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7년06월23일(월) 09시43분34초 KDT 제 목(Title): 중도 수행 생사를 해탈할려면 생사가 있다하면 불가능한 것이니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서 도망간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사를 해탈할려면 생사가 있어야 해탈하는 맛이 있으니 생사가 없는데서 해탈을 하면 바위나 나무와 같은 무정물이 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가아를 소멸시키고 진아를 드러내는 것이 수행입니다. 가아는 가짜라는 말입니다. 없는데 있다고 하면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소멸할 것 조차도 없는 것이 가아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비유를 통해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 눈앞에 컴퓨터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이 컴퓨터는 물체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물체가 컴퓨터냐고 물으면 글쎄요? 정말 이 물체를 가지고 컴퓨터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눈 앞에 컴퓨터가 사라지면 컴퓨터가 없어진 것일까요? 컴퓨터가 눈 앞에 있기전에도 컴퓨터가 있어야 하는 모든 이치는 원래부터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컴퓨터가 눈 앞에서 사라져도 컴퓨터라는 모습을 보일 모든 이치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진짜 컴퓨터라고 할 만한 것일까요? 눈 앞에 물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컴퓨터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컴퓨터라는 물체가 있기 전에도 있고 컴퓨터라는 물체가 없어지더래도 있는 이치를 컴퓨터라고 해야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나라는 것에 대입을 하면 똑같습니다. 나는 육체와 정신의 결합입니다. 육체와 정신이 곧 물질화된 컴퓨터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그 물질화된 컴퓨터를 진짜 컴퓨터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진짜라면 항상 진짜이어야지 진짜일 수 있는데 컴퓨터는 어느날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고정화시키면 그것은 가아입니다. 그러나 컴퓨터가 존재할 수 있는 이치가 원래 있는 것 처럼 우리의 가아를 존재하게 하는 이치도 원래있는데 그것이 진아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참다운 이치(진리)라고 합니다. 진아라는 것은 진리의 다른말입니다. 다시 컴퓨터 비유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물질이라고 하면 그것이 가짜이지만 정말 가짜일까요? 또한 그렇지가 않은 것이 진리가 컴퓨터속에 완전하게 작동되어서 물질로서의 컴퓨터가 보이므로 가짜라고 하지만 가짜도 아닙니다. 이치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컴퓨터 그대로 이치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하는 가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아인 것 같지만 진리가 작동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가아도 아닌 것입니다. 그대로 진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이야기한 불교의 중도법입니다. 가아도 아니고 진아도 아니면서 가아이기도 하고 진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수행은 어디에서 부터 해야할까요? 있지 않지만 또한 틀림없는 가아상태(진아의 이치를 모르니까요)에서 이 가아를 가지고서 이리저리 노력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컴퓨터의 이치를 모르면 컴퓨터가 고장나서 애먹을 때에 불필요하게 컴퓨터를 학대하게 되는 것처럼 가아상태라 할 수 있는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애를 써보았자 다람쥐 쳇바퀴를 돌게 되는 것입니다. 끝내 윤회를 반복할 뿐입니다. 이치부터 배워야 하고,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이치를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배움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수행해서 중도를 깨친다는 것이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이냐하면 바로 내 삶, 그대로 진리의 완성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치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어디 딴 세상에 있는 정신적 유토피아를 꿈속에서 그려내는 수행이 아닙니다. 만일 버려야 할 가아가 따로 있고 찾아야할 진아가 따로 있다면 가아를 버리고 진아를 찾는데 시간적인 순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아를 버리는 수행, 진아를 찾는 수행이 시간상 순서가 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만 비유로 말씀드린 것처럼 가아와 진아는 무슨 수를 써도 분리가 되지를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하고 관계없고 공간하고 관계없이 즉시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적인 과정이 제시되면 비유에 따라서 발견불가능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가아를 버리고 진아를 찾아야 하는데, 어떤 꼴이 되고 마냐하면 가아와 진아가 구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끝내 진아를 버리고 있으면서 진아를 찾는 꼴이 되고 맙니다. 다시 컴퓨터를 비유하면 컴퓨터 이상 생겼는데 이상 생긴 컴퓨터 내버려두고 컴퓨터 이론만 공부하는데 이론을 제대로 공부했는지 않했는지 어디에서 확인을 해야 할까요? 이상이 생긴 컴퓨터에서 확인을 해야합니다. 즉 가아는 우리가 참성품이 피어나고 있는 이치확인의 자리이며 또한 이치를 적용시킬 수 있는 완전한 실험현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것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면서 이것이 진짜 경지다 아니다라고 하면서 황당한 것을 수행의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서 다른 곳에 참다운 나의 자리가 있다고 하는 분들을 옛부터 소등에 올라앉아서 내 소가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 거리는 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이치를 듣고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일 수 밖에 없는데 고맙게도 부처님께서 그 이치를 낱낱이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쉽게 급행열차 타고서 진리탐구를 할 수 있고 참다운 나의 모습을 찾아서 그곳으로 부터 나오는 인생을 전개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에 의존해보면, "아이쿠 뭐가 이리 쉽고 재미있나!!!" 얼굴에 긴장과 굳은 결심을 보일 필요도 없이 "하하~~ 호호~~" 하면서 신나고 재미있게 곧 바로 급행열차를 타고 즐거운 기차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가아를 진아와 합일시키는 고민이나 고생(그리고 결과적으로 되지도 않는)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보통 수행자들중에 얼굴이 긴장되어 있고 확고한 결심으로 굳어져 있는 분들은 진리탐구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고 보시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결심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뭔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불확실속에서 뛰어든 공포심을 억누르고 그 동안 투여한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로 얼굴이 긴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 보아도, 음지의 얼굴이라는 것을 압니다. 세상에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는 것에는 천지의 차이가 나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갑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부산을 가면 비행기를 타고 가거나 경부선 기차를 타고 가면 아무 고민없이 잠을 자도 부산에 도달을 합니다. 자! 그런데 어떤 분이 기차를 타면 된다는 것만을 어디에서 듣고서 호남선 기차를 탔습니다. 그래서 가니까 여러가지 사람들도 만나고 대전도 지나갑니다. 달리고 있으니 신도 나기도 하고 좋아서 기차안에서도 열심히 달립니다. 그런데 글쎄 광주라는 곳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기차를 바꾸어 타고 대전으로 옵니다. 그리고 대전에서 기차가 있길래 충북선을 타고 가니까 제천이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아고!! 아직 부산에 오지 않았나 보다 하고 또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와서 기차가 서있길래 탔는데 글쎄 그것이 서울가는 기차입니다. "아이고~~ 부산가는길이 무진장 힘드네..." 이렇게 빙글 빙글 거리면서 인천에도 갔다고 청량리에서 원주로도 갔다가 다시 서울역에서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탔는데 경부선 새마을 호입니다. "이젠 등골에서 땀도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입술은 바짝바짝 마르고 몸의 진기도 빠지는데....... " 부산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거하고 경부선 열차를 타면 부산간다는 것을 알고 경부선 열차타는 것과의 차이가 없다고 하면 어린아이도 의아해할 일입니다. 자~~ 또 문제가 나오는데 부산에 도달한 기쁨속에 빠져서 무엇을 하냐하면 마치 부산에 오는 길이 이길인가 보다하고 부산에 오는데는 광주, 대전, 제천, 인천, 원주, 청량리등을 분명히 거쳐왔는데 정신없이 무진장 열심히 했기 때문에 도시는 알겠는데 어느선 열차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첫번째는 광주 두번째는 대전, 세번째는 제천..... 등등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수행의 경지가 아니라 전부 잘 못된 길을 간 결과일 뿐인데도 의기양양합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이런 분이셨다면 경전은 몇줄 필요가 없습니다. 가야할 기차역과 열심히 가라.... 부처님이 위대하시고 참으로 과.현.미의 스승이라는 것은 다시 돌아보고 다시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 복귀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서울역에서 경부선 기차만 타면 부산에 간다는 간단한 이치를 알아내셨고 알아들을 때까지 쉬지않고 이야기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이 "어이쿠 이건 경부선 기차를 타라는 이야기"구나 하고 알아듣고서는 얼른 올라타면 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여행하는 것입니다. "역시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구나.!!!" 부처님께서는 열차까지 인도하고 기차표에다가 간식비까지 주고서 열차에 올라만 타세요. 그리고 저와함께 즐겁게 콧노래부르면서 항상 기쁨속에 확신가지고 "라라루루~~~~~" 이렇게 함께 여행을 하자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마련해주신 열차와 기차표와 간식비가 있다는 것을 가지고 신난다고 하하 호호 하면서 실제로 기차를 타지는 않으면 영원히 도달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과 불교 수행이고 염불의 세계입니다. 부산에 왔는지도 모르고 부산에 오거나 부산에 왔는지 알고 부산에 오는 두 가지 결과만 있는 것이 염불이고 부처님세계입니다. 수행의 초지름길인 염불수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생의 우선순위 0 순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관점은 부처님법 앞에서 무조건 허문다. 2. 기차에 올라탄다. 3. 동승한 정말 좋은 벗들과 함께 간식을 적당히 먹으면서 "부처님 끝내준다." 노래부르면서 기분좋게 여행한다. 4. 중간역에서 내리지 않는다. 결과 도착지에서 그리운 고향친구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기다립니다. "여기는 극락. 고향에 돌아오신 인생의 용사를 환영합니다." 그리고 아미타불 부처님과 극락세계의 고향벗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자!!!!!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단호한 결단들 내리시고 기차표 받고 열차에 탑승하시고 기쁨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극락왕생의 여행을 떠나도록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