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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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4월 21일 토요일 오전 10시 12분 23초
제 목(Title): 함석헌선생 재조명


함석헌선생 탄신100주년 재조명 잇따라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만이 가집니다. 희망이 있다 해서 웃고 없다 해서 우는 
사람, 한가한 사람입니다. 정말 살자는 마음이면 현실을 보고 절망을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함석헌(1901~1989)은 누구인가. 그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데 생을 바친 
사람이다. 아홉살 되던 해 나라를 잃고, 평양고보 재학중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일본 유학서 돌아온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교단에서 쫓겨났다. 40년과 42년 두차례 투옥되고 
해방 직후에도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58년에는 ‘사상계’에 투고한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구금됐다. 그러나 지독한 절망은 70년 월간 
‘씨●의 소리’ 창간을 통해 큰 희망으로 부활했다. 엄혹한 시절, 민중들은 이 
잡지를 통해 숨통을 틔웠고, 그들의 절망도 함께 부활했다.


종교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 역사철학자인 함석헌 선생이 탄신 100주년을 맞아 
출판가에서 새로이 조명되고 있다. 도서출판 삼인은 강연 유고집 ‘끝나지 않은 
강연’과 논문집 ‘함석헌 사상을 찾아서’(이상 함석헌기념사업회 엮음)를, 
한길사는 논문집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진덕규 외 지음)과 추모의 
글모음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장기려 외 지음)을 각각 출간했다.


‘끝나지 않은 강연…’이 함석헌의 육성을 지근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민족의 큰 사상가…’는 그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은 부정(否定)해야 사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이 역사가 되어간다는 
걸 보고 뭔지 불만을 느껴서 ‘이럴 수가 있겠나!’ 안타까워 못견디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떼밀어서 예까지 온 겁니다. 인류가 이 지경에까지 온 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온 거요. 그러니까 잘못된 일이 있을 때 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이 아닙니다”(84년 5월 고려대 강연 ‘새 세대에게 주는 말:반항할 줄 
모르면 사람 아니다’). 17년이 흘렀지만 힘찬 울림은 여전하다. 젊은이들의 
각성과 자기부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보의 원동력 아니던가.


‘민족의 큰 사상가…’는 기독교 사상에 편향돼오던 함석헌 연구의 지평을 
지성사·환경·노장철학 등 다른 분야에까지 확장했다. 함석헌은 지성사적으로 
볼 때 ‘반성’과 ‘자기인식’을 사유의 중심에 놓도록 요구한 인물로 
평가된다(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교수). “우리 역사에서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일이 백가지 병, 백가지 폐해의 
근본원인”이라는 그의 진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생태환경이론을 체계화한 환경사상가로서의 면모도 조명된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씨●의 생태환경사상’이란 글에서 
“생명사상-씨알(아래아)사상-자연-국토-내 몸-인류-세계를 하나로 본 
함석헌에게 환경문제는 세계평화를 통해서만 완벽하게 실현되는 국제적 
쟁점으로 인식됐다. 그 반대 논리로는 자연파괴가 곧 
평화파괴-반생명-독재·부패-전쟁이라는 인식이 체계화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함석헌은 기독교뿐 아니라 노장(老莊)철학까지 깊이 이해한 사상가였다. 그는 
노장철학이 추구하는 절대평등, 개성해방, 평화사상, ‘아니오’라고 하되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 등에 주목했다(조민환 성균관대 연구교수). 함석헌은 
이같은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질적인 기독교와 노장이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사유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의 유(儒)·불(佛)·도(道)·기(基·기독) 
일치적 사유는 한국사상사에서 원효와 율곡의 맥을 잇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다시, 함석헌은 누구인가. 이기룡 동국대 연구교수의 말을 빌리자. “그는 
야인이었다.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강조했지만, 또 ‘간디는 간디고 나는 나지’란 생각도 놓지 않았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무교회주의를 배우고 실천했지만 무교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어떤 
주의나 사상 혹은 종교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냥 자유인이 아니라, 
자유란 언제나 피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음을 몸소 보여준 자유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그는 선사(禪師)에 가깝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선사다” 


/김민아기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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