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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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6년04월29일(월) 03시41분42초 KST
제 목(Title): 문자문화와 무문자문화의 갈등과 화두선


 #1241/1271  보낸이:윤원철  (0710sail)    04/07 13:21  조회:43  1/23

         문자문화와 무문자문화의 갈등과 화두선

발표자 박성배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교수, 극동불교)
[한국종교의 세계사적 조명] 제1회 강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문제연구소 주최
1995년 3월 16일 서울대학교 문화관 국제세미나실

[녹음채록]

  제가 오늘 택한 제목을 먼저 간단히 설명드리겠읍니다. 우리가 인류의 문화
, 문명 이런 것을 살펴 보면, 현재 문자가 발견된 후에 문자에 의지한 문화생
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자가 문화에 만능은 아니고 미치지 
못한 영역이 있읍니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 경험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어느 문화의 전통을 보아도, 불교를, 유교를, 회교문화를, 그리고 서양철학 
등을 보아도 역시 문자문화가 미치지 못한 영역이 그 전통 속에 보입니다. 또
, 문자의 발견이라는 것이 몇 천년 되지 않았으니까, 우리 인류는 상당히 더
 오래되었는데, 문자가 발견되기 이전의 인류는 그러면 문화생활을 안 했는가
--이 때의 문화라는 말은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문제가 되겠지만--, 사람이 사
람다운 생활을 하는 것을 문화라고 우선 정의를 내려 본다면 문자가 없었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못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읍니다. 문
자가 나옴으로써 우리가 굉장히 덕을 많이 본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로 말미
암아 해를 보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양자의 관계 속에서 그 갈등면을 추적한 전통도 많고, 그런 
개인도 많습니다. 그래서, 문자문화와 무문자문화의 갈등, 이것을 하나의 대
상으로 해서, 여기서 불교의 화두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
는 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제목도 그렇게 뽑은 것입니다.


  오늘 제목은 이렇게 나왔읍니다만, 사실은 제목은 훨씬 후에야 생겨나는 것
이고, 이런 생각을 제가 한 것은 퍽 오래 되었읍니다. 특히 근래에 와서는 제
가 느끼기를 불교에서--제 전공이 불교이기 때문에 자연히 용어도 그렇고 드
는 예도 불교의 예를 많이 들겠읍니다--옛날에는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의 가
르침을 받고 있는 학생이랄지 혹은 어떤 관계에서든지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
침을 받는 사람의 관계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하는 제일 큰 일은 문제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그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서 탁 잡는
다고 그래요. 요즘에 그런 표현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
을 들었읍니다만. 아뭏든 무슨 발동이 걸리듯이 어떤 문제가 자기에게 턱 걸
립니다. 그래서 걸려 가지고 이것을 풀지 않고서는 잠도 못 자고 하는, 가슴
 속에 무슨 응어리진 한이 있듯이 그 문제를 가지고 쭉 씨름을 합니다. 그래
서 드디어 언젠가는 그 문제를 푸는 이런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의 지도를 받는 사람에게 문제를 주는 데에 비교적 성공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날 가만히 보면 책도 많이 나왔고 Ph.D도 많이 나
오고, 학자들도 많고, 또 큰 스님도 많고, 모든 것이 더 발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문제를 주지 못하고 있다
, 문제 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런 느낌을 제가 많이 갖고 있었읍니다. 그
래서 사실 이러한 것이 제 강연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제목은 그렇게 뽑았을 망정 제가 다루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에 치
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불교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무슨 천상에서 내려온 
문제도 아니고, 신선들이나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사람이면 누구나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유식무식을 막론하고, 종교가 있건 없건, 불교를 믿건 안 
믿건간에 인간이면 누구나 문제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 그것을 이것이 문
제다하고 튕겨 주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듣는 사람이 대체 그렇구나, 그리고
서 그 문제를 풀려고 자기 스스로 애쓰는 그런 거란 말예요. 그런 것은 꼭 불
교의 신앙을 가져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불교의 지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든지 가능해야 하지요. 그런 착상에서 이런 얘기는 불
교의 용어를 쓰지 말고 불교의 이론도 빌리지 말고, 누구든지 알고 있는 얘기
가지고 결국 문제만 우리가 들추어 내면 되지요. 지식을 갖자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도 불교용어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불교교리
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얘기를 좀 해 볼려고 하는데, 실상 쉽지 않은 작업입
니다. 

  자, 그러면 제가 벌써 ㉩ 년 전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일본에서 사업하던
 친척 한 사람이 이런 말을 제게 해 주었는데, 일본의 씨름이--쓰모라고 하지
요--일종의 국기이자 전국적인 스포츠인데, 최근에 쓰모 선수의 부상률이 상
당히 높아져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연구를 했는데, 그 연구결과 
보고서가 이렇게 나왔다고 들었읍니다. 원래 일본의 쓰모라고 하는 씨름은 일
본사람들의 생활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특히 정좌 문화, 꿇어 앉는 것을 정좌
 문화라고 하지요. 특히 일본 사람들은 세이사라고 하는데, 땅바닥에 꿇어 앉
는 것이 일본 사람에게 굉장히 퍼져 있지요. 부모 앞에서는 반드시 꿇어 앉고
 아뭏든 꿇어 앉는 것은 상당히 많이 보여요. 이 꿇어 앉는 것에서 나왔는데
, 이 쓰모의 기술이란 것도 결국 꿇어 앉는 일상생활이 밑바탕이 돼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쓰모 선수들의 경제력이 향상이 되면서 집 구조를 전
부 양식으로 바꾸어 침대 생활을 하고 의자 생활을 하고 이렇게 바뀌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쓰모 선수들이 꿇어 앉는 기회가 일상생활에선 없어진 거지
요. 다만 쓰모 도장에 가서 쓰모 수련을 받으면서 꿇어 앉는다는 것, 그러니
까, 꿇어 앉는 것이 자기의 다리 근육에 있어서 원래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 떨어져 버렸다는 거지요. 없어져 버리고 기본적인 체력, 꿇어 앉을 때
의 근육의 구조 등이 제대로 되지 않고 기술만 배우니까 자꾸 부상을 당한다
는 보고가 나왔다고 들었읍니다. 저는 읽어 보지도 못했고 사실이 그런지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아닌가는 제 관심사는 아니고, 그 얘
기 자체가 저에게 뭔가 좋은 시사를 깨우쳐 주는 바가 있었읍니다.
  서양에서 불교 공부를 학생들과, 동료교수들과 해 보면 분명히 그런게 느껴
집니다. 동양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불교신자건 아니건 간에 생활 자체에 어떤
 불교적인 요소가 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활이 체(體)가 되고, 이 생
활이라는 체(體)에 근거해서, 한 용(用)으로서 불교의 경험, 불교의 이론,불
교의 단어 등 불교문화가 나옵니다. 따라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불교전공을
 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읍니다. 이런 것도 생활이
 체(體)가 되고 그 위에 불교문화가 꽃이 피었다는 거지요. 우리 뉴욕 주립 
대학에서는 한국에서 영문과, 불문과 나온 사람들이 저와 불교 공부를 하러 
오기도 하는데, 생전 불교책 한 권 읽어 본 적 없어도 한두 학기 지나면 그렇
게 잘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십 년 정도 저와 함께 공부했던 미국학생들이 당
황을 해요. 영문과 나오고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한 학기 지나면
 저와 비슷하게 대화를 하는데, 자기들은 엄두가 안 나거든요.
  일례를 들면 불교에 무념(無念)이란 말이 있는데, 콜롬비아 대학의 얌폴스
키(Yampolsky) 같은 분은 [육조단경]을 번역하면서 '무념(無念)'을 'No-thou
ght'라고 번역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생각이 없음'이
 뭐예요? 아무 생각 안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아무 생각 않고서는 신라문
화가, 중국의 당나라 문화가 나왔을 리 없거든요. 기가 막힌 생각을 했기에 
저런 문화가 나왔지, 생각 없는 데서 저런 문화가 나왔을 리 없지요. 그러니
까 저 번역이 잘못된 거예요. 'No-thought'는 분명히 아니거든요. 얌폴스키 
같은 사람은 경도(京都)대학에 가서 10 년 동안 불교공부를 하고 절에서 생활
을 한 사람인데도, 자기의 일상생활이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으면서
 경전을 볼 때만 불교적으로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리고 경전을 딱 닫아 놓
으면 서양적으로 생활을 하지요. 결국 그 씨름 선수와 똑같은 케이스예요. 그
러니까 번역할 때 '무념(無念)'도 No-thought라고 번역해 놓고 자기는 잘 됐
다고 생각한단 말이예요. 그러나, 그런 번역을 읽고서 미국의 독자들이 [육조
단경]의 무념사상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여기서 결국 사상이라는 것은, 사상도 문화의 하나인데, 생활이 체(體)가 
되어야 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생활을 엉뚱하게 하고서 사상만 
한다고 할 때 쓰모선수처럼 밤낮 부상만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부상당해서
 붕대감고 있는 건 좋지만 그 지도받는 사람들까지 부상 아닌 부상을 입혀서
 평생 엉뚱한 길로 가게 하는 건 차라리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왜 우리의 지도자들이 문제 주는 데 실패했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자면, 결국 우리의 지도자들도 그런 것 같아요. 옛날 사람에 
비해서 생활은 불교적이 아니면서 말로만, 글로만, 가르칠 때만 불교적인 용
어로, 불교적인 이론을, 불교적인 사색을 한 듯이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여기
서도 쓰모선수의 부상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가르쳐 줬는데도 제자들이 하
나도 자기 속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건 시간의 낭비일 뿐 아니라 그것
도 일종의 부상현상과 비슷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래서 여기서 
부득이하게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결국 24 시간 계속되는 생활, 그것이 
철학이고 그것이 공부지 그것 따로 있으면서 '철학한다', '공부한다'라고 하
는 것이 얼마나 자기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롭고, 결국 아무 결과도 가져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생각을 이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조금 본론 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읍니다. 이제까지는 제 입
장이랄지, 제가 왜 이제까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얘기했구요.
  한국 불교인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건 적건 그건 제 관심사가 아
니구요. 이 한국 불교인의 대부분이 조계종과 태고종에 속한다고 합니다. 종
파는 약 30여 개 종파가 있지만 대부분이 조계종, 태고종에 속합니다. 그런데
, 이 조계종, 태고종은 지도노선으로 볼 때 참선을 강조하는 선종입니다. 그
리고 선종 중에서도 일본의 도겐이라는 사람이 퍼뜨렸던 가만히 앉아 있는 묵
조선도 아니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화두선(話頭禪)입니다. 요즘에
 화두란 말이 김영삼 씨도 쓰는 'popular'한 말이 되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읍니다.  그런데, 이 화두는 다른 말로 
공안이라고도 하고, 서양사람들은 일본 발음을 따서 "코안"(koan)이라고 하고
 또는 "코온"으로, 옥수수처럼 발음하기도 합니다.
  한국 불교가 조계종, 태고종으로 나뉘고 이것은 선종이고, 선종 중에서도 
화두, 공안을 가지고 문제를 탐구하는 종파라고 한다면 과연 화두가 무엇이냐
? 어떤 사람은 '수수께끼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수수께끼라 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렇게도 말하는데, 사실 이 화두란 말, 공안이라는 말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입니다. 이 풀어야 할 문제는 제자들이 그것을 풀지 않고
는 못 배기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이라고 
해서 7, 8, 9 세기 당나라 때부너 유행해서 송나라 때 와서 11 세기쯤 꽃이 
피었는데, 이 화두선의 시원이라고 하는 조사선이 처음 나올 때 어떤 상황이
었는가 하면, 경전연구가 굉장히 유행했었읍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을 할
 때는 대개가 경전에 입각해서 퍽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 질
문에 대한 답변도 경전에 입각해서 교리를 따져 가면서 역사을 밝혀 가면서 
그 질문을 풀어 주는 것이 일반적인 공기였읍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의 헛점을 본 사람들이 있읍니다. 이 사람들
이 화두선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읍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런 질문이 나
왔을 때 종래 사람들이 하는 그런 식의 답변을 하지 않고 새로운, 보통 사람
들이 보기에 아주 엉뚱한 답변을 했읍니다. 일례로 들면, 달마대사가 인도에
서 중국으로 오셨다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셨읍니까? 아주 지성적이고 이
성적인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답변을
 했읍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해서 조사선을 하는 선사들, 화두선을 하
는 선사들이 어떤 답변을 했냐하면, 고함을 꽥 질렀습니다. 고함소리에 고막
이 터져서 3년 동안을 못들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혹은 몽둥이
로 질문자를 실컷 두들겨 패 줍니다. 때론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
로, 예를 들면 '무(無)'랄지, 대답을 합니다.  또 손뼉이라는 것은 두 손으로
 마주 쳐야 되는 건데, '한 손으로 치는 손뼉을 가져 오너라' 이렇게 얘기하
기도 하고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을 얘기해 봐라,' 즉 '부모
미생지면목(父母未生之面目),'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네가 들었던 것, 보았
던 것을 다 빼 놓고 얘기해 봐라,' 이런 식의 대화를 합니다. 이것이 조사선
을 하는 화두선을 하는 사람들의 말투였읍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가 있느냐 하면 적어도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합
니다. 첫째로,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이 1 세기 전후이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형태를 거쳐서 조사선이 나올 때까지는 7, 8백년이 지나서 교리적으로
 아주 원숙한 경지에 있었읍니다. 그런데, 조사선을 하는, 참선을 하는, 화두
선을 하는 사람들의 이상스러운 행동을 한번 분석해 보면, 정리를 해 보면 이
렇게 말할 수 있읍니다. '역사를 몰라도, 경전공부를 안해도 그리고, 교리를
 따질 줄 몰라도 불교의 진리는 알 수가 있다' 우선 이런 운동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 화두선을 통해서 불교의 진리는 유식한 
사람의 것에서 일자무식도, 벽사도,경전도,교리도 모르는 그런 사람에게도 문
호가 개방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문제를 던져 준 것인데, 여기서 '실컷 두들겨 패 줬다, 고
함을 질렀다' 하는 것이 답변인데, 어떻게 문제를 던져 주는가 하면, 두들겨
 맞은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아니 내가 달마스님이 왜 중국에 왔느
냐 물었는데, 왜 나를 두들겨 패는가?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른 것인가?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린가?' 이러한 데서 자기의 이제까지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그것은 해당이 안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람들이 간절하게 왜 그랬는
가 하고 의심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문제를 던져 준 것입니다. 이렇게 문
제가 던져지고 이제까지의 견문, 지식이 쓸모가 없어지고, 그리고 지식만 쓸
모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때의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는데, 그 깨달은 것이 다름아닌 부처님이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다 이
거죠. 그러니까, 경전을 읽어서도 불교의 진리를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선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문제를 던짐으
로써, 불교의 이치를 알게 됐다 이거죠.
  그러면, 여기에서 몇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것이 문제로
 제기될 수 있고, 또 그런 문제를 받아서 나중에는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
었더니 그게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했는가, 뭔가가 감추어진 듯 불분명한 것
, 알아 들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구요.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 몇 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상황과 그때의 상황이 달랐다는 걸 우선 전제로 띄
워야 합니다. 그때는 불교의 교육이라는 것이 그 나라의 교육의 가장 큰 교육
적인 기관이었읍니다. 그러니까, 어느 절, 어느 절 큰 절에 가보면 온통 몇천
 명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최대의 교육기관이었고 최고의 영재들이 거기에
 모여서 그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다구요. 그러니까 자기 교육 기관에 대
한 신뢰, 말하자면 우리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서울대학교에 보낼 때 그 대
학에만 들어가면 모든 일이 다 되는 것처럼 서울 대학에 대한 존경, 자부심이
 있다 이거죠. 말하자면 그러한 존경과 자부심을 그 당시에는 불교의 절, 수
도원이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절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자세가 오늘날 우리가 절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스
님이 고함을 친다거나 무조건 두들겨 팬다고 하면 '도대체 왜 두들려 팰까'하
는 물음이 풀리지 않아서 잠을 못 잡니다. 오늘날에는 내 방에 들어온 사람한
테 고함을 치거나 두들겨 팬다고 하면 아마 학교 당국에 고발해서 정신병원에
 감금했거나 그랬을 겁니다. 정신병자 취급을 하겠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때에는 스승과 제자간의 신뢰라든지 교육기관
에 대한 믿음이라든지 존경이라든지 이런 것이 첫째로 거기에 작용을 했던 것
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그런 행동은 우선 분석이 되
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맞은 뒤 생각을 할 때에 어
떻게 생각을 하느냐 하면, 아무튼 왜 두들겨 팼는가? 이것이, 즉 두들겨 패는
 것이 달마 대사가 중국으로 온 까닭을 일러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문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적인
 질문 앞에 지성적인 답변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읍니다. 그러나 선자들은
 지성적인 답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지성적인 답변이 나오는 그 근거를
 한 망치로 두드려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땅에 서 있으면 그 사람을 밀어서 쓰러뜨리려고 하지 
않고 그 땅 자체를 빼았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foundation자체를 흔들
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고백한 것을 보면 '한마리의 모기가
 철로 만든 소를 물어 뜯는 것 같다,' 뭐 이런 식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모기
가 철로 만든 소를 물어 뜯을 때 물어 뜯어집니까? 안뜯어지지요. 그 말은 결
국 그 사람들이 그 두들겨 팬 의미에 대해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들겨 팼다고 하는 것을 지성적으로 풀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스님이 때린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 모르겠다는 상
태가 마치 모기가 철우를 물어뜯는 것 같다. 은산 철벽이다. 도대체 내가 가
지고 있는 어떤 것을 동원해 봐도 그것은 풀리지 않는다. 심지어 불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깨달은 사람, 부처님인데, 그리고 부처님의 도
통을 이어 받은 조사들인데, 그런 최고의 경지에 이른 분들까지도 상신실명(
喪身失命) 즉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 얼마 안가서 그 사람은 깨닫게 된다고 기록에 
쓰여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조사선이 나와서 화두선을 통해서
 천년 동안을 아시아, 동아시아의 불교 문화권 속에서 경전 공부를 안해도, 
교리를 따질 줄 몰라도, 역사를 공부 안해도 불교의 진리는 알 수 있다는 풍
조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다른 차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발달해서 사회과학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
오고 또 그러한 훈련에 입각해서 역사를 보고 사회를 보고, 소위 운동권이라
는 것이 형성이 되고 사회참여가 높이 평가되고, 이런 사람들이 화두를 통해
서 불교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전통에 대해서 도전을 합니다. 그래서 소위 
반(反)화두 세력이 형성됩니다. 민중불교나 실천불교운동 등이 그런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반화두세력이 형성됨과 동시에 운동권에 참여
하지 않는 사람도 종래의 두들겨 패는 그런 식의 교육방법은 전혀 자기에게 
해당도 안되고 또 그런 얘기를 듣고 화두를 듣고 참선을 해도 잘 안되고 특히
 지성적인 approach를 하는 사람들이 동조해서 점점 반화두세력이 커가고 있
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나갔다가는 화두선이라는 것은 불원 멸종위기에 직면
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반 화두세력들은 자기들이 정말로 불교를 살려내고 있
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보듯이 화두선이 나오기 이전의 천년 여 이상을 
교리로써, 불경공부로써 불교가 계승이 되오다가 화두선이 나와서 천여년 이
상을 이어왔고, 이제는 다시 반화두선 운동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에
서 주류가 조계종, 태고종인데 여기서도 주된 수련, 신앙생활은 화두였습니다
. 그런데 요즈음에는 민중불교 본회의에서 화두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불교
의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그런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반화두세력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와야 할 것이 왔구나 하
고 환영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두를 반대할 때에는 화
두가 무엇인지 알고 반대를 해야지 내가 해보니까 잘 안된다라는 식의 이유를
 가지고 반대해서는 화두선의 맥을 정말로 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화두
선의 맥이 정말 끊어져야 할 것이라면 그야말로 꼼짝없이 숨통을 끊어야 하는
데, 알지도 못하고 반대해서는 숨통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세계에서 숨통을 끊는다는 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죽이는 것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죽음을 통해서 그 진리가 다시 부활하는 것이지요.  이런 두가지 면
, 죽음과 부활의 구조가 그 내부에 있을때 운동으로 성공하는 것이지 죽이지
도 못하면 부활도 없고 그것은 하나의 소요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화두 운동을 환영하면서도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화두선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삼겠
습니다. 이 화두선의 제1특징이 무엇이냐면, 지성을 경계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경전이란 것은 분명히 지성 자체를 전제로 하고 문자에 근거해서 만들어
졌으니까, 이것이 굉장히 도움이 되고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전 공부와
 무관하게 선사도 될 수 있고 불교계의 지도자도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것은 가짜가 커 나갈 수 있는 온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겁
니다. 문자를 근거로 해서 씌어진 경전, 그리고 그 경전을 공부할 때의 약점
은 이런 게 있습니다. 내가 체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체험이 있는 사람의 세
계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진짜 체험은 얻지 못하
면서 마치 진짜 체험을 한듯이 착각을 하고, 또 체험을 했다고 착각했기 때문
에 더 이상 공부 안하려고 하고, 자기보다 공부를 더 깊이 한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 시기하고 모략하고 질투나 하고 이런 현상이 막 벌어지거든요.
 그래서 화두선의 제 1 공헌이 무엇이냐 하면 문자가 가지고 있는, 경전이란
 것이 곧 문자니까, 한계를 지적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자라고 하는 것은 생겨나면서부터 그 사명이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계다'라고 하면 시계라는 단어 자체가 시계가 아닌 것으로부터 시계를 구
별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문장도 그렇고, 어떤 문장이든지 구별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구별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알고자 하는
 것이 그 윤곽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에게는 구별할 수 있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반드시 있읍니다. 말하자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전에는 다 있읍니다. 말하자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은 구별을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구별의 원리 밖에 없는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구별되지 않는 어떤 면이 있
고 바로 그 면 때문에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
고 하는 것은 구별이라고 하는 그것이 못 미치는 영역입니다. 그 외에도 인간
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본연의 모습들, 말하자면 평화롭다든가, 틀림
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든가,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달라도 사랑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그렇고, 남녀간의 사랑도 그렇고, 사
랑에는 그런 측면이 있는데, 이런 사랑같은 것은 분명히 구별 가지고는 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문자의 사명이 구별이라면 구별가지고는 그 영
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구별만 하는 세계는 경계선, 즉 boundary가 분명합
니다. 어디까지는 되는데, 그 경계선을 넘은 것은 흐릿흐릿하니 잘 안됩니다
. 그러니까, 우리에게 불교가 어려운 것은 구별 않는 대목을 자꾸 갖다 대거
든요. 그런데 우리의 무기는 구별이거든요. 그리고, 지성이라는 것도 구별하
는 것을 통해서 기능하는 것이지요. 지성이 연마되었다, 절차탁마(切磋啄磨)
다 하는 것도 우리의 경우에는 구별이 그 주요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무기
가 맥을 못 추는 대목이 있다는 겁니다. 아까 화두선의 경우에는 두들겨 맞았
는데, 그 두들겨 맞은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고, 그것이 마치 모기가 
철우를 물어 뜯는 듯, 불조(佛祖)도 상신실명하는 듯, 이런 표현이 있는 것도
 결국 자기의 지식과 지성이 창피당하는 곳, 난파당하는 곳, 맥을 못추는 곳
, 이런 것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죠. 불교
에만 있는 것이 아니죠. 지식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누구에게든지 
다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문자는 구별이 특징이기 때문에 문자가 그 강한 힘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은 보이는 것, 구체적인 것의 영역에서지요. 구별이 가능한 것
은 결국 보이는 것이니까 구체적이라는 거죠.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분
명히 구획을 지을 수 있는, 이런 것이다 하고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유의 대
상이라는 것도 구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런 것
은 불교의 용어로써 용(用)이라고 합니다. 사용한다 할 때의 용(用)인데, 용
(用)이라는 것은 현상계라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뜻이예요. 그래서 용
은 부단히 변하는 것이고, 용은 눈에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그 보이는 것은
 뒤에 절반이, 절반이라는 말이 어패가 있는데, 아뭏든 그 뒤에 안 보이는 것
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안보이는 것을 딱 잘라 버리고 보이는 것만 가
지고 자꾸 얘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늘날 불교책을 읽어 보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데, 사실은 조사들이 조사선에 화두를 가지고 밝히고자 한 문제를 다룬 책은
 거의 없읍니다. 뭐 선종사상서다, 선학사상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등 별
책이 다 나옵니다만 어떤 책을 봐도 결국 용의 세계에서 구별될 수 있는 세계
에서 서로서로를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논의만 하고 있지, 그 구별될
 수 있는 한계를 띄우면서 도대체 구별하는 주인공인 지성 자체를 난파시키고
 창피를 주고 하는 그러한 무서운 도전이 없읍니다. 그런 문제의식이 지금 없
습니다. 그런데, 원래 선이라고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근본, foundation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거든요. foundation은 그대로 놔두고, 우리가 서 있는 땅
은 그대로 놔두고 그 위에 서있는 어떤 몸짓이나 교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
라 그 서있는 밑바탕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그 밑바탕에 해당
되는 것을 體라고 부르죠. 체라는 것을 우리 말로 표현하면 몸이고, 용이라는
 것은 그 몸이 보여주는 몸짓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몸짓은 몸이 있
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한데, 우리는 몸짓만을 보았지 몸자체는 보지를 않
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용적인 세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얻은 것으
로 승부를 가리려고 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화두선은 우선 눈에 보이는 용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듣고 보는 거기에 집
착을 하게 되니까 그 집착을 끊고, 이런 용이 나왔던 몸짓이 나왔던 몸 자체
를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농사를 예로 들자면, 가지와 잎사귀에만 사로잡혀
 거기서 어떤 결판을 내려고 하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줄기와 잎사
귀가 나오는 안보이는 뿌리를 보라는 거죠. 안보이는 뿌리가 결국 굉장히 중
요하다는 겁니다. 가지, 잎사귀와 뿌리의 관계에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 공부를 하는 데, 인생을 아는 데, 역사를 아는 데 있어서도 결국 눈에
 보이는 용에 현혹되지 말고 체로 돌아가라, 눈에 보이는 몸짓에 현혹되지 말
고 몸짓이 나오는 몸으로 돌아가라, 이런 운동이 다름아닌 조사선 운동이고,
 화두선이라고 말할 수 잇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불교학자들이 선승들의 교
리를 따지지 않고 스님들이 오면 차나 한잔 하고 가라, 이렇게 답변했다고 해
요. 이런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체로 돌아가는 작업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체로 돌아가는 작업,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가 지적
 세계, 문자문화, 여기에 얽매여 있으니까 이 얽매임을 푸는 것이죠. 그리고
 풀어진 자유인의 상태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
든 논리적, 역사적인 지식을 따질 수 있는 그런 철학적 능력이 제대로 그 기
능을 다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본에 불교대학이 열댓개가 있는데, 그 불교
대학의 도서관에 가보면 서가가 종파별로 분류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자
의 가치를 매도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는 선종의 섹션에 가보면, 선종의 칸에 
있는 책의 양이 화엄종이나 천태종이나 그 밖에 철학적 교의를 따지는 종파보
다도 열배, 스무배가 더 많거든요. 즉 문자문화를 배격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
지요. 그게 아니라 문자문화에 집착해 있는 상태를 풀어주는 겁니다. 풀어주
는 것이 말하자면 체로 돌아가는 작업이죠. 그러면 문자에 집착해 있는 상태
가 풀려가지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문자를 보면 그 문자가 바로 생명을 드러내
는 문자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작업을 하자는 겁니다. 결국 이 선승들이
, 화두선을 하는 선승들이 아주 좋은 데 착안한 것 같아요.


**
퍼오기 끝
--,--`-<@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잠이 들고파..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        Love is real      \|||/   @@@
Till lovers cease to dream           |        Love is touch    @|~j~|@ @^j^@
Till then, I'm yours, be mine        |        Love is free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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