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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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Enlight (D.S.)
날 짜 (Date): 2001년 6월 26일 화요일 오후 11시 53분 23초
제 목(Title): 견성과 수행에 관하여


   견성이후에는 수행에 급진전이 있게 됩니다.  견성이전의 수행은 진정한
의미의 수행이 아닙니다. 왜냐면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해도 사도를 걷는
다면 오히려 견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평등한 마음을 보면 그
순간 견성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무슨 특별한 묘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견성을 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수행 아닌 것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돈오 이후에 점수가 따른다고 한것 입니다. 
깨달음은 순간에 이루어 지고 수행이란 깨달은 후에 점진적으로 닦아나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오돈수가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전생부터
닦아온 근기가 높게 쌓인 후에나 가능하기때문에 돈오점수가 일반인들에게
가장 적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견성 이후에는 모든 행동이 마치 수행하듯이 이루어 지는데,
이것을 무위(無爲)라고 하며, 그뜻은 수행을 해야한다는 목적의식을 두지
않고 일상생활 자체가 수행하듯이 자연스럽게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중용에서는 이것을 신독이라고 표현하는데, 비록 혼자 있을때라도
예(禮)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수행을 한다고 하면 굉장히 노력해야 하고
집중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고 피곤하리라 생각하는데, 만약
이런것이 수행이라면 이것은 유위(有爲)의 수행이 됩니다. 무위의 수행은
흔히 함 없이 한다고 하는데, 이말은 모든 지각이 굉장히 예민하지만 몸과
마음은 반대로 매우 이완되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민하기 위해서는
이완될수 없는 것인데, 진리란 이렇게 모순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강경 설법도 자세히 보면 전부 모순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라 하겠습니다. 이완 되어 있을때 참으로 인생을 즐길수 있으며
연극과 같은 인생을 마치 게임하듯이 살수 있게 됩니다. 이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게임하듯이 인생을 살면 굉장히 열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우 재미가
넘칩니다. 그러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더라고 자포자기하지
않고 마치 게임에 져서도 즐거운 것과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는 네가지 상을 없애라고 나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보다 논리적 표현을 들어 공사상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흔히 금강경을 대승경전의 텍스트로 삼는데, 이것은
어불성설이입니다.  왜냐하면 금강경에는 대승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으며,
흔히 소승불교라하는 남방불교에서도 금강경을 텍스트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승불교라는 말또한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이 스스로 대승불교라고 칭하면서 기존의 상좌부를
소승불교라고 칭한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금강경을 최상승 법문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소승과 대승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최상승이라고
하는 것 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공사상을 설한 반야심경에는 제혜제일 사리불이 등장하고
금강반야를 설한 금강경에는 혜공제일인 수보리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을 깨우친 수보리에게는 지혜를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에게는 공사상을 설함으로서 어떠한 발란스를 맞추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을 흔히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말하곤 하는데 제가
보기엔 반야심경의 핵심은 첫구절에서 이미 결정 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머니 구절들은 논리적 설명들로 이루어 진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첫
구절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추어 보고 모든 번뇌를 벗어났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육조단경에도
혜능선사가 처음 법문을 하신 주제가 바로 마하반야바라밀 인 것을 알수
있듯이, 견성이후의 수행은 바로 반야바라밀임을 알수 있습니다.  금강경의
수보리존자와 반야심경의 사리불은 이미 견성하여 아라한이 된
사람들이므로 이들이 보살로서 닦아야 할 수행방법을 설명한 것이 이 두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반야바라밀이란 모든 상을 떠나는 것 즉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순진무구의 상태가 되는 것과, 오온이 공하다는 것 즉 느낌과 생각의 뿌리의
실체를 바라봄으로서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을 가르킨다고
하겠습니다.  사상중에 나오는 수자상(목숨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는
문제와 반야심경의 불생불멸(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의 경계, 즉 이러한
이분법적인 것들을 규정지을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수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육조단경에 나온 설명을 빌리면, 마하반야바라밀은
마하는 크다는 것인데 엄청나게 커서 그 끝을 알수 없고 분별심으로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허공과 같아서 공이라하고 이것은 성품이 곧 공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에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바른
마음이 나오면 반야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모든게 있어서
슬기로운 마음을 내지 않으면 반야가 나올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밀이란
피안에 이르렀다는 의미로서 즉 자유롭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마하반야바라밀이란 마음에 장애가 없어서 모든것을 관조하며 취하는 것도
버리는 것도 없다는 것이 되며 이것이 곧 견성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와함께 육조단경에서는 일행삼매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가지 생각만
한다고 해서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참선하다
하더라도 화장실에도 가야하고, 밥도 먹어야하 하며, 청소도 해야하는 등
일상생활을 떠날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선할때만 반야가 나오고 생활할때는
반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평등한 마음(등각)에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보기때문에 수행이 생활이고 생활이 곧 수행이
됩니다.  따라서 번뇌가 일어날때 그것을 관조(見)하는 것이 지혜(반야,
prajna)가 됩니다. 만약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면 목석이 되어 오히려 도를
이루는 성품이 막히고, 불법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만 많아지면 삿된 견해로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속에서도 '밝게
깨어있는 의식(반야)'이 있으면 자성이 스스로 드러나 불도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선사들이 정혜쌍수를 주창한 것이 바로 평등한 마음과
고요한 관조가 서로 어우러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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