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1Cust49.tnt4.sea> 날 짜 (Date): 2000년 12월 4일 월요일 오후 11시 27분 44초 제 목(Title): 김영민/ 적멸의 즐거움 ,정휴 김영민 (jajaym@hanmail.net) 조회수: 2 , 줄수: 41 걷다가 죽어버려라 옛 친구가 불쑥 전화연락을 해왔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짧은, 그러나 왠지 불경스럽도록 덤덤한 기별이었다. 그 덤덤함 속에는 격조(隔阻)했던 우리 사이의 어색함도 배어 있을 듯 했다. 그와의 빛바랜 추억을 되씹고, 어느 여름 날인가, 맛깔스러운 국수를 해주시던 그의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급히 D대학병원의 영안실로 향했다. 나는 표정관리에 한껏 신경을 썼지만, 영안실의 분위기는 의외로 밝았고, 짙은 향냄새 사이로 의례적인 조문의 인사가 진중하게 교환될 뿐, 슬픔의 표식은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인은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곧 혼수에 빠진 채 수개월간 식물인간의 상태로 연명해오다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이었다. 후일담에, 내 친구를 포함한 자식들 넷은 간호하느라 그야말로 진을 뺀 나머지 있던 정마저 다 말라버린 채 사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결국 그 영안실의 '가벼운'(?) 분위기는 그같은 신산스러운 이력을 반영하는 셈이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지기도 오랜 암투병을 겪으면서 재발에 재발을 거듭하다가 남편도 자식도 없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득달처럼 달려간 영안실의 분위기는 차마 경망스러울 지경이어서, 유학 시절부터 사귀어 온 정리를 되새기며 나는 제법 장중한 표정을 준비하였지만 그 현장의 분위기 속에서는 별무소용이었다. 이들은 수개월, 혹은 수년씩 '누워' 있다가 세상을 하직하였고, 그리고 이들을 위해 울어주는 이들은 참으로 적었다. 굳이 사람살이의 이치를 좇아 변별하자면, 가는 사람이 웃고 남은 사람이 우는 것이 보기에도 좋으련만, 가는 이들은 한결같이 긴 병고의 끝을 힘겹게 넘어 그 익명의 땅 속으로 말없이 적멸해가고, 남은 이들은 짐짓 태연한 채 죽음에 무관심할 뿐이었다. 종교와 형이상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든 서구의 전통에 의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가 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경우, "철학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죽는 것, 그리고 죽음의 상태를 추구"한다. 따라서, 죽음에 임해서 슬퍼하는 등 마음의 철학적 평정을 깨는 행동은 일종의 금기다. "일생 동안 오로지 이것을 얻으려고 갈망해 오다가 내내 열심히 연습해 온 것이 다가왔을 때 괴로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에게 죽음은 평정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몽테뉴(1533-1592)의 <수상록>(Les Essais) 중, 키케로의 철학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이같은 취지는 고스란히 반복된다: 키케로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에 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연구와 명상이 우리의 영혼을 우리들 밖으로 끌어내어, 육체와 분리하여 일하게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죽음의 연습, 모방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세상의 모든 지혜와 이론은 결국 우리에게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는 일점에 귀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죽는 이들은 흔히 고통과 절망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까지 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다가 죽음의 블랙홀 속에 빨려들게 마련이고, 남은 자들은 그들대로 죽음에 대한 기묘한 허위의식으로 삶의 피상 속에 코를 박고 살아가게 마련인 것. 여기에, 선가(禪家)의 임종일화는 내게 희유한 매력으로 다가든다. 경통(景通) 선사는 신도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삿갓을 쓰고 불을 붙여 불길 속에서 나오지를 않고 그대로 입적했다."*** 천연(天然) 선사는 선 채로 입적했고, 현태(玄泰) 선사는 누워 한 발을 든 채 입적했으며, "광오(廣悟) 선사는 삼경을 알리자 혼자 법당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합장을 한 채 서서 입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 흥미를 끄는 인물은 <신심명(信心銘)>의 저자 3조 승찬(僧璨)이다. 그는 걷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승찬은 법회를 마치고 방 안에서 쉬다가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뜰을 거닐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임종하였다. 나무를 잡고 입적한 스님은 바람이 지나가도 쓰러지지 않았다. 나무를 잡고 스님이 입적에 들었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제자들은 알 수 있었다.***** 삶의 전부를 안고, 온갖 형이상학의 그 밑둥을 모조리 다 드러낸 채 그는 홀연히 이곳에 있는 듯 없어져 버린 것이다! 철학이 죽음의 연습이라고 한다면, 대체 이보다 더한 철학이 어디에 있을까? 아, 걷다가 죽어버려라. ---------- *I.F. 스톤, 소크라테스의 비밀, 편상범·손병석 옮김 (자작아카데미, 1996), 344쪽. **미셀 드 몽테뉴, 수상록, 손석린 옮김 (서문당, 1981), 30쪽. ***정휴, 적멸의 즐거움 (우리출판사, 2000), 88쪽. ****같은 책, 230쪽. *****같은 책, 3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