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3년 6월 23일 월요일 오전 09시 18분 37초
제 목(Title): Re: 묵조선


위빠사나 수행법에 관한 책들이 많은데 그것을 참고하시면 수행에 도움이 
될것입니다. 간략하게 주시하는 자는 누구며, 진정한 나는 누구고, 그걸 
관찰하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행하다보면 여러가지 '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번뇌하는 나, 관찰하는 나, 
분석하는 나, 주시하는 나 등등..그렇다면 진아라는 것은 과연 무엇으로 
설명해야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분명 내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일 뿐입니다. 이것들 중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일까 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생각(또는 사념) 들이지 
어느 것도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이상 문제에 대한 답.  이러면 너무 
황당하죠, 그럼 계속 설을 풀지요)

 

하얀 스크린에 비친 영상들처럼 생각이나 마음은 각양 가색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수한 진정한 모습은 영화가 끝나도 남는 하얀 
스크린에 해당됩니다. 거기에는 번뇌도 없고 고집멸도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진아를 공 이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범부들은 단지 그것을 못 보고 있을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부처와 다를게 없게 됩니다. 땅을 파고 나면 빈공간이 나옵니다. 
빈공간은 없던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본래 거기에 있었을 따름입니다. 
빈공간은 공 입니다. 그것은 스크린이고 바로 우리의 본질 '진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진아'는 볼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텅 비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아가 없이는 어떠한 우주의 생명활동은 일어날수 없습니다. 마치 
스크린이 없으면 영화를 볼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그 기능을 통해서 볼수 있습니다. 텅 비어있지만 그 작용은 
무궁무진합니다. 흔히들 마음의 작용이라고하는 것이 자세히 보면 진아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비심, 환희심, 등등 이런 마음들은 내부의 
에너지가 충분할때 나오게 됩니다. 그런반면 수치심, 질투심, 분노심, 소유욕 
등은 마음이 경계(즉 해당되는 개체)와 만날때 생기게 됩니다. 게으름이나 
거만함은 진정한 자기자신의 기능을 보지 못할때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불필요한 한마디로 쓸데없는 마음의 기능들입니다. 그래서 헛개비인 셈입니다. 
이러한 쓸데없는 마음의 잡념이 생겨날때 마음을 주시하게 됩니다. 보통 참선을 
많이 하게 되지요. 이때 마음을 주시하는 그 관찰자는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문제에 앞서 우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들을 주시하게 되면 
그것들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 쉽게 
말씀드리면 남비에 물을 끌이면 물표면에 물방울들이 일어납니다. 이 
물거품들이 바로 번뇌 망상입니다. 이것들을 없애려면 불을 꺼야지 물방울을 
누른다고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불을 끄는 작용이 바로 마음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생각이나 잡념은 마음이라는 에너지를 먹고 자랍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하면 에너지의 흐름이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 
잡념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굳이 일부러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번뇌 
망상 분노심, 수치심, 탐욕심 등은 본래 허상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다시 관찰자로 돌아가서 이 관찰자는 과연 어떤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진아'는 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관찰자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찰자에서 행위자를 빼면 결국 '관찰'만 남게 됩니다. 즉 
행위자는 없는데 현상만 있는 것이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진아는 공하기 
때문에 볼수는 없지만 그 기능들은 우리가 느낄수 있습니다. 지금 이글을 읽고 
불교를 공부하고 깨달음의 꼬랑지를 붙들고 하는것이 모든 그러한 
기능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관찰자는 없지만 관찰이라는 현상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관찰자'로 
남는 것입니다. 단지 관찰하고 예의 주시할 뿐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그런데 
이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거짓 자아 흔히 말하는 에고'ego'가 남아 
있어서 수행은 어려워야 하고 깨달음은 대단한 것이어야 한다는 미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에서 본다면 역시 수행은 미묘한 에고의 
작용까지도 없애야 하는 아주 끈질긴 싸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관찰하게 되면 하얀 스크린만 남습니다. 그때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화면을 보고 슬퍼하거나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영상일뿐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연극 같은 인생을 살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지만 극중 인물이 죽는다고 연극배우가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극장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채로운 영상에 사로잡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달았다하더라고 그들이 보는 영화를 멈추게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옆에 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보는것 
방해한다고 싸움이 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서로 더 추해질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후 일주일간 그냥 열반에 들까 아니면 중생제도를 
할까 망설였던 것입니다. 


         
--------------------------------------  Show me your smile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