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새들의소리) 날 짜 (Date): 2003년 3월 18일 화요일 오후 05시 39분 57초 제 목(Title): 김용옥/ 상업주의에 짓눌린 묵언 출처: 문화일보 <도올기자가 만난사람>상업주의에 짓눌린 `默言` 김용옥/doholk@munhwa.co.kr 지금 이 순간 나는 매우 참담한 심정으로 붓을 든다. 내가 기자가 된 삶의 비애를 너무도 절실하게 느껴본 최초의 체험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허긴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동류의 느낌을 담배연기로나 훅 날려버리겠느냐마는, 내가 오늘 느낀 당혹감은 매우 비굴한 자신의 모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서글픈 여운이 깊게깊게 서린다. 두 번 다시 이런 자리에는 서고 싶질 않다.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만 살아왔던 것이다. 허긴 다양한 삶의 체험을 위하여 내가 기자라는 직업에 뛰어들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 핵심적 문제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 인간의 진실된 모습인가? 무엇이 구도(求道)며, 무엇이 해탈(解脫)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정직한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처세가 제도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승가라는 공동체, 언론이라는 공동체, 이 모두가 이해관계나 상업주의적 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속박에 얽힌 인간들 속에서 해탈을 운운한다는 것이 근원적으로 무의미하거나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오메가 포인트의 한계 또한 명백한 것이다. 그런 비관적인 느낌 속에서 지낸 17일 하루였다. 며칠 전,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을 낸 명진출판사의 안소연 사장과 통화를 했다. 평소 나를 존경하고 있으며 틱낫한 스님의 방한을 주선한 주체로서 내가 스님을 만나 한번 대담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11일(화), 그 부군이신 한상만 상무라는 분이 틱스님의 책 3권과 자료를 들고 날 신문사로 찾아와 방한일정을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나와 스케쥴을 짜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예 내가 고개 숙이고 공항에 나가 정중하게 틱스님을 맞이하고 숙소까지 동행하고 잠깐 숙소에서 말씀을 나누면 다음 월요일날 인터뷰를 문화일보지면에 싣겠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나는 대로 더 찾아뵙고 배움을 청하겠다고 했더니 한상무님이 너무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4일(금), 한상무님이 다시 전화하기를 틱스님이 피곤하셔서 16일(일) 도착당일에는 일체 인터뷰를 사양하겠으며, 그래도 나와 같은 사상가를 만나고 싶으니 17일(월) 오후 3시에 당신의 호텔 숙소방에서 대화를 나누시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월요일 대화는 이미 약속이 된 것이니, 공항에 나가 모시고 숙소까지만 동행하는 예의를 갖추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 다시 전화를 해서 공항이 취재진으로 북적대니까 내가 안나오는 게 좋겠다고 해서 나는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9시경 다시 한상무님이 전화를 해서 오후 3시 대담이 너무 피곤하시기 때문에 인사동 산촌(山村)에서 점심식사하실 때 옆에서 같이 식사하시는 것으로 대체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좀 화가 났으나 꾹 참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 시간 후 다시 전화를 하기를 오늘은 피곤하셔서 일체 말 안하시기로 했으니까 나보고 산촌에도 오지 말라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화요일(18) 오전에 프레스센터 19층에서 공식기자회견을 하기로 되어있다. 주최측은 틱스님과 나의 면담을 그 전에 조용하게 주선하기로 생각했다가 틱스님의 방한성세(聲勢)가 언론사들의 개입으로 엄청나게 확대되니까 나와의 면담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식회견 전에 내 글이 나가면 ‘특종’이 되기 때문에 딴 신문사의 압력을 받게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내막사정을 환히 알고 있는 나였지만, 나는 반기는 사람없는 각설이처럼 예정된 시간에 산촌에 돌진하였다. 한상무는 나를 말렸으나, 난 틱스님과 식사자리를 같이 하는 데 성공하였다. 성공하였다기보다는, 틱스님 비슷한 승려처럼 보이는 나의 당당한 위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조선땅에서 최소한 그 정도의 진실은 축적해온 나였다. ―긴 여로에 피곤하시죠? “저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틱스님의 첫 일성이었다. 그런데 옆에 통역자로서 앉아있는 어린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스님께 말씀드린다. “여기 앉아계신 철학자는 스님을 흠모하여 그냥 깨어있는 마음의 상태(mindfulness)를 체험하기 위하여 앉아있기로 한 것뿐입니다. 말씀 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일단 자리를 한 이상, 순간 스치는 일념을 가지고도 나는 일천 매의 문장을 휘갈길 수가 있다. 어리석게도 나의 정신세계와 틱스님의 정신세계를 콘트롤하려는 주변 인간들의 군상에 나는 굴욕과 고소를 금치 못했지만 나는 나의 인내의 한계를 실험해보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화’의 저자 앞에서 화를 초월하는 화두를 잡은 것이다. 이때였다. “우리는 강물입니다.” 나는 ‘리버’라는 말이 강(江)인지 간(肝)인지를 종잡을 수 없어 다시 되물었다. ―강물이라니요? “강물에는 흐름만 있고 물방울이 없습니다.” 분별심을 갖지말라는 경고 정도로 나는 받아들였다. ―틱은 석(釋)의 차음이고, 낫한은 일행(一行)으로 표기됩니다. 일행이란 스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모두 같이 간다는 뜻입니까? “완 액션(One Action), 그 하나가 무엇인지 나도 모릅니다. 모든 행동일까요?” ―베트남불교는 대승입니까? 소승입니까? 그러자 그 통역원은 틱스님께 또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쌩글쌩글 웃으며. “스님께서는 내일 공식인터뷰를 하시기로 되어있습니다. 공식적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 무거운 이야기는 말씀안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압력이 내가 특종기사를 쓸 수 없게 하는 데 성공적일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도올이라는 특공대를 막는 특공의 임무를 단단히 띠고 허리를 졸라매고 있는 듯했다. 하여튼 그녀의 우리대화 중단발언은 내 말이 끝날 적마다 수십 차례 계속되었다.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틱스님이 충분히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수행승이 취해야할 자세는 무엇일까? 자기를 초청한 물주의 상업주의적 계산 때문에 초청당사자국가의 가장 신망받는 사상가 한 사람을 코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강물을 막아 조각조각 물방울을 흩날려버릴 것인가? 수도자의 정신세계가 우리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도(正道)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날 내가 받은 틱스님의 인상은 거리낌과 구속, 그리고 회피였다. 그는 매우 평범한 노인이었다. 그러나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그러한 자리에서 웃음을 가장하면서 그 노인에게 기사거리를 강요하고 있는 기자 도올의 비굴한 모습이었다. 여기 벌이고 있는 게임은 실상, 도올과 틱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베트남에는 소승과 대승이 공존합니다. 인도차이나라는 뜻은 문명의 흐름이 인도와 차이나 양쪽에서 들어온다는 뜻이지요. 인도에서는 상좌부(Therev뫂da)소승이, 중국에서는 대승이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 대승이 들어왔다면 그럼 선(Ch’an)도 들어왔습니까? “선종과 정토종이 들어왔습니다만 월남불교의 대세는 선입니다.” 우리는 월남불교 하면 남방불교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히기 쉬우나, 월남의 역사는 한무제 시절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중국문명의 직접적 영향권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정치체제나, 언어, 문화, 종교의 제반상황이 우리나라역사와 매우 흡사하다. 한장어족과는 다른 남아시아어족(Austroasiatic)에 속해있으면서도 한자음을 조차한 상황(예: Viet=越, Nam=南)이라든가, 유·불·도의 삼교(三敎, tam giao)가 정립(鼎立)한 문화적 전통이라든가, 카톨릭이 근세에 정착한 과정 등 모두가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남방상좌부 소승의 영향은 크메르지역과의 접경지역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와 중앙아시아로부터 직접 포교승들이 월남에 온 역사는 불교의 중국전래를 약간 앞지르는 것이다. 인도북부 소그디아나(Sogdiana, 康居)의 승려 캉썽후이(康僧會)가 지금 하노이지방인 쟈오찌(交趾)에서 많은 역경사업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중국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한 사람은 바로 월남 쟈오찌에서 불교를 배운 AD 2세기경의 중국난민(Chinese refugee)이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나보고 노트장을 달라고 한다. 그러더니 거기에다 매우 아름다운 한자글씨로 모자(牟子)라고 쓰는 것이다. 나는 순간 그가 말하는 모자는 ‘모자리혹론’(牟子理惑論)의 저자 모융(牟融)이나 모박(牟博)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자리혹론’은 현재 ‘홍명집’(弘明集) 제1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유가·도가경전에 정통한 사람이 오히려 그 중국경전의 지식을 활용함으로써 불교를 옹호하여, 불교라는 이단에 관한 모든 의혹(惑)을 없애버린다는(理) 쟁론을 수록한 걸작인데, 위서(僞書)의 시비가 걸려있으나 대체적으로 삼국(三國)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쟈오찌를 다스린 태수 스셰(土變)는 손권조정에 유학한 인물이었고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다. 그 아래서 모융이라는 사상가가 탄생되었을 확률은 높다. 그러나 틱스님의 말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 통역원은 이러한 나의 학술적 논의마저 차단하는 것이었다. 틱스님도 밥이 들어오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밥먹을 때는 밥만 먹으라는 것이다. 일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밥먹기전 시좌가 종을 세번 울리고 식사끝나갈 때 종을 세번 울린다. 묵언속에 밥을 먹으려니 도무지 소화가 되질 않았다. 종이 울리고 난 후 나는 여쭈었다. ―밥먹는 것에만 열중하라는 것은 위파샤나(vipas′yan뫂) 수행입니까? “위파샤나란 명료하게 본다(to see clearly)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찰나에 있다는 것이죠. 참으로 현재에 머물수 있는 우리 마음의 능력을 저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부릅니다.” ―천태(天台) 지의(智쨁)대사가 말하는 지관(止觀)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현재의 순간에만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빠야(up뫂ya)라는 말을 아십니까? “상황상황에 적절한 수단(expedient means)이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말을 하면서 밥을 먹어야 소화가 잘되는 사람에게는 식사중 말을 하는 것도 하나의 마인드풀니스의 방편이 아닐까요? “밥을 먹는다는 것은 밥을 먹는다는 것에만 열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음식과 음식저작행위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순간에 두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밥먹는 순간에 말을 하는 것은 곧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식 한톨이 곧 우주전체입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성선·성악의 논쟁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선·악을 초월하는 초윤리적 종교로서 중국인들에게는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가르침은 너무 사소하게 윤리적입니다. “붓다는 선·악을 말하지 않고 리얼리티 그 자체만을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것은 언어의 장난이지요. 문제는 실천(practice)이지요. 실천은 곧 인격의 변화(transformation)를 의미하지요.” ―당신은 평화의 멧세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은 지금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며 평화를 갈망합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을까요? “평화는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속의 평화를 얻으면 마음밖의 평화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평화시위는 언론사의 조작여부에 따라 우리 북한동포들을 욱박지르는 우익적 시위로 포장될 수도 있습니다. 칼빈슨호의 무력시위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그리고 당신의 평화·환경시위를 빙자해서 많은 기금을 조성하려는 계획도 있다는데…. 이런 상업주의가 과연….”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잽싸게 통역원이 가로막는다. “그런 이야기는 수요일 평화포럼때 말씀하시면 됩니다.” “평화를 진정 원하신다면 이 시간에 왜 이라크를 아니가시고 여기를 오셨나이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사방에서 눈총을 주고받는 주변의 험상한 기운에 눌려 나는 꾹참고 말았다. 틱스님은 좋은 사람이었으나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소하고 쉽고 또 원시불교의 본질에 가까운 멧세지를 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산촌의 자리를 떠서 안국동로타리의 관광버스있는 곳까지 틱스님을 동반했다. 내가 계속 질문을 던지자 주변에서 계속 말씀하시지 말라고 스님께 압력을 넣는다. “걷는 것 그 자체를 느껴보십시오. 걷는 모든 순간에 행선(行禪)을 실천하십시요.” ―저도 스님처럼 걷는 것만 느끼고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로타리까지 묵언중에 같이 걸었다. 버스앞에서 무심코 스님은 나보고 같이 올라타자고 권유하신다. 한상무와 통역원은 내가 안타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내가 옆자리에 동석했을 때, 스님은 그동안의 냉대가 미안하다고 느꼈는지 내 수첩을 달라고 하시더니 그곳에 또박또박 한자로 다음과 같이 쓰신다. 地行神通, 步步淸風起, 步步蓮花開. 땅을 밟으니 신기가 통하네, 걸음마다 맑은 바람이 일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노라. 그래서 나는 곧 다음과 같이 필담에 응했다. 天地人皆無心, 何有風起蓮開?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무심한데, 어찌 바람일고 연꽃핀다함이 있을손가? 그랬더니 스님은 아무 대꾸도 없이 빙그레 말문을 닫아버리신다. 나는 이어 여쭈었다. ―왜 월남에는 안가십니까? “현 공산정권에는 종교적 자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때로 진리를 두려워합니다. 조국의 마음이 열릴 때가 오겠지요.” ―두번째 오신 한국의 인상은? “투 얼리 투 쎄이(Too early to say)” ―진정한 평화의 힘을 우리 국민에게 선사해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아멘. 나는 틱스님이 훌륭하신 스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국민이 다시 한번 깊게 새겨야 할 것은 종교사대주의·문화사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나라 불교전통이야말로 세계 어느곳 보다도 원시불교의 공동체정신이 잘 보존된 상가(僧伽 sam·gha) 화합중(和合衆)이며, 검증안된 최근의 구미공동체의 사례보다 더 확고한 전통의 기반을 갖는 검증된 개방된 토착공동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절간을 특수 출가자들의 문화외적 집단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산산곡곡에 박혀있는 5대총림 25교구본사가 모두 1700년동안의 시험을 거친 아름다운 우리문화속의 생태공동체이며 인류사의 고귀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틱스님의 열풍도 좋지만 이 순간 고적한 산사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는 우리나라 수행승의 진실이야말로 더 고귀한 평화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