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wwww (DD15러셀) 날 짜 (Date): 2000년 12월 8일 금요일 오후 08시 25분 23초 제 목(Title): 불교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옛 기록에 보면 '부처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느 스님이 '마른 똥막대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다른 스님은 같은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처란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일까요? 자기를 바로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우주의 원리나, 물리학의 체계나 갖가지 신통력을 깨달은 것으로는 깨달았다고 인정해주지 않는게 불교입니다. 최근 타계한 라마나 마하리쉬의 수제자가 전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히말라야에 갔을 무렵, 히말라야에서 은둔하고 있던 요기가 나타나서 호풍환우하고 몸을 바꾸거나 허공을 걷는 등 온갖 신통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 수제자는 그 요기에게 한가지 질문만을 했다고 합니다. '신통력을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통력을 부리는 그대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한 요기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신통력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무릎꿇어 요청했다는 일화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불교인이 아니지만, 불교의 깨달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제자 또한 자기를 깨친 사람이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삼법인 중에 제법무아라는 게 있습니다. 자기를 깨친다는 것은 이 무아를 깨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온갖 인연이 모여서 몸과 마음을 이루어, 의식이 그에 응한 결과라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 무아의 깨침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도 그러한 말을 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라는 생각만 없으면 된다. 모든 행위에 있어서 내가 행위자라는 망상만 짓지 않으면 된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업을 계속해서 지어, 장식(아뢰야식)에 저장하고 세세생생 다시 그 업식에 따라 몸을 받아 다시 어두워져서 태어나 고통 속에서 살다가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삶입니다. 이 순환의 고리를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무엇이 나이며,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가를. 그리고, 습관적으로 '나'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불릴 때, 무엇이 거기에 들어있는가를 깊이 숙고해보십시오. 과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있는가를 들여다 보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제법무아를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을 見性이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견성이 아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전혀 소용없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에게 바르도 소돌을 읽어주거나 불경을 읽어주는 것은 다음생을 기약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 見性을 하지 못한다 하여도 불법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하다보면 업식이 점차 엷어져서 다음생에 다시 불법을 만났을 때, 딱 하고 깨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