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4년07월24일(일) 07시31분57초 KDT 제 목(Title): ZEO님께 "나",저의 잘못이 고맙습니다. '나1'과 '나2'라고 사용하자는 말씀하신 것을 옛부터 불교에서는 '소아(작은 나)'와 '대아(큰 나)' 또는 '가아(가짜 나)'와 '진아(진짜 나)'라고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낱말을 굳이 구분하지 않은 것은 소아와 대아가 따로 따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읽는 분들이 그게 편하면 소아와 대아를 구분하면서 읽어도 문제는 없겠군요. >통합체란 >한순간에 정지되어 있는 나1들의 집합이 아니라, >죽고 태어나고 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하는 >그 전체를 말한다. (가이아?) 그렇습니다. 집합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1' '나2'로 쓰지 않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1'은 '나2'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나1'이 곧 '나2'입니다. 똑같은 '나'이지만 '나'를 시간적,공간적으로 제한하여 인식했을 때 나를(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식하는 나입니다.) '나1'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인식하기 전의 '나'를 '나2'라고 할 수 있지만 '나1'이 '나2'의 원소로서의 '나1'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2'가 '나2'를 '나1'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나1'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여긴다고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나2'가 '나1'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에서 '나1'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삶의 외형적인 모습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나2'가 '나2'의 입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2'를 부처라고 하고 그 부처의 성격은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불생불멸의 존재이고 영역에 제한이 없는 절대무한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형상과 모습을 떠나 있습니다. 그것을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 아마도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1'은 없는 것이지만 있다고 인식할 때, 부처가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부처는 여전히 부처입니다. 물론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니까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그래도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zeo님은 여전히 부처님입니다. >어떤 아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듯이, 생각을 통해서 존재함을 지금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으니까요. >뇌와 죽음에 대한 문제 인식이 뇌에서 나온다고 하셨는데 내가 뇌를 통해서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뇌세포의 기능이 주이고 인식이 단지 뇌세포에만 종속된다고 하면 뇌세포에 어떤 전기적인 충격을 계속 가하고 살아있는 사람의 뇌가 동작하는 것처럼 만들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은 시체인 경우에는 인식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하긴 제가 시체가 아닌 이상, 인식을 한다, 인식을 못한다고 결론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단지, 불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뇌를 만들고 그 뇌를 통해서 인식한다. 그리고 그 인식의 틀에 빠져서 뇌를 나로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뇌를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뇌를 나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불교는 말합니다. > 톱니 바퀴 톱니 바퀴가 맞물린 것이 아닙니다. 톱니 바퀴는 뉴톤이나 데카르트적인 세계관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톱니 바퀴가 될 수 없습니다. (공식 1: 부처님 식) X = X1 + X2 + X3 + X4 ..... 무한 X를 부처라고 해보죠. X1 = X2 + X3 + X4 + X5 + ...... 무한 X1을 나라고 해보죠. X2 = X1 + X3 + ..... ~ ~ X무한 = X1 + X2 + ... 위와같은 형태가 부처님이 깨달은 후에 말해준 내용이고 (공식 2: 우리 식) X = (X1,X2,X3,.....)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와 나입니다. zeo님이 톱니바퀴로 판단하신 '나1'이라는 것이 사실을 톱니바퀴가 아니라 부처님 식에서의 X1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는데 전달이 미숙했나 봅니다. 우리가 '나(나1:공식2의 X1)'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나(나2:공식1의 X1)'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 거기에서 고정된 나1(공식2)은 없는 것이라는 그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공식1에서 표현이 안된 것이 있다면 시간의 문제입니다. 위의 식에서 3차원축으로 -무한대에서 +무한대로 선을 하나 그려놓으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대충은 식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의 요지는 `나2'가 존재한다고 `나1'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고, `나1'이 존재한다고 `나2'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나2와 나1이 따로 존재한다고 느끼셨다면 분명 제가 잘 못한 것입니다. 저의 설명이 잘 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나1을 버리고, 나2만을 찾는다는 것은 >오히려 편협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제 의도는 '나1'을 버리고 '나2'를 찾는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1(공식2의 X1)'이 곧 '나2(공식1의 X1)'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할려는 것이 었고 그 '나1'이 '나2'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 '나1'로 살고 있다는 것을(공식2의 세계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한 번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쓰는 단어의 뜻을 우선 사전처럼 명확히 해 주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명확히 하면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요. 그렇지만 가능하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경우는 구분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내용이 참 종교적이지 못하게 표현이 되고 말았지만 결국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내용이고 그러므로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나라는 것은 공식1에서의 X1인데 우리의 세계속에서 나는 공식2의 X1입니다. zeo님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