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wwww (DD15러셀) 날 짜 (Date): 2000년 11월 15일 수요일 오전 10시 29분 58초 제 목(Title): 대원선사의 일반문답 문 : 어떤 것이 멸진정입니까? 답 :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만이 멸진정은 아니다. 사실은 멸진정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보고 들으면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 그 자체가 멸진정이다. 업을 다한 데에서 이러한 멸진정을 이룬다면 몸을 잘라내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데 우리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까 업을 빨리 녹이기 위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멸진정을 익힐뿐 보든 보지 않든, 듣든 듣지 않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그 자체가 멸진정 이다. 눈을 뜨고도 경계가 보이지 않는 멸진정에 들 수 있는데, 이럴 때 가장 빨리 업을 녹일 수 있다 문 : 죽은 영혼이 어떠한 이치에 의해 천도됩니까? 답 : 천도 관행의 아주 일부를 예를 들어 말해보겠다. 이 방 안에 등불이 다 온전한데 한 등불만 깜박깜박한다고 해보자. 한 등불로 인해서 방안의 전체 불빛이 어른거린다. 이러한 이치에 의해 자성의 법력으로 관행을 해주면 천도받는 이 스스로 모를 뿐 가없는 자성의 여래장에 이미 법력에 의해 법문이 심어지게 된다. 또한 등불이 멀고 가까운 거리에 따라서 더하고 덜한 영향을 받듯 천도받는 이도 각각의 업에 따라 그 법력을 더 받거나 덜 받는다. 이렇게 여래장에 심어진 법문에 의해 오랜 생 후 인간의 몸을 받아 나와 법을 들었을 때 그 이치에 다른 이들보다 잘 계합하게 된다. 이것이 천도되는 이치이다. 이는 마치 초등학교 졸업식 때의 광경을 들어서 이야기하면 초등학교를 졸업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즉시 생각이 나지만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은 생각해낼래야 생각해 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재를 지내면 바로 천도된다는 것은 거짓말이니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열에 아홉은 화살보다 빠르게 자신의 업에 따라 수생하기 때문이다. 한편 천도재는 세세생생 많이 지내줄수록 좋다. 왜냐하면 법력에 의해 여래장 에 법문을 많이 심어줄수록 다시 인간으로 났을 때에 그 법문에 더 빨리 계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 저는 그 전에 기도하던 습관이 돼서 눈을 감으면 저절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게 됩니다. 답 : 관세음보살을 밖에서 찾는다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설사 밖으로 화현한 관세음보살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가없는 체성과 관세음보살의 가없는 성품이 두 불빛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관음의 가없는 체성을 관하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바르게 기도하면 그것이 곧 보림이요 기도요 선이다. 입으로만 관세음보살을 독송한다면 그것은 바람이 죽은 나무를 스치며 내는 소리에 불과하다. 다만 깨닫지 못한 이가 독송한다 해도 지극한 정성이 있으면 자신의 심식이 맑아지는 효과는 있다. 그러나 참 기적의 효험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효험을 보았다는 이가 있다면 깨달은 이가 아닌 경우 전부 잡신에 의한 것이다. 십지 이상의 보살을 친견하면 곧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아니할 때는 바른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문 : 번뇌 즉 보리란 말은 어떤 말입니까? 답 : 자성을 여의어 경계에 매해 있는 것을 번뇌라 할 뿐 여의지 않으면 꿈이니 환이니 하지만 자성의 능력으로 연출되어 누리는 바이다. 따라서, 번뇌라고 부르던 그대로가 보리이며, 중생세계란 것이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곧 극락 이다. 마치 까맣게 어두웠던 방안에 불을 켜면, 어둠이 어디로 나가거나 밝음이 들어온 바 없이 어둠 그대로 밝음이고, 불이 꺼지면 어둠이 들어오거나 밝음 이 나간 바 없이 밝음 그대로 어둠이듯 번뇌즉보리란 그런 것이다. 문 :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해서,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답 : 강에 비친 달은 물이란 인연을 만나서 생겼을 뿐이다. 그러므로 물속에 비친 달이 따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늘에 있는 달의 작용으로서 하늘의 달 밖의 것이 아니다. 바다의 물거품 역시 한순간 바람의 인연 에 의해 생겼을 뿐 따로 물거품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곧 바닷물 인 것이다. 우리 생각 생각 역시 따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성품이 인연 을 만나 응한 것일 뿐이어서, 근본 자성 이외의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법이란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이 있을 때 성립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이 성품이 있을 수 없다. 문 : 깨닫지 못했지만 순수하고 행이 뛰어난 이가 있다면, 깨달았으나 그렇 지 못한 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닙니까? 깨달았다지만 복을 짓고 실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 : 물론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잘 알아야 한다. 둘 다 함께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백 번 선행을 쌓는 것보다 한 번 체성을 여의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선행만으로는 생사를 해탈할 수 없고 생사를 해탈하지 못하 면 자유자재로 몸을 바꿀 수 없어서 의지에 따라 원하는 곳에 날 수 없다. 만약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진다면 다시 인간 몸을 받아 성불 할 것을 기약하기란 참으로 요원한 것이다. 즉 자성을 깨달아 보림하여 생사를 자재하지 못하면 제 아무리 선행을 했다 해도 입태, 출태시에 매하게 되고 입태, 출태시에 매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시절 어느 인연을 만나 어떤 업에 떨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선한 행을 한다지만 내일 더욱 강한 전겁의 악연을 만날시 지옥길에 떨어질 수도 있다. 또한 깨닫지 못한 선행은 어떤 극한에 이르렀을때, 즉 최선을 다했 으나 상대방에게 배신당하는 것과 같은 경우에 극악으로 치달릴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반드시 먼저 근본을 완전하게 밝히고 그에 의해 닦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문 :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답 : 최상의 도리인 진리를 밝히는 방편에는 1,700공안과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방편이 있으나 구경에 이르르기 위해서는 안팎없는 경지에 사무치는 길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불성 한 가지 뿐이라는 말이다. 불성 한 가지 뿐이라는 말은 세간에서 불성이 하나라고 하는 말과는 달라서, 무수하다 해도 모두가 불성 한 가지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불성이 하나라거나 정해진 법이 따로 있는 양 잘못 받아들인다 문 : 어떤 것이 선입니까? 답 : 잘 온 것이다. 문 : 잘 모르겠으니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답 : 마음 이외에 다른 물건 없는데서 보고 듣고, 보고 듣되 마음 이외에 다른 물건 없는 일상의 생활이다. 문 : 어떤 것이 참선입니까? 답 : '잘 온 것이다.'라고 한 의중을 몰라서 알고자 참구하는 것을 말 한다. (마음 이외에 다른 물건 없는데서 보고 듣고, 보고 듣되 마음 이외의 다른 물건 없는 경지를 깨닫고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다.) 문 : 어떤 것이 선화입니까? 답 : 마음 이외에 다른 물건 없는데서 보고 듣고, 보고 듣되 마음 이외의 다른 물건 없는 경지를 깨달아 일상생활 속에서 꽃피우고자 남은 업을 닦는 수행을 선화라고 한다. 문 : 어떤 것이 참 예불입니까? 답 : 예불문을 살펴 보자. 계향부터 말해보겠다. 계향은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다. 정향은 안팎없는 체성이 경계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혜향은 계와 정을 갖추어서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해탈향은 계와 정을 갖추어서 어리석지 않아서 이러-히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해탈지견향은 본래 이러-해서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조차 없이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 광명운대, 즉 온통 나 하나인데에서 성성하고 활달 한 그 자체여서 주변법계, 이 광명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 이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팎없는 체성에 사무쳐 상즉한 가운데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해야 참 예불이다. 문 : 개유불성(個有佛性)이라 하는데 가없는 경지에서 어떤 것을 각각, 각자라고 합니까? 가없는 경지에 사무치면 알 수 있듯 불성은 하나가 아닙니까? 답 : 만일 불성이 하나라면 그래서 네 불성이 내 불성이고 내 불 성이 네 불성이라면 최초의 부처가 깨달아 보림해 마쳤으므 로 그후로부터 모든 사람은 누(漏)를 다한 구경의 화신불이 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생로병사의 고통은 무슨 일이며 지금 깨 닫겠다고 선방에 앉아 있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금강경 에 부처님께서는 인행시 초지보살 때부터 몸이 갈갈이 찢겨 도 진안을 내지 않았다고 했다. 하물며 깨달아 마친 부처에 게 아픔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아프다는 것은 자성이 알지 육신이 아는 것이 아니다. (육신이 아는 것이라면 시체도 아 픔을 알아야 한다) 만약 불성이 하나라면 지금 앓아서 아픔 을 느끼는 이의 불성은 어떤 불성이며, 부처님 불성은 어떤 불성인가? 그러기에 전등록 28권에 육조의 법을 받아 국사로서 법을 편 혜충 국사께 어떤 중이 "오직 하나의 불성이라면 한 부처 님의 수행만으로도 온갖 중생들이 당시에 해탈했어야 할 것 인데 이제 그렇지 않으니 하나라는 이치가 어디에 있습니 까?"라고 묻자 혜충 국사께서 "중생과 부처님의 성품이 하 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처럼 동일한 성품이라는 것이 니 서로 동일한 성품이라 해도 제각기 자신이 닦아서 자신 이 깨달아야 방해롭지 않다. 남이 밥을 먹어서 내 배가 부른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답하셨다. 문 : 요즈음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주장 으로 시비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행자들이 그릇된 길에 집착되거나 의심을 일으키는 분이 많습니다. 바른 돈오돈수의 이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답 : <금강경>에는 네 가지 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만 여의 면 곧 중생이 아니라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제구 일상무상분(第九 一相無相分)을 보면 다툼이 없는(곧 모 든 상을 여읜) 삼매인(三昧人) 가운데 제일인 아라한도 구경지 (究竟地)가 아니니 보살도를 닦아 등각(等覺)을 거쳐야 구경성 불(究竟成佛)인 묘각지(妙覺地)에 이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 으며, 제이십삼 정심행선분(第二十三 淨心行善分)을 보면 부처 님께서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고, 수자 (壽者)도 없는 가운데 모든 선법(善法)을 닦아야 곧 아뇩다라삼 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부처님께서 '네 가지 상(四相)이 없는 경지에서 모든 선법을 닦 아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성불의 경지를 얻는다.'고 하신 것 은 다름이 아니라 견성(見性)한 후에 견성을 한 지혜로써 항상 체성을 여의지 않고, 남은 업을 모두 닦아 본래 갖춘 지혜덕상을 원만하게 회복시켜야 구경 성불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돈수인가? '돈'이란 시공이 설 수 없는 찰나요, '수'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닦는 것이다. 단박에 마친다면 '돈'이면 그만이고, 견성 이전이 든 이후든 닦음이 있다면 '수'라고만 할 것이지 어째서 돈과 수 를 함께 놓아 돈수라 했을까? 그야말로 물의 차고 더움은 그 물을 마셔본 자만이 알듯이 깨달 은 사람만이 알 것이다. 사무쳐 깨닫고 보니 시공(時空)이 서지 않고 시공이 서지 않아 이러-히 시공을 초월한 경지에서 닦아 도 닦음이 없는 것이 네 가지 상이 없는 가운데 모든 선법을 닦 는 것이요, 단박에 깨달으니 번뇌 그대로 보리(菩提)요 보리 그 대로 번뇌여서 버려서는 버린 바 없고 얻어서는 얻은 바가 없어 색(色)과 공(空)마저 서지 못하여 항상 이러-한 경지에서 닦음 없이 닦는 것이 네 가지 상이 없는 가운데 모든 선법을 닦는 것 이다. 또한 네 가지 상이 없는 가운데 모든 선법을 닦는 것이 곧 견성 후의 보림(保任)이다. 왜냐하면 네 가지 상이 없다는 것은 네 가지 상 뿐만 아니라 모든 상이 없다는 것이요, 견성하지 않고서는 모든 상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닦아 남음이 없는 구경지인 성불에 이르는 과정을 돈오돈수라 하는 것이다. 이러-하여 깨달 아서는 깨달은 바 없고 닦아서는 닦은 바가 없는 것이다. 요즈음에 견성이 곧 돈오돈수라고 하는 분들이 많다. 견성이 곧 구경지인 성불이라면 돈오면 그만이지 돈수란 말은 왜 해 놓았 겠는가? 다시 한 번 밝히자면 돈오란 자신의 체성을 단박에 깨닫는 것이 요, 돈수란 깨달은 체성의 지혜로써 시공이 존재하지 않는, 네 가지 상이 없는 함이 없는 함으로 닦는 것을 말한 것이다. 견성 하면 마음 이외의 다른 물건이 없는 경지인데 어떻게 닦음이 있 을 수 있는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견성 했다 하나 헤아릴 수 없는 겁(劫) 동안에 길들여온 업(業)으로 인하여 경계를 대하면 깨달아 사무친 바와 일치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 견성한 지혜로써 항상 체성을 여의지 않고 억겁에 익 혀온 업을 제거하고 지혜 덕상을 원만하게 회복시키는 것 - 이 것이 돈수요, 오후 보림이며 수행자들이 퇴전하지 않고 구경성 불할 수 있는 바른 수행의 길인 것이다. 이것은 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금강경>에서 밝힌 부처님의 말씀이요, 또한 바로 돈오돈수를 주창하신 육조대사님의 말씀 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 돈황본(敦煌本) 이십칠 상대법편과 이십 팔 참됨과 거짓편을 보면 육조 대사님께서 당신의 설법언하 (說法言下)에 대오(大悟)하고도 슬하에서 삼, 사십년간 보림한 십대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난 뒤에 너희들 은 각각 한 곳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종지(根本宗旨)를 잃지 않도록 해 주리라.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兩邊)을 여의도록 하라." 하시 고 삼과(三科)의 법문과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설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삼개월 후 다시 십대 제자들을 모아놓고 '팔월 이 되면 세상을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의심이 있거든 빨리 물 어라. 내가 떠난 뒤에는 너희들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 하시 며 진가동정게(眞假動靜偈)를 설하시고 외워 가져 수행하여 종지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거듭 당부하시고 있다. 이것을 보아서도 육조께서 주창하신 돈오돈수를, 위에서 이 사 람이 주장한 것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www.zenparadis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