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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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6년01월28일(일) 16시24분00초 KST
제 목(Title): 참선의 시작과 끝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수행형태가 아닙니다.
선종에서 "선"이라고 말할 때의 선은 일상적인
"선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는 수행형태의 모습을 취한
"선정"에 대하여 석존의 선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선종에서 "선"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의 선은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도란 말은 외도의
반대이고 외도는 곧 도저히 깨칠수 없는 잘못된
가르침 혹은 잘못된 사고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외도가 무엇인지를 알면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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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친 후의 복귀

부처님께서는 깨치신 후에 어째서 자신이 수도 없이
오랜세월을 종교적인 정신병속에 있었어야 했는 지에 대한
전면적인 거슬러 가는 과정을 진행합니다.

거기에서 찾아낸 것이 사유방식과 존재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틀의 오류였음을 밝혀냅니다.

그러한 오류적인 인식을 말하는 것이 곧
"범아일여"입니다. 즉 범아일여는 모든 외도법의 근본이
됩니다. 범아일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이
명상주의와 고행주의 입니다.
오늘날의 기공이나 단학 혹은 수식관등의 비파사나는 모두
명상주의 입니다. 또한 세속을 멀리하고 몸을 학대하는
것은 모두 고행주의 입니다.

부처님께서 형태상으로 외도라고 비판한 대표적인 것이
이 명상주의와 고행주의 입니다.
그리고 형태적인 외도의 내용의 근본은 "범아일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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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아일여란?

"범"이란 브라흐만입니다. 브라흐만이란 우주의 주재신을 말합니다.
"아"란 아트만입니다. 아트만은 곧 우리들 각자의 개체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범아일여란 것은
태초에 우주의 주재신인 브라흐만이 있는데 이 브라흐만이
아트만인 개체생명을 만들었으니 아트만의 근본은 브라흐만이므로
아트만이 열심히 노력하면 브라흐만과 정신적인 합일을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사고방식은 모든 외도법의 근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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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아일여에서의 파생되는 외도적 정신병

1. 조물주가 있어서 생명을 창조했다.
   == 조물주가 "범"이고 창조된 생명이 "아"입니다.
2. 육신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진리에서 멀어졌으니
   육신을 학대하고 제어하면 순수의식에 들어간다.
   == 순수의식이 "범"이고 육신이 "아"입니다.
3. 태초에 무극이 있고 무극에서 태극이 생기고
   음양이 생기고 생명이 생겼다.
   == 무극이 "범"이되고 음양등이 "아"입니다.
4. 중생이 노력해서 부처가 된다.
   == 이럴때의 "부처"가 곧 "범"이고 중생이 "아"입니다.
5. 우주의 기가 있는데 우리몸의 기는 이 우주의 기와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기 수련을 하면 우주적인
   기를 받아들인다.
   == 우주의 기가 "범"이고 우리 몸의 기가 "아"입니다.
6. 인생은 운명에 의해서 좌우된다.
   ==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곧 "범"이고 운명에 빠진 인생이 곧
   "아"입니다.
7. 영혼에는 단계가 있어서 같은 생명이라도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다고 말하는 계급적인 생명의식
   == 이것은 결국 "아트만"이 노력해서 "브라흐만"으로 간다는
   사고방식과 동일합니다.
   
이외에도 정신병적인 외도적인 사고는 많지만
모두 한결 같은 것은 어떤 것과 어떤 것이 서로 다르다고 하면서
둘을 같게 만들겠다고 하는 정신분열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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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발생

불교란 위와같은 정신병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집단도 만들어지면 곧 바로 범아일여적인
외도의 길에 들어갑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라서
초기의 석가모니의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외도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곧 계급의 탄생입니다.
부처와 중생사이에 성직을 두는 식의 체제 중심적인 모습이
생깁니다. 그래서 성직을 통해서 부처로 접근할 수 있다는 생명에
대한 규정적인 종교형태가 발생합니다. 이와같은 불교를
소승불교 혹은 상좌부불교(성직 우선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할 때에 원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장한 완전한 생명평등
정신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종교운동이 일어납니다.
다시 싹튼 "범아일여"적인 오염된 삶의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통하여 근본을 회복하여 생명회복을 시도하는 운동입니다.
용수보살을 주축으로 하여 재가자들이 일으키는 이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합니다.

대승불교는 곧 부처님의 근본 정법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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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발생

이러한 대승불교가 중국과 한국 일본에 들어왔는데
대승불교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범아일여적인 종교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승려는 제사장으로 변모하고 온통 절에서는
복이나 빌고 내세의 안녕이나 기원하는 형태의 불교가 됩니다.
이러한 때에, 먼저 그와같은 잘못된 불교의 중심에서
견디다가 못해서 뛰쳐나온 "달마"라는 인도분이 중국에 와서
아직 완전하게 오염되지 않은 중국불교를 일으키는 근본주의
불교운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선종"입니다.

즉 선종에서 말하는 "선"이란 정신병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앉아서 호흡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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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범아일여"적인 사고 방식이
있으면 그 사고 방식을 날카로운 칼로 잘라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어딘가로 정신적인 수준을 높여 나간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곧 "범아일여"적인 사고
방식일 뿐, 진리에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하고 있어도 사유방식이 범아일여적이지 않으면
그것이 곧 참선이고 좌선을 한다고 앉아 있어도
무엇가 높은 정신의식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어떤 것을
보겠다고 하면 곧 참선이 아닙니다.

방하착이란 말은 참선의 특성을 말하는 아주 대표적인
말입니다. 방하착이란 말은 곧 "내려 놓는다"라는 말로
어딘가로 정신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그 마음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실체를 찾겠다고 헤메이는
마음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즉 높은 것과 어떤 가상적인 실체에 대한 탐구
포기와 중단을 이끌어내는 것이 곧 참선이고
모든 외도적인 행동에서 탈피하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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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를 추구하게 되는 근본 원인은?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중생이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육체생명이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죄의식에서 나옵니다.
자신의 영혼이 현재의 정신과 다른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딘가에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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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대부분 시중에 나와있는 참선 입문서는 모두 수행법을 
말하고 있지 참선을 제대로 말하고 있지 못합니다.
제가 여기서 이렇다 저렇다 말해도 참선은 무엇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곧 참선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말하는 입문서는 완전히
참선과는 정 반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을 찾는 길이 먼저입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생긴 이후로
역대의 부처와 선지식들 중에 참선방법론을 가르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참선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알아둘 것은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보다 조금 높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 속아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범아일여"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만큼 하면 "범"에 조금 가까워졌다고
말하면 천명이면 구백구십구명이 속아 넘어갑니다.

그래서 요사이에
그런 것을 이용하는 온갖 종교와 명상법 도인술이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기꾼 조차도
대량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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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데체 참선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벌써 어떻게 하고 의문이 들면 틀린 것입니다.
어떻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와 "무엇"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집요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곧 참선입니다.

삶의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삶을
떠난 다른 어떤 것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 그 속에서 배경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와같은 기본적인 마음속에서
경전을 보아도 참선이고
염불을 해도 참선이고
절을 해도 참선이고
예경을 해도 참선이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아도 참선이고
자면서 꿈을 꾸어도 참선이고
온갖 일상의 모든 것이 다 참선입니다.

그러나 참선을 목적성으로 보거나 어떻게 하는가라는
방법론에 기초한다거나 어떤 단계위에 어떤 단계가 있다라는
형태의 사다리 꼴의 수행 단계론을 기반으로 한다면
밤새 앉아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도
잠시도 참선을 한 것이 아니고
꿈속에서 부처를 열심히 찾아도 한 순간도 참선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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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깨닫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
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쉬운 것이 도이지만

만일 범아일여적인 인식틀은 하나도 없앨 생각은
하지 않고
참선 아니라 기공 단학 명상 등을 아무리 해도
"도"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인식틀에서 벌어지는데
인식틀은 고정시켜 버리고서
참선을 한다는 것은

항아리를 내버려주고 항아리의 내용물을
물에서 간장으로 간장에서 된장으로
된장에서 다시 물로 끊임없이 내용물만 바꾸면서
참으로 어려운 것이 진리이구나
참으로 어려운 것이 불법이구나
아무리 항아리안의 내용물을 바꾼다고 해서
항아리밖을 알 수는 없는 법....

항아리만 깨어버리면
됩니다.

이것이 참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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