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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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2년 8월 20일 화요일 오전 01시 06분 15초
제 목(Title): Re: '뇌'와'마음'


불교에서는 의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의문자체를 없애도록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면 의문이라는 것이 본래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죠. 
수행이라는 것을 크게 본다면 모든 육체적 정신적활동들이 다 수행의 
대상입니다. 밥먹을때 숫가락을 드는 행동에서 부터 길을 걸어갈때 발을 내 
딛고 방문을 열고 닫고 하는 모든 일상적인 행동들도 수행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수행이란 견성이후에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견성하기 전에 하는 수행은 수행이라고 하기 어렵죠.  왜냐면 자기자신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는 행동은 결국 에고(ego) 즉 자아가 개입된 상황에서 하는 
행동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수행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진정한 수행은 '나'라는 것을 완전히 배재하고 뭔가 깨우침을 바라는 욕망 
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는 일체성현들은 무위로서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길을 간략하게 그려놓은 것에 '십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깨우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소를 찾아 
헤메이다 소를  찾아 길들여 다시 집에 오니 자기 자신은 본래 그자리에 있었고 
소도 없고 나도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면 뭐하러 소를 찾아 헤메일까하고 의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를 
찾아 헤메이지 않으면 본래자리가 깨우친자리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래자리에서 '나'라는 생각 '내것' 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비웠다면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를 길들이는 단계에서 소를 잊는 단계로 어떻게 
가는가하는 점이 십우도에서 생략되어 있는데 .
소를 길을 잘들이면 도망가지도 않고 말을 잘 듣습니다만 조금만 한눈을 팔면 
남의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망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그런일이 없을 
정도로 아주 길을 잘 들이게 되면 소에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가 됩니다. 그러면서 차츰 소도 잊고 소를 생각하는 '나'도 잊게 됩니다.

도마복음서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이 나오는데 82절에 보면 
예수가 말하길 '누구든 내 곁에 있는 사람은 불 옆에 있는 것과 같고, 누구든 
나에게서 멀어지면 천국에서 멀어진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을 따르게 되면 불에 가까이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인데,  불에 
가까이갈수록 내 자신이 불에 타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불에 타는 것은 '진아'를 둘러싼 거짓자아 즉 에고(ego)가 
타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타서 텅 비었을때 예수와 제자는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서 108절에 보면 예수가 말하길 '누구든 내 입을 통해 마시는 
사람은 나처럼 될것이고 나 자신도 그 사람이 되어질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말은 곧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자아가 다 타버리고 그 불길이 진아에 이르렀을때 깨달음의 
불꽃이 전달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불가에서는 등불을 전한다는 의미의 
'전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수행이란 '자아'라는 짐을 짊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없는 상황에서 순수한 불성의 작용으로 모든 일상사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남전선사는 조주화상에게 '깨우친 다음에는 밭가는 소가 
되거라.'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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