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6월 5일 화요일 오후 03시 24분 05초 제 목(Title): UGK...story 2 깨달음은 없다 (2)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입니다. 청각을 혼자 놓아두면 들리는 것은 소리의 진동뿐입니다. 이야기는 여러분 속에서 한번 반복됩니다. 마치 소리가 울리는 방 같습니다. 감각은 이런 식으로 기능합니다. 그저 여러분이 밖에서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할 뿐이죠. 정확하면 말하자면 여러분은 그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죠.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의 해석만 듣습니다. 여러분이 듣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소리일 뿐이죠. 그 진동이 고막에 닿고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됩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해석을 합니다. 듣고 있는 것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죠. 다른 사람과의 관계유지를 위해서 그래야 합니다. "여기 돈이 있어요. 당근 좀 주세요." 이 정도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전부입니다. 나눌 수 있는 의사소통의 전부이죠. 해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의 지식구조가 그 언어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상관없이 모든 언어는 같은 소리로 들립니다. 다른 것은 음절간의 간격이나 어조뿐입니다. 언어들은 서로 다른 멜로디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취향일 뿐입니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어떤 종류의 소리는 육체에 해를 끼칠 수도 있죠. 몇 데시빌 이상의 소음은 신경계를 괴롭히고 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음악이나 시나 언어에 대한 찬미는 모두 문화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관념의 작용은 촉각에도 참견을 합니다. 여러분은 몸에 닿는 모든 것을 해석해 내죠. '단단하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차갑다' '축축하다' '건조하다' 등등. 여러분은 깨닫지 못하지만 여러분의 육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사고의 작용입니다. 사고의 작용이 없으면 육체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육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육체는 다른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따로 떨어져 있는 닿는 점들만이 존재합니다. 생각에 의해 함께 엮이지 않은 접촉의 자극만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주변의 사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육체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조합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여러분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이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몇 시에 잠자리에 들던지 네 시간을 잡니다. 그리고 완전히 깨어서 아침까지 누워 있죠. 저는 자리 위에 무엇이 누워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지 오른쪽으로 누워 있는지도 모르죠. 몇 시간이고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새소리나 다른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제 안에서 메아리칩니다. 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습니다. 그게 무언지 모르죠. 이불 속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의 형태는 거기 없죠. 그곳에는 닿는 점에 대한 주시만 있습니다. 육체가 침대와 이불에 닿아 있는 접촉, 그리고 몸이 서로 닿아 있는 접촉 그런 접촉에 대한 자각만이 존재합니다. 닿아 있는 점들의 감각만이 있고 육체의 나머지 부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력 때문일 약간의 중량감이 흐릿하게 있죠. 이런 개개의 현상은 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육체를 바라보아도 닿는점들과 제가 눈으로 보는 것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 닿는점들과 제 육체의 형태를 연관시키려고 한다면 아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연결을 끝내면 이미 육체는 각각의 다른 닿는점들로 돌아가 있겠죠. 그 연결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망고주스가 어떤 맛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망고 주스 맛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맛보았던 경험을 자신이 다시 만들어 냅니다. 저는 그런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지식이 다시 살아나, "그래, 바로 이것이 망고 주스의 맛이야"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망고 주스를 직접 혀로 맛보아야만 합니다. 보거나 냄새를 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취향이나 입맛이 바뀌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시장에 가면 저절로 전에 좋아했던 물건들로 손이 갑니다. 그러나 제가 하지도 않은 어떤 정신적인 경험을 꾸며댈 수는 없으니, 있지도 않은 음식을 갈망할 수는 없지요. 우리의 일상에서 후각은 미각보다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지닙니다. 후각기관은 냄새를 향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관념의 간섭이 없을 때 냄새는 후각에 대한 자극일 뿐입니다. 소똥의 냄새와 값비싼 프랑스 향수가 차이가 없습니다. 코를 한번 문지르고 지나갈 뿐이죠. 저의 이야기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생각을 해보고 대답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공을 던지면 공은 튀어 나가겠죠. 그 튀어 나간 공을 여러분은 '대답'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는 스스로를 표현하죠. 저는 제가 말하는 것이 무언지 모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말을 기록하는 것 제가 보기에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 이 자연스러운 상태만이 살아 있습니다. 저한테 잡힐 수도 없는 것이고 여러분이 떼어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꽃처럼. (이런 정도의 비유밖에는 할 수 없군요) 꽃이 피어납니다. 꽃이 피어 있는 한 그곳에는 다른 곳에 없는 향기가 감돌고 있겠죠. 여러분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죠. 지나가던 암소가 먹을 수도 있고, 낫에 베어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 않으면 시들어 떨어질 겁니다. 그렇게 끝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없죠. 여러분은 그 향기를 간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대용물 뿐입니다. 화학적인 향기죠. 살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과 가르침을 간직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 상태는 동시대의 가치와 동시대의 표현만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상태에 들어와도 개성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는 컴퓨터 같은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지금 변화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사실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입니다. 개성은 남습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 든 사람이 분노나 개성에서 벗어나길 기대하지 마세요. 영적인 겸손을 기대하지 마세요. 어쩌면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거만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아무도 손대지 못한 곳에서 삶을 만졌으니까요. 그러므로 이 상태에 든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시대에 걸맞은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 여러 명이 나타나도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우리는 다 깨달았다! 이제 같은 편이다."하고 외치지 않죠. 인간에게는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일을 해서 얻던지 다른 사람에게 얻죠. 이것만이 필요하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기본적인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이 노이로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섹스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일까요? 섹스는 관념에서 나옵니다. 육체에는 섹스가 없습니다. 성기가 있고, 남성과 여성간에 호르몬의 균형이 다를 뿐입니다. "나는 남자다. 저기 여자가 있다. 매력적인 여자다" 머리가 말합니다. 성적인 느낌을 몸에 전달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거 성적인 느낌이다." 그 다음에 선동을 합니다. 이 머리의 선동 없이 섹스는 불가능합니다. "그냥 보는 것보다 저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이 더 즐거울 거야. 손잡는 것보다 키스하는 게 더 즐거울 거야. 키스하는 것보다 포옹을 하는 게.." 계속되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머리의 선동이 없습니다. 선동 없이 섹스는 불가능합니다. 육체에 있어 섹스는 폭력입니다. 평소에 평화로운 유기적 질서를 유지하는 육체에 섹스는 과도한 긴장을 부과하고 해소시킵니다. 여러분에게는 쾌락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육체에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섹스를 억압하거나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는 이 상태에 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신에 대해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섹스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독신을 지키는 종교적인 구도자에게 여자 꿈을 꾸는 지 물어 보십시오. 성적인 경험은 여러분의 삶에서 직접 경험에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경험들은 간접경험이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왜 이 둘레에 수많은 금기와 관념들을 갖다 붙입니까? 왜 섹스의 즐거움을 망가뜨리죠? 저는 성에 탐닉하거나 여러 사람과 섹스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금욕과 절제로는 한가지도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누가 이 방 바깥으로 나가면 그 사람은 저의 의식에서 사라집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왜 여기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작업에 필요한 연상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들어 있을 공간이 없습니다. 저의 감각기관은 지금 제 앞에 있는 것들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과의 접촉이 아니라 이 방안에 있는 것들과의 살아 있는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감각행위와 완전히 조율되어 있다면 내일은 무엇을 먹느냐 하는 불안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나, 진리, 실체에 대한 억측이 들어갈 공간도 없겠죠. 이 상태는 전지(全知)의 상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영원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질문이 멈춘 상태입니다. 그런 질문은 유기체가 기능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질문이 들지 않습니다. 유기체의 기능 방식은 그런 질문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두지 않습니다. 육체는 자기를 회복시키는 비범한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감각은 항상 최고조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이 피곤해지면 육체는 죽음을 거칩니다. 정신적인 죽음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루에 몇 번씩 일어나기도 합니다. 죽음을 거칠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덮쳐 옵니다. 처음에는 마취제를 맞은 듯한 기분입니다.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느려지죠. 손과 발이 얼음처럼 차갑게 되면서 온몸이 시체처럼 경직됩니다. 온몸의 에너지가 한곳으로 모입니다. 매번 다르게 나타나고 48분에서 49분 정도 계속됩니다. 사고의 흐름은 계속되지만 생각을 읽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의 마지막에 완전한 멈춤이 있습니다. 사고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얼마나 오래 끊어지는 지는 모릅니다. 이것은 경험이 아닙니다. 끊어져 있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적 사고나, 의식적인 존재의 일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죽음에서 돌아오게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에 의지를 가질 수 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끊어짐'이 지나면 사고의 흐름은 멈춘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둔감함이 사라지고 선명한 느낌이 되돌아옵니다. 경직되었던 육체는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고 스스로 근육을 폅니다. 그 움직임은 하타 요가보다는 중국의 태극권과 유사합니다. 아마 스승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그런 움직임을 익혀서 수백 가지의 동작을 만들어 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깨어날 때 저의 움직임을 지켜본 사람들은 마치 갓난아기의 움직임 같다고 합니다. 이 '끊어짐'은 감각과 내분비선과 신경계에 완전한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감각은 다시 최고조의 상태로 활동합니다. 죽음의 맛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태어났습니까?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시작되는 곳과 끝나는 곳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경험할 수 있죠. 그러나 자신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심리적인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경험의 구조는 경험하지 않을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소멸까지도 지휘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 들지 몹시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느낌이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경험을 미리 알기 위해서는 참고로 할 비슷한 과거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탄생도 기억할 수 없죠. 따라서 미래에 비존재非存在가 되었을 때의 느낌이 어떨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삶을 알고 있는 한, 자신도 알고 있고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영원의 느낌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의 구조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상상을 시작합니다. 천국, 환생, 영혼의 윤회. 여러분이 생각하는 환생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맛볼 수 있나요? 만질 수 있습니까? 저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천국으로 향합니까? 무엇이 있나요. 두려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꿈은 왜 꾸는 것일까요? 감각을 조종하는 자아라는 것이 있어서 보이는 것은 무엇이다, 들리는 것은, 느껴지는 것은 무엇무엇이라고 일일이 해석을 하고 또 '이것은 아름답다. 여기를 봐라. 저것은 추하다. 보지 말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카메라는 항상 돌아가고 모든 것은 기록됩니다. 조금 더 오래 보건 잠깐 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쉬고 있을 때 사고가 수동적이 되면 이런 것들이 올라옵니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그래서 모자이크를 만들죠.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감각을 조종하는 자아가 없으면 '나는 잤다. 꿈을 꾸었다. 지금은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출처: http://z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