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lovethee (널사랑해) 날 짜 (Date): 2000년 9월 2일 토요일 오전 10시 21분 03초 제 목(Title): 왜 불행한가?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다는 꿈을 꾸는 중이다. 실제로 보면, 그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대는 불행하다. 행복은 그대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희망이란 위안을 받으려는 마음의 속임수이다. 오늘은 지나갔지만 내일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려는 작전이다. "오늘은 불행하지만 내일은 행복해질거야." 그대는 이런 꿈을 꾸고 있다. 희망을 가지고 꿈을 투영한다. 그러나 진실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는 결코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왜 염려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그의 모든 에너지가 지금 여기에서 진동하고 있다. 무한한 지복과 행복, 축제의 춤이 되고 있다. 나는 삶에 반대하지 않는다. 삶을 즐기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면 그대는 나를 크게 오해한 것이다. 나의 종교는 축제와 기쁨, 춤의 종교이다. 나는 그대가 춤출줄 모르는 신을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나는 그대에게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열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집착은 불행한 마음을 대변한다. 그대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눈에 비친 그대는 불행하다.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사실을 직시하라. 그대가 진실로 삶을 즐기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것을 축복해 줄테니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지 않다. 그저 "나는 삶을 즐긴다."고 믿을 뿐이다. 자신의 불행을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는 것은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그대는 슬픔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웃음짓는다.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옷을 껴입고 색칠을 한다. 그대는 행복에 겨운 것처럼 위장하면서 타인과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 그대는 행복하지 않다. 만일 진실로 행복하다면 그대는 이미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명상할 필요도 없다. 진실로 행복하다면 어떤 종교도 필요없다. 종교는 하나의 방편으로써 필요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종교는 아직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 여전히 불행과 어둠의 늪에 빠져있는 사람들,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의 수단이다. 나는 안다. 그대는 번뇌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어떤 안식처를 필요로 한다. 고통이 큰 나머지 꿈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꿈꾸는 천국과 행복은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결코 그대와 함께 있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를 제외한 다른 시간과 공간을 모른다. 진실로 행복하다면 오직 행복이 존재할 뿐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명심하라. 불행 속에서는 그대와 불행이 존재한다. 둘이 존재한다. 그러나 행복 속에는 오직 행복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없다. 행복의 차원에는 '이원성(二元性)이 없다. 인도에서는 그것을 '아드와이트(adwait)'라고 부른다. 불행은 위원적이다. 불행 속에서 그대는 항상 둘로 존재한다. 조각조각 나뉘고 분열된 상태가 불행이다. 불행할 때 그대는 유기적인 통일체가 아니다. 무엇인가 그대를 거스르고 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다. 생선의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다. 그대는 "내일은 괜찮아 질거야."하는 희망을 안고 그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어제를 돌이켜 보라. 어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에는 오늘이 바로 내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리던 오늘이 왔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내일들도 계속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내일은 항상 오늘로 온다. 결코 '내일'로 오지 않는다. 사실, 내일은 오지 않는다. 그 본질상 불가능하다. '내일'은 지평선과 같은 꿈이다. 내일을 꿈꿀 수는 있지만 그것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일은 허구이다.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대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감추어 두고 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그것을 감추려는가? 그것을 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감추면 감출수록 그것을 제거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의 존재가 더 많이 오염된다. 그대 삶의 근원 자체가 더 중독된다. 불행이 암세포처럼 번져나간다. 그래서 거의 그대의 일부처럼 되어버리고 그것을 어떻게 제거해야하는지 속수무책이 된다. 그래서 명상이 필요하다. 명상은 그대의 심각함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그대 자신이 시체처럼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과거의 망령과 미래의 헛된 꿈을 몰아내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명상은 그대에게 넘치는 즐거움을 선사하여 그 즐거움 안에서 그대가 사라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남아 있다면 불행을 벗어날 수 없다. 그대 자신이 불행이다. 그대가 존재하는 한 심각함은 멈추지 않는다. '나'가 존재할 때 그대는 즉시 자신의 주변에 심각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무엇인가 이미 죽어가고 있다. 그대 자신이 곧 그대의 죽음이다. 그대는 질병이다. 즐거워하고, 춤추고, 사랑할 때, 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 이때 그대는 아무 이유도 없이 행복하다. 행복에는 아무 이유도 필요없다. 만일 이유를 찾으려 한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행복을 인과의 법칙에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복은 절대적으로 비논리적이다. 행복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행복하라! 기다리지 말라. 무엇인가 준비를 하려고 애쓰지 말라. 사전준비가 필요없다. 그대는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행복해질 수 있다. 아무 것도 모자람이 없다. 나로부터 이 기술을 배운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배운 것이다. 행복은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은 오직 자연스럽게 즐기는 습관, 즐기는 능력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오직 즐김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없다. 즐기면 즐길수록 그대는 더 많은 많은 것을 즐기게 된다. 즐기는 능력이 늘어난다. 이런 능력은 끊이지 않고 늘어간다. 끊임없이 날아올라 정상을 향해 줄달음친다. 모든 순간이 지금 이 순간에서 나온다. 다음 순간도 지금 이 순간에서 나온다. 이금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산다면, 사랑과 기쁨으로 이 순간을 산다면, 다음 순간 역시 이 순간에서 비롯될 것이고 그대는 이 순간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다음 순간이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고 그대의 능력이 배가될 것이다. 행복이란 그대가 이미 갖고있는 것을 즐기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대는 이런 능력을 한번도 발휘한 적이 없다. 두 발로 걷는 것을 금지당한 어린아이가 불구자가 되는 것과 같다. 그에게 걸을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혹시 넘어져서 상처를 입을까봐 염려한 엄마가 아이에게 두 발로 걷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계속 네 발로 기어다닌다. 모든 아이는 두 발로 걷는 능력을 타고난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아무도 예외가 아니다. -오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