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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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5월29일(수) 13시53분53초 KDT
제 목(Title): [이재원님] 오랜 의문, 윤회, 우주등등..



새로 이 게시판을 찾아주신 분께 감사를 드려야 겠습니다.
이재원님 전공이 우주물리인가 보군요.
갖고 계신 의문이 쉽게 풀린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겠지만
의문이 몽땅 풀려버리면 또한 세상살 맛이 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1. 나로부터 생각하자.

우선 우리가 "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 부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에 무엇을 두고서 "너"와 구분한 "나"라고
하고 있는 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명백한 구분 기준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육신입니다. 몸이 서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나"와 "너"라는 구분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 육신말고도 또 구분되는 것이
있는데 사고방식입니다. 서로간의 의견의 충돌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은 사고방식의 틀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육신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나"와 "너"라고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이론이나 실험을 통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재원님께서 제가 지금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 이야기가 전개가 안되겠지만
이 평범한 사실은 이재원님도 인정하리라고 생각합니다.

2. 그럼 나에 대하여 모두 안 것일까?

육체와 사고로 분명하게 "나"와 "너"가 구분이 된다는 평범함을
알고 있지만 과연 그것으로 "나"와 "너"에 대하여 모두 해결이
된 것일까? 그렇지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이 육체와 정신에
의하여 구분은 되고 있지만 구분되는 육체와 정신은 어떤 시점의
육체와 정신인지가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습니다. 1분전에
"너"와 구분된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분명하게 변화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구분하여 다투었던 1분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이것 저것을 따져보아도 다른 나인데도
여전히 지금도 너와 나가 구분이 됩니다. 그렇다고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는 육체와 나의 사고들은 하늘에서 우연히 뚝 떨어지거나
불확실한 애매모호성에 의하여 랜덤하게 툭툭 생겨나서
1분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완전히 다른 나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이론이나 실험을 통하지 않아도 석연치 않다는 점에 대하여 이재원님도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도데체 무엇이 있어서 시시각각 다른 나이면서
그 가운데에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것일까? 그와같은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모르지만 붙이는 이름들이
"영혼" 혹은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즉 무엇인가가 있어서 변화하는 육신과 정신을 소유하는 그와같은
것이 없다면 "나"라는 말하는 어떤 동일성이 확보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란 바로 육신과 정신의 주인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변화무상한 육신과 정신만을 가지고 "나"라고 주장하게 되면
"너"에게 "나"라고 말하는 순간 순간이 실체성이 확보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순간 순간이라 모두 그만 허무한 순간 순간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윤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속에서 지칭하는 "나"라는 것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하고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한 사실로 변화하고 있는 "나"를 지칭하면서 그 "나"가 변화하지
않는 "나"인양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변화하는줄 알면서도
변화하지 않는 것 처럼
인식하는 근본적인 의식을 "자아의식"이라고 합니다. 요새는 ego라는
말들을 즐겨 사용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아" 즉 자짜의 자아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가짜의 나말고 다른 것을 가지고 우리는
"나"와 "너"를 구분한 적이 없습니다. 혹시 모르죠 이재원님은 "가아"말고
다른 것을 가지고 "너"와 구분한 적이 있었는 지도 제가 이재원님이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속에서의 "나"가 현상속에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이 순간속에서의 사실입니다. 이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지만요. 그렇다면 지금 변화하고 있다는 이 현재의 사실에
충실해 본다면 우리는 과거에도 변화했었고 미래에도 현상적 나는
끝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설정할 수가 있습니다. 변화하는 나외에
어떤 것도 지금은 모르고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요.

여기서 변화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랜덤하게 우연히 숙명적으로
이전과 무관하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와같은 것을
불교에서는 "인과"라고 합니다. 즉 변화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과로 인하여 우리는 변화합니다. 이 인과가 곧 윤회의 근본입니다.
과거의 삶의 인으로 인하여 현재의 과가 있다면 현재라는 인이
미래를 만든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윤회라는 생명현상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전생을 모르는데 어떻게 인과율이 윤회에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럴 때 역시 우리는 현실에서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다섯살.. 열살 때의 나를 아는가?

다섯살 열살 때의 나를 바탕으로 지금의 나가 존재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지만 다섯살.. 열살 때의 나에 대하여
무엇을 가지고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다섯살 때의
나는 다섯살 때의 나가 아니라 다섯살 때의 가물가물한 몇가지
기억뿐입니다. 금생의 일조차 이렇게 과거의 나를 지칭하기 어려운데도
다섯살 때의 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나라는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윤회가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현실적인 사실에 근거한
수학적인 귀납법에 의하여
생각해 보더라도 윤회가 없다기 보다는 있는 쪽으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4. 시간과 공간의 허구 생각하기

우리가 지칭하고 있는 "너"와 상대하는 자아의식속에서의 가짜의 나인
육체와 정신을 변화시키고 소유하고 있는 동질성이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불교에서는 "화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아의 변화주체로서의 "가아"의 주인 그러니까
일반적인 영혼개념으로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을 "진아"
즉 진짜 나라고 합니다.

그럼 육신과 정신의 "가아"를 소유하고 변화시키는 주체는
무엇일까?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것도 기왕 시작한 것 수학적인 귀납법에 의하여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탄생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육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즉 어머니 뱃속을 거쳐서
나오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어머니와 아버지 입니다. 이것 부정할 수 없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기 위해서 그 위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냐면 모두 네분의 조부모가 계셔야 합니다.
한 30번만 올라가도 도데체 지금의 나의 조상은 어떤 분인가
깜깜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어찌 된 것이
줄어들어야 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사고에
역행적으로 조상의 수는 늘어만 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유추를 통해서 볼 때에
가상적인 창조라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이겠냐는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의문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시초가 어디부터냐 이렇게 묻기 시작하면
사실적 귀납적인 사고와는 도데체 맞아 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지금 보고 아는 이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른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확인한 이 사실을 끌어낼 수 없는 가상적인 시초라는 것에서
현재의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 바른 출발일까요?
태초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간의 시작점에서 두 남녀가 만들어져서
지금의 우리까지 왔다는 이 가정의 출발과 지금의 나를 위해서 바로 위로
두분 그 위로 네분 다시 그 위로 여덟분... 태초쪽으로 가면 갈 수록
많을 수 밖에 없는 무수한 생명... 어느 쪽에서 출발하는 것이
타당할 까요?

육신의 탄생이 그러하다면 현재 육신의 유지는 또한 어떠한가요?
그리고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다시 시간이라는 것과 공간이라는 것에 대하여 좀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관념은 어디에서 느낄까요?
낙엽이 떨어지는 그 현상을 볼때에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낙엽이 떨어지기 전의 나와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의 나와
낙엽이 떨어진 후의 나가 함께 변화하고 있다면 과연 시간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시간의 존재한다는 것,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은
관찰의 주체는 고정되어 있고 관찰의 대상이 움직인다는 그와 같은 속에서만이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찰의 주체와 대상이 함께 움직인 다는
이 간단한 사실에서 어떤 주체로서의 나를 기준으로 시간이 흐른다
공간이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조금 어려운 관찰이기는 하지만요.




5. 지금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이 순간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육신과 정신의 한 순간에 들어있는 주인은
무엇인가요? 한 순간 "나"라고 말하게 될 때에 그 말속에는
상상이 따를 수 없는 시작이 없는 무한 과거의 무한 생명과
상상이 따를 수 없는 끝이 없는 무한 미래의 생명이
상상이 따를 수 없는 무한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생명이
현재의 이 한 순간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 한 순간을 위해서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있어
한 순간의 "자아의식"이 있다면 이 자아의식 조차도
이전까지 "나"와 "너" 그러고 있었던 그런 구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하고 말하는 그 나는 곧 무한시간성과 무한공간성이
말하고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실제적인 "너"가
"나"와 구분하여 존재한다는 그와같은 것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자아의식이라는 "가아"의 세계 그대로가
우주생명 실상 그대로 라는 것이고
우주생명 실상 그대로의 생명의 내용이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재 우리들이 "나"와 "너"라고 말하고 있는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구분되어 살지만 구분됨 속에서 조차도
구분됨이 없는 이 생명의 실상을 설명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입니다.

앞서 윤회가 분명할 수 있다는 사실적인 관찰을 하였기에
윤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또 다른 사실의 관찰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윤회하는 나가 남과 뚜렷이 구분되는
객체적인 영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것이 뚜렷하게
살고 죽는다면 윤회를 긍정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뚜렷이 구분되는 그 나가 아니라면 이 사실을 볼때에는
무엇을 윤회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6. 해탈은 물질화인가?

질문하신 내용중에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물질과 같이
아무런 감각이 없는 상태냐고 물었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위의 내용을 참조하면
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물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현상이라는 현상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희노애락의 주인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고 남김없이
추적하여 희노애락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희노애락 이 자체를 두고서 물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물질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현상이라는 현상의
본질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희노애락의 주인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고 남김없이
추적하여 주인공인 참다운 나를 확인하여
희노애락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7. 어째서 우주를 알아야 할까요?

어째서 우주를 알아야 할까요? 우주로 살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
우주를 안다는 것이 어떤 삶의 부조화를 이끌어 낼까요?

이것도 나라는 문제로 다시 좁혀서 생각해 봅니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해부합니다. 발의 싸이즈는 어떻고
손의 크기는 십년전과 어떻게 달라졌고
지능은 어떻고 감성패턴은 어떻고 사주팔자는 어떻고 등등을
이것저것 따져서 알았다고 할 때의 그 나는
어느 시점의 나일까요? 내가 나를 관찰하는 것 조차도
객관적 관찰이 불가능합니다. 관찰하는 나와 관찰되는 대상이
동시에 상호규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주가 우주를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이 것이
우리 삶의 문제에 얼마나 바른 길을 제시하는 끄나풀이 될 수가
있을 지 의문입니다. 관찰하는 우주와 관찰되는 우주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우주를 관찰한다고 할 때의
우주는 관찰하는 시점에서의 나속에서 그 나와 동일한 우주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간적도 없고 공간이 변화된 적이 없는
생명의 실상속에서 어떤 우주의 시작을 찾아낸다는 것이
과연 사실의 확인이 될 수 있을까요?

8. 마무리

윤회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하는 문제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그것,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협소한 나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윤회는 분명한 실제상황입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의 시작이 없는 착각없는 실상속에서 
무엇을 시작이라고 할 수 있고 무엇을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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