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aRoNg (4Ur@@sOnly) 날 짜 (Date): 2000년 5월 27일 토요일 오전 12시 17분 59초 제 목(Title): 꽁지] 안락사와 기독교..에대한 글 하나! 본문은 고려신학대학 신원하님의 글 입니다.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라는 말은 고통없는 "편안한 죽음,"좋은 죽음이란 말이다. 지난달 우리 사회에서 합법화된 뇌사는 장기가 필요한 고통받는 이웃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뇌의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손상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인정하자는 것에 초점이 있다면, 안락사는 기본적으로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회복 가능성이 희박한 환자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한 채 죽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저렇게 고통받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그냥 더 고통받지 않고 차리리 죽었으면.... 아마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에 주위의 복도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한숨의 내용이고 우리들과도 그렇게 먼 이야기는 아니다. 안락사에 대한 논의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게 등장하는 사례가 미국의 캐런 퀸란의 사례이다. 카렌 퀸란양은 22세에 친구들과 어울리다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심각한 뇌 손상을 입고, 의식, 사고, 기억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호흡의 도움이 필요하여 인공호흡장치의 도움으로 숨을 쉬면서 병상에 누워있는 것이 수년간 계속되었다. 수년동안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퀸란 양의 부모는 더 이상 이런 식물인간 상태의 딸을 볼 수 없고 자기 딸이 구차하고 무의미하게 고통스런 생을 유지하기 않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다. 오랜 논란 끝에 1976년 미국 뉴저지주 대법원에서는 이를 허락하였다. 환자가 회복의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라도 의사는 과연 보조 장치를 사용하여서 이 환자의 생명을 계속 유지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결국 뉴저지주는 법적으로 그럴 의무가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 사건은 안락사의 논쟁을 본격적으로 유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안락사는 크게 능동적인 안락사와 수동적 안락사로 구분한다. 능동적 안락사 능동적 안락사는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죽음 이외에 고통을 극복할만한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 몰핀과 같은 약을 주입함으로 죽도록 하는 것이다. 근년에 들어 일어난 미국 미시간주 케보키안 박사의 안락사 사건은 이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를 주장하면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율적 의견을 존중해서 약을 투여하고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 사실 능동적 안락사에 대한 요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고 비록 엄격한 요건 하에서 제한되긴 하지만 1993년에 네덜란드가. 그리고 1997년에 미국의 오레곤 주가 이것을 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능동적 안락사를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기 자기 생명에 대한 결정(self-determination)할 권리가 있고 동시에 자기의 삶은 사생활권에 속하는 것이기에 그 권리는 법적으로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곤 주에서 허용한 법안인 "품위 있게 국을 권리에 관한 법'은 이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는 불가피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은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수동적 안락사와 치료 종식 수동적인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요한 치료 행위를 중단하거나 생명연장 의료 장치를 제거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도록 내어 버려 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치료행위 중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치료행위는 일상적으로 취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일반적 치료와 특수적 치료로 구분한다. 보편적 치료란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경제적인 부담도 심하지 않고, 환자가 큰 통증을 느끼지 않는 치료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수한 치료는 경제적 비용뿐만 아니라 환자가 상당히 통증을 느끼게 됨과 아울러 그것이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 치료를 의미한다. 폴 램지박사는 일반적 방법의 치료는 누구나 피해서는 안될 의무적인 치료라고 한다면, 특별한 수단을 동원해야하는 특수한 치료는 선택적 치료에 속하는 것이고 이것은 도덕적인 강제성이나 당위성을 지니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있는가? 일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있다. 사실 오늘 환자가 음식을 정상적으로 먹을 수 없어 튜브로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여 호흡을 돕는 것등은 특수한 치료수단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보편적 또는 일반적 치료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준은 나라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것은 의사와 환자, 환자 가족의 의견과 그리고 경제적 환경 이 모든 것이 함께 고려되어서, 종합적으로 판단이 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자비의 안락사와 기독교 신앙 환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소위 자비의 안락사는 동기가 어떻든 간에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기 힘들다. 케보키안박사의 경우와 같이 환자의 고통을 경감하고 품위 있게 죽게 하도록 하는 능동적인 안락사 행위는 는 상황윤리에 의하면 사랑이 동기가 된 자비의 행위일수 모르나 이것은 기독교 윤리적 행동과는 조화를 이루기가 힘들다. 성경은 안락사에 관한 직접적인 내용은 없으나 이에 관한 원리와 안내지침은 제공해 주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닌 생명에 관한 주권이 없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자기 자신의 생명에 관한 자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에 관한 안락사에 걸쳐 동일하게 적용되는 성경적 지침이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이 인위적으로 다른 인간의 생명을 종식시키려고 하는 것은 월권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성경은 인간은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을 통해 볼 때, 다리가 부러져 쓰러져 헉헉거리고 있는 말, 즉 궁극적으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을 동물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안락사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죽음만이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에 안락사시키는 것이 자비로운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조화되기 힘들다. 부모가 견디기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자식이나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경감하고 싶은 생각이 들 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런 고통을 평면적으로 바라보고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지만 병자 그들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어떤 교통을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 안에게 역사 하는지 모르는 일이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건강할 때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편으로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들도 사랑하는 자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함께 하면서 다른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깨달음과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을 어떤 값을 치러서라도 막아야 하는 악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무조건 피하기 위해 안락사를 행하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섭리와 그것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큰 뜻을 놓칠 수가 있다. 치료의 거부: 삶의 거부인가 선택인가? 그리스도인은 병상의 고통 속에서 씨름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그들을 보살펴야 하지만, 회복하기 힘든 병으로 싸우고 있는 환자에게 닥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고도의 특수한 치료를 하는 것이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길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통받고 있는 병자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는 진정한 보살핌(care)이다. 그러나 진정한 돌봄과 보살핌은 단순히 죽음을 지연시키고 생명을 붙잡는 것하고는 구분되어야 한다. 만약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특수한 치료행위를 하면 단기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할 때,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그 환자를 진정으로 돌보는 것이냐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윤리학자 메일랜더는 특수한 치료가 단순히 죽음을 지연시키고 생명을 연장하는 효과는 있으나 회복에 큰 유익을 주지 못하거나, 또는 어느 기간 동안의 생존을 위해서 유익하다고 하더라도 환자를 크게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들만큼 지치게 하는 부담스런 치료라고 한다면, 그 치료를 거부하거나 중단해도 결코 생명존중 사상을 거슬리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한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과잉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치료거부와 중단은 생을 존중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즉 짧게 살지만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그러한 삶을 선택하는 태도다. 그러기에 치료를 종식함으로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결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환자가 그런 치료와 생명연장도구를 더 이상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럴 경우에는 의사와 가족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소위 수동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회복하기 힘든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생명을 오래 붙잡고 놓거나 연장하려고 하는 것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결코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배려하고 위하는 길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비록 죄의 삯으로 사망이 들어 왔고 사망은 우리의 원수이고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더 이상 사망의 쏘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제거되어졌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형벌과 심판이 아니고 영원한 영광으로 이르는 길이 되었다. 그래서 만약 병자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내세의 삶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가지고 편안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고자 치료를 거부한다면, 가족은 생명연장을 위하여 더 이상 특수한 치료를 강요하거나 또 그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경우 소위 말해서 수동적인 안락사는 허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카렌 퀸란의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의사들은 환자들이 신앙으로 삶을 정리하고 마음가짐을 갖출수 있도록 환자들에게 그들의 상태에 관한 사실을 바로 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성도들이 무리한 치료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임종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울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로다'(롬14:7) 라는 고백을 믿고 동일하게 고백하는 성도들은 자기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게 되면 더욱 인생의 마지막을 잘 정리하고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안락사에 대한 대안과 교회의 사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회복하기 힘든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의식기능이 사라지기 전에, 사망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끊지 못하고(롬8:39) 죽음은 어두움과 끝이 아닌, 안식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심어주며 그에 관한 소망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죽어 가는 사람들은 집착과 고통에서 자유로와 지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끝까지 돌봐주며 편안한 가운데서 종말을 맞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소위 안락사운동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안락사를 요청하는 원인에는 극심한 고통뿐만 아니라 죽음을 직면하면서 갖는 불안과 공포도 크게 작용한다. 사실 이런 불안을 해소하고 경감시키기 위해 약물을 주입하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위안과 해결을 제시해 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임종을 앞두고 심신이 약해져 있는 환자들에게 다정스럽게 대하고 그들의 말벗이 되고 진정으로 보살펴주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죽음을 마지 할 수 있도록 신앙을 심어 주고 확신을 갖게 하는 이 호스피스 사역은 앞으로 노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추세를 볼 때, 교회가 중시해야 할 사역이 아닐 수 없다. 교회와 신자는 이 운동을 일종의 사회봉사 차원과 동시에 안락사를 대체하는 하나의 기독교적 대안으로 사회에 제시하고 또 전개해나가는 일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