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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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croce)
날 짜 (Date): 2003년 3월 15일 토요일 오후 04시 45분 30초
제 목(Title): 다 버리고 산다는 것의 의미


집착을 놓아라, 다 버려라...하는 뜻은
다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경봉 큰스님 말씀 중에 이런 법어가 있습니다.
"지극히 고요해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곧 통한다."

무엇이 고요해져야하는가?
우리 자신입니다. 마음이라고도 하죠.
마음에 혼탁한 것들, 가령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가득차 있는 것들을 버려라는 것입니다. 탐욕을 버린다고해서
현재 갖고 있는 재산과 처자식들, 명예 따위를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겠지요? 단지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은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강물이 지극히 고요해지면 혼탁하던 구정물에 잡스러운 진흙이
가라앉아 윗물이 맑아지듯, 마음도 맑아집니다. 온갖 근심걱정들이
가라앉으면서 지혜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지혜가 밝아지면서 통하게
된다...즉 확철대오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달빛이 강물 밑바닥까지
훤히 비추게 되면 자신의 성품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 되어 생사에
해탈하게 된다고 하지요. 말 그대로 육신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자유자재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보물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초월한 영원한 자유... 상상해보세요. 그 어떤 부귀영화도 육신이 병들어
죽고나면 내 손을 떠나야하는 것입니다. 잠들면 의식을 놓쳐버리고, 죽으면
업식에 따라 사생육도를 순회하며 윤회하게 됩니다.

이러한 해탈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고요한 
경지까지만이라도 수행을 통해 맑음에 도달한다면 한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과 분노, 단견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두뇌가 명석하고 많이 배웠다해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듭니다. 반면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학식에 관계없이 사물을 깊게 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禪이 
경전공부보다는 수행에 더 중요성을 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불교를 허무주의라거나, 염세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불교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피상적인 종교나 철학이 아닙니다. reality로 
말하자면 오히려 우리가 매일 부닥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 한낱 꿈인 
것이지요. 죽음의 경계에 닥쳐서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중심을 찾는 길,오직 
불교에 있습니다. 오직 불교만이 진정한 reality를 말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간혹 밝음이나 맑음의 경지까지 인도하는 종교나 철학이 
있습니다만 '통함'까지 도달하여 완전한 해탈을 말해주는 것은 불교 밖에 
없습니다. 일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세계에에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천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가더라도 업의 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이야기하죠. 중국에 한 신선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아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젊었을 때 연명술에 관한 책을 구한 후 
도를 닦아 장생불사의 신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큰 스님이 쓰신 글귀를 
보고, 법회에 몰래 들어갔는데, 그 스님이 법회를 시작하면서 법도둑이 들었다 
어서 나와라, 하자 앞에 나가서 이런 저런 법담을 물어봅니다. 큰스님은 이 
신선에게 설법을 해줍니다. 설령 장생불사의 신선이라 하더라도 결국 空에 빠질 
뿐이라고 이야기를 해준 뒤, 막힌 곳을 풀어주어 신선을 해탈문으로 인도했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 역시 경봉 큰스님의 법어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도의 
한 성자 역시 비슷한 일화가 있지요. 히말라야에서 초능력을 부리는 요기가 
성자 앞에 나타나 이런 저런 초능력을 과시했다가 이 성자의 지혜와 감화력에 
자신의 잘못된 길을 뉘우치고 바른 깨달음의 길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이야말로 지고의 초능력이라고 라마나 마하리쉬는 말합니다. 
불교는 이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 속에 감추어진 달, 탐진치 3독과 온갖 
번뇌로 밝음과 지혜를 드러내지 못하는 주인공을 이야기합니다. 태어남도 없고 
변함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 오직 이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집착을 버려라, 그럼 
어찌 살란 말이냐? 불교에서 집착을 놓는 것은 자연스레 일어나는 과정일 뿐 
그것이 목적은 아니지요.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은 불교가 가리키는 방향 끝에 
있는 그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마치 억만장자에게 상한 죽 
한그릇 동냥하는 불쌍한 거지와 같은 것이지요. 

질문하신 분은 불교에 대해 좀 더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라...이것은 불교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절대 불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이며 
영원불멸하는 귀중한 보배를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보면 사람 
사람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도 없지요. 천만금을 준다해도 이것을 깨워내지 
못한다면 한 평생이 하룻밤 꿈과 같은 것입니다. 이 육신을 잃게 되면 다시 
불법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과 생이 더 걸리는지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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