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Oee ( 오 이) 날 짜 (Date): 1997년04월24일(목) 16시33분15초 KST 제 목(Title):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하라. ▶이 글은 오쇼 라즈니쉬의 [탄트라 비전 Ⅲ] 의 내용중에서, 67번째 방편 `여기에 변화의 구(球)가 있어 변화하고 변화한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의 강의 부분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그대가 알 수 있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말의 요지를 기억하라. 그대가 알 수 없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 아는 자,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변한다. 그리고 아는 자는 항상 앎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아는 행 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주체인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 고 무엇을 알든지 그것은 그 뒤에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동요하지 마라. 그대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내 가 말할 때 나는 그것이 대상으로서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그대 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이라는 관계점에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볼 때 그대는 알려지는 대상이 되고 나는 아는 자가 된다. 지식은 하나의 다리로서 거기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어디서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 다리를 만들 수 있겠는가? 거기 에는 오직 나 자신만이 홀로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홀로인 것이다. 둑은 한쪽밖에 없는데 어떻게 다리를 연결한다 말인가? 어떻게 아는 자 자체를 안단 말인가? 그래서 `자기 인식(self-knowledge)'은 부정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직접 알 수 없다. 그대는 단지 그대가 아 닌 것만을 계속 제외시켜 날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지식의 대상이 거기에 남아 있지 않을 때, 다시 말해 그대가 어떤것도 알 수 없을 때, 단지 텅 빈 허공만이 남아 있을 때-이것이 바로 명상이며 명상은 단지 지식의 모든 대상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그때 의식이 존재하는 순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앎 만이 있을 분 알 수 있는 대상은 없다. 앎이라는 단순하고 순수한 에 너지만 흐를 뿐 대상은 없다. 아무것도 알 수 있는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어 떤 특별한 감각으로 안다고 경전은 말한다. 그러나 그 지식은 다른 모 든 종류의 지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쓴다면 오 해가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아는 지식이란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있었다. 그 단어는 사실 매우 역설적인 말이 다. 지식은 항상 그 대상으로서의 타자(他者)가 있다. 다라서 자기 를 아는 지식이란 가능하지 않다. 자기는 결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없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대는 그것을 `자기 인식(self-knowledge)'라고 부를 수도 잇다. 그 러나 그 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래서 그대가 아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 도처에, 이 벽조차 끊임 없이 변하고 있다. 이제 물리학은 이 말을 지지하고 있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벽조차 매순간 변하고 있다. 거대한 흐름이 거기에 계 속된다. 모든 원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모든 전자들이 달리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그대 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벽은 영원히 고정된 것처럼 보인 다. 아침에도 그대로이고 오후에도 그대로이며 저녁에도 그대로이다. 어제도 그대로이고 내일도 그대로일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마치 동 일한 것처럼, 변치 않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 선풍기가 있다. 그 날개가 아주 빨리 돌아가면 그저 하나의 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날개 사이의 공간은 그 원 속에 가려져 보 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자 알갱이들도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 있 다. 그대 눈에는 날개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다. 선풍기의 날개는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 고 그대의 손을 그 틈 사이로 넣을 수 없다. 손이 그 날개만큼 빨리 돌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들어가기 전에 다른 날개가 이미 그 자리에 와 있기 때문에 그대는 언제나 날개만을 만질 뿐 틈새로 들어 갈 수 없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지면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 인다. 그래서 사룸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것은 너무나 빨리 움직인다. 단지 그 움직임의 겉모양을 보고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편은 모든 것이 변화라고 말한다. `여기에 변화의 구(球)가 있어...' 붓다의 모든 철학이 이 경구 위에 서 있다. 붓다는 모든 것 이 흐름이며, 변하고 있고,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 고 사람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붓다는 바로 이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그는 말한다. "변화, 변화, 변화, 이것을 계속 기억하라." 왜인가? 그대가 변화의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거기에 분리가 일어난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그대는 어떻게 집착할 수 있겠는 가? 그대가 어떤 얼굴을 본다.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대가 이 얼 굴을 볼 때 아름다움이 계속될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이 점을 깊 이 이해라라. 이 아름다움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안다면, 단지 이 순간만 아름다우며 다음 순간 추해질지도 모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자 각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거기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 하다. 육체를 보라. 그것은 살아 있다. 다음 순간 그것은 죽을 것이 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그대가 변화를 느낀다면 말이다. /중략............................................................ 이 방편은 아름답다. 이 방편은 말한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붓다는 이 후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반부는 기본 적으로 탄트라적 전통이다. 붓다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만 말했다. 그것을 느낀 그때 그대는 집착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집착하 지 않을 때 점점 변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것이다. 그대는 그 대 자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변화가 없는 내면의 중심으로 말이 다. 그러므로 변화를 통해 변화를 계속 소멸시켜 나가라. 그러면 그 대는 자신을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중심으로 떨어드릴 것이다. 바퀴 의 중심으로 말이다. 붓다는 자신의 종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퀴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바퀴는 계속 움직이지만 그 중심은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삼사라, 이 윤회의 세계는 바퀴처럼 움직인다. 그대 개체 의 인격은 바퀴처럼 돈다. 그리고 그대 내면의 본질은 바퀴의 중심처 럼 부동한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붓다는 `삶은 변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이 방편의 전반부에 대해서 찬성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방편의 후반부는 전형적인 탄트라 의 문구다.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라고 말하고 있다. 탄 트라는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그 곳으로 뛰어 들라고 말한다. 집착하지는 마라. 그러나 뛰어들어라. 왜 두려워하 는가? 그 속에 뛰어들었다가 살아 나오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허 용하라. 변화 자체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 두려워하지 마라. 달아나지 마라. 어디로 달아나겠는가?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변 화는 어디에든 있다. 탄트라는 말한다. 모든 것의 변화는 도처에 있 다고. 그대가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변화를 피해서 어디로 갈 수 있 는가? 그대가 가는 곳마다 거기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모든 도피행위 는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므로 도피하려 들지 마라.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집착하지 말고 변화 속에 살아라. 변화가 되라. 변화에 대해서 어떤 투쟁도 하지 마라. 그것과 함께 움직여라. 강물 은 흘러가고 있다. 그대도 강물과 함께 흘러가라. 헤엄조차 치지 마 라. 그저 강물이 그대를 실어 나르도록 하라. 흐름과 싸우지 마라. 그대의 에너지를 흐름과 투쟁하는 데 낭비하지 마라. 그저 푹 쉬어 라. 그저 내버려둬라. /중략............................................................ 어떤 변화도 일으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순간 그대는 전적으로 이 완할 수 있다. 어떤 작은 노력이라도 들어 있다면 그대는 이완할 수 없다. 그때는 긴장이 일어난다. 미래에 어떤 가치 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화해 나갈 것이다. 세상은 이상적인 공 산주의가 되는지 지상낙원이 될지도 모른다. 혹은 그대가 미래 어느 순간에 신의 나라, 혹은 모크샤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낙원 한모퉁이 어디에선가 천사들이 그대를 영접하려고 기다기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선가'는 미래가 문제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대의 긴장은 계속될 것이다. 탄트라는 그것을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세상은 벌써 변하고 있고 그대 역시 변하고 있다. 변화는 존재계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변화는 그대가 없어도 일어나고 있다. 그대는 필 요치 않다. 그대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그저 떠다녀라. 갑자기 변 화의 한가운데서 결코 변화하지 않는 그대 내면의 중심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동일하게 남아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충분히 이완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변화의 배경은 그대에게 대조의 느낌을 준다. 그것을 통해 그대 는 변함없음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이 세상이나 자신을 변화 시키려는 어떤 노력 속에 있다면 그대는 그대 속에 미세하게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발견할 수 없다. 그대는 변화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 그대는 그 상황이 어떤지를 정확히 볼 수 없다. 변화는 온통 주위에 널려 있다. 변화는 삶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대조가 일어난다. 그대는 이완된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속에는 어떤 미래도 없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지금 여기 에 존재한다. 이순간이 전부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그때 문득 그대는 결코 변하지 않는 내면속의 한 점을 인식한다. 이것이 바로 ` 변화를 통해 변화를 소멸시켜라'라는 의미다. 싸우지 마라. 죽음을 통해서 죽음 없음이 되라. 죽음을 통해서 죽 음이 죽게 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탄트라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 렵다. 우리의 마음은 뭔가를 하고 싶어하지만, 탄트라는 될 수 있으면 뭔가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편히 쉬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깊이 감춰진 비밀들 중의 하나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 하나의 방편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어떤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변화를 통해 변화 가 소멸될 수 있다는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죽음이 소멸될수 있으며, 섹스를 통해 섹스가 소멸될 수 있다. 분노를 통해 분노가 타 없어질 것이다. 이제 그대는 독을 통해 독이 말라 없어질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