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2월 16일 금요일 오후 11시 36분 42초 제 목(Title): Re: to staire 핫핫 장하십니다. 돌파구를 찾으셨군요. '희망이나 여유를 잃은 상태'라는 표현은 '백 보 양보해서 마태가 마음이란 단어를 끼워넣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에 관한 얘깁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한 마음'이란 표현은 제가 맨 처음에 쓴 글에서 표현한 그대로 '경제적 가난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거죠. 마음에 무슨 부정적인 것이 없는 상태라는 당신의 해석과는 정반대입니다. 마태의 '마음'이 가필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는 의미이며 마태의 '마음'이 가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여전히 애초의 원문은 '가난'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 틀렸습니다. 당신의 태도는 백 보 아니라 천 보 양보하더라도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반드시 "가난한 마음의 뜻이 경제적 궁핍 그 자체인가?"라고 물으라는거 보니 초조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당신의 표현대로 "흐리멍텅한 안목과 교만에 사로잡힌, 그리고 지금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후안무치한" 넘이므로 그렇게 안 묻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표현이 경제적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냐'라는 질문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다는 표현이 마음속에 잡스러운것이 없이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도 같이 검증을 받아야 하니까요. 사실 질문을 지정해서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논변을 지켜보고 계신 다른 분들이 바보가 아니니까요. sca님이든 누구든 이 보드에 오셔서 이 쓰레드를 한번 둘러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충분하겠지요. 그리고 혹시 억울해하실지 모르니 잊지 않고 전하겠습니다. '반드시 "가난한 마음의 뜻이 경제적 궁핍 그 자체인가?"라는 질문을 하라'는 크로체님의 요구가 있었다구요. -------------------------------------------------------------------------- 초조하지 않습니다. 님의 안목이 그간 축적하신 지식에 의해 흐려져 있음을 지적하는데 초조할 이유가 없습니다. 님은 지금 대화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지 모르나, 저는 님의 그릇된 안목을 지적하는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잡스러운 것이 없이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척 좋습니다. 만일 스테어님께서 저의 해석을 다시 해석하신 바대로라면 예수는 굳이 가난한 마음이라 하지 않았을 겁니다. 고결한 마음이라 해야 맞겠지요. 가난한 마음의 眞意는 마음 속에 성스러운 것도, 고귀한 것도, 더러운 것도, 천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은 마음이 가난해지면 곧 알 수 있습니다. 스테어님도 경험해본 상태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만이 천국을 볼 수 있다는 말 역시 깨끗함의 의미가 더러움과 대칭되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스럽다/천박하다, 깨끗하다/더럽다의 이분법에 해당하는 양변을 여읜 상태를 의미합니다. 힛힛힛 (죄송합니다... 재밌어서요...)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그 주장이 저만의 관점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아는 분들'의 검증을 거쳐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목욕재계하면 천국이 보이느냐 라는 얘기는 100점 드리겠습니다. 재밌었어요. ^^ 그런데 이왕 언급하시는 김에 8가지 다 체크해 보시지 그랬습니까. -------------------------------------------------------------------------- 재미있었습니까? 웃으시며 재미있어 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군요. 스테어님 당신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목욕재계하면 천국이 보인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은 것인데, 그 얘기가 재미있습니까? 물론 재미있으라고 한 조크입니다만 스테어님만은 두 볼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움을 갖고 웃어야합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음이 깨끗이 빈 자에게 복이 있으면 '애통해하는 자'에게는요? 애통해하는 자는 아무래도 마음이 텅 빈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당신의 관점에서는 '의'라는 것을 향한 무서운 집착에 시달리는 자인데 역시 복이 있나요? 아니면 혹시 "마음이 깨끗이 빈 자에게도 복이 있지만 복이란 게 인색하게 그런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이넘에게도 있고 저넘에게도 있다. 마음을 못 비우고 애통해하는 자에게도 복이 있고 의에 목매달고 집착하는 넘에게도 복이 있다."라는 입장이신가요? * 처음에 인정하셨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고집 부리시니까 점점 재밌어지는군요... * ----------------------------------------------------------------------------- 아주 좋습니다. 8가지 구절을 전부 우리말로 올려주셨군요. 위에도 지적한 바와 같이 스테어님이 쓰시는 깨끗한 마음은 성스러운 깨끗함이 아닙니다. 달마가 말한 확연무성의 마음이 본 뜻입니다. 더러움에 대칭되는 깨끗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난한 마음이라 합니다. 자, 비유를 들어 생각해보죠. 화려한 아파트에 온갖 가구며, TV며, 냉장고 등 다 갖추어져 있고 베란다에는 많은 관상식물들이 있습니다. 새장에 새도 있으며, 컴퓨터와 소규모 영화관이 있고, 서재에는 책이 수천 권이 꽂혀 있습니다. 집주인이 깔끔한 것을 좋아해서 매일 매일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합시다. 이 아파트는 깨끗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집 안에 있는 물건들에 애정을 쏟느라 창 밖의 달을 볼 수가 없지요. 반면 달맞이 동네에 단칸방이 있습니다. 가구와 TV, 냉장고 등 단촐합니다. 그리 깨끗하게 해놓고 살지는 않지만 어지럽지 않고 단순합니다. 이 집은 깨끗하다 할 수 없지만 가난하다, 단촐하다, 소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방 안이 단촐하고 단순하여 창문을 열면 달빛(지혜)이 비칩니다. 이 두 집은 우리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집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과거의 좋고 나쁜 기억들을 등록시켜둡니다. 책이나 학교를 통해 얻은 지식들도 모두 등록시켜둡니다. 그외에 사소한 것들을 저장하고, 온갖 잘못된 관념들을 버리지 않고 쌓아둡니다. 근본무명이라는 때도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일까요? 미래에 대한 근심걱정들 역시 끊이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실직에 대한 공포, 실연에 대한 공포, 병에 대한 공포, 돈에 대한 욕구, 권력에의 욕구, 명예에 대한 욕구, 섹스에 대한 욕구, 어제 싸웠던 사람에 대한 분노, 과거 부모나 교사로부터 당한 학대에의 증오심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때는 언제일까요? 친한 사람, 가족이나 친구, 애인이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을때, 또는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해도 장례식에 가서 죽음을 목도합니다. 우리는 종종 아픈 사람의 병문안을 가거나, 우리가 입원을 하기도 하죠. 죽을 고비에 처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정적해지며, 가난해집니다. 우리가 집착하거나 두려워했던 것이 사소해지고 힘을 잃으면서 잠시 겸허해집니다. 초라해지고, 삶에 무상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동안 집착하면서 고통받아왔던 모든 것들이 일시적으로 스톱되며, 소박해집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잡다한 것들이 정리되어 지속적으로 가난한 마음에는 필수적인 것들만이 힘을 발휘합니다. (텅 빈 마음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입니다.) 가령 운전하는 요령, 생계를 위해 익혀야하는 기술, 음식을 만드는 요리법 등과 같이 실용적인 지식들과 인간의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 애통해하거나, 연민하거나 불의에 정직하게 분노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만이 진실로 행복을 알 수 있다고 예수는 설파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불교식으로 풀자면, 거기엔 깨달음이란 지고한 목표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라는 절대 권위도 설 수 없습니다. 소유물에 대한 욕심이나 영원한 생명/내생의 복과 같은 소원도 없으며, 다만 목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잠자는 소박함, 단촐함입니다. 깨달음을 기다린다든가, 부처님께 기도하여 부자가 되어야겠다든가, 다음생에는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나고 싶다든가, 누구를 미워하거나 집착한다든가 하는 것이 있으면 그 마음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차 부풀게 되죠. 치장되고 단단하게 부푼 에고도 없습니다. 다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 무명의 업력으로 육도윤회하는 중생의 삶에 대한 자비가 있고, 진리를 바로 알고, 지혜가 밝게 빛날 뿐입니다. 어제에 얽매이지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현재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깊이 진실을 바라보는 것일 뿐인 마음이 진정 가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테어님! 저는 고집부리는게 아니라 제 자신이 아는 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스테어님도 당신의 아는 바 진실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진실이 과거에 축적된 지식에 의해 조건지어진 죽은 진실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만일 스테어님이 기억상실증이 되어서, 그동안 쌓아온 성경에 대한 지식, 판단, 해석들이 모두 무효화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물론 기억상실이 되었다고 해서 정상적인 사리분별이 불가한 것은 아니라고 가정합시다. 오직 성경에 대해 쌓아온 지식과 그에 대한 판단의 구조,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오심, 예수에 대한 인상 등이 모두 백지화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때 제가 스테어님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느니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데, 가난한 마음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스테어님은 그 뜻이 뭘까 하고 지금 현재에 의식을 통해 궁구할 것입니다. 지식을 빌리지 않고, 과거의 판단과 해석, 다른 학자들의 의견이나 예수에 대한 이미지, 기독교 멸절에 대한 의지 등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스테어님의 지성만으로 그 뜻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스테어님은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분입니다. 성경에 관한 한, 자존심도 강하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극히 부정적입니다. 물론 그 부정적인 태도가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정직한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가 자연스러워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공기와 같은 것이 되어 의식하지 못한다면, 예수에 대한 相이 너무나 강력하게 작용하여 예수가 그러한 말을 할 리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이 자연스럽게 유도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다면, 마태가 단순무식한 예수의 말을 그럴 듯하게 뜯어고쳤을 거라는 가정이 이러한 지식과 판단, 분별의 체계에서 나온 죽은 진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재의 심정을 솔직하게 바라볼 수 없다면, 결코 가난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