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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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10월04일(금) 18시42분51초 KDT
제 목(Title): 도에서 점점 멀어지는 도



도를 구하는 이유...
진리를 찾는 이유...
나를 찾는 이유...

불교를 알고 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각자 모두들 나름대로
열심히 정진들을 하고 있고, 그리고 그 정진의 결과에 대한
확인한 결과와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는 미확인된 결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서점이나 아니면 지하철 역에서 많이 들었던 소리입니다.

어느날 우연히 알게된 분과 처음 만나서 대화를 하였습니다.
엑스포 아파트 근처에 있는 소설책이 잡다하게 많은 찻집에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옆 자리에서 어느 분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꾸 귀에 들렸나 봅니다.
급기야는 우리 자리로 와서는

"수행하시는 분들 입니까?"
*************************
도를 묻고 도를 찾는다는 행위를 할때에
하다보면 "왜! 도를 묻는지", "왜! 수행을 하는지"를
그만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국을 끓여 먹기위해서 "도를 닦는지"
아니면 친목할 사람이 필요해서 "수행단체"를 찾는 것인지
불명확한 동기를 가지고 어쨌든지 "도"와 "수행"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를 하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동기와 목적과 이유가 단지 "도"인 경우에
이 "도"는 "도" 그대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왜곡과 투쟁과 고통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도" 자체가 목적성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일이란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능합니다.
"도"가 목적성이 된다는 것은 도를 체계를 세워서 경지화 시키고
낮은 도, 높은 도를 가름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특히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허해서 그런지
도를 목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가르침과 주장에 쉽게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신통력이 생긴다", "몸이 하늘을 나른다", "빨리 걷는다",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천리안이 생긴다.", "마음이 순수해진다."
"전생을 알 수 있다."

몸이 하늘을 날을 수 있어도 비행기 보다 더 빠르지고 더 놓이 날지도 못하고
빨리 걷는 다고 해도 자동차가 더 빠르지 못하고
남의 마음을 엿보기 보다는 터 놓고 대화하는 방법이 더 빠르고
천리안이 없어도 방송.통신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천리안보다 더 많고
마음이 순수해 진다고 하는데 마음은 처음부터 청정할 뿐이고
전생을 아는 것 보다는 현재에 충실함이 미래가 더 약속되고....

이렇게 뻔한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은 별 가치도 없는 헛된 것에다가
정신을 스스로 빼앗깁니다.
이런 것 들이 모두 "도(정말 도인지는 둘째 치고)"를 목적으로
하는 것에 의하여 발생하는 믿기 어려운 어리섞음입니다.

하늘을 나는 공력을 얻어도 총알 한방이면 끝이고
도에 백번째 단계에 와있어도 백한번째 단계로 가야하고...
이런 것은 아주 쬐끔 정신차려도 다 알 수 있는데도
"도"를 목적으로 하는 "별난 도의 세계"에서는 매일 다반사로 발생하는
어리섞은 모습들입니다.

이것은 꼭 다른 종교나 다른 수행의 모습이 아닙니다. 불교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지금도 무진장 발생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입니다.

왜? 도를 한다면서 더욱 어리섞음을 쫓아 다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동기의 잘 못 됨 때문입니다. 
무엇때문에 왜 도를 추구하고 배우려고 하는지 그 원인이
피상적이고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불법을 배운다." 이런 동기 마저도
이미 이데올로기화된 동기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제도란 것 조차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중생제도라는 것이 나와야하기 때문입니다.

도를 배우고 닦아 나가는 가장 지름길은
"도" 자체를 배우고 닦는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울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진리"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실제적인 원인과 동기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고
왜? 도를 배우려고 했는지에 대한 동기를 잊지 않을 때에
지름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도를 배우는 어떤 이유가 곧 도의 목적이고
도의 완성이란 어떤 이유를 해결한 것이기 때문이지
도라는 특별한 목적성과 도 라는 도달할 실체는 존재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불도의 동기는 단지 "괴로움" 이것 하나입니다.
불도의 완성은 "괴로움"에서의 자유로운 해탈입니다.
오직하면 "괴로움"을 성스러운 네가지 진리로
설정하였을까요?

이 괴로움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도를 이야기하고 본질을 이야기 함은 마치
강을 건너갈 사람이 배는 타지 않고
배는 이렇게 생겼다.
배는 이런 원리로 물위에 떠서 간다.
뗏목이 좋다. 범선이 좋다. 혹은 증기선이 좋다. 핵 잠수함이 좋다.
이 배의 선장님이 저 배의 선장님 보다 훨씬 유능하다.

흐르는 강물위에서 배를 타고 강건너로 건너야 할 진짜 할 일은
끝내 스스로 하지 않으면서 "도"는 참으로 멀다고
자신에게도 이야기하고 남에게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래도 이만큼은
도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도"는 왜 구하려고 하십니까? 냉정하게 물어야 겠습니다.

"괴로움"과 진정으로 맞대결 하는 곳에서 "도"의 모습과 쓰임은
가치를 무한히 발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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