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MinSoo () 날 짜 (Date): 2000년 5월 18일 목요일 오전 11시 44분 32초 제 목(Title): [퍼]위빠사나 수행법 출처: http://www.medipia.co.kr/link/vipa/index.html 1.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변함없이 계속 행복하기만을 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호소한다. 그러면 행복과 불행은 무엇이며 왜 일어나는 것일까? 행복은 욕구(바라는 모든 것)가 충족되어 만족한 상태를 말하 며, 불행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불만족한 상태를 말한다. 만족 하면 행복하고 불만족하면 불행한 것이다. 만족하면 행복으로 끝나는가? 불만족하기 때문에 만족하려 하고 만족하면 만족하는 순간부터 일어나는 또 다른 욕구로 인하여 항상 불만족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이다. 끊임없이 새로 일어나는 욕구로 인한 불만 족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끊임없는 순환을 계 속하게 한다. 행복과 불행은 만족과 불만족의 교차에서 오는 감 정인 것이다. 불행을 담보로 한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며 이 순환과정 자체가 사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채워질 수 없는 불만족을 계속 일으켜 제 스스로 멋대로 순환하 면서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절대자에게 이 고통의 순환과정으로 부터의 구원을 호소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이를 멈추게 해 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제삼의 힘에 의하여 고통의 순환으로부터 구원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일,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이 있다면 이미 이 달갑지 않은 순 환과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먹이사슬과 같은 생존경쟁이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루어진 세상구 조에서는 한쪽의 행복은 다른 쪽의 불행을 조건으로 얻어지는 것 이며, 상대적 평가에서 오는 만족감이기 때문에 공평이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획일적이라면 그 또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자극을 원하고 그 자극으로 생존을 확인하면서 계속 더 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다. 같은 환경조건이라도 개체에 따라 미치는 영향의 결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이를 비교 분석하여 다양한 만큼의 새로운 욕구를 생성하는 것이다. 원래가 이렇게 계속 전개되어온 세상인 것이다. 존재 자체가 욕구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만족의 불행을 계속 전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달갑지 않은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스스로 만드는 고통의 순환이기에 스스로 멈추지 않으면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 잠시라도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계속 편안하면 좋겠다. 모두가 평온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며 욕구는 왜 일어나는가, 어떠한 욕구가 불행을 더 가중케 하는가를 알고., 그 원인을 치료한다면 달갑지 않은 순환과정을 멈추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조건 없는 행복인 진정한 자유(해탈)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2. 위빠사나(Vipassana) 위빠사나 수행은 이제까지 나(자아)라고 생각되는 이 몸과 마음 안의 세계, 즉 몸(신), 느낌(수), 마음(심), 생각의 대상(법)에 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통찰명상>이라는 적극적인 방법을 통하여 현재의 순간에 알아채고 집중된 마음으로 <주시(들여다 봄)>하여, 그 현상의 참 상태에서 드러나는 실제가 확실히 파악 됨으로써 존재 형성의 진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존재는 원인 결과에 따라 생성 소멸의 변화 과정 속에 있으 며, 그 속에서 불변(영원히 산다든지)의 상태를 원하는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배후에 그것을 관장하는 어떤 변하지 않 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앎>으로 불행과 불행의 원인인 집착과 집착으로 형성된 자아관념(아집)을 스스로 극복하게 되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서 오는 모든 고 통 번뇌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것은 이론이나 생각(관념)이 아니라 실제를 보고 체험적으로 알게된 <지혜>로 무거운 짐인 번뇌를 벗어버리고 무한한 자유 < 해탈(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개인, 가정, 공동사 회의 복잡하고 혼돈된 구조 속에 살아가면서 병마·불안·공포· 불만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는다. 많은 시 달림을 받으면서도 왜 시달려야 하는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지, 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지 생각해볼 기회도 여유도 없이, 조그만 쾌락을 행복이라 착각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하루 이틀 일년 이년 죽을 때까지 평생을 비교적 자신보다 남을 더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만족과 불만족의 교차에서 오는 감정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에 필연적으로 불만족이 따라붙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 착각하고 사는데서 오는 것이며 조건 없는 행복 에 비하면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고통의 굴레와 굴레의 원인이 무엇인지, 벗어날 수는 있는 것 인지,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 해답 은 먼 곳 또는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생각되는 이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좀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살펴보아 존재 형성의 원리를 터득하고 그 자체의 실상을 정확하 게 파악해야 한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집착은 있지도 않은 자아를 있 다고 생각하는 관념의 허구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그 허구가 허구임을 확실히 이해한다면, 즉 끈질긴 집착인 아집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알게 되어 스스로 무거운 짐인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 또는 포기하라거나 무엇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 스로가 스스로를 지혜로 극복하여 이제까지 끈질기게 이어져 온 결집력과 경향성(습성)을 타파하고 번뇌로부터 초월하는 승리를 이루는 것이다. 몸이 괴롭거나 마음이 괴로운 사람,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이 명상 수행법으로 정진하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의 허와 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오는 모든 고통들에 대처할 수 있는 능 력과,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 자신과 남들을 함께 보호하며, 슬픔과 비탄, 갈애와 불안 공포, 육체적 괴로움 과 정신적 고뇌들로부터 차차 벗어나게 되어 삶의 질이 향상되는 이득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더욱더 진전하여 조건 없는 지고의 행복인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수행법이다. 가정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10분, 20분, 1 시간 수행하는 것도 좋다. 짧은 시간이라도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잠시라도 수행하면 짧은 시간에 완전한 휴식 을 취하여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고, 자기 의지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만큼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며, 조 금 더하여 한 두 달 집중 수련을 한다면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수행하는 방법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 으나, 이 모든 것을 한번에 다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잠깐동안 앉 아서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차차 더 진전하게 되는 것 이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려는 초보자와 계속 정진하려는 이들을 위하 여 미얀마(버마)의 수도 양곤(랭구운)에 있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마하시 명상 수도원을 세웠으며, 위빠사나 수행법을 재정립하신 마하시 사야도(선사)의 법문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수행을 시작 하고 실행하고 이해하는가를, 그리고 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수행방법의 설명은 집중수 행을 기본으로 한다. 수행의 자세는 행, 주, 좌, 와 즉,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가지 로 되어 있으나, 걸으며 하는 수행과 앉아서 하는 수행을 주로 하고 서서 하는 수행과 누워서 하는 수행은 보충적으로 한다. 3. 앉아서 하는 수행(좌선) 앉는 자세는 가부좌나(그림ⓛ) 반가부좌(그림②) 또는 반가부좌 의 자세에서 얹힌 다리를 앞의 바닥에 내려놓는다(그림③). 얼굴 은 정면을 향한 상태에서 눈을 가볍게 감고, 입은 가볍게 다물 고, 목과 등을 반듯이 펴고, 허리를 앞쪽으로 약간 밀고, 엉덩이 를 약간 뒤로 빼면 자세가 안정된다. 왼손을 아랫배 앞의 발 위에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놓고 오른 손을 그 위에 가볍게 얹어 놓든지(그림③), 양손을 양쪽 무릎 위 에 손바닥을 위로하여 가볍게 놓는 등(그림④) 신경 쓰이지 않도 록 하고, 너무 형식에 얽매인 경직된 자세보다는 편안하고 바른 자세로 앉는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몸을 마음으로 살펴보면 호흡에 의하여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움직이는 이 배를 마음으로 주시한 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나올 때 <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이 름 붙이면서 주시하고 내쉬면 배가 들어갈 때 <사라짐>이라고 마 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주시한다. [vipa-1.gif] 만약, 배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손바닥을 배에 가볍게 대고 주시한다. 그러면 배의 오르고 내리는 움직임 이 손바닥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다. 호흡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바꾸어 너무 빠르거나 느리게 또는 너 무 강하거나 약하게 하면 쉽게 피곤해지면서 여러가지 부담을 준 다. 호흡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의식을 가하지 말고 쉬어지는 대 로 자연스럽게, 부드럽고 꾸준하게, 그리고 안정되게 하면서 일 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의 현상과 움직이는 과정 속의 <현상>에 서 인지되고 느껴지는 것을 마음으로 <주시>한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주시할 <대상(현상)>에 마음을 잡아 집중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모든 현상에 걸맞은 이름을 붙이면서 주시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이름하건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 자체를 정확하게 <아는(알아차림)> 것이다. 주시대상의 현상이 이름 붙이기가 애매할 때는 그 상태를 알고 있다는 뜻으 로 "앎" "앎" "앎" 하면서 주시하고, 이름 붙이는 것이 방해가 될 때에는 그 현상의 상태만을 그냥 주시한다. 수행에서 <주시함>이란 몸과 마음 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 상들을 편견ㆍ관념ㆍ생각ㆍ의도를 내포하지 않고 그 대상에 온 정신을 모아, 긴장을 풀되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인지하고 느껴지는 것을 바라만 보는 것이다. 시냇가 에 앉아 맑은 물 속에서 노는 고기를 놓치지 않고 눈으로 들여다 보듯이 객관적인 마음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다. 즉, 일어나고 사 라지는 현상들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숨을 들이쉴 때 나오고 내쉴 때 들어가는 배의 움직임 을 알아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떤 때는 배의 움직임이 저 절로 길거나 또는 짧거나, 명료하거나 불분명할 때, 배가 일어나 는 상태에서의 변화들, 팽만감, 피부 근육 등의 움직임을, 또 배 가 사라지는 상태에서의 여러가지 변화, 반복될 때마다 달라지는 전과정의 <움직임과 느낌들을> 자세히 주시해야 한다. 현상의 일어남과 마음의 주시가 일치 되도록 정확하게 목표를 조 준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배의 움직임과 그것을 주시하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작용이 밀착되어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여 동일 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누구나 처음에는 이러한 어려운 단계 를 겪어야만 한다. 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으면 몸의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현상 들이 일어난다. 통증ㆍ가려움ㆍ저림ㆍ답답함ㆍ경직ㆍ열기ㆍ피로 감 등,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면 가능한 한 참아 내며 가장 두 드러진 현상으로 주시대상을 옮겨 그 현상에 따라 "통증, 통증, 통증" 또는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주시한다. "머리가 뻗뻗함", "얼굴이 간지러움", "손에 통증", "허리 아 픔", "다리 저림", 등 느낌과 현상이 발생한 부위 이름까지 명칭 화 하지 말고, 단지 발생한 느낌과 현상을 주시하면서 "통증", "가려움", "경직", "열기", 등 그 상태만을 마음속으로 이름 붙 이면서 철저하게 놓치지 않고 주시하면 그 현상은 차차 사라지게 된다.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배의 움직임으로 돌아와 일어나고 사라 지는 현상을 <일어남>ㆍ<사라짐> 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우리의 몸에는 항상 여러가지 <감각현상(느낌)>들이 셀 수 없이 일어난다. 하나가 사라지면 곧이어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난다. 상 기ㆍ통증ㆍ가려움ㆍ답답함ㆍ저림 등의 불쾌한 신체적 현상들은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현상들이 일어날 때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반드시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그 당시 두 드러진 것을 선택하여 주시해야 한다. 인내는 수행의 필수적 요 소이다. 초보의 수행자가 어떠한 자극, 아픔, 열남, 차가움, 등도 느끼지 못 하였다고 한다면, 주시와 집중력이 그러한 느낌들에 대하여 의식 할만큼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상을 주시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답답하다", "나는 덥다", "나는 아픔을 느낀다", "나는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 이 러한 불쾌감으로 해서 괴롭다." 이렇듯이 <나>라는 생각(자아관 념)을 가지고 현상을 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현상에 그같이 복잡한 <나>는 없다. 오직 <느낌(현상)>과 그것을 알아차 리는 <마음>, 또 다른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또 다른 마음이 연이어진 것뿐이다. 초보의 수행자들이 수행중에 몸의 자세를 바꾸거나, 구부리고, 뻗고, 어떤 다른 행동들을 하게 하는 원인은, 그러한 행위를 하 기 전에 발생하는 고통의 느낌인 얼마간의 통증 때문이다. 그러 므로 수행자는 통증을 인내심으로 견디면서 주시해야 한다. "인 내심이 열반으로 이끈다." 라는 말이 있다. 움직이지 않고 자세 를 바꾸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수행자가 통증을 견딜 수 있고, 자세를 바꾸지 않고 계속 주시 할 수 있다면, 그는 통증의 실상을 보게될 것이다. 강한 통증의 현상이 일어났을 때 혐오ㆍ싫어함ㆍ회피 등의 충동 이 일어나면서 심신을 긴장시킨다. 이때 용기 있는 수행자는 그 고통스러운 느낌을 피하지 않고 이 통증으로 해서 어떠한 일이 생길지라도 그 실상을 보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 오를 하고 주시하는 것으로 정면대결을 시도한다. 긴장을 풀되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통증의 현상과 주 시하는 마음을 일치시켜 계속 "통증, 통증, 통증" 하면서 놓치지 않고 주시하면 그 현상에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통증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다음 통증의 느낌은 있으나 아파하는 자는 없어 혐오나 회피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다음 하 나의 통증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해 가는 <생멸(일어나고 사 라지는)>들의 흐름이며, 다음 아픔이 없어진 반복 자극하는 현상 만이 남아 있다가, 이 또한 또 다른 현상들을 보이면서 힘을 잃 고 사라져 간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일어난 통증을 망각하는 것 이 아니라 사라지는 과정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며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오랫동안 주의 깊게 주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때 몸의 자세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 이 커지게 되며, 이러한 욕망 또한 놓치지 말고 "욕망, 욕망, 욕 망" 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다음 자세를 바꾸기 위하여 움직이려 는 <의도>, 앉은 자세에서 팔을 뻗고, 다리를 잡고, 내리고, 그 리고 그에 수반되는 행동 과정 안에서의 모든 의도(마음)와 실제 움직임들(몸)을 세밀하게 주시하면서 자세를 바꾼다. 수행자는 어떤 행위를 할 때 행위 하려는 <의도>를 처음으로 알 아차리고, 그리고 실제의 행위 하는 과정들을 주시해야 한다. 이 러한 주시가 그의 수행력이 집중되고 무르익도록 도와줄 것이 다. <의도>란 행동에 앞서 나타나는 정신적 작용으로서 움직임에 앞 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대체로, 우리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 고 행동해 왔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 고 마음이 어떻게 움직임과 관계 맺는지, 모든 의도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하며 몸의 자세를 바꾼다. 이것은 의도와 행위의 원인 결과를 바라보는 것이다. 움직임이 그치고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한다. 가려움의 현상이 있을 때 참지 못하고 긁기를 원하거나 자세를 바꾸고 싶은 욕망이 일게 된다. 이때 가려움을 없애고자 즉시 긁 지 말고 먼저 가려운 현상과 긁고 싶은 욕망을 차례로 주시한 다. "긁고 싶음", 편안하길 원하면 "편안하길 원함", 다음 "가려 움, 가려움, 가려움" 하면서 가려움의 현상을 계속 주시할 경우 대개의 가려움은 사라진다. 그 뒤 곧 다시 배의 움직임을 주시한 다. 만약, 가려움이 정말로 사라지지 않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에 는 물론 손으로 긁어서 이를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긁 고 싶은 욕망을 주시한다. 그리고 가려움을 제거하고자 긁으려 는(손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가능해 지도록 노 력해야 한다. "긁으려 함", 긁어 대는 모든 움직임,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의 행동하려는 의도, 그에 수반되는 모든 느낌(시원함, 개운함 등) 까지도 놓치지 않고 주시한다. 다시 말해서 손이 닿고, 밀고 당 기고 할 때 먼저 행동하려는 <의도(마음)>, 긁는 <행동(몸)>, 손 을 제 위치로 옮기는 모든 미세한 동작까지 주시하고 나서 다시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으로 주시를 돌린다. 불쾌감에 반응하여 슬며시 자세를 바꾸면서도 바꾸는 진행과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바꾸고 나서야 바꾼 사실을 안다 거나, 이러한 고통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세를 바꾸기 위하여 몸을 자주 움직 인다면, 그는 <깊은 마음 집중(삼매 Samadhi, 연속적인 알아차림 만을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는 상태)>을 이루지 못하여 현상들의 실상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배의 움직임이 너무 미세하여 <일어남>과 <사라짐>이 선명하지 않아 잘 감지되지 않을 때나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는 그것들을 찾으려하지 말고 몸이 앉아있음으로 해서 오는 느낌이 나 엉덩이가 바닥과 닿음에서 오는 느낌으로 주시대상을 옮겨 " 앉음" "닿음" 하면서 주시하다가 배의 움직임이 다시 살아나면 주시대상을 배로 옮겨 배의 움직임과 움직임에서 오는 느낌들을 자세히 주시한다. 그래도 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앉음"을 주시한 후 오른쪽 다리의 "닿음"을 주시하고 다음 엉덩이 "닿음"을 주시한 후 왼쪽다리의 "닿음"을 주시한다. 이런 방법으로 "닿음"의 주시 대상 위치를 세곳 또는 다섯, 여섯, 그 이상으로 바꾸어 주면서 주시한다. 물론 여기에서 아무 현상이 없는 곳을 생각으로 정해 놓고 대상이라고 주시해서는 안 된다. 느낌의 현상이 있는 곳만 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주시해야 한다. 이 방법은 잡념이 많을 때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주시하다가 어느 사이에 마음은 주시대상을 떠나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된다. 초보자는 그가 방황 하고 다니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어 디에도 방황하지 않았고, 항상 고요하다." 라고 말한다. 주시대상인 즐거움, 괴로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상념, 욕망, 증 오, 등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렸을 때, 그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망상, 망상, 망상", "잡념, 잡념, 잡념" 등 그 마음 상태에 따라 마음속으로 걸맞은 이름을 붙이면서 주시하면 그 현 상은 사라진다. "집에 간다", "장소에 도착함", "산을 봄", "사람을 봄", "무엇 인가를 가짐" 등과 같이 집들, 사람들, 수풀, 산, 들판 또는 일 하는 장소들이나 목적어에 이름을 붙이지 말고 단지 "감", " 감", "도착함", "도착함", "봄", "봄", 등 동사형의 이름을 붙이 면서 주시해야 한다. 우선 "망상, 망상, 망상" 하면서 주시하여도 망상이 사라지지 않 을 경우 다음 단계로 마음이 누군가를 만나는 상상을 했을 경우 "만남", 대화하는 상상을 할 경우에는 "얘기함", 무언가 계획을 할 경우 "계획함", 무언가 인식했을 때는 "인식함", 행복을 느낄 경우 "행복", 이같이 기쁨ㆍ슬픔ㆍ실망 등등 이러한 모든 의식의 행위들을 주시하여야 한다. 망상이나 생각들은 수행의 장애가 아니라 주시해야 될 또 다른 대상들이다. 무슨 생각이며 왜 일어났는가, 어딘가, 등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난 순간 알아차려 생각하는 상태를 주 시하는 것이다. 망상이나 생각들은 계속 주시하면 힘을 잃고 사 라지지만 중요한 것은 망상이나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 리는 것이다. 수행자는 망상에 빠져 있어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 을 갑자기 발견하고는 놀라 실망하면서도 어느 사이에 또 생각 속을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마음이 방황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끝없는 망상으 로 탈선되어 헤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에 악영향을 미 친다. 마음이 방황하는 동안에는 <일어남> <사라짐>이 분명하지 않으며, 일어남과 사라짐을 세밀하게 잘 주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곳으로 방황하게 된 것이다. 이럴 때 자신의 주의력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망상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망상했음을 확인하여 "망상, 망상, 망상" 하면서 주시 하고, 망상이 사라지면 주시대상을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려 주시하다가, 또 어느 사이에 망상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여 알아채고 "망상, 망상, 망상" 망상했음을 또 확인하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여기에다 순간순간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리고자 노력하여 달아나는 마음을 일어나는 현상에 밀착시키면 망상이 줄어들게 된다. 이 노력을 계속 반복하여 주 시하는 마음과 주시대상인 현상이 일치되어 "일어남", "사라 짐", "앉음", "닿음", 등 대상들이 더욱 선명하고 구별되게 정확 한 주시와 집중이 이루어질 때 모든 망상은 사라져 버릴 것이 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명확하게 주시하는 동안에는 마음은 방황 할 수 없다. 망상이 나타날 수 없으며 망상을 하였을 지라도 빠 르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졸음이 올 때는 "졸음, 졸음, 졸음" 하고 졸음을 주시한다. 고개 가 처질 때 "처짐", 눈까풀이 무겁고 답답할 때에는 "무거움", 눈이 쑤시고 아플 때는 "아픔" 또는 "쑤심" 등, 이렇게 모든 졸 음의 현상들을 주시한다. 졸음이 심할 때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졸음, 졸음" 하면서 어느 틈에 잠에 떨어져 버리 기 때문이다. 마음을 챙겨 다시 주시를 시작하지만 또 꾸벅 졸고 마는 것이다. 졸음은 안개처럼 밀려들어 어느 사이에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취 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시하는 마음도 주시대상인 현상도 모두 잠에 취하여 희미해진다. 희미한 대상과 희미한 주시가 만나 희 미한 잠 속을 계속 헤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비 능률적이다. 잠자는 것이 수행은 아니다. 이럴 때 마음을 다시 챙겨 잠이 깬 <주시함>과 잠이 깬 새로운 <대상(현상)>을 만나게 하여 밀착시키면 잠시 동안이라도 졸음이 달아난다. 다시 졸다가 깨었을 때 절대로 졸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챙겨 또 <신선한 주시>와 <신선한 대상>을 밀착시킨 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면 웬만한 졸음은 물리칠 수 있다. <주 시>와 <대상>이 정확하게 <밀착>되면 잠이 끼여들 틈이 없어지는 것이다. 졸음이 사라지고 다시 마음이 맑아지면 "맑아짐" 하고 주시한 뒤 곧 배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그래도 졸려서 도저히 못 참겠으면 조용히 일어나서 걸으며 하는 수행을 하다가 잠이 달아나면 다시 앉아서 하는 수행을 시도하는 것도 좋다. 마음에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때는 이를 알아채어 "욕망, 욕 망, 욕망" 하면서 주시하고, 불만족이나 성냄이 일어날 때는 "진 심, 진심, 진심" 하면서 주시하고, 마음이 흐려져 싫증나고 권태 를 느끼거나 무기력하여 의식이 명료하지 않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경각심을 가지고 "싫증, 싫증, 싫증", "권태, 권태, 권태" 또는 "지루함, 지루함, 지루함" 하면서 주시하고, 불안정하고 걱 정이 있을 때는 "불안함, 불안함, 불안함" 하면서 주시하고, 이 수행이 과연 나에게 어떠한 이로움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생길 때는 "의심, 의심, 의심" 하면서 그 마음 상태를 주시한다. 이러 한 <생각(법)>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이러한 현상들 이 일어날 때마다 그 마음 상태를 철저하게 주시하면 그 노력에 의하여 이러한 장애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주시하면서 주시대상과 미세한 잡념이 함께 붙어 있을 때에는 " 잡념, 잡념, 잡념" 하면서 이를 잘 가려내고 더 정확하게 현재의 현상에 밀착하여 따라가야 한다. 주시와 그 대상(현상) 사이에 잠시도 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밀착되어 면밀한 주시가 이루어 질 때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가지 느낌과 현상 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생멸의 현상이므로 좋고 나쁜 느낌은 그 느낌에 따라 알고 주시하며 환상이나 영상이 나타날 때는 그 현상에 따라 알고 주시한다. 수행자는 수행의 목적이 <번뇌의 소멸>에 있음을 항상 명심하고 어떠한 느낌과 현상들도 철저하게 주시하여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잘못된 견해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참된 수행을 하게 된다.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주시의 중심대상이다. 몸과 마음 어디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는 즉시 주의력을 그 현상으로 옮겨 철저하게 주시하여 그 현상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중심으로 돌아와 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의 현상들을 <일어남>, <사 라짐> 하면서 면밀하게 주시한다. 주시력이 향상되면 일어남과 사라짐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 라 일어남의 끝과 사라짐의 끝에 중지가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 중지 부분을 더 자세히 보아야 한다. 수행이 많이 진전하여 몸과 마음에 모든 현상이 사라져서 대상이 없고 그 없는 상태를 아는 마음만이 있을 때에는 그 <앎> 자체만 을 주시한다. 앉아서 하는 수행을 끝내고 일어설 때는 먼저 일어서려는 의도를 "일어서려 함" 하면서 주시하고 일어서는 과정의 모든 동작들을 하나하나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 손을 "듦", 다리를 "폄", 일 어 "섬" 하면서 모든 동작에 집중하여 주시한다. 4. 걸으며 하는 수행(보행선) 몸을 바로 하고 서서 시선은 발끝으로부터 2∼3m 정도 거리의 앞 을 본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면 쉽게 피곤하고 부담이 옴으로 턱 을 들어 바르게 한다. 손은 앞이나 뒤로 모아 잡아 흔들리지 않 게 하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걸으며 걷는 발의 동작과 감각에 마 음을 일치시켜 주시한다. [vipa-3.gif] 빨리 걸을 때는 왼발을 내딛으며 "왼발" 오른발을 내딛으며 "오 른발"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붙이면서 한발한발 주시하던가 각 발을 두 단계로 왼발을 "들어서, 앞으로" 오른발을 "들어서, 앞 으로" 하면서 발의 동작과 느낌을 주시한다. 천천히 걸을 때는 세 단계로 왼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 오른발을 "들어서, 앞 으로, 놓음" 또는 네 단계로 "들어서, 앞으로, 놓음, 누름" "들 어서, 앞으로, 놓음, 누름" 이라고 하면서 각 발의 <움직임>과 <느낌> 하나 하나를 단계별로 세분하여 주시한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서려 할 때는 우선 "서려 함" 하면서 서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섬" 하면서 서 있는 상태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주시하고 "돌아서려 함" 하면서 돌아서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돌아감, 돌아감, 돌아감" 하면서 돌아갈 때 몸과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완전히 돌아섰을 때 "돌아섬" 하 면서 서 있는 몸의 상태를 또 주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나아가려 함" 하면서 나아가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들어서, 앞 으로, 놓음" 하면서 또 발의 움직임과 느낌을 주시하면서 진행한 다. 마음의 명령에 의하여 모든 동작이 이루어지고 그 움직임의 상태 와 느낌을, 즉 왼발이면 왼발임을 알고, 들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들면 들림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고, 나아감을 알고, 놓을 때 의도와 놓음을 알고, 닿으면 닿음을 알며, 바닥과 접촉할 때의 감각, 체중의 중심이 옮겨질 때 발의 상태 등 모든 움직임에서 오는 느낌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 시해야 한다.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어느 사이에 마음은 주시대상을 놓치 고 생각 속을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럴 때는 발의 진 행을 멈추고 "생각, 생각, 생각" 하면서 생각하는 마음 상태를 주시하여 그 생각이 사라지면 다시 진행하면서 발의 움직임을 단 계별로 주시한다. 주시력이 향상되면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 는 중에도 미세한 잡념이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잘 가려내어 실제의 움직임이나 감각만을 주시할 수 있게 된다. 걸으면서 눈이 어느 대상을 보았을 때는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소리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중인 수행 자에 있어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현재>의 내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주시>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상하거나 또는 인상적인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는 그 대상에 빠져들지 말 고 다만 조심스럽게 <보임>, <들림> 만을 주시할 뿐 어떤 견해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마음 집중이 잘되어 <주시>와 <현상>이 일 치할 때 <의도>와 <행위>만이 있을 뿐 이를 주도하는 <주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걸으면서하는 수행은 앉아서하는 수행과 균형을 맞추어(한 시간 : 한 시간) 해야한다. 앉아서하는 수행만을 주로 하면 심신이 침 체되고, 걸으면서하는 수행만을 주로 하면 심신이 들떠 깊은 마 음 집중을 이룰 수 없다. <앉아서하는 수행>과 <걸으며하는 수 행>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깊은 마음 집중(삼매)> 속에서 수 행의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오래 걷다 보면 앉고 싶어진다. 그럴 때는 "앉고 싶다"라는 그 욕망을 주시하고, 앉을 때 무겁게 내려앉는 몸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한다. 움직임이 그치고 몸이 고요해지면 또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한다. 5. 누워서 하는 수행(와선) 몸을 눕힐 때 몸을 눕히고자하는 의도를 먼저 주시하고, 천천히 누우면서 누울 때의 모든 동작과 느낌, 팔 다리를 가지런히 놓는 등 세세한 움직임을 쉴새없이 조심스럽게 주시한다. 몸을 완전히 눕힌 후 움직임이 그치고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 짐>을 주시한다. 주시를 하다 보면 좌선 때와 같이 몸과 마음에서 여러가지 현상 들이 일어날 때 두드러진 현상에 따라 이름 붙이면서 계속 철저 하게 주시한다. 잠자는 시간에 누웠다 해도 바로 잠을 자지 말고 주시함을 계속 한다. 수면 중에도 수행을 계속한다는 생각으로 한다. 수행이 여 실하다면 잠에 쉽게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잠자지 않고 계속 수행 하면 피곤할 것이라고 염려하겠지만 잠을 잔 것보다 더 피로가 풀리고 몸이 가벼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누워서 수행을 하다가 참으로 피곤하여 졸음이 심하면 끝내는 그 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몸이 몹시 지쳐 있을 때나 앉아서하는 수행이나 걸으며하는 수행에 진전이 없을 때, 그리고 수면시간에는 누워서 배의 오르내림을 주시한다. 초 보자는 누워서하는 수행을 자주 한다거나 너무 오랜 시간 해서는 안 된다. 누워서하는 수행보다는 앉아서하는 수행과 걸으며하는 수행을 주로 해야한다. 수면시간은 수행자가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참으로 진지 하게 열심히 수행하려는 수행자는 하루 4시간 이상 잠자지 않는 다. 4시간 수면은 충분한 시간이다. 더러는 4시간 수면으로 건강 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도 있다. 그런 이들은 5∼6시간을 잘 수도 있다. 6시간 수면은 건강에도 충분한 시간이 다. 또 잠에서 일어날 때는 반드시 주시함을 곧장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요 약 지금까지 수행자가 주시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말했다. 그러나 요약하면 몇 가지뿐이다. ※ <1차 대상> 즉 기초적 주시해야 할 대상으로 앉아서하는 수행 때에는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 걸으며하는 수행 때에는 발의 움직임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 누워서하는 수행에서 또한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주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1차 대상>을 주시하는 도중 1차 대상 이외의 다른 현상인 <2차 대상>이 나타나면 즉시 알아차려 그 대상으로 옮겨 주시하다가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1차 대상>으로 돌아온다. <2차 대상>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오직 <1차 대상>만을 놓치지 않고 계속 주시한다. 6. 항상 깨어 있음 열심히 번뇌의 소멸을 향해 가는 수행자는 항상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채고 계속 주시해야 한다. 오직 잠자는 시간에만 어쩔 수 없이 그 노력이 멈출 뿐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일찍 일어나며, 또한 잠에서 깨어날 때도 "잠이 깬다" 라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알아차려 주시하지 못하였다면 곧장 배의 오르내림을 주시한다. 수행자는 자세를 바꿀 때나 또는 어떤 움직임에도 병약자가 움직일 때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천천히 행동하듯이 서서히 점잖게 그리고 품위 있게 움직여야 한다. 동작에서 오는 모든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채려면 좀더 천천히 움직임으로써 자세히 주시 집중할 수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할 때는 "일어나려 한다"라고 그 의도를 주시한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팔 다리 등의 움직임, 머리를 들며 "든다", 일어나 앉으며 "앉는다", 이렇듯 모든 의도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한다. 세수나 목욕을 할 때는 움직임이 많고 빨라지나 그 세세한 동작들을 가능한 한 모두 주시하려고 노력한다. 그 뒤에 하게되는 옷을 입고, 잠자리를 정돈하고, 문을 여닫고,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모든 움직임과 현상 등, 이 모든 동작과 느낌들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주시한다. 걸을 때, 서있을 때, 앉아있을 때, 일어날 때, 먹을 때, 볼 때, 들을 때, 등등에 마음 가득히 주시할 수 있는지, 만약 주시가 정확하지 않을 때에는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주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식사 때에 음식이나 식탁을 보면 "본다", 음식을 집으려고 손을 뻗을 때 "뻗음",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넣음", 음식을 씹을 때 "씹음", 맛을 느낄 때 "느낌", 음식을 삼켜 식도를 따라 내려갈 때 모든 느낌과 움직임, 계속해서 음식을 한입 한입 먹을 때마다 주시한다. 식사시의 주시는 수많은 관찰대상이 있어서 약간은 어렵다. 초보자는 대상을 수없이 놓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모두를 주시하고자 하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많은 부분들을 넘어가고 놓치게 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점차 마음의 집중력이 강해져서 모든 움직임을 세밀하게 주시할 수 있게 된다. 몸(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마음이 느끼(수)고 인지하는 것과 움직이려는 의도가 있어 몸이 행동하게 되고 몸이 원인이 되어 마음(심)이 일어나게 되며, 마음은 일어나는 대상(법)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는 이 모든 경험들이 순간순간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현상들을 싫다고 거부하거나 좋다고 집착하지 말고, 일어난 원인을 분석하거나 판단(과거)하려하지 말며, 무엇을 이루어보려고 조작하거나 기대(미래)하지 말고, 예측이나 긴장이 없는 편안하고,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그 현상들의 현재의 흐름을 알게 되는대로 보이는 대로 느끼면서 지속적으로 주시하여 의식과 행위들이 생멸할 때마다 변화하는 상태를 마음으로 자세히 보아 알아야 한다. 수행자는 주시하는 동안에 짧은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육체적 감각과 느낌, 의도와 행위, 마음의 대상을 따라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편견 없는 집중된 주의력으로 계속 주시하여, 첫째로는 현상이 일어남을 알아채고, 둘째로는 주시하여 인지하게 되고, 셋째로는 사라짐을 보게된다. 어떤 상황이든지 수행자는 몸과 마음 안에서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 대상을 놓치지 않고 즉각 알아차려 쉼 없이 끊임없이 <주시>해야 한다. 어떠한 신체적 행동, 감각, 또는 생각들이 현저할 때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주시를 지속시켜야 하며, 그런 노력이 있은 후에야 수행은 매우 좋게 향상될 수 있고, 수행자의 통찰지혜는 무르익어 선명하게 알게될 것이다. 생활하면서 언제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아 챙겨 항상 주시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질 때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첩경이다. 주의 요점 <일어남>이나 <사라짐>을 주시할 때 나타날 어떠한 대상을 미리 예견하고 그 현상을 기다리면 안 된다. 만약 일어남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면 "기다림" 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처음으로 인지되는 현상을 알아채어 일어남이 먼저면 "일어남" 사라짐이 먼저면 "사라짐"을 주시한다. 그 다음 더 두드러지는 대상이 나타났을 때, 자극, 통증, 가려움, 열남, 차가움, 등, 나타나는 현상에 따라 주시를 지속적인 노력과 함께 유지하여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고, 그 현상이 사라지면 다시 <일어남>이나 <사라짐>을 주시한다. 수행자의 경험에는 좋은 주시와 집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좋게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때로 주시 집중의 진행이 느려지고, 느슨하게 쳐진 자신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실망한다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나 느낌을 주시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열성적인 노력으로 지속하면 이를 통해 그는 둔해진 단계를 극복할 수 있다. 수행자는 무엇인가를 주시하기 위하여 고의적인 행동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런 식으로 주시를 한다면 알아차리기 위해 무엇을 찾는 기대를 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은 탐욕을 일어나게 하며, 이를 통해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행자가 대상들을 경험하고 있는 동안, 대상들에 대한 기쁨의 느낌이나 집착의 느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만약 행복했다거나 대상을 좋아했다면, "행복함", "행복함" 또는 "좋아함", "좋아함" 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의 평화로운 상태, 좋은 명상에 대한 기쁨, 그리고 밝은 상태가 좋다고 생각했고 즐겼다면 이것을 통해 그는 갈망에 집착한 것이다. 수행자가 오직 비범한 현상들을 경험한 것을 생각했고, 이러한 것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그는 자만심에 집착한 것이다. 수행자가 그 자신의 평화로운 느낌만을 생각했다거나 많은 노력 없이 주시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사견에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생각하기를 이런 평화로운 조건이 법이다 했다면, 특별한 법의 경험을 쉽고 고요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라 생각했다면, 또는 나는 가벼움을 느끼니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잘못된 도에 집착하는 것이다. 주시를 잘할 수 있을 때 기쁨과 만족의 느낌, 그리고 집중을 더욱 강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때, 만약에 이러한 느낌이나 의지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주시력은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주시가 잘 되지 않을 때, 노력이 약한 쉬운 방법으로 수행을 하려하면서 주시를 잘하는 위치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면, 이것은 수행자를 나쁜 상태로 이끌 수가 있다. 주시함에 있어서 좋은 상태, 좋아함 그리고 기쁨의 느낌을, 또 주시가 잘 되지 않아 싫어함, 이러한 장애가 되는 느낌들을 방어하기 위해 어느 것도 놓치지 말고 주시해야한다.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 잘 집중할 수 있을 때, 단지 일상적으로 해 나가야한다. 느슨하게 한다거나 의욕이 넘치게 되도록 하지 말고 오직 일상의 표준대로 균형 있게 주시한다면 좋은 상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주시를 위한 기대감은 탐욕 때문이다. 좋은 수행을 너무 갈망하거나 너무 열심히 시도할 때 더욱 나빠질 것이다. 수행자는 탐욕과 성냄을 없애기 위해 주시하는 것을 훈련해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탐욕과 성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의 수행은 향상될 것이다. "나는 무상, 고, 무아를 볼 수가 있었다. 배의 일어남은 현상의 생성이었고 배의 사라짐은 현상의 소멸이었다. 일어남과 사라짐의 과정은 항상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상했다. 알아차리는 노력, 이것 자체가 한 종류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몸의 형태가 사라졌을 때 나는 이것을 무아라고 반영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단지 생각들과 상상들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은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는다. 단지 평소처럼 주시를 해 나가야한다. 만약 생각했다면, 그 생각을 놓치지 말고 "생각", "생각" 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존재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오직 주시를 통해 모든 것들을 매우 선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어느 순간 저절로 오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밀착되어 면밀한 주시가 이루어져 주시력과 집중력이 좋아지면, 몇몇 수행자들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가지 느낌과 현상들을 보게 된다. 그들의 눈에서 빛을 본다거나, 숲속, 구름, 집, 길, 사람들, 또는 동물 등을 보거나, 죽은 몸이나 해골, 또는 부풀은 시체를 보기도 한다. 때로 수행자는 그의 피부가 찢어진 것처럼, 그의 머리, 손, 다리 또는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수행자들은 기쁨과 행복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고, 대단한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몇몇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거나, 종교적 예배를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저한 광경들을 경험했고, 그는 수행과 스승에 대하여 매우 위대함과 존경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났을 때 수행자는 기뻐해서는 안 된다. 만약 기쁨과 욕심을 느끼면 주시는 형식화되고 알아차림의 진행은 붕괴될 것이다. 예배하여서도 안 된다. 이것 또한 그의 수행을 중단시킬 것이다. 만약 수행자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면, 성냄이 나타날 것이고, 주시는 무너져 버릴 것이다. 모든 이러한 광경들과 마음의 대상들은 특별한 사건들이 아니라 집중의 힘이 강할 때, 형태화된 착상이나 생각들일 뿐이다. 사실상 그것들은 비범한 현상들이 아니라, 단지 꿈속에서와 같은 대상들의 이름된 개념들이다. 그것들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으로 신비하다. 마음의 대상은 확실한 증거로 실제로 본 것처럼 시각화되었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것들이 자기의 생각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언제든지 마음 대상들의 이 같은 경우를 우연히 만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만났을 때 받아들이지 말고 열심히 "보임", "보임"하며 사라질 때까지 자신감을 가지고 주시를 하면 그것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것들을 기쁘게 느끼거나, 좋아하거나, 예배를 하거나, 두려워했다면, 적절하게 주시하여 이와 같은 생각이나 느낌을 버리고, 주시하는 일상적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환상이나 영상들이 두세 번의 알아차림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때는 반복적으로 "보임" ,"보임" 하며 그 현상들이 없어질 때까지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돌아가서 일어남을 처음으로 보았다면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리고 사라짐을 처음으로 보았다면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자는 특별한 경험을 찾기 위해 기대하며 수행을 해서는 안 된다. 특별한 광경들 또는 광선(빛)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주 이것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수행자는 이런 어떠한 것도 기대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무엇이 나타나든 간에 그 현상에 대해 매우 선명하게 주시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정확하게, 다른 신체적 감각들에 대해서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해야한다. 수행자가 "괴로움", "괴로움"이라 알아차렸다면, 수행자는 괴로운 몸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다. 수행하는 이유는 이러한 종류들의 고통의 실체를 알기 위함이다. 만약 이것을 몰랐다면 모든 것은 좋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지냈을 것이다. 때로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느끼거나 그것들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주시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종류의 느낌들은 항상 적절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하다가, 주시와 집중의 힘이 좋아지면 숨겨졌던 느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느낌들은 정말로 심각한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조건에 따라 나타난 현상들일 뿐이다. 집중이 좋아진 이후부터 항상 고통을 주고있는 몸안의 감각들에 대해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이전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고통들을 주시하기 위해 수행자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두려워한다거나 실망하지 말고, 이것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라질 때까지 신중히, 균형잡힌 마음으로 열심히 잘 주시한다면, 이 느낌들은 오래 가지 않고 빠르게 극복될 것이다. 만약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통증이 나타날 때 수행자가 이러한 통증들에 두려워하고 알아차림을 전체적으로 멈추었다면, 수행자는 이러한 고통의 느낌들을 이후 언젠가 또다시 만나야 할 것이다. 수행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느낌이나 통증들은 주시와 집중이 깊게 되었을 때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행자가 집중이 좋아지기 이전이나 주시하지 않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수행자는 이러한 종류의 느낌이 그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집중이 강해지고 주시력이 좋아지면 이 느낌들은 나타난다. 이러한 대상들을 계속 주시해 나가면, 이 느낌의 현상은 점점 증가될 것이다. 만약 수행자가 무엇인가 두려워한다거나 다른 어떤 이유에 의해 주시하는 것을 멈춘다면, 이 느낌들은 사라질 것이며, 또 주시와 집중이 좋아지면 이 느낌들은 다시 전처럼 나타날 것이다. 수행자가 증가하는 느낌에 대해 정확하게 주시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점차적으로 줄어들 것이고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 느낌이 그것을 주시하는 동안 사라진다면 수행자는 그 느낌에 의해 다시는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법의 실체에 의한 느낌의 표시이다. 질병으로 인한 느낌이나 통증은 수행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느낌이나 통증과는 다르다. 질병으로 인한 통증은 수행 전에도 나타나며 수행중 주시력이 좋지 못할 때에도 나타난다. 이 느낌을 주시한다 할지라도 집중력이 약하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증세가 나쁘게 성장할 수 있다. 주시를 멈춘다면, 그 현상은 여전히 버틸 것이다. 수행자는 할 수 있다면 질병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도 그 느낌이나 통증을 주시해야 한다. 통증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 집중이 강하면 그 통증이 질병에 의한 것이라도 완전하게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통증은 수행자가 주시를 멈추어도 갑자기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장시간 그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운 기간이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통증은 돌아올 것이다. 돌아온 통증을 또다시 주시하여 사라지게 하는 과정을 몇번 반복하면 그 통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느낌들의 넓은 범위에서 닥치는 대로 산만하게 주시를 시도하지 말고 가장 구분되는 고통, 가장 견디기 힘든 것에 중점을 두고 "통증", "통증", "통증" 하면서 끈질긴 의지의 힘으로 그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면, 그것은 실상을 드러내면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통증이 정말로 참기 힘든 것이며, 이것은 주시하기 불가능하고 견딜 수 없다면, 그 통증에 집중을 투자하지 말고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일어남, 사라짐과 같은 다른 대상에 더 집중을 투자한다. 몸 안의 냉기, 오싹한 전율, 부드러운 진동, 장시간 전율하는 쾌감, 그리고 소름끼치는 잔물결, 등의 느낌은 몸과 마음의 현상으로 위빠사나 명상과 관련되어 있는 기쁨(Piti)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의 반응이다. 수행자는 이러한 기쁨의 느낌을 두려워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그 현상을 그대로 주시한다. 냉기, 차가움, 소름끼침, 행복함, 기쁨, 좋아함, (이름 붙이기 애매할 때는 "앎", "앎" 이라 함), 공포, 등 그것들이 사라질 때까지 단지 느껴지는 대로 알고 열심히 주시해야 한다. 어떤 현상이 끝나거나 사라지기 전에 잘 주시해야한다. 같은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필요가 없다. 현상, 그들 자신의 방법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냥 그대로 두고 나타나는 것을 그저 주시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정밀하게 응시하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7. 수행의 이해와 <앎> 우리는 평소 의식의 변화, 의도와 행위, 감각현상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많이 놓쳐 버린다. 또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의 뭉쳐진 개체로 인정하기 쉽다. 나는 누구인가 등 나에 대한 생각, 개념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렇듯 움직이고 생각하고 보고 듣는 것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어릴 적부터 자라서 살아가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는 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와 같은 사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거기에는 의식의 연이은 행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의 <원인>, <결과>에 의한 순환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여섯가지 감각 기관 눈(안)ㆍ귀(이)ㆍ코(비)ㆍ혀(설)ㆍ몸(신)ㆍ뜻(의)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 형상(색)ㆍ소리(성)ㆍ냄새(향)ㆍ맛(미)ㆍ촉감(촉)ㆍ생각의 대상들(법)을 받아들여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세가지로 분류하고, 다시 여러가지 경험의 기억들과 대조하여 판단하고 분별하여 이것은 어떤 것이다 하는 개념을 만들어 좋은 것은 애착하고 나쁜 것은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나는 좋아한다>, <나는 싫어한다> 등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형성된 <나>라는 아집을 점점 더 굳게 짓는다. 이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순간 순간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느껴지는 그대로 순수하게 주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사이에 나름대로의 편견을 합쳐 관념을 형성하여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하는 사실이 아니라 습성으로 포장된 관념인 것이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인 주시의 대상을 관찰할 때 섞여 있는 관념을 잘 가려내야 한다. 관념은 기억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생각이므로 그 생각은 또 하나의 주시할 대상인 현상일 뿐 생각의 내용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대상을 주시함에 있어 관념이 개재한다면 우리는 좀더 순수한 실상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색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거나 장갑을 끼고 만져 정확한 질감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꽃을 바라본다고 하자. 무슨 꽃이라고 또는 무슨 색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 기억된 경험과 비교 분석하여 꽃이며 색깔을 판단하고 이 순간에 호감을 섞어 아름다운 붉은 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화는 사실이고 그림 속의 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일어나는 생각은 동일한 부류인 것이다. 생화를 보더라도 꽃이라던가 색깔을 분류 판단하였다면, 더구나 좋고 싫음을 합쳤다면, 이는 벌써 사실에서 관념으로 굴절된 것을 읽고 있는 것이다. 개념이 서 있지 않은 어린아이는 무슨 꽃인지 무슨 색인지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관념을 빼면 반사된 빛이 꽃으로부터 눈에 닿았을 때 눈에 일어나는 현재의 순수한 느낌은 꽃이라 할 수도 없고, 무슨 색 또는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저 눈에서 형태나 색을 <봄>, 귀에서 소리를 들었을 때는 <들림>만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코에서 <냄새>, 혀에서 <맛>, 몸에서 <촉감>, 의식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있다. 과거 경험의 기억으로 형성된 관념은 호, 불호의 편견이 섞였거나 정확성이 없으며 미루어 짐작하는 미래도 마찬가지다. 일어나는 생각 그 자체의 현상은 현재의 실제이지만 생각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미 실제가 아니다. 오직 현재의 이 순간에 몸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가장 실제(참 상태)와 가까운 진실이다. 현재의 실상을 정확하게 보려면 주시하는 과정에 미세하게 끼여드는 관념을 알아채어 벗겨 내고 그저 순수하게 객관적인 마음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가 수행중에 가져야 할 태도이다. <관념>은 과거에 경험된 기억에 의존하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된 <아집(자아개념)>의 <형성>을 돕는다. 그러나 <주시>는 관념의 허상을 벗은 실상을 봄으로써 <아집>의 <소멸>을 돕는다. 보통 <깊은 마음 집중>을 이루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든 생각의 표적에 마음을 모아 집중함으로써 선정삼매가 이루어질 때, 몰아의 상태에서 모든 잡념, 고통을 떠나 평온과 고요를 이룰 수는 있으나 편안함은 안주를 부르고 안주는 추진력을 잃는다. 인간이 최상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의 삼매라도 영속적으로 그 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다. 오래 앉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주시 없는 집중은 몰입이며 그 순간에 몸과 마음 안에 있는 것, 생겨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현상의 실상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로서는 경계해야 될 일이다. <진리>는 생각,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주의 깊은 <주시행동>은 주시해야 할 대상과 동시에 일어난다. 수행자는 주시와 심신적 대상이 짝을 이루어 나타남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배의 오르내림을 주시하는 동안에 배가 오르는 신체적 현상과 동시에 이를 주시하는 정신적 행위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그로 인하여 동시에 일어나는 심신현상을 더욱 명백한 실감으로 알게 될 것이다. 모든 현상을 주시할 때 거기에는 오직 <주시>와 알아차려야 할 심신적 대상인 <현상>밖에 없음을 스스로 체험하여 확실하게 알게 된다. 이것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식별력은 위빠사나 지혜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식별력을 정확하게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이로부터 계속 수행하여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분간하는 지식을 가지게 된다. 대상들(원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마음 집중된 주시(결과)가 있다. 구부리고자 하는 욕망(원인: 정신적 현상)이 원인이 되어 구부리는(결과: 물리적 현상)행위가 일어난다. 생(일어남)은 멸(사라짐)의 원인이고 멸은 생의 원인, 즉 생은 원인이면서 결과이고 멸 또한 원인이면서 결과이다. 하나의 생멸(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보다 큰 생멸현상의 부분이며 보다 작은 생멸현상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원인 결과의 순환과정에서 지속의 유지는 있을 수 없고 계속 변하는 과정만이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안에 존재하는 것들은 오직 원인과 결과(몸과 마음의 실체)만이 있다. 거기에는 자아, 영혼, 또는 나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대상들로 나타나면 그것들을 주시해야 한다. 어떤 특별한 결과들을 불러오는 특별한 대상은 따로 없다. 수행자가 대상을 주시하는 안에 세 가지의 훈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대상들, 일어남, 사라짐, 굽힘, 뻗음, 봄, 들림, 또는 생각 등을 주시하고 있을 때 계(행위)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계>에 대한 훈련은 충분히 성취되고 손상되지 않았다. 항상 주시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 목표에 직접 맞아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마음집중의 <정>훈련 역시 완전하게 포함되었다. 일어남과 사라짐의 진행이 발생했을 때, 일어남과 사라짐이 존재했고, 알아차렸고, 그리고 이것에 대해 알았으므로 이것은 지혜이다. 구부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실제로 구부렸다. 뻗으려는 욕망으로 인해 실제로 뻗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인 행동들을 알아차렸다. 수행자는 각각의 주시함으로 이를 알게된 것이다. 각각의 알아차림의 만족으로 지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원함', '원함'으로 알아차렸다. 좋아하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좋아함', '좋아함'이라 알아차렸다.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함', '실망함'이라 알아차렸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갔었기 때문에 '망상', '망상'이라 알아차렸다. 각각의 시간 그 상태를 날카롭게 알아차렸고 각각의 주시에 만족을 느꼈다. 마음은 대상의 진실한 실체를 알았고 이것은 지혜 훈련이 인지된 것이다. 이것을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각각의 대상들을 정밀하게 주시할 수 있었다면 마음의 세가지 훈련인 계, 정, 혜를 완전하게 가질 수 있다. 각각의 주시는 계(Sila), 정(Samadhi), 혜(Panna)를 축적시킨다. 어떠한 대상이던 간에 수행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대상들의 현상에 대해 시작부터 끝까지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개별적인 대상을 구별되게 알아야한다. 수행자들은 이 같은 사실들에서 그들의 지혜가 성숙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심신의 현상이 태어나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원히 지속되는 현상은 없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동안 그것들이 나타났고 변화했고 사라졌고 그리고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행을 통해 모든 현상이 나타나는 것과 변화하는 것과 끝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일어났다가 깨끗이 지워져 사라진다. 또한 찰나에도 사라져서 더 이상 지속되는 것은 없다. 무엇이든지 나타난 그 순간 이후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마음과 물질의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단지 무상하다는 고유의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수행자는 현상을 주시해 가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일어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무상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현상은 영원하지 않아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변하고 사라진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이는 곧 <무상의 앎>이다. 수행자는 모든 대상들이 좋거나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고통의 진정한 표시에 대해 알게 된다. 무상은 채워질 수 없는 불만족이기 때문에 지속된 만족을 요구하는 <자아>는 항상 갈애하는 고통의 형성이다. 수행자는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예리한 주시로 보게되며 이것은 고통의 집합체와 같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것은 곧 "모든 무상한 것은 고통이다" 라는 사실이다. 이는 <고통의 앎>이다. 수행자는 이런 모든 심신현상이 어느 누구의 통제, 지시, 의지에 관계됨이 없이 그들 스스로의 원인 결과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며, 마음과 물질 이외에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거기에는 오직 대상들의 본질 그리고 주시의 본질 그 자체만이 있을 뿐이다. 그 배후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들은 모두 임의로 조절할 수 없는 현상들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실히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을 <무아에 대한 앎>이라 한다. 모든 존재의 현상들은 곧 무상ㆍ고ㆍ무아임을 알게된다. 이것들은 사고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절감되어지는> 것이다. 수행을 계속해 나가면, 언젠가 수행자는 이 세가지의 <앎(지혜)>들을 완전히 성취하게 될 때 그 앎의 힘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즉, 삼독을 여의고 <열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통찰>은 생각이나 개념이 아니라 <대상>과 <주시>가 일치하여 이루어진 고요하고 <깊은 마음 집중(삼매)>으로부터 나타나고 계발되는 것이다. 현재의 이 순간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따라 주시하면서 움직임이나 느낌의 변화에 마음을 집중시켜 삼매를 이루고, 평온과 고요, 맑음 속에서 현상들의 변화과정 속의 변화를 더 깊이 보면 <삼매>와 <주시>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현상의 뿌리 속에 드러나는 인과를 여실하게 보며, 주시함은 알아차림의 연속이고 알아차림도 생멸 현상임을 보게 된다. <주시>와 <현상>이 하나가 되어 모든 현상들이 사라질 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수행자는 평상시의 한계를 넘어 <주시(알고 있는 마음)>마저 사라지는 <완전한 소멸(정지)>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초월적인 것이다. 진리는 사고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깊은 마음 집중(삼매 Samadhi)>과 <주시함>으로 존재의 실상을 보고 <앎(지혜 Panna)>이 생기는 것이다. 존재의 실상을 <앎>으로써 탐욕과 집착을 여의고 뒤집힌 망상에서 벗어나 탐ㆍ진ㆍ치의 덩어리 <아집(자아)>을 허물게 된다. 오직 몸과 마음의 현재 실태를 주시하여 체험적으로 진리를 터득하고 <자아>라는 것은 집착(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 된 관념의 덩어리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는, 뒤집힌 생각임을 알아 스스로 무거운 짐(아집)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관념뿐인 <자아>의 <소멸>은 허무가 아니다. 허무는 욕망의 포기이며 포기는 또 다른 욕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소멸>은 원인이 될 수 없는 <평화>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좀더 향상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유일한 해탈 도(통찰)에 들어서 열심히 수행하여 <열반(Nibbana)>에 이르는 이 완전하고 고결한 길을 따라가라. 이것이 진정한 <기쁨(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항상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밀착되어 확인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해 나아간다면 아만과 불확실, 의혹, 고난, 윤회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 모든 수행자가 번뇌의 소멸, 완전한 자유, 위대한 열반에 도달하소서 ! " " 사두 사두 사두 (착하도다 착하도다 착하도다) ! " 정 해심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