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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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3월 12일 월요일 오후 05시 40분 30초
제 목(Title): 좌선이란


좌선(坐禪)이란

1
예나 이제나 거의가 다 비슷하겠지만, 학교에 다니는 아들딸들을 둔 부모는 
자녀가 책상 앞에 반듯이 앉아있으면 대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실제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 가운데는 책상 앞에 반듯이 앉아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또 우리 어른들은 자신이 지나왔던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자세 바르게 앉아있다고 해서 그가 곧 앞에 놓여있는 일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우리가 지난 시절에, 선생님이나 부모님 앞에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앉아있었다고 해서 그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들의 말씀에 늘 집중되어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몸의 자세는 바로 하고 앉아있었어도 정신은 태반이 딴 곳에 
가있었던 경험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끄집어 내보자. 

젊은이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애인이나 친구와 같이 있을 때는, 
자세를 어떻게 하고있든 간에 저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자기 마음이 온통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때는 내 몸이 앉아있거나 서있거나 걷거나 눕거나 간에 관계없이 내 
마음이 온통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집중되어 진다는 말이다. 

위에서 든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란 내 몸의 자세에 따라 「직접」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오직 내 관심사에 따라 쉽게 움직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른바「좌선」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도「좌선」이라고 하면,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곧「앉는 자세」나 
「호흡」등이 좌선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門」인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초보자들에게 잠시 마음의 안정과, 스스로「좌선을 
한다」는 느낌이 들게 해서 자기 만족감을 얻게 해주는 소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초보자들이라면 특히 심리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의 효과를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여기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좌선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다만 방편(方便)이라고 하는 것이며, 소위 좌선을「잘하고」「못하는」것과는 
서로「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좌선에서도 역시 그 사람의 「마음상태」가 가장, 그리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다. 

따라서 좌선을 하는 사람이 앉는 자세나 호흡 등을 챙기는 경우에는 이것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스스로 방편임을 분명히 알고 행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좌선을 한다면서 스스로 방편에 놀아나서 진짜 좌선의 본질은 영영 
놓쳐버리고 말 우려가 있다. 

사실 이 문제는 현대에 들어서 새롭게 얘기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는 
이미 2500년 전 부처님 당시 때부터 있어왔던 내용이다. 


2
불교의 수많은 경전 가운데 유일하게 재가불자의 말씀을 받들어 경(經)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유마경」이다.
이 유마경의 주인공인 유마힐거사는 바로 부처님 당시에 살았다는 분으로, 이 
경에는 유마 거사 뿐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한 부처님의 말씀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유마경의「제자품」처음에 보면 이러한 대목이 있다.
부처님께서 유마가 병들어 누워있음을 아시고는 제자인 사리불에게 유마거사를 
문병하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사리불은 자신은 유마힐을 문병할만한 
법력을 갖추지 못하였다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다. 

『언젠가 제가 숲속 나무아래서 조용히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덕 사리불이시여,
그대가 좇고있는 것은 단지 그 방법일 뿐, 좌선은 결코 수행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원래 몸도 마음도 삼계(三界)가운데 그 모습이 내비치지 않도록 해야 
참다운 좌선인 것입니다.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있는 그대로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내보이는 그런 좌선을 
행하소서.
이미 얻은 성자(聖者)로서의 위의(威儀)를 잃지 않으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성품마저 지니는 그런 좌선을 행하소서.
그대의 마음이 안도 아니고 바깥 사물에도 향하지 않도록 좌선을 행하소서.
외도의 견해까지도 무시하지 않고 37조도품 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그런 좌선을 
행하소서.
윤회를 부르는 번뇌마저 끊지 않고 그대로 열반에 드는 그런 좌선을 행하소서. 

대덕 사리불이시여,
누군가 이미 그러한 좌선을 행하고 있다면, 세존께서는 반드시 그를 진정한 
좌선인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그 때 유마거사의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병 문안을 갈 수가 없나이다.』 

여기에 나타난 것처럼,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앉은 채로 하는 禪」만을 
뜻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 옛날 우리 불교에서는「좌선」이란 단순히 앉을 좌(坐)자 좌선, 
즉「앉아서 하는 선」만을 뜻한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마음이 분별망상을 떠나 
지극히 참다운 경지를 나투는 수행을 일러 「좌선」이라고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3
이렇게 坐禪이 곧 수동적으로「앉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위의 
유마경 뿐만이 아니라 저 유명한「육조단경」에도 나타나 있다.
이 단경에서 육조 혜능스님은 坐禪의 坐자가 「앉는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고, 오로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좌선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고있다. 

『이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법문 가운데 무엇을 일러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서「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 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서 어지럽지 않음」이 禪이니라.』 

즉, 좌선에 있어서 坐자는 몸이「앉는다」는 뜻보다는, 사실상 마음에「일체의 
망상분별이 가라앉는다」혹은「모든 경계에 동요하지 않는다」 는 뜻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옛적의 좌선이란 한결같이 앉는다, 어쩐다 하는 말보다는, 오직 
네「마음」이 어떠한「상태」여야만 한다는 것을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니 좌법(坐法)이니 호흡이니 하는 것들을 무엇보다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요즘의 좌선법은, 문득 방편이 본질보다 앞서는, 초기의「오리지널」좌선이 
세월이 지나 매우 형식화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좌선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차분히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서」또는「장소가 너무 
시끄러워서」좌선을 못한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리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참다운 본질보다 주로 외피적인 행위가 禪의 모습으로 널리 
퍼져있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에 바쁜 우리 대중들이 때없이 
禪수행을 하고 마침내 해탈성불을 이루도록 공부해나가기엔 너무나 부족한 
일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십여 년 전에 처음「좌선문(坐禪文)」이라고 하는 걸 읽을 
때,
『좌(坐)자는「앉는다」는 글자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씌어 있을까?』하고 
의문을 가졌던, 元 나라 때 몽산덕이(蒙山德異)화상의「휴휴암주좌선문 
(休休庵主坐禪文)」를 아래에 옮겨실으며, 우리 모든 불자들의 참다운 禪공부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휴휴암주좌선문(休休庵主坐禪文)
대저 좌선이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지선(至善)의 자리에 이르러 마땅히 스스로 
깨어있음이니, 

모든 생각을 끊고 끊되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 하고,
욕심경계 속에 있으나 욕심이 없고 티끌세상에 살지만 티끌을 벗어나는 것을 
일러 선(禪)이라 하며, 

바깥경계가 안[마음]으로 딸려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이 바깥으로 끌려나가지도 
않는 것을 일러 坐라 하고,
주착(住着)함도 없고 의지하는 것도 없으며 항상 광명이 앞에 나타나는 것을 
일러 禪이라 하며, 

외경(外境)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고 중심이 고요하여 요동하지 않는 것을 
일러 坐라 하고,
빛을 돌이켜서 안으로 자성을 비추어 진리의 근원을 꿰뚫는 것을 일러 禪이라 
하며,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상관 않고 소리와 빛깔에도 끌려감이 없는 것을 
일러 坐라 하고,
그윽한 곳을 비춘즉 밝음이 해와 달보다 더하고 만물을 감싼즉 그 덕이 하늘과 
땅보다 큰 것을 일러 禪이라 하며, 

차별 있는 경계에서 차별 없는 정(定)에 드는 것을 일러 坐라 하고,
차별 없는 경계에서 차별 있는 지혜를 보이는 것을 일러 禪이라 하나니, 

통틀어서 말하자면,
모든 경계에 불꽃튀듯 생생하게 작용하나 바른 바탕이 여여(如如)하여 움직이지 
않음을 일러 坐라 하고,
종횡으로 묘용(妙用)을 얻어서 일마다 걸림이 없음을 禪이라 하는 것이라. 

대략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지만 자세히 들기로 하자면 종이와 먹으로는 다할 
수가 없느니라. 

나가(那伽: 龍, 부처)의 큰 정(定)은 정(靜)도 없고 동(動)도 없으며, 
진여(眞如)의 오묘한 본체는 남[生]도 아니고 없어짐[滅]도 아니니,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림이 없으며, 공(空)이로되 공하지 않고 있어도 
있음이 아니로다. 

크기로는 바깥이 없는[無外] 데까지 감싸고, 가늘기로는 안이 없는[無內] 
데까지 들어가며, 신통한 지혜와 끝없는 광명과 대기(大機) 대용 (大用)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하나니, 

뜻이 있는 자는 마땅히 잘 참구하여 큰 깨침을 얻도록까지 정진하면, 마침내 
크게 깨치는 한 소리 후에 헤아릴 수 없는 영묘(靈妙)한 능력이 스스로 다 
갖추어져 있을 것이니, 

어찌 사마외도(邪魔外道)들이 법을 건네줌으로써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것과 
같을 것이며, 얻은 바 [所得]가 있음으로써 구경(究竟)을 삼는 자들과 
같겠는가. 

주(註):「休休庵主」는 몽산스님의 호(號) 

懶牛, 1999. 10. 5 



출처: myhome.netsgo.com/bu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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