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3월18일(월) 17시22분51초 KST 제 목(Title): [불교신앙8] 8. 나무(南無) : 불이(不二)의 세계 부처님은 생사를 해탈하셨기에, 대립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중생인 상태로 있어서는 부처라고 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제도해서 마쳤을 때만 부처님의 참이름인 아미타가 됩니다. 아미타(阿彌陀)란 나의 참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무한생명(無限生命)이고, 공간적으로 무한광명(無限光明)인 참생명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참생명의 세계와 만나려면 '나무(南無)'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나무아미타'가 될 때, 우리의 참생명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무(南無)'란, "인과응보속에 살고 있는 이 가짜생명을 버리고, 진실생명인 부처님생명으로 돌아가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돌아가려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하는 것 역시 나무입니다. 중생쪽에서는 '중생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나무(南無)'입니다. 부처님쪽에서는 '제발 부처가 되어다오'하는 것이 '나무'입니다. 중생 입장에서는 중생을 부정하는 소리,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부 처가 돼주어야 한다고 간절히 요망하시는 소리가 나무입니다. 언뜻 중생이 먼저 부처님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을 부른다'는 것은, 부처님이 '제발 부처되어 다오'하고 간청을 하시니까, 내가 중생이 아닌가 보다'하고 생 각이 드는 것이지, 중생인 내가 처음부터 '나는 중생이 아니다' 라고 선언할 능력은 본래부터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염불(念佛)은 '나무'하시며, 부처님이 나를 불러주시는 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 보살피시기를, 마치 효성스러운 자제가 부모님 모시듯 한다'고 하지 않던가요? 우리는 중생인 우리가 부처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모신다고 생각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당신은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부처되어 주십시오.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南無)!'할 때, 우리는 중생생명(衆生生命)의 현장인 인과응보의 세계를 부정 하게 됩니다. 물론 인과응보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상대유한의 세계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참생명인 절대무한의 세계에는 인과응보가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나무아미타가 완전히 실현된 실현된 상태를 '불(佛)'이라고 하 니까,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매달리면 복을 받는다. 부처님한테 가서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그렇치만 이는 아직 중생이 부처님을 찾아가는 단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염불을 깊이 있게 하게 되면, '내가 부처님을 찾기 전에, 부처님이 나를 찾고 계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나, 부처님 쪽에서 나를 찾아 온다는 것이나 분명한 것은 나와 부처님이 따로인 것은 확 실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하면, '나 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부처님을 찾고 부처님이 나를 부르니, 결국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세계, 생사없는 세계에 들어 가도록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본래부터 나는 부처님 생명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 다. 부처님과 나와는 본래부터 한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불이(不二)라고 하며 극락(極樂)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왕생(往生)이라는 말도 공간적으로 이동을 해서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둘이 아닌 [不二] 세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나무'의 궁극의 의미를 요약하자면, '내가 곧 부처님생명이고, 부처님생명이 나에게도 살아지고 있구나!'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