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6월04일(화) 11시39분29초 KDT 제 목(Title): [해탈에 대한 이야기 추가] 노파가 스님을 내쫓은 이유는 저도 모르지만 제가 노파의 입장이라도 저는 스님을 내쫓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번뇌로 삽니다. 번뇌로 사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나그네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언제 왔는지 또 언제 가는지도 모르지만 왔다 갔다 하는 육신과 정신작용이 마치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바로 이 순간도 어떤 놈은 떠나고 어떤 놈이 오고 그렇게 끝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망각하고 사는 것을 번뇌로 산다고 말합니다. 즉 언제 왔는지 언제 가는지 통보도 없고 기별도 없이 가버리는 그것을 가지말라고 붙들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삶입니다. 이를 나그네가 중심이 된 삶이라고 하고 불교적인 말로 표현하면 "객진번뇌"입니다. 나그네가 중심이 되는 삶을 보면 어떤 나그네에게는 너는 참으로 마음에 든다 그러니 계속 머물러다오 하는데 그 나그네는 간다는 말도 없이 가고 어떤 나그네에게는 너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제발 오지 말아다오 하는데 그 나그네는 통보도 없이 옵니다. 이럴 때에 좋은 나그네를 반겨서 있어달라고 하는 것도 나그네가 중심이 되는 삶이고 싫은 나그네를 오지 말라고 하고 온 후에 제발 떠나다오 하고 하는 것도 역시 나그네가 중심이 된 "객진번뇌"의 삶입니다. 해탈을 한다는 것은 길손 중심의 삶에서 주인 중심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좋은 나그네가 왔으면 기뻐하지만 그가 떠났어도 주인은 그대로이고 나쁜 나그네가 왔을때 슬프고 화가나지만 그가 있어도 주인은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생명을 제약하는 모든 "객진번뇌"인 손님들에게 구속을 당하지 않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해탈을 한다고 해서 나그네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그네는 역시 통보도 없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에게 끄달려 다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비유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이라함은 우리들의 본래적인 참다운 모습인 부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나그네라함은 부처님의 성품이 현상적으로 모습을 보이고 정신적인 작용을 말들어 내어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현상적인 외형만을 집착하고 있을 때를 나그네의 삶이라고 합니다. 집착한다는 말도 오해들을 많이 하는 말이기에 부연해 드리면 집착한다는 말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것 밖에 거기에는 의미가 없다는 단정적인 시각을 집착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면을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좀더 우리 삶을 비추어서 말해보면 우리들은 어떤 문제에 봉착할 때에 그리고 결단의 선택을 내려야 할 때에 이것이 옳을까 저것이 옳을까로 고민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무엇을 고민하냐하면 내가 이것을 선택했을 때에 나에게 돌아올 피해를 고민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즉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결단 이후에 다가올 결과에 대한 고민을 주로 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인생의 시간을 오지 않은 미래를 고민하거나 이미 지나간 과거를 가지고 후회하는데 삶의 탕진하고 맙니다. 그런데 결국 나중에 보면 이것을 선택하건 저것을 선택하건 결과는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장자"는 "조삼모사"라는 것으로 풍자합니다. 이와같은 삶의 모습이 "객진번뇌"에 휘말린 삶입니다. 해탈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의 그릇의 무한성을 확인하였기에 어떤 미래도 어떤 과거도 심지어는 현재마저도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즐거우면 즐겁고 슬프면 슬퍼하지만 거기에 과거.현재.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노파가 스님을 쫓아낸 심정을 추측해 보겠습니다. 스님은 십년간 무엇을 한 것이냐 하면 손님이 오는 것을 두려워해서 오지말라 오지말라는 것을 억지로 한 것입니다. 즉 십년간 나그네 중심에서 한발작도 나아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손님을 두려워해서 오지말라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나 좋은 손님이 오면 반가워서 가지 말라고 하고 나쁜 손님이 오면 싫어서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나그네의 삶이라는 면에서 아무것도 다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 노파야 말로 참으로 인생의 이치를 꽤뚫은 문수보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해탈이라는 명제를 통하여 우리들의 현재 삶의 모습을 되돌아 보아야겠습니다. 사실 이 해탈을 나무토막이나 돌조각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인하여 벌어지고 있는 사회의 제반 현상은 끝내 돌고도는 고통의 수레외에는 남겨주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탈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해탈했다는 것은 단지 주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지 거기에 손님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해탈을 그에게 강요합니다. 무생물의 삶을 강요합니다. 해탈의 모습을 형상적인 고정된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강요합니다. 그와같은 그릇된 해탈관 때문에 발생되는 병리현상은 불교도인 저의 입장에서도 참으로 거론하기 조차 부끄러운 일들 투성입니다. 사실 해탈한 그 사람의 해탈은 우리들이 강요하는 해탈의 모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탈한 사람은 꼭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무수한 억겁의 습관적인 관습은 "정형화된 성자상"을 만들었기에 해탈하지 않은 사람들이 성자의 모습을 취하여 거드름을 피고 그런 사람앞에서 저당잡힌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옛부터 수많은 선지식과 선각자들이 그와같은 병리현상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고 주의를 주었건만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가 자신의 스승을 성자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데 몰두하여 심지어는 자신의 스승을 "좌탈입망 : 앉아서 죽는 것"의 모습으로 치장하기 위하여 힘이사라지는 노구를 억지로 앉혀놓고서 손으로 목을 쳐서 꺽어버리는 그와같은 행위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 해탈에 대한 잘못된 관점들입니다. 성철 스님이 가신 후에 사리탑을 재일교포의 새로운 디자인으로 현재적인 조형물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나왔고 그리고 그 제자분이 하신 이야기가 신문에 나왔습니다. "성철 스님은 살아 생전 철저하게 검소하게 사셨는데 사리탑을 호화롭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계실지 걱정입니다." 이 말 자체가 너무나도 큰 모순 덩어리입니다. 살아 생전 철저하게 검소한 그 바탕의 정신이 사리입니다. 사리를 모실 생각이 있으면 검소한 삶의 바탕을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부처님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는데 진신 사리는 모습이 없습니다. 모습이 없는 사리를 알고서 현상의 사리를 볼 때는 주인으로 산다고 하고 모르고 현상의 사리만을 볼 때에는 우리는 현상인 나그네에게 목숨을 의탁하는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는 없는 나그네가 주인된 삶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여래를 능히 뵈옵지 못하리라." [금강경] 해탈... 절대로 고정된 형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