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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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Param (파람)
날 짜 (Date): 2002년 9월 28일 토요일 오후 06시 08분 14초
제 목(Title): 퍼온글/ 도올강의 1.2 


*제가 쓴 것이 아니라 시청자게시판에서 퍼온겁니다. 
어느 분이 쓰신 강의요약 필기입니다. *

 제1강: 인도문명의 세기둥 Summary(1) 작성자 | dayseekh  
 
  조회수 | 278 작성일 | 2002/09/27 07:11:15  
 
 
 
유료화 관계로 강의를 못보신 분을 위해 여기 제1강의 내용을 올립니다. 실수가 
있더래도 양해부탁드리며 유익한 자료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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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와의 만남과 관련된 도올의 에피소드
* 인도를 방문하고 몇일 뒤에 일어난 미국 9.11 테러 사건(뉴욕 쌍둥이 빌
딩 바로 밑에서 3개월동안의 뉴욕생활....월드 트래이드 센터 빌딩은 
minimalism의 극치였다.) 
* 부처님의 대각지 보드가야에서 열린 칼라차크라 행사 참여를 접고 도올 
과 이틀간 사상적 대화의 만남을 가진 달라이 라마

-인도라는 나라는 우리에게있어서 늘 관념속에 살아있는 환타지와 같은 곳이
다...

- 동승동 도올 한의원을 찾아온 어느 젊은 여성의 하소연( 사귀고있는 남자와 
자신의 사주에 '충이 꼈다'는 어느 스님의 말에 절망하는 혼인을 앞둔 
여성)---불교라고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대해서도 인간의 운명에 대해 
결정론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스님은 불교의 근본도 모르는 
불학무식한이다.

-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업이라는 말은 인도 범어 까르마(Karma)의 
한역이다. 까르마의 본래적 뜻은 무엇을 행한다 (영어의 do에 해당함)라는 
뜻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항상 보를 수반한다. '보'라는 것은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업'이 있으면 '보'가 수반된다. '업보'라는 개념은 과거 
나의 행위에 대한 결과이다. 이런 과거 행위에 대한 결과에 대해 '과거'라는 
입장에서 볼때는 숙명론적이거나 결정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과거의 
모든 업이라고하는 생각은 인도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였다.

이 업이라고하는 관념에 의해 생겨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인도 사람들은 
'윤회'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업이 없다면 윤회라고하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윤회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 윤회를 한다는 것....윤회란 문엇인가? 

윤회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삶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인도적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다. 중국문명(유교문명)에서는 
윤회라는 것을 전제로 죽음 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서양문명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은 죽지않고 계속 살아 저 하늘나라라고하는 곳으로 간다는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다시말해 어떤 초월적 셰계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 인간의 영원성을 부여하고 잇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문명은 이런 
기독교의 초월적 세계는 없고 대신에 '역사적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 
인도문명의 이 윤회사상은 한마디로 초월적 세계와 역사적 세계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문명-----------역사적 세계 (현세적 입장)
인도문명-----------계속되는 죽음을 전제로한 윤회적 세계 
서양문명-----------초월적 세계(일회적 죽음)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가 인생을 살면서 자율적으로 도덕적이 된다는것이 매우 
어렵다. 다시말해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이 되려고 한다는게 이게 무척 어렵다는 
말이다. 왜냐? 인간에게는 '욕망'이라고 하는게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남을 해쳐서 까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우리가 일상사를 
살면서 이 욕망은 도덕적 양심보다 강할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부조화한 인간이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을 어디로 부터 받느냐?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과 종교와는 엄청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나는 본다.

* 도덕적 압력을 받는 방식 

서양사람들(기독교 등)----------> 신 으로부터 (초월적세계)

동양사람들(유교)--------------> 역사 로 부터 (역사적 세계)

인도사람들(불교 등)------------> 윤회 로부터 (윤회적 세계)

 
 
 제1강 세기둥 Summary(2) 작성자 | dayseekh  
 
  조회수 | 290 작성일 | 2002/09/27 07:58:29  
 
 
 
윤회사상은 내가 현재 선업을 싸으면 다음생에 좋은세게에 태어난다는거고 내가 
지금 잘못한 업을 쌓고 있으면 다음 세대에 좋지않은 것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과보'로 '업'을 생각할 때 이것은 '숙명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앞으로 내가 선업을 쌓아서 미래에 이러이러한 바람직한 것으로 윤회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매우 '혁명론적'인 생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불교의 윤회사상은 '철저히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렇게 볼때 불교는 숙명론이 아니라 혁명론이다.

내가 싯달타의 이런 생각이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당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진 '숙명적 업'을 '혁명적 업'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싯달타는 
카스트제도의 최 하층 대중에게 설법을 통해 "너희들도 좋은 선업을 쌓으면 
최고계층으로도 윤회될 수 있다"고 토로했던 것이다.

내가 선한 행위를 통해 선한 과보가 따른다면 이세상 문제될게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선업에 대해서 악과가 생긴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럴때 
사람들은 좋은 일을 했는데 왜 나쁜 일만 벌어지는가?라고 반문할 때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기독교는 이문제를 아주 분명하게 해결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 비록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이고통은 하느님께서 꼭 보상해 주신다. 선업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절대적 명령이고 또 이명령에 반드시 인간은 
순복해야된다..."라는 식의 설명이다. 이런 문제해결방식을 보여주고 있는게 
구약의 '욥기'라는 책이다. 이런 생각들이 초기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이 핍박과 
환란을 극복하는 논리였다. 

불교에서는 내가 좋은 일을 했는데 나쁜 결과가 나왔다라고 한다면 "너가 오늘 
재수가 없고 나쁜 결과가 나온 것은 너가 과거에 나쁜 업을 쌓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좋은 일들로 업을 쌓게 되면 앞으로 기나긴 
윤회를 통해 반드시 너의 선업이 보상받게된다....그러므로 선하게 
살아라!"라는 논리로 설명되어진다. 이 윤회라는 억겁의 시간을 도입하면 
오늘날 내가 하고 잇는 억울한 과실과 결과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 해결된다.

기존에 많은 사람들이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 "초윤리적이며 모든 것을 
해탈한다"는 식으로 일관해 왔다. 

불교는 결코 해탈교가 아니다. 불교는 어떻게 이세상에 살면서 윤회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선업을 쌓아가느냐 하는 것을 가르키는 종교다. 이게 내가 
강의하려고 하는 초기불교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서양, 중국, 인도 문명들이 각각 독특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공통된 인간의식의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태까지 세계문명을 바라 볼때 너무 일면식에 치우친 감이 
많앗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 하나에 집착해 다른 것을 배척해 
버리는.....기독교는 기독교대로, 불교는 불교대로 말이다.

공통된 사회적 윤리들에 대해 이들 고등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이제는 서로 깊이 이해하는 시점에 잇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2강 싯달타와 세종 summary(1) 작성자 | dayseekh  
 
  조회수 | 120 작성일 | 2002/09/28 07:39:52  
 
 
 
- 석가모니의 이름, 싯달타 

싯달타(Siddhartha)는 이름이다. 한자어로 '실달(다실 이룰달)'로 중국인들은 
표기하는데 그뜻이 재밋게도 '다 이루었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에 했다는 바로 그말이다. 싯달타는 기독교의 예수라는 이름에 해당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얻게 되드시 싯달타도 후에 '붓다'라는 호칭을 
받게 된다. '붓다'라는 것은 결코 이름이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었고 
싯달타는 붓다가 된 것이다. 

예수(본명)----------------->그리스도(Christ, 기름부음을 받은자,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된자)

싯달타(본명)--------------->붓다(Buddha, 깨달은 사람)

그리고 싯달타의 성은 고타마(Gotama)이다. 그의 Full Name은 고타마 싯달타가 
되겠다. 

- 석가의 전기 석보상절의 뜻 

석보상절의 석은 샥카(Sakya)의 준말이다. 이 샥카라는 것은 '고타마씨가 
속해있는 종족'이름을 말한다. 석가 모니의 모니 즉 문니(muni)는 '성자'를 
말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즉 샥카문니(Sakya-Muni)란 말은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석보란 싯달타의 족보를 말하는데 오늘날 우리의 그런 족보같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석가모니의 전생들을 포함한 그의 일대기를 담고있다.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에게는 조선을 창건한 후 다스릴 정치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존 불교를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분명 꾸려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 유교문화권에서 왜곡된 '해탈'

불교는 '윤회'라고 하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삼고 있다. 이 윤회는 업을 전제로 
하는데 이 윤회라고 하는 것은 결코 즐거울 수 없는 괴로운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이 윤회라고 하는 걸 참 괴로운거라고 생각했다. 기나긴 윤회의 
억겁년을 통해 죽은 사람이 또 죽고....또 죽고...또 죽는....생각만해도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바로 이 윤회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했다. 해탈이란 
윤회의 옷을 벗는다라는 것이다.
-------------------------------------------
인도인들의 사유적 구심 

업-----------윤회-------------해탈 

-------------------------------------------
그런데 이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 결단코 집단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선지가, 필유여경(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남아 
돌아가는 경사가 있다.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가 문제다.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최대로 왜곡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윤회의 주체를 개인에서 가족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입시철만 되면 우리나라 절간이 기도하는 아낙들로 북새통을 이루지않나. 
한국의 불교인들은 업보의 단위를 가족단위로 생각하는데 그리고 윤회를 한 
울타리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결단코 불교이론이 아니다.

-불교는 철저히 개인적 '실존주의'철학 

불교라는 것은 서양 아리안 계통의 철저한 '개인주의'에 서있는 것이다. 아주 
치열한 개인주의에 서있다. 나의 업보는 나 개인에 국한된다. 미래의 내가 
태어나는 것은 나 개인의 문제지 내 어머니의 문제도 내 새끼의 문제도 결코 
아니다. 전혀 관계가 없다. 자기의 업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는 철저히 '개인적 실존주의 철학'이다.

그리고 집단이 성불하는 것이 아니다. 나 개인이 성불하는 것이다. 내가 
성불하는 것이다. 성불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큰일날 일이지만....내가 성부 성자 성신 즉 3위 일체 
모두가 된다는게 바로 불교의 '성불'이다. 바로 부처가 되는거다.

따라서 불교윤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조직의 윤리를 갖추어 낸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 가만히 스님들을 보면 다 잘났다라고 하지 않는가....전부 개인주의다. 
통제가 잘 안된다. 이들은 전혀 조직성이 없다. 이러한 개인적 윤리를 가진 
불교를 가지고 새로운 어떤 질서있는 조직국가를 만들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한게 바로 이성계였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던 가운데 치고 나온게 바로 
'주자학'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중국으로부터 알게 되었고 그걸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주자학이라는 이 이데올로기는 바로 
불교를 까면서 치열한 선비들의 도덕적인 의식과 엄격한 윤리적 구조를 가진 
인간관계 속에서 사회를 새롭게 조직해 나가는 대단한 철학이였다. 이런 새로운 
조선의 시스템을 만드는 오피니언 리더들 뒤에 바로 위대한 사상가 '정도전'이 
있었다.

-세종의 패러다임 쉬프트 

조선왕조는 어떠한 개인주의도 아닌 새로운 윤리체계인 가족주의 즉 가족의 
윤리를 가지고 조상숭배와 제사라는 매우 세속적 윤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세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조직한게 바로 '집현전( 
세상의 현명한 사람들을 모은 곳)'이다. 여기서 현자들이란 사서오경에 통달한 
유생들을 의미한다. 즉 유자들이다. 바로 집현전의 탄생은 바로 공맹지도에 
의한 유교국가 건설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불교국가의 평등구조에서 왕 
중심의 수직구조로 바꾸는 작업이였다. 바로 패러다임 쉬프트 (Paradigm 
Shift)가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하이어라키의 권력 구조변경, 교육제도 개편, 과거제도의 도입 등 등 그리고 
절간이란 절간은 모두 문을 닫게하고 사원에 소속된 토지들을 몰수해 버리거 
스님들을 환속시키고 하는 등 등의 엄청나게 나라를 조직해 나갔다. 이렇게 한 
국가의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였다.

또한 부녀자들이 고려시대는 아무꺼리낌없이 절간이나 외부출입을 
자유롭게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를 금지시키고 아녀자들을 집안 깊숙이 
유폐시켰다. 이로인해 '가옥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남편은 사랑채로 아내는 
안채로 분리되어 각방을 쓰게되는 가옥구조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바뀌였다고 하는 것은 일개 왕조의 변화만을 
의미하는게 아니였다. 그것은 가히 엄청난 변화였다. 마치 구한말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만큼의 똑같은 수준의 변화가 바로 조선 건국을 통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이런 새로운 유교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판에 세종은 새로운 통치수단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들게 된 것이 한글창제였다. 한문으로는 분명한 한계를 
느끼게 된 세종은 우리말로 직접 대중들과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말이다. 세종의 이런 발상은 우리나라에 방송국 몇개를 세우고 또 몇천개의 
채널을 늘리고 하는 그런 수준의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어마 어마한 
발상이였다. 대부분 유자들은 세종의 이런 발상자체를 매우 흉칙한 것으로 
치부했다. 한문이라고 하는 것은 위대하고 한문을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중국이라는 고도의 문명과 세계 보편적 질서에 편입되어 권위를 부여받는 
것인데 그 무슨 흉칙한 '언문'을 만들어서 난리를 치느냐는 역풍이 신진 
주류측으로 부터 엄청났다. 집현전 유자들 모두가 반대했다.그런 가운데 세종은 
일군의 어린 소장파 학자들(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 )을 조직해 한글을 
만들어야 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해 문화적 독립을 기치로 한글을 몰래 
몰래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2강 싯달타와 세종 summary2 작성자 | dayseekh  
 
  조회수 | 87 작성일 | 2002/09/28 10:42:25  
 
 
 

- 국가적 대사업으로 탄생된 불교 언문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한글을 창제한다는 것!... 사람의 말을 표현할 어떤 집을 만든다는 것!...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디자인해 만들게 됐다. 유교국가를 위해 사상의 
구심점이 될 집현전을 세운 세종은 이 한글을 만든 후 3개의 책을 만들게 된다. 
하나는 용비어천가(왕실에 대한 권위를 부여한 책) 그리고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다.

세종은 수양과 안평에게 석보상절을 지을 것을 명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교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어렵게 만든 글자 한글을 가지고 
첫번째로 국가적 대사업으로 작업한게 붓다의 전기를 쓰는 작업이였다고 하는 
사실이 말이다. 공자의 전기가 아니라 붓다의 전기라고 하는데 그 특이성이 
있다. 

이것은 당시 국가 권력에 의해 불교가 탄압을 받고 있었지만 국가 권력에게 
압력을 가할 정도로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있었다는 얘기다. 민중들이 알고 
싶어했던 것은 공자가 아니라 바로 붓다였다는 얘기다. 정권은 바뀌였을 망정 
그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수양과 안평을 시켜 석보상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참으로 대단하다. 세종이 
이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시로 만든 것이 바로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지곡의 뜻은 달이 천개의 강에 도장처럼 박힌다(비추인다)라는 건데 
달이란 여기서 부처님을 가리키고 그부처님 한분이 모든 천개의 강에 비춰 
나오듯이 세종이 서사시처럼 부처님을 칭송해 부처님의 생애를 엮어 노래부를 
수 있도록 만든 찬불가인 것이다. 이게 월인천강지곡이다. 내가 월인천강지곡을 
보면서 느낀게 밀튼의 '실락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위대한 작품으로 느꼈다. 
이 작품은 붓다에 대한 엄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매우 위대한 
서사시다....내가 보기에 세종이 직접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실은 수양과 안평의 배후에 있는 세종이 아주 사랑한 대단한 당시의 
불교학자가 있었다. 그사람이 '김수온'이라는 사람이다. 이사람은 집현전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앗던 사람이지만 세종이 참으로 아꼈던 사람이다. 이사람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였고 불가와 유가에 모두 달통한 사람이였다. 대장경을 다 
읽었고 십삼경을 다 섭렵한 사람이였다. 당대에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아마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기본은 내가 보기에 김수온이라고 하는 사람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왜냐 이작품들의 수준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불교를 민중에게 이해시키려 했던 유교인 '세종' 

우리나라의 이런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세종은 철저하게 
유교적 이념을 지향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교를 옹호했다는 것이다. 이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20세기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개화의 물줄기(주도권)을 거머 쥐게 
된것 처럼 당시 국제정세가 불교갖고 나라꼴을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는 
얘기이다.강대국과 어깨를 겨뤄야 하는 마당에 이념적 노선을 고리타분한 것 
가지고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새로운 정치 이념인 유교국가로 그틀을 
바꿔야 됐던거다.

세종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정치 이념이 바뀌어 갔지만 즉 유교 
이념으로 바뀌어 가면서도 불교를 철저히 민중에게 이해시킬려고 했던 바로 
그점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이땅에 과연 세종과 같은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가? 20세기 한국기독교 안의 지도자급 사람들이 불교에 관한 위대한 
작품을 남긴게 과연 있는가? 이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런 세종을 
보면서 우리민족이 얼마나 다양성을 포용하면서 항상 어떤 복선을 깔고 있는 
그런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세종의 위대함이 있다고 본다. 

-한국의 종교문화 이해-샤머니즘, 불교, 유교, 기독교 

우리 한민족을 이해 할 적에 반드시 언급되는게 샤머니즘인데 마치 이 
샤머니즘은 화산의 용암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본다. 고래로 부터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층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 흐르며 깔려 있는게 이 샤머니즘이다. 
우리민족의 충동적 에너지 속에 이 '무끼(무속적 끼)'가 있다고 나는 본다. 
최근 이런 극명한 무끼를 보여줬던게 바로 '월드 컵 열기'였다. 마치 무당의 
광기처럼 모두가 박수요 무당이 되지 않았던가!

고대 우리민족이 이런 샤머니즘의 흐름 속에 있다가 이 표층을 최초로 덮은게 
바로 불교였다. 신라를 통해 유입되게 된다. 그리고 불교라는 지층 위에 무엇이 
들어오게 돼ㅅ느냐 바로 유교가 들어 왔다. 여기에 20세기 들어와서 기독교가 
덮어 씌어졌다. 이게 우리민족의 간단한 정신적 역사다.

그런데 재미잇는 것은 기독교는 내가 보기에 가장 샤머니즘과 친화력이 강한것 
같다. 유교와 기독교는 정말 잘 배합이 안되는 이념들이다. 유교가 기독교를 
볼때 그것은 한마디로 '무당 지껄이'로 보여졌던게 사실이다. 교회안에서 
박수치고 찬송부르고 열광하고 하는 그런 모습을 유자가 볼때 말이다. 그러나 
샤머니즘이든 불교든 유교든 기독교든 이모든 것은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우리 
것이 되었다. 우리의 풍토가 되었다. 

20세기를 통해 기독교는 외부에서 들어 왔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의 본질이 외국에 나가 배워와 정말 열심히 
소개되었다. 그결과 20세기에 들어와 세계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기에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교회들이 들어 섰지 않않았나! 
지구상에 이런 유래를 찾아 보기 어렵다. 그렇게 방대한 대륙 중국을 그렇게도 
기독교가 공략했었어도 현재 기독교인 수가 아주 극히 미미할 따름이다. 세계 
강대국 중 하나인 일본을 선교사들이 공략했지만 기독교인 수는 전체 인구 1%도 
못미치는 숫자에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구 절반이 기독교인이다. 
세상에 이런 기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유교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불교를 
어떻게 봐야 되느냐? 무속(형태없는 샤머니즘)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이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들이지만 나는 그동안 여러 
강의들을 통해 이 물음에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번 불교 강의도 
이 강좌를 통해 "어떻게 이 불교문화를 본질적으로 이해 할 것인가? " 하는 
물음의 해답을 찾으려고 마련된 것이다.

우리민족의 문명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불교문화'! 
우리나라 문화재의 80%가 바로 불교문화재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잇는가? 결국 불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해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격문제다. 

나는 대학시절 "3교통일 3교합일로서 유 불 도 3교를 알아야만이 비로서 
동양철학자다"라고하는 매우 개방적인 학풍을 받고 공부한 사람이다. 그래서 
편견이 없이 공부햇다. 젊은 여러분들은 이렇게 폭넓게 공부하고 편견없이 
공부해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문명을 새롭게 이해하고 이러한 뜻을 포괄해 우리의 21세기를 
어떠한 패러다임으로 만들느냐?하는 것이 바로 여기 모여 공부하는 
소이연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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