당시로선 충격적인 문제를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전태일이 의인인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가 어떻게 예수'나며 응대했고, 이에 '전태일 평전'을 보고 말해라, 그렇게 산 이가 예수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예수냐는 재반격이 날아들었습니다. 그는 '전태일 평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책을 꺼낼 땐 학교 안에서조차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낮추며 말하던 시절이라, 나를 포함해서 그 책을 처음 본 몇 사람은 눈이 뻔쩍 뜨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그 책을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짜릿하게 다가오는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지나치듯 가볍게 말을 던집니다. '이런 게 성령 체험인가봐!'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말을 결코 농담으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게지요. 그날 밤 그 책의 소유자이자 문제 제기자였던 이는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역 앞에서 불신검문을 받고 경찰서로 강제연행됐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형사들이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당하고, 수십 권의 책을 압수당했습니다. 어떤 조직에 가담한 것도 아니고 어떤 모의를 한 것도 아닌데, 단지 책 한 권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그는 즉석에서 연행되어 매 맞으면서 심문당하고 가택수색까지 당하는 곤경을 치루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그와 '불온한' 토론을 한 우리도 그와 같은 곤경을 치루게 될 뻔했습니다. 어쩌면 더 큰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조작되었을 수도 있었지요. 그땐 그런 일이 수다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전태일 평전'을 구해 읽을 수 있었고, 그제서야 그 말이 실감되었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가 얼마나 감동스러운 것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분사(焚死)한 그가 내 가슴에 남아 나를 향해 꾸짖고 훈계하며, 나약해진 심사를 되돌려 놓는 신비한 마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전태일이 부활해서 나와 삶을 함께 하는 이 체험, 나는 여기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부활이니 성령이니 하는 말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내가 믿는 예수가 바로 이런 얼굴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태일이 오늘 우리에게 현신한 예수라는 것입니다. 한데, 실은 이 체험은 저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앙의 신비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70년 전태일 사건 직후에 이미 그리스도교 청년운동가 한 사람이 쓴 감동적인 글은 바로 그런 신앙적 성찰의 흔적을 보여줍니다(오재식, [어떤 예수의 죽음.―.고 전태일의 영전에]). 여기서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예수, 너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 먹고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내가 쏟은 피니 마시고 나를 잊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너는 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을 본 것이다. 너는 벽 뒤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그 세계가 오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벽을 뚫을 수가 있었다. 이 시작을 죽음이 막지 못한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탈바꿈이 아닌가. 네가 죽은 후, 예수여! ... 죽음의 벽이 당분간은 누리를 덮었지만, 그 밑으로 고동소리, 희망이 흐르고 있었다. ... 죽은 너는 다시 무리 속에 살아서 흐르지 않는가. 새 역사의 여명이, 부활의 아침이 급박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예수, 너는 죽어서 많은 예수를 낳고 그 예수들이 다 같이 예루살렘 거리에 서는 날, 너는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를 가르칠 것이다. '전태일 예수론'이 1970년 11월 13일에서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기에 제기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병무 서남동이라는 민중신학의 두 거목은 바로 이런 체험들을 신학으로 담아냈고, 그것이 민중신학의 최고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사건' 또는 '예수사건'이라는 신학적 개념의 핵심 내용이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건' 속에서 예수는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건은 부활 신앙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시간의 장벽을 뚫고 공간의 담장을 넘어서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예수 부활의 자리가 '교회'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부활 신앙의 내용이 교리가 아니라 역사적 체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단의 사람들은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예수 그분을 '전태일 사건'을 통해서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리/말/도그마'는 사상을 전수받는 기억술입니다. 그러나 사건은 경험을 전수받습니다. 교리에서 사람들은 예수가 뭘 말했는지를 듣지만, 사건에서는 예수가 뭘 했는지를, 왜 어떤 것에 고통스러워했고, 또 왜 어떤 것에 기뻐했는지, 무엇을 위해서 저항했고, 무엇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체험으로 전수받는 기억술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태일 사건 이후'라는 말은 중요합 니다. 안병무 선생은 전태일의 사건을 접하면서 비로소 민중신학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그가 '전태일 이후의 신학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는 '전태일 이후'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여전히 '전태일 이전'의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그들은 아직 교리를 말해야만 신앙을 유지할 수 있고, 역사의 학대로 고난당하는 사람과 분리된 이른바 '신령스런 예배'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전태일은 죽음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연의 사람들을 알아야만 했고,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던져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호소도 해봤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신조차도 정의를 외면하고 침묵하는 세상을 절감하면서, 자기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정을 내지르고야 말았던 사람입니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의가 죽은 세상, 그 무신적인 세상을 향해 시위하듯 자신의 생명줄을 스스로 끊지 않으면 안됐던 사람입니다. 성서 가운데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러한 무신성의 세계를 만나 절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책은 '전태일 예수론'의 성서적 전거/준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에, 그 살인자들의 성에서 타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여야 했던 한 예언자의 이야기를 펴 나가고 있습니다.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절망의 세계 속에 목숨을 던진 이의 이야기의 절정을 향해 가는 한 계기점에 위치합니다. 그 예언자가 죽기로 마음을 먹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오늘 본문처럼 말합니다. 말하건대 '내가 죽어야 하리. 그래야만 이 죽음 같은 세상에서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고.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이 말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복음서의 예수의 말이 바로 이런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또 놀랍게도 예수는 '내가 너희를 영원히 떠나지 않기 위해, 곧 성령이 너희와 언제까지나 함께 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령은 곧 사람들의 전태일 체험과 관련됩니다. 전태일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존재로서 우리 안에 예수가 계속 체험되게 하는 효과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예수는 요한복음서의 예수론을 통해 1세기말 소아시아에서 부활합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한국의 '민중예수 전태일'로서 부활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태일은 누구인가? 그는 그 자신이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고통을 함께 신음하며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들과 계속 함께 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전태일 사건의 의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태일은 끝없는 낮아짐의 선택과 궁극적으로는 '자기 살해'의 영으로 계속 살아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을 예시해준 상징으로 그는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 --------------------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도 살아가고 하나님도 살아가고. SCA!----http://www.hanbaik.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