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hyoo (문사수) 날 짜 (Date): 1995년07월31일(월) 09시37분39초 KDT 제 목(Title): 반야심경 7 7. 오온법에 대하여 1) 오온(五蘊) 오온이란 것은 일체의 생명현상을 말합니다. 결국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온이란 말은 "쌓임"을 말합니다. "쌓임"이란 곧 소유하여 취한다는 말입니다. 소유하여 취함으로 "나"를 규정함을 오온이라고 합니다. 물질의 세계속에서 육체를 취함이 색온입니다. 정신적인 현상인 느낌.생각.의지.분별심을 취함이 수온.상온.행온.식온 입니다. 취한다는 것은 규정당함을 말합니다. 소유함이 소유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2) 오온법(五蘊法) 오온법이란 부처님 설법이 무엇인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다음은 아함부의 분별경이란 경전에서 부처님이 오온법을 설한 내용입니다. "다섯 가지 쌓임이 있으니 이른바 물질의 쌓임과 느낌.생각.의지.분별심의 쌓임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슬기도 없고 밝음도 없어서 다섯 가지 쌓임에서 "나"라는 소견을 내어 거기에 집착하여 마음을 얽매고 탐욕을 낸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슬기도 있고 밝음도 있어서 그 다섯 가지 쌓임에서 "나"를 보아 집착하여 마음을 얽매거나 탐욕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 . 그러므로 만일 모든 물질로서 과거거나 미래거나 현재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좋거나 더럽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일체를 바르게 관찰하면 그것은 다 덧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느낌.생각.의지.분별심으로서 과거거나 미래거나 현재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좋거나 더럽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일체를 바르게 관찰하면 그것은 다 덧없는 것이니라." 위의 오온법은 "무상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이 무상하고 수.상.행.식이 무상한데 무상한 그것으로 무상하지 않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을 규정하며 살고 있으니 이 오온의 무상함을 잘 관찰하여 덧없음을 살피라는 법문이십니다. 색.수.상.행.식에 의하여 규정된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의 부처님의 법문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문입니다. 그런데 위의 법문에서 보면 오온에서 "나"를 보지 말라고 했지 "나"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오온의 특성은 말하고 계셔도 오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온으로 나를 삼지말라는 법문을 언뜻 들으면 "나는 무상하니까 없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색수상행식이 덧없다는 것을 색수상행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법문에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의 대상체는 오온이 아니라 오온으로 한정시킨 "나"입니다. 색수상행식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색수상행식의 주인공을 바로 알아서 색수상행식에 의하여 자신의 생명을 위축시키고 작게 만들지 말라는 법문인데 언뜻 들으면 세상은 무상하니 집착하지 말고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기 쉬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리불 존자는 잘 못 알아 들은 것입니다. 사리불 존자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위와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쉽게 단정적으로 알아 듣습니다. 3) 아함부 경전이 읽히지 않은 이유 아함부의 경전은 언뜻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쉽고 공감하기 좋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권에서는 잘 읽히지 않았습니다. 대장경속에는 들어 있었지만 중요시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사리불 존자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현대인들에게 비교적 맞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체계적인 설법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학문하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보배와 같은 경전으로 등장하고 대승의 돈오 수행법인 염불.참선 등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점차적으로 뭔가를 이루는 듯한 아함의 위빠사나가 매력적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상좌부불교의 승가상에 대한 사회적인 위치에 대한 매력으로 인하여 더욱 남방불교가 관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함경을 공부하건 또는 위빠사나를 수행하건 간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함부 경전은 잘 못 읽으면 부처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 이해되어진 상태에서 만들어진 수행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반야심경을 듣고 있는 당시의 사리불 존자 처럼... 그렇게 근본설법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원래 부처님이 말씀하신 근본을 재정립한 것이 북방불교인 대승불교입니다. 이해가 잘 안되고 어느 경우에는 서술이 방대하지만 그래도 병이 없는 것이 대승불교이고 부처님의 정법이 이어진 것은 대승불교이고 아함의 핵심을 전승한 것은 대승불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