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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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크로체)
날 짜 (Date): 2001년 2월  4일 일요일 오후 09시 46분 26초
제 목(Title): 왜 명상인가?


다음 글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연내용입니다.




Jidu Krishnamurti

1. 왜 명상해야 하는가?
 
명상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명상의 방법이나 수행, 또는 
어떤 특정한 체계에 따른 명상이 중요하다는 것보다는 명상 그 자체가 갖는 특별함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명상의 의미와 필요성과 
중요성을 찾아낸다면, 그는 동양적인 유형의 명상 속에 포함된 모든 특별한 것들을 
비롯한 모든 제도와 방법과 구루를 내던져도 무방하다.
혼자의 힘으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심리학자들이나 철학자들, 구루들의 이론과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전체적인 본성과 움직임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정말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구조에 일대 변형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이고 깊이 있게 그러한 변형 내지 대체를 
가져올 때 그 변형은 그 사람의 의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며, 실체적인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현재의 세계와 
혼란, 불확실성, 불행 및 수많은 종교와 민족의 분열,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대의명분을 걸고 이루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군비증강, 전쟁 준비를 위한 막대한 
경비 지출 등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근본적인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하며, 이 자유는 
그 사람의 의식이 담고있는 모든 내용물로부터 벗어나는 그러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의식의 내용물이란 사고에 의해서 결합된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내용으로부터의 자유, 분노와 야만성으로부터의 자유, 허영과 
교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하여 결국 자신을 붙들고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어지는 자유가 곧 명상이다.자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바로 그 행위야말로 
변형의 시작인 것이다.
명상은 모든 투쟁과 갈등을 내부적으로 ,그리고 그 결과로 외부적으로도 종결 
시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상 내부나 외부와 같은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있게 마련인 바다와 같은 것이다.
자신이 과연 실제로 무엇인가를 밝혀가는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관찰자는 과연 자신이 관찰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나는 분노하고 
있고, 탐욕스러우며, 난폭하다. 그런데 그러한 내가 분노, 탐욕, 폭력 자체인 
관찰되는 대상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다른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내가 분노를 터뜨렸을 때, 분노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분노는 바로 나이며, 따라서 관찰자는 곧 피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구분이 완전히 배제된다. 관찰자는 피관찰자이며, 그리하여 
갈등은 이제 그 막을 내린다.
명상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모든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갈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즉 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관찰자는 관찰되는 대상과 다르지 않다. 분노가 있을 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히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사고가 ‘나’를 만들어 내면, ‘나는 
화가 나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분노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나’가 존재한다. 바로 
그러한 구분이 갈등을 초래한다.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존재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오직 분노만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분노가 계속 되는가? 아니면 분노가 완전히 종식 되는가? 분노가 발생하여 아무런 
관찰자나 구분도 없을 때 그 분노는 활활 타오르다가 사라지게 된다. 마치 피고 
지고 시들어 버리는 한 송이 꽃처럼. 그러나 그 분노와 싸우고 있거나, 
저항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하는 한 그것은 분노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관찰자가 곧 관찰되는 대상일 때, 분노는 활짝 피어 절정에 달했다가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는 이제 그 어떠한 심리적 갈등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행동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것은 특정한 동기에 따르거나, 이상에 
따르거나, 아니면 전통과 관습에 따른 것이다. 명상 상태에 들어가 있는 마음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갈등은 인생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갈등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강박적 행동이 일어난다. 갈등을 종결 
시켜서 강박적 행동을 끝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당신은 건전하고 
건강하며 신념이나 공포 같은 것에 얽매여 있지 않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즉 어떠한 원리에 따라서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행동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기억으로부터 행동한다. 기억은 일정한 유형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습관화 되고 만다. 사람들은 즐겁게 기억된 것에 
따라 행동한다. 행동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그 각각은 모두 불완전하며 
분열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나는 사업가이며, 가정에 가면 
자녀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업 상의 문제라면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유명한 화가일 수도 있다. “비록 뛰어난 재능을 
갖춘 화가 지만 내 삶은 허울 뿐이다.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돈과 지위와 인정과 
명성만을 바랄 뿐이다.” 
당신의 갖가지 행동들은 제각기 나뉘어져 있다. 단편적인 행동이 존재할 때 그 
행동을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갈등도 없고 실패와 후회와 
좌절감도 없는 행동이 있는가? 또한 전체적이고 조화로우며 완전한 행동이 있는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행동이 있는가? 당신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모순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을 완벽하게 의식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일 내가 상호 모순된 행동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이 나에게 “그것을 
의식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도대체 의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되물을 
것이다.선택을 할 때는 의식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러한 
특수한 행동이 좋으니까 저것을 계속 지키고 싶다 제발 다른 행동은 피하게 
해달라”고 말할 때 알아차림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만족스럽고 좋은 보답이 있을 것 같은 특정한 행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완전한 알아차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완전히 의식 했다면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끊어짐도 없는 지속적인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건전한 
마음을 갖는 것인데 그 어떠한 형태의 신념이나 도그마 내지 이상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명쾌하고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명상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행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명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모든 기존의 지식을 던져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탐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권위로부터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조사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집중? 주의력? 알아차림? 
당신이 집중을 할 때 당신의 모든 에너지는 특정한 어떤 것에 맞추어진다. 그리고 
중간에 끼여드는 모든 생각들을 거부하고 밀어낸다. 분명 집중 속에는 거부와 
저항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고를 의식하는 데 있어서는 집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차림 속에는 어떤 사고를 좋아할 것인가 따위의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알아차림에서 관심이 나타난다. 
관심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기준이 되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며, 명상의 본질이다. 집중에는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에 근거한 집중의 중심이 존재한다. 당신은 집중 속에서 벽을 쌓고 
저항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다른 어떠한 들어올 수 없으며 
따라서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고의 알아차림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모순이 없으며, 어떤 사고에 
대한 저항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가 움직이는 모든 형태의 운동에 대한 
알아차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알아차림으로부터 관심이 싹튼다.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그 자리에는 이미 나와 같은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관심을 기울이면서 당신은 모든 복잡한 사고와, 공포, 고뇌, 절망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이 기초인 것이다. 당신은 의식 속에 담긴 내용물이 
비워지면서 해방이 된다.그러므로 명상은 의식이 담고있는 내용물을 비워내는 
것이다. 모든 알맹이를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명상의 의미이자 심도이다. 그리하여 
사고는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명상은 관심이며 그 관심 속에는 아무런 등록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두뇌는 모든 것,것 모든 것, 즉 사용되고있는 무수한 말들과 소음까지도 
등록시키고 있다. 마치 녹음 테이프처럼, 그런데 이제 두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을 등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왜 나는 모욕을 등록해야 하나? 
어째서, 왜 나는 아첨을 등록해야 하나? 그건 전혀 불필요한데도. 왜 나는 상처를 
등록해야 하나? 필요도 없는데.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만을 
등록시키고 다른 것은 등록 시키지 마라. 명상에는 심리적으로 볼 때 등록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아가고 사무실에 출근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등의 실천적인 
사실들 이외에는 전혀 등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것도. 그로부터 완전한 침묵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사고가 이미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경우에만 제 기능을 발휘할 따름이다. 시간도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 존재하게 된다.
그때, 종교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이전에는 종교란 사고의 
문제였던 것이다. 사고는 수많은 종교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각각의 종교는 
분열되었으며 그러한 분열 하나하나마다 또다시 다수의 하위 분열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과 희망 공포 신념 등을 포함하여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은 사고의 결과이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안전을 찾고자 하거나 희망하거나 두려워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물질적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종교인가? 신성한 것을 찾아내고 성스러운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시켜서 행하는 탐구가 종교인 것이다. 그것은 
온갖 시끄러운 온갖 사고로부터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내면의 시간과 사고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의 지식을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성하고 
성스럽고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뇌가 사고를 사고 자체의 적절한 
위치에 놓아 두었을 때 그리고 완전한 침묵이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처럼 
거대한 침묵으로부터 신성한 것의 존재가 자리를 잡게 된다.
침묵은 공간을 요구한다. 그 공간은 의식 전체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의식 그 자체의 구조 속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공포와 쓸데없는 지껄임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 자리잡게 된다. 오직 그때라야만 영원하고 신성한 것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신비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정화작용이기도 하다.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지속되는 모든 것은 타락한다. 그 패턴은 나라나 기후 환경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패턴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패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지속성을 낳고 그 지속성은 인간을 타락 시키는 과정의 일부분이 
된다. 지속성에 대한 종식이 있을 때,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고와 공포 ,사랑과 미움 등의 전체적인 운동을 이해했다면, 그 
사람은 이 같은 사실을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는 죽음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즉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사고에 의한 수많은 
답변들을 준비한다. 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비극적인 
설명들을 조사하고 싶지 않다.”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조건이나 욕구, 희망등에 
따라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 그 해답이란 거의 예외 없이 사고에 
의해서 결합된 지적인 것으로서 언어의 형태를 띤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완전히 신비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조사 해야만 
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사람들은 유기적 조직체인 육체가 죽으면 두뇌 (이것은 살아가는 동안에 자기 
탐닉이나 자기모순, 헛된 노력, 끊임 없는 투쟁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잘못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기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또한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두뇌는 경험으로서의 
기억과 지식으로서의 기억의 보관소이다. 두뇌의 세포들 속에 기억으로 저장된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사고가 일어난다. 한 유기체가 죽게 되면 두뇌역시 동작을 
멈추게 되며, 그에 따라서 사고도 끝나게 된다.
 
사고는 물질적인 과정이며, 결코 영속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뇌의 
세포들 속에 간직 된 기억에 근거를 둔 일종의 물질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유기체가 죽으면 사고도 죽는다. 사고는 ‘나’의 전체 구조를 창조한다.그 
‘나’는 이것을 바라거나 저것을 바라지 않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근심하고, 
낙담을 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도 어리석고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투쟁하고 경험하고 획득한 
인간에게 삶의 종말이 온다면, 그가 살아 온 인생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잇겠는가?” 그러면 사고는 대답한다. “어나, 이것은 절대 끝이 아니야. 분명히 
또 다른 세계가 있어.” 그러나 그 다른 세계도 여전히 사고의 움직임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묻는다. 이제 매우 다른 
질문을 해보라. 죽음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죽음 이후가 아니다. 죽음 잎에 
존재하는 것은 곧 한 사람의 인생이다.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인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을 거쳐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룬다. 남자는 근 50여년 간을 
직장에 다니고 여자는 더 많은 재산을 늘리려고 분주히 다닌다. 그들은 자녀와 
함께 고통과 근심도 가지고 있다. 그처럼 불행한 생활을 해나가면서도 그들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싶어한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쓰여졌다. 그 모든 것들은 사고에 의해 산출되었으며 한결같이 ‘믿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그 모든 것을 실제로 완전히 던져 버린다면 그가 직면하는 
것은 무엇이 될 것인가? 사고가 결합시킨 자아가 끝나게 되는 사실과 그는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근심과 열망도 막을 내리게 된다.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활력과 에너지, 그리고 수고로운 
인생사를 안고 살아갈 때, 과연 항상 죽음과 만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나는 왕성한 정력과 능력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데 죽음이란 
그러한 삶에 대한 종결을 뜻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죽음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내가 너에게 집착하고 있는데 그 집착을 끝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뜻이다.
 
어떤 탐욕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죽을 때 탐욕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니 탐욕을 버려야 한다. 일주일 이나 열흘 이내가 아니다. 바로 지금 당장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활력과 에너지와 능력과 관찰로 가득찬 삶을 
살아가며 지상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모든 것의 순간적인 종말, 곧 죽음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전의 삶은 죽음과 함께하는 삶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람은 자신이 얻는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없어지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삶에는 항상 극심한 운동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사람도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이것은 개념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초대할 때, 이것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종결이고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매 분마다. 매 초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그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알고 있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무시간적 차원의 상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것을 보는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에 담긴 모든 내용물이 비워져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한다. 곧 시간이 끝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짜 죽음인 것이다. 
  
 
 
 
 
3.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완전한 관심이 있을 때 그치고, 관심이 없을 때 나타나는 사고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은 알아차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심의 완전한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하나의 관념인가? 아니면 사실인가?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 
‘알아차린다.’라는 말은 사람이나 사물, 자연, 사회구조 등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깨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내면을 탐구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정신분열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상을 알고 나서 내부 세계로 이동 한다면 당신은 균형을 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밀물과 썰물처럼 연속적인 운동이다. 그리하여 외부 세계에서 내부 
세계로 움직이게 되면 하나의 기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은 매우 복잡한 구조이며 복합적인 
운동체이다. 그런데 이처럼 복잡한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은 오직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당신은 상처 받지 않으려고 그들과 멀어질 수도 있고 또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의존적이고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다. 
 
그러므로 관계는 자신을 알 수 있는 거울인 것이다. 외부 세계도 마찬가지다. 
외면은 자신의 반영이다. 사회나 정부 등의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자기자신과 
동일한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질서와 무질서의 문제를 조사해야 한다. 
당신은 외부적으로 엄청난 무질서와 혼란, 불확실성이 존재함을 본다. 무엇이 
이러한 무질서를 초래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들인가? 만일 자신이 외부적인 
무질서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 무질서는 곧 자신의 무질서가 표출된 
것은 아닌가?
외부적인 무질서는 우리의 내부적인 무질서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내면에 질서를 갖지 못하는 한 항상 무질서가 존재할 것이다. 정부가 
그러한 무질서를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극단적인 형태는 전체주의이다.
 
우리들 각자가 무질서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무질서하다. 당신은 자신의 
무질서를 의식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그러한 관념을 의식할 뿐인가?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추상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추상화는 있는 
그대로에서 벗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은 보통 관념 속에서 살고 사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관념과 사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가? 과연 당신은 있는 
그대로를 의식하게 되는가?
 
무질서란 어떤 의미인가? 그 속에는 모순이 있다. 대립적인 욕망, 대립적인 요구, 
대립적인 운동,자아 속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원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곧 무질서의 속성이다. 이러한 이원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그것은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은 있는 그대로를 떠나서 되어야 할 것으로 가려고 한다. 그것은 분노하고 
있는 사람과 분노해서는 안 되는 사람의 차이이다. 만일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당신은 있어야 할 것이나 되어야 할 것으로 
도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관념을 만들어 그 관념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본질적으로 과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미래 속에 존재하는 현재를 
변형시키려는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안다면, 미래란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와 함께 남아있는 문제인 것이다.
 
만일 있는 그대로를 보고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만을 보고 그 외의 것은 전혀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자신이 
탐욕스러움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탐욕이 
일종의 감정인데, 자신이 탐욕이라는 이름의 그 감정을 본 것이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언어는 결코 사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은 언어를 마치 실제 사물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언어는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당신의 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언어의 노예인가? 사실이 나에게는 실제적이지 
못할 정도로 언어가 중요해진 것인가? 나는 산에 가서 직접 경치를 보기 보다는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 사진을 보는 것은 상징을 보는 것이지 결코 실제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상징에 불과한 언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리하여 실체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인가? 언어가 탐욕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낸 
것인가? 아니면 언어를 동반하지 않고 탐욕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고도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먼저 말이 그 감정을 창조한 것인지 아니면 말이 없이 그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를 세심하게 조사해야 한다. 결국 말이 그 감정인 것이다. 
나는 전에 그러한 감정을 가졌을 때 탐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현재의 
감정도 같은 종류의 과거 사건에 의해서 등록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가 
과거 속에 흡수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언어가 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탐욕이나 질투라는 언어로부터 벗어나 자유가 존재하는가? 언어는 과거에 속한 
것이다. 감정은 과거에서 나온 언어에 의해서 인지된 현재이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가 ‘나’이다. 그리고 과거는 
시간이다.결국 시간이 나인 것이다. 그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이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과거는 현재에게 항상 어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항상 충돌과 모순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거를 수반하지 않고 탐욕이라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는가? 이름을 
붙이지 않고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 탐욕을 관찰할 수 있는가? 관찰자인 ‘나’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가? 과거에 속한 관찰자를 동반하지 않고 
탐욕이라는 감정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가?
‘나’가 없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색깔과 형태를 관찰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당신은 눈을 통해서 그것을 관찰한다. 
눈을 움직이지 말고 관찰할, .. 눈을 움직이면 사고하는 두뇌가 동작을 개시하는 
순간 왜곡이 일어난다. 눈으로 뿐만이 아니라,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때 그 자리에는 결코 관념이 아닌 사실에 대한 관찰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에 접근해야 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어떠한 편견이나 비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대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4. 사고와 지성
  
 
사고는 두뇌 속에 기억으로 저장된 경험과 지식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응은 따라서 언제나 과거로부터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거 속에 안전이 
있을까? 이성과 논리 , 그리고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라. 본질적으로 
과거인 사고의 행동이 과연 안전을 줄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 연쇄 관계를 
생각해 보라.
 
사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서 안전을 찾는데 그 안전은 과거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고는 비록 미래를 투영한다 해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나는 신성을 
성취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고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고는 과거 속에 안전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하나의 개념 즉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투영시키고 그러한 미래의 희망 속에서 안전을 찾는다. 
 
인간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사고와, 사고가 본질적이고 성스럽다거나 그렇지 
않은 것 등으로 결합시켜 놓은 것들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자, 보시오.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운동이란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과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던 다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비록 
과거로부터 나온다고 할지라도 사고에 집착한다는 것이 뭐가 잘못 됐는가?” 
그러자 앞서의 그 사람은 이를 인정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고에 매달릴 
것이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과거 속에서 살고 과거에 매달릴 때 그것은 살 
능력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도달점에 이르게 된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와 같은 것들 
속에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것들이 회의적일 때 공포가 존재함을 보고 
논리적으로 인식한다.”
 
한편 우리가 어떤 것을 본다고 말할 때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만 논리적인 이해나 언어상의 이해, 혹은 선조적인 이해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서 사고의 운동 전반을 깨뜨릴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한 이해인가? “나는 당신이 말하는 내용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이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영어로 된 말 몇 마디를 알아 
들었다는 뜻인가? 단어를 이해하고 단어의 뜻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극히 
피상적인 수준의 이해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해한다.”고 이야기 할 때, 
실제로 사고가 무엇인가에 관한 진리를 보거나 관찰한다는 뜻인가?
 
당신은 사고와 사고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결코 안전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느끼고 맛보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의 진실을 보는 것이 곧 
지성이다. 그러한 지성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며, 또한 신중한 변증법적 설명도 
아니다. 결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사고의 설명이 아닌 것이다.
 
사고는 그러한 지성이 될 수 없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지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 속에 안전이 존재한다. 그 지성은 당신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아무런 조건도 부여 받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끝난 것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사고가 바로 자신의 운동 속에서 조건을 창조해 낸다는 사실과 
그러한 운동에 대한 이해야말로 지성이라는 점을 보아왔다. 그 지성에는 안정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예컨대 공포, 슬픔, 죽음, 명상 등등.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사고는 
과거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이며, 따라서 시간적이고 측정이 가능한 것이다.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결코 측정이 불가능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진리는 오직 마음이 사고가 만들어 낸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볼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관찰 과정이 지성이다. 그러한 지성이 존재할 때,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그렇게 되면 비록 당신이 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해도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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