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fdragon (rudals) 날 짜 (Date): 2000년 4월 11일 화요일 오후 12시 54분 28초 제 목(Title): 환승라운지에 건물을 짓지말라 Satsang with Papaji 영원 속으로 뛰어들어라. 대담자: 캐서린 인그람 (Catherine Ingram), 1992년, 러크나우. 파파지(Papaji), 자유는 무엇입니까? 자유는 그대자신의 근본적인 본성, 그대자신의 진아(眞我)를 아는 것이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자유는 가장 얻기 쉬운 것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면 그 진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지적(知的)이지 않으며 심지어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둘이라는 개념 없이 하나를 설명해 보라. 그리고 하나라는 개념마저 버려라. 당신은 종종 조복(調伏,Surrender)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무엇에 대해 조복하라는 겁니까? 근원(根源)에게. 그것을 통해 그대는 말하고, 그것을 통해 보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호흡하고, 그것을 통해 맛보고 감촉을 느끼며, 그것을 통해 이 지구가 회전하고, 태양이 빛을 발하며, 그것을 통해 그대가 이 질문을 했다. 모든 것은 그 의식을 통해 일어난다. 공(空)마저도 그 의식 속에 거주한다. 이 지고력(至高力, Supreme Power)은 초월을 넘어서 있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아이며 그대는 그 진아에 조복 해야만 한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의식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것입니까? 의식은 탄생과 죽음의 개념, 심지어 영원, 공, 우주의 개념들마저 초월해 있다. 우주, 공, 또는 영원을 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의식이라 부른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탄생과 죽음이라는 현상(現象)이 있습니다. 창조와 파괴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러한 모든 나툼(Manifestation)은 바다의 거품이나 파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그렇게 일어나도록 놔두어라. 바다는 결코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품, 소용돌이, 파도, 이것들은 그들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다 자신은 그것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들로 하여금 바다 위에서 움직이도록 놔두어라. 다른 모양과 다른 이름을 갖도록 놔두어라. 왔다가 가도록 놔두어라. 이 육체는 벌레와 개미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육체는 땅에서 났고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는 그것(That)이며 그것은 육체를 통해 빛을 발한다. 의식은 무구(無垢)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면 우리가 파도 대신에 바다 즉, 근원과 동일시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다, 그대는 어느 것과도 동일시 할 필요가 없다. 관념들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어떠한 이름과 형상도 동일시하지 말라. 이름이나 형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름과 형상을 물리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으며 생각을 하거나 동일시 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지금까지 이름과 형상에 동일시해 왔다. 그래서 그대는 근본이 되는 본성-그대는 항상 근본이 되는 본성으로 존재한다-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참되지 않은 어떤 것과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바다나 근원과 동일시 할 필요도 없다. 그대가 근원이다. 그대의 비실재와의 동일시가 사라지면 그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있는 그대로의 그대 모습이 될 것이다. 마음(Mind)은 무엇입니까? 신경 쓰지 말라(Never mind)! (웃음) 나에게 마음을 보여 달라. 그대는 '마음'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본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마음은 곧 생각이며 주체와 객체로써 존재한다. 첫 번째 물결은 '나'이다. 그 다음은 '나는'이다. 그 다음은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은 시작된다. 자, 이제 침묵하고 어떠한 욕망도 근원에서 떠오르도록 허용하지 말라. 한 찰나만이라도 욕망을 일으키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원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고 엄청난 행복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자신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그대는 집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나'를 물리치고 '누구'를 물리치고 그런 다음 '인가'를 물리쳐라. 이 '나'라는 생각이 근원 속으로 뛰어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 곳에서 그대는 마음 없이 살 수 있다. 그대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무엇인가가 그대의 삶을 돌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다른 무엇'이 마음보다 더 잘 그대를 돌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마음을 이용한 결과가 무엇이며 그 마음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침묵하고 지고력(至高力)으로 하여금 모든 삶을 돌보게 한다면 그대는 모든 존재와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아는 이는 동물, 식물, 바위, 그리고 모든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게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진아실현을 놓치면 그대는 아무 것도 모른다.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소위 '에고(Ego)'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에고가 어디에서 떠오르는지 보자. 에고가 에고로 되기 위해서는 어딘가로부터 떠올라야만 한다. 먼저 에고가 떠오르고, 그 다음 마음, 그 다음 감각-시각, 후각, 미각, 청각, 촉각-이 떠오른다. 에고가 떠오르기 전에 '나'가 있다. 이 '나'라는 관념은 에고, 마음, 나툼, 행복, 불행, 이 모든 삼사라의 뿌리이다. 이 '나'로 돌아가서 이 '나'가 무엇인가 물어 보라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올라오는가? 자 한번 해보자. 저는 여러 번 이렇게 했습니다만..... 그대가 전에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하고 있지 않다. 그저 그렇게 해 보라. 아무 것도 하지 말라. 행위라는 그물에 걸릴 때마다 바로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에고, 마음, 감각, 이 모든 것들은 '행위'라고 불린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지성만 있으면 된다. 그대는 진지하고 주의 깊게 깨어있기만 하면 된다. 행위 없이, 생각 없이, 노력 없이, 관념 없이, 의지 없이, 모든 것을 한쪽으로 제쳐 두고 그저 침묵하라.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려라. 이 결과는 지금 여기에서 당신과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 '일어남(Happening)'으로써 시작하라. 이 일어남으로 그대는 에고, 마음, 감각, 그리고 나툼의 진행과정을 부술 수 있다. 그대는 일어남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대는 여기에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왕좌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가는 왕처럼 하라. 그대는 정원사가 아니라 왕이다. 그대는 어디에 가든지 이 '일어남'이다. 붓다는 이러한 깨어있음을 수행하는 것에 관해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깨어있음의 맛을 볼 수 있도록 명상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이들 수행이 어떠한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두들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어떠한 수행방법도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그대의 오래된 무거운 짐을 없애버릴 뿐이다. 내가 그대에게 새로운 어떤 것을 줄까 기대하지 말라. 그대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다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며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유는 '한 원인을 바탕으로 한 결과'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이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황제이다. 동냥 그릇을 던져 버려라. 그대에게 어떤 지향점이 있거나 성취할 무엇이 있다면 수행은 필요할 것이다. 훗날에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영원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대가 30년이라는 각고 수행 끝에 자유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가 될 것이다. 왜 30년을 기다린단 말인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앉아서 그대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보라. 그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나는 무엇을 위해 수행하고 있는가?'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대는 어떤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어떠한 의도를 필요로 한다. 그대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수행하는데 그 생각은 무엇인가? 그대는 수행에 쏟아 붓는 에너지를 어디에서 끄집어내는가?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겠는가? 그대가 어떤 곳에 가기를 원한다면 일어서서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일어나서 걷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틀림없이 존재한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일어나서 걸어가게 했는가? 어떤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지만 그 욕구는 어디에서 올라오는가? 누가 그 욕구를 일어나게 했으며 그 욕구는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자유를 위하여 수행을 한다. 나는 그대가 목적지를 향해 가기 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보기를 바란다. 자유를 원하면 먼저 무엇이 속박인가 알아 보라. 쇠사슬은 어디에 있는가? 족쇄는 무엇인가? 조용히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앉아서 물어 보라. '나는 어떻게 묶여 있는가?' 이러한 관념과 개념과 자각들 외에 무엇이 그대를 묶고 있는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잊어버려라. 어떠한 생각이나, 어떠한 의지나, 어떠한 관념도 일으키지 말라. 단 일초만이라도, 즉각적으로 이러한 관념들을 없애버려라. 누가 자유를 구하고 있는가? 구하는 자 자신에 대해서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데.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구하는 자, 그 자신이다.' 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렇다. 구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 보라.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 보라.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어 왔다. 그대는 이미 여기에 있으며 이미 자유롭다. 그대는 무언가를 구해야만 한다거나 뭔가를 얻기 위해 명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이것에 대해 자주 들어왔을 것이다. 자, 아주 잠깐 동안만 고요히 앉아 단 하나의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그러면 그대가 수행방법이나 사다나(Sadhana)를 통해서 구하는 것이 이미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명상을 하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자유 그 자체로부터 떠오른다.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 내에서 작용하고 있는 마음일 뿐이다. 그대의 실재는 마음이 범할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참된 명상은 그대가 이미 자유롭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은 환대 받지 못하는 손님처럼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찾아옵니다. 명상수행을 통해서 생각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곳에서 침묵을 지키면 생각은 둔화되고 나아가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대는 생각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힘이 세고 그 생각들을 저지할 수 있으면 생각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지할 수 없으면 생각은 다시 되돌아온다. 떠오르는 생각들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오면 오게 놔두고 파도가 바다와 노는 것처럼 함께 놀라. 파도가 바다의 평정을 어지럽힌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될게 없다.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대로 놔두어라. 하지만 그 생각으로 하여금 내면에 자리를 잡게 하지는 말라. 마치 생각 없는 마음이 깨달은 상태와 같은 것처럼 생각을 없애는데 너무나 많은 수행을 하고 그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생각이 오면 오는대로 놔두어라. 생각을 거부하면 생각은 그 대문을 열고 강제로 들어오려고 할 것이다. 문을 걷어내 버려라. 벽을 없애버려라. 그런 다음에는 누가 들어올 수 있겠는가? 안과 밖이라는 개념은 벽으로 인한 것이며 이 벽은 '나는 의식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생각이다. 생각이 오는대로 내버려두라. 그것들은 대양의 파도와 같다. 차라리 생각, 에고, 마음, 감각, 그리고 나툼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낫다. 그 어느 곳과도 싸우지 말라. 하나가 되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 속에서 그대의 본래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식물들과도, 바위들과도 말할 수 있다. 그대는 단단한 바위 그 자체이다. 그대는 지저귀는 새이다. 내가 지저귀는 새인 것을 그대는 알아야만 한다. 나는 반짝이는 별이다. 움직이지 않는 침묵의 마음은 이러한 내면의 깊이로 들어가는데 도움이 됩니까? 어떠한 깊이도 없다. 그것은 흠없는 공(空)이다.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표면도 없고 깊이도 없다. 갈 곳이 없다. 그대가 가는 어느 곳이나 '여기'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이 순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해보라. 그대가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라. 어떻게 그것을 측량할 수 있는가. 그 길이? 넓이? 폭? 이 순간은 시간이나 깊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정말 그렇게 간단한 것입니까? 그렇다. 그대가 그것을 알게될 때 그대는 웃을 것이다.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해내기 위해 산 속 동굴로 들어가 몇십 년 동안 수행한다.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안경을 쓴 채 안경을 찾는 것과 같다.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은 그대자신의 호흡보다 더 가깝다. 그대는 항상 근 원안에 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는 근원 안에서 한다. 파파지, 대부분의 종교는 내생(來生)을 약속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이 근원은 영생에 대한 약속입니까? 나는 죽음 후에 일어나는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믿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체험은 지금 여기에서이다. 지금 여기 없는 것은 구할만한 가치가 없다. 그대가 지금 여기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대가 지금 여기에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진리는 항상 단순한 법이다. 복잡한 것은 거짓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둘이 있으면 두려움이 있고 거짓이 있게 된다. 라마나 마하르쉬,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Nisargadatta Maharaj) 그리고 심지어 붓다까지도 인생은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잠에서 깬 상태와 꿈의 상태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꿈속에서 산, 강, 나무들은 실재로 보인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꿈을 꾸었다'라고 말한다. 깨달은 상태에서는 이 모든 것이 덧없으며 그대는 그것들을 꿈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난 상태는 꿈과 비교할 때 영원하며 실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그대가 의식 그 자체로 깨어나면 잠에서 깬 상태는 꿈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구루, 즉 스승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구루(Guru)'라는 말은 무지를 없앤 자, 어둠 -'나는 몸이다', '나는 마음이다', '나는 감각이다', '나는 물체이고 나툼이다'등의 어둠- 을 몰아낸 자를 의미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 지혜를 나눠 줄 수 있는 사람, 그 체험을 전해 주는 사람, 그가 곧 '구루'이다. 많은 사람들이 파파지 당신을 자신들의 구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육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루는 진아만을 본다. 그대는 바로 나 자신의 진아이다. 나는 바로 그대 자신의 진아이다. 이러한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그대의 진아와 나의 진아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나는 그 진아-그대는 참으로 그 진아이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종파에 여러 설교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대에게 특정 교리를 줄지는 모르지만 구루는 그대에게 그 자신의 체험을 주며 이러한 체험은 영원한 의식일 뿐이다. 구루는 그대에게 어떠한 가르침이나 어떠한 방법, 혹은 파괴될 수 있거나 영원하지 않은 어떠한 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을 그대에게 준다면 그는 구루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따르지 말라. 그대는 사자(獅子)이다. 사자는 가는 곳마다 그 자신의 길을 헤쳐나갈 뿐이다. 러크나우 이 곳에는 많은 오쇼 라즈니쉬 제자들이 있으며 점점 더 많은 오쇼의 제자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매우 논란이 많은 스승이었으며 평판 또한 좋지 않았습니다. 파파지와 오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나는 어떠한 구별도 좋아하지 않는다. 신성(神性)은 유희(遊戱)할 뿐이다 신성이 하는 것은 무엇이나 지고한 근원의 영향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모두가 나 자신의 진아이며 유희에 있어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유희이다. 이 신성이 스스로 유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의 고통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며 생태계를 파괴하여 다른 존재들에게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도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구를 사막으로 만들고 땅과 강물과 대기 중에 독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기아 상에서 허덕이는 사람들, 악화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긴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세상에 대해 봉사를 베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 나툼이 단지 꿈이라면 봉사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지고의 경지인 자신의 진아를 알게되면 내면으로부터 자비가 우러나온다. 자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부의 명령이 자비가 될 때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거기에 없다. 그대가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대가 위(胃)에게 봉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손이 음식을 입에 넣어준다고 해서 손이 입의 봉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살아야만 한다. 봉사는 진아의 책임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봉사를 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에고를 가지고 봉사를 하면 거기에는 위선, 시기가 일어나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행위자가 없을 때 자비가 떠오른다. 한 사람이 진아를 실현하게 되면 그의 모든 행위는 아름답게 된다. 자유, 즉 해탈로 가는 길에 있어서 주된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주된 장애물은 자유를 향한 치열하고도 절대적인 열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속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때때로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당연히 그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다. 잠에서 깨면 즉시 꿈속에서의 결혼, 아내, 아이들과 떨어진다. 이와 같이 꿈속에서 깨어나면 그러한 관계가 끝나고 자유로워진다. 비베카는 실재와 비실재를 식별하는 힘이다. 이 세계의 나툼을 단지 꿈으로 본다면 그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약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무책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다. 1947년 인도가 분할될 당시 나의 고향지방은 신생 파키스탄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때 나는 티루반나말라이에서 라마나 마하르쉬와 함께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너의 고향 지방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왜 그 곳에 가서 너의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가?' 내가 대답했다. '바가반(Bhagavan)을 만난 후 제게 가족이란 없습니다.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 꿈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네가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꿈속에서 남아 본분을 다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말했다. '저는 바가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너와 함께 하겠다.' 그 때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그 마하르쉬의 말은 아직도 사실이다. 자, 그대가 실재와 비실재를 분별했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의심은 그대와 자유사이에 놓여 있는 장벽이다. 이러한 의심은 단지 개념에 불과하며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영원 속으로 뛰어들라. 이것은 넥타(Nectar)이다. 사람들은 이 넥타를 마시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스승들은 욕망을 태워 없애거나, 또는 욕망에 완전히 물릴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대상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파지는 이 실재가 단지 꿈인 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욕망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 어떤 스승들은 그대가 욕망을 충족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불을 끄기 위해 불 속에 더 많은 기름을 계속해서 넣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더욱 불길을 거세게 만들뿐이다.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그것을 끝낼 수는 없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이다. 일단 그대가 무엇이 참으로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가를 알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대는 자신의 손에 단 하나의 무기를 쥐고 서게 될 것이다. 즉 실재와 비실재를,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알아 볼 수 있는 분별력이 그것이다. 그대가 이 열망을 가지고 있을 때 자유, 그 자체와 하나가 된다. 종종 심리적인 습관이나 일생동안의 컨디셔닝에 의해 의심, 또는 실재와 비실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영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조언하시겠습니까? 이 고통은 그대가 과거라는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과거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대는 불행할 수 없다. 그대가 현재 속에서 살면 그대는 행복하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지복(至福)이다. 우주의 연료는 사랑, 즉 그 자체와 합일하기를 원하는 거대한 맥박입니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조차 부르지 않는다. 그대가 '사랑'이라는 말을 입밖에 낼 때 주의 깊게 지켜보면 그 말은 과거에서 일어났던 어떤 경험으로 그대를 데리고 간다. 내 경험으로 보면 그것은 사랑조차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바다 한 가운데 어떠한 파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의 충만함-이다 '사랑'이란 말은 잘못 사용되고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도 사랑 받는 자도 없을 때 거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다. 헌신이란 말은 어디에 적용됩니까? 그것은 다른 무엇을 향한 개인 행위가 아니다. 침묵 그 자체가 근원에 조복하는 것이다. 파파지, 당신은 아직도 삶 속에서 초월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지금도 그렇다. 매 순간마다 그렇다. NEXT Satsang with Papaji 여기에서 질문하는 이는 누구인가? 대담자: 웨스 니스커(Wes Nisker) 마음은 사념에 불과하다. 그대는 마음과 사념을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그대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첫 생각이 무엇인가? '나'입니다. '나'가 첫 번째 사념이다. 이 '나'는 에고이다. '나'라는 말을 사용할 때 에고가 있다. 그런 다음 마음이 있고, 그 다음에 몸이 있고, 그 다음 감각이 있고, 그 다음 감각 대상이 있고, 그 다음 모든 나타난 현상들이 떠오른다. 그 다음에 고통이 있지요. 물론이다. 존재가 분리되어 있으면 항상 고통이 있게 마련이다.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고통은 없다. 그러므로 이 '나'가 어디에서 떠오르는지 이해하라. 다음과 같이 물어 보라. '나는 누구인가?' 깨어 있어라. 그러면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주의 깊게 깨어 있어라. 그리고 답을 기다려 보라. 침묵 속에서 답을 기다려 보라. 순간이면 된다. 자. 지금 '나'가 어디에서 떠오르는지 물어 보라. 이전부터 쌓아온 관념이나 개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대가 전에 물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 질문을 하지만 그대 자신의 자아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사실 저는 이러한 질문을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모든 문제들을 풀기 위해선 이 질문을 먼저 풀어야만 한다. 저는 상대적인 의미를 염두에 두고 '나(I)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지..... '나는 사용하고 있다. 나는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도 '나'가 있다. 저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곧 제가 지난 20년 동안 불교 명상을 통해 해온 것입니다. 저는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해왔습니다. 그렇다. '저는 탐구해왔습니다. 저는 탐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진정으로 탐구해 오지 않았다. 진정한 탐구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요? 제가 지금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지금이다. '지금'으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그저 이 '지금'을 붙잡아 보라. 그대는 이 '지금'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지만 그것은 그대를 따라다닐 것이다. 뒤에서, 앞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그대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저를 봅니다. '나는 나를 본다. 나는 나이다. 나는 지금 있다.' 무슨 말인가? 보는 자는 누구이며 봄은 또 누구인가? 자, 지금 그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해 보라. '나는 나를 본다.' 이것은 객체인가. 주체인가?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나'의 형상은 무엇인가? (찾아보기 위해 쉼) 제가 언급하고 있는 이'나'는 입체적인 형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 말이 입체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더 이상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자, 이제 그대는 참된 '나'에 도달했다. 그대는 '지금' 노력하고 있다. 이전의 '나'는 가짜 '나'이다 이 '나'는 몸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에고의 '나'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이 초월로 뛰어들었을 때 그것은 끝나 버렸다. 이 '지금'도 끝이나 버렸다. 그대는 모두를 새로 시작해야만 한다. 매 순간마다 저는 새로이 시작해야만 합니다. 참된 '나'를 보는 것은 전체의식을 보는 것이며 그 전체의식은 공(空)을 의미한다. 전에 그대가 사용했던 '나'는 몸, 에고, 마음, 감각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으로부터 떠오르면 그것은 공 자체이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으리만큼 깊은 '나'이다. 그대가 이 '나'를 볼 때 그대는 모든 것을 '나'로써 볼 것이다. 그러면 사랑이 생기며 지혜가 생길 것이다. 그대는 동물, 새, 식물, 바위들에서 그대의 비추인 모습을 볼 것이다. 자, 그대의 20년 동안의 구도 수행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난 20년 동안 무엇을 해왔는가? 내면을 보아왔습니다. 저는 공을 체험한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명상 중에 공 속으로 녹아든 것처럼 느낍니다. 모든 현상들의 공을 보았습니다. 그대가 보아온 그 공은 자기 본위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마디 말, 하나의 개념에 불과했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공은 공조차 아니다. 공은 내가 그대에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나는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대는 공이라는 말조차 사용하면 안 된다. 이 공이라는 말은 어디서 배웠는가? 틀림없이 경전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많은 대승(大乘)경전들이 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자, 들어 보라. 공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이 공은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려면 손가락에 신경 쓰지 말라. 초월을 원한다면 공이라는 말을 버려라. 그렇다면, 20년 동안 저의 비파사나 수행은 허된 노력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다. 지난 20년이 그대를 나에게 데려왔지 않은가! (웃음) 그리고 단지 20년이 아니라 삼천 오백 만년 동안 그대는 이렇게 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낭비된 시간은 없다. 공 속에는 결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인 체험이다. 공은 단지 개념에 불과하다. 이 개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마음의 자만일 뿐이다. 그대가 '나'라는 말을 건드리기만 하면 그와 동시에 시간이 떠오르고 과거, 현재, 미래가 나타난다. '나'가 멈추어 버리면 모든 것이 멈춘다. '아무 것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이것이 궁극적인 진리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이며 앞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붓다는 49년 동안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였다. 나는 그가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붓다는 깨달은 후 왜 거의 50년 동안 말했어야만 했는가? 그는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지기 위해 가르침을 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그 자신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말합니다. 그래서 붓다는 많은 수행 방편들을 가르쳐 주었고요. 모든 수행 방편들은 에고와 관련되어 있다. 그대는 에고로 모든 방편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대는 육체와 동일시하면서 '나는 누구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을 궁극적인 진리와 분리시킨다. 절대는 모두가 함께 하는 그 무엇이다. 어떤 수행을 해도 그대는 그것을 놓친다. 모든 사다나(Sadhana), 즉 수행은 장애라고 말하시는 겁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습니까? 사다나는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와의 동일시 같은 오래된 습관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사다나는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절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항상 사다나를 하지만, 진리는 그대 앞에 미소지으며 서 있다. 수행의 장애는 '나는 묶여 있다'는 생각과 같은 과거의 개념들이다. 그대는 '나는 묶여 있다, 나는 고통스럽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대는 고통만을 없애기 위해 사다나를 한다. 자유를 위해서 하지 않는다. 자유는 어떠한 수행방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는 있는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자유롭다. 한 번은 어느 선사(禪師)가 말했습니다. '나는 깨달았지만 이전만큼이나 고통스럽다'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깨달았지만 아직도 세상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선사는 이미, 그리고 항상 자유로왔음에도 불구하고 삼천 오백 만년 동안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갑자기 깨우쳤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웃음) 그렇다면 깨달음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항상 '지금' 가운데 살며, 공 속에서 사는 한결같은 깨우침의 경지를 성취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정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왔다가 가는 것입니까? 그대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통채로 비어있다. 매일같이 나는 수많은 스승들을 모시며 여러 수행방법들을 해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말한다. '아무런 수행방법들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저희는 여기에 왔습니다. 이제 저희에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웃을 뿐입니다' (웃음) 그들은 파파지 주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웃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깨우침은 스승의 은총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깨우침은 구루의 은총에 달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은총 그 자체의 은총'에 달렸다. 스승은 그대가 열망을 가지고 있을때 끌어당긴다. 무엇보다 먼저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 저희는 자유롭습니까? 이 질문을 하러 여기에 와서 내 옆에 앉아있는 그대 옆집 사람은 없다. 그대는 은총을 가지고 있다. 제가 은총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그 은총을 지니기로 선택했습니까? 저는 은총을 자유롭게 선택했습니까? 은총과 자유는 똑같은 것이다. 은총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지만 그대는 은총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은총은 그대로 하여금 '나는 자유롭고 싶다'고 느끼게 한다. 그대는 명상을 20년 동안 해왔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몰아댔는가? 그대 이웃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왜 그대가 뽑혔는가? 왜 그대가 선택되었는가?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은총이다. 이 은총은 그대가 이해할 수 있은 언어로 진리를 알리는 사람에게 그대를 데리고 산다. 이 사람은 단지 그대가 이미 자유롭다고 말할 것이다. 그대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스승으로 간주될 수 없다. 차라리 그를 푸루한(??????)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스승은 그대의 무거운 짐들-모든 활동, 개념, 가르침-을 덜어준다. 그대는 충분히 할만큼 했다. 삼천 오백 만년 동안 그대는 하고, 하고, 또 해왔다. 참된 스승을 만나면 그는 그대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저희들에게 내면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행위가 아닙니까? 내면으로 들어간다 함은 그대 자신의 구루의 말을 듣는 것이다. 이 구루는 그대 자신의 진아이다. 그대는 그를 모른다. 알아보지 못한다. 그의 침묵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참된 구루는 그대를 내면의 구루로 인도하며 '그대'에게 침묵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대 자신의 은총이다. 그것은 그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그 밖의 어느 누구도 그대에게 이러한 은총을 줄 수 없다. 이 은총을 가지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이 은총에 의해 은총을 받는 이는 누구입니까? 모두이다. 모두가 은총을 가지고 있다구요? 그렇다. 모두가. 그렇다면 은총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왜 그다지도 적습니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두가 이미 자유롭지만 진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있다. 욕망이 그 장벽이다. 붓다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욕망이 눈을 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대는 이 욕망을 간단히 던져버릴 수 있다.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욕망은 과거에 속한다. 그대에게 과거로부터 오는 어떤 욕망도 없을 때 그대의 눈은 열린다. 일단 해보고 말해보라. 어떤 욕망도 그대와 자유사이에 서 있지 못하게 하라. 단 1초만이라도 욕망이라는 장벽을 치워버려라. 그리고 나에게 말해 보라. 지금요? 그렇다. (한참 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볼 것이다. 욕망이 장벽이다. 제가 여기에 왔을 때 대담을 잘하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모든 욕망은 장벽이다. 심지어 자유를 위한 욕망마저도. 파파지를 인도 전통적인 박티, 즉 헌신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문(自問)을 통하는 것보다 헌신을 통하여 진리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직접적인 방편은 자문이다. 드물지만 매우 예민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이 자문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자유로울 수 있다. 모든 방편들은 궁극적으로 거기까지 필요한 것이다. 아마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결국 그대는 절대 자유의 자리에 들어서야만 한다. 헌신에는 헌신자와 구루, 헌신자와 신(神)이라는 이중성이 남아 있다. 헌신자는 완전히 조복해야 하지만 사실상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분의 경우, 헌신은 의식(儀式)에 그치고 만다. 구루에게 전적으로 조복한다면요? 헌신자가 진실하게 조복을 한다면 거기에서 끝이다. 더 이상 카르마가 쌓이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신성이 그를 돌본다. 그것은 사랑이며, 지속적인 로맨스이며, 그대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로맨스이다. 그것은 진아와의 참된 사랑이다. 자문은 그대가 '나는 누구인가? 에고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라고 탐구하는 것이다. 조복과 자문은 똑같은 것이다. 요가, 탄트라등 수많은 길이 있지만 나는 그 길들이 모두 궁극으로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된 수행은 자문이다. 이 방편이야말로 지름길이다. 우리 모두는 지름길을 원합니다. 가장 빠른 길이다. 참된 스승은 단 한 마디로 제자의 모든 노력을 끝낼 수 있다. 파파지는 사람들에게 단지 자신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말은 '평상심이 곧 도(道)이다'라는 선사의 말과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되라. 그렇다. 그대가 각성하지 못했다거나 깨닫지 못했다는 의심을 버려라. 왜냐하면 그대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이나 간단하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미망 속에서 삽니까? 이것은 단지 릴라(Leela), 즉 신들의 유희입니까? 그렇다. 불행하게도 이 신들의 유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유희를 실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받는다. 파파지, 마지막으로 어떻게 가슴을 열고 세계를 좀더 사랑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그대자신의 진아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대 자신의 진아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대는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진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진아를 알게되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알게된다. 그대자신의 진아를 알라. 이 앎은 곧 존재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앎은 존재이다. PREV NEXT Satsang with Papaji 환승 라운지에 건물을 짓지 말라. 대담자 : 마두카르(Madhukar) 사랑하는 파파지. 1993년에 접어들면서, 파파지의 발아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놓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 저희 모두를 위하여 사트상에서 답변해주시겠습니까? 파파지를 자신들의 선생, 스승, 구루로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난 2년 동안 파파지께서는 문을 활짝 열어 놓았었습니다. 저희가 파파지를 구루로 만든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결정할 문제다. 나는 모른다.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습니까? 그렇다. 나의 손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 어는 누구도 어떠한 것의 '부분'이 아니다. 나의 역할은 그대에게 그대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에 부분은 사라져 갈 것이지만 지금 당장에 있어 그 부분들은 위험하다.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이는 누구인가? 누가 이 생각을 만들어 냈는가? 이 질문을 묻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그대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면 그대는 나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질문, '부분들'이 있다는 그대의 생각, 이 모든 것들은 그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대가 그대는 누구인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그대는 단지 '부분'에 불과하면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어떤 부분에서든 창조된 적이 없는 그 자리를 묻고 발견해 보라. 자문(自問)을 통하여 전체의 자리로 옮아가라.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들'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나는 아무개이다. 나는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대가 자문을 통해 탐구하지 않으면 그대는 '부분들'이 되고 나툼이 된다. 그대는 결국에 가서 파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질문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음으로써 그대자신의 근원 속으로 향해가라. 가장 명백한 첫 번째 질문은 '나는 질문자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나는 질문자다'라고 말할 때 틀림없이 그대는 몸, 감각, 욕망, 소유물, 바램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근원을 찾고 있는 이런 신원(身元)들의 집합은 진짜로 자신들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바다의 파도에 비교될 수 있다. 파도가 처음으로 이 질문을 했을 때, 파도는 전체의 부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다의 부분들이야' 그대는 말할 것이다. '누구는 크고 누구는 작고, 하나는 앞에 있고, 하나는 뒤에 있고, 우리 모두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어'.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상대적인 크기, 상대적인 위치, 그리고 상대적인 속도를 알아내는데만 그들의 탐구를 제한한다면 그들의 참모습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름과 형상을 보는 것으로서는, 그대는 본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파도는 색다른 것을 시도해 본다. 그들은 모여서 '우리들은 진짜 누구인가? 우리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참된 본성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자문하기 위하여 그 파도들은 함께 모여서 사트상을 열기로 결정한다. 그런 다음 각각의 부분, 각기 파도는 '나는 물이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파도의 이름, 형상, 크기는 당장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파도는 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본질, 본성, 실재, 그들이 이름과 형상으로만 존재하며 사량(思量)하여 무시해 버렸던 실재를 발견한다. 이름과 형상은 물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무지로부터 나온다. 파도는 결코 그들 자신의 참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과 형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물은 파도의 근원이자 실체이다. 파도가 '나는 오직 물이다'라는 앎으로 나타난다면 파도라는 형상을 지닌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파도는 자신의 참된 본성이 물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파도가 이를 잊어버리고 그 결과로 고통을 당한다면 자신의 참된 자리를 이해하고 있는 다른 파도가 다음과 같이 말해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너는 물이다. 오직 물이다. 파도인체 하지 말라'. 파도는 자신들이 참으로 누구인가 잊어버린다. 파도는 자신들이 이름과 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진리를, 지식을, 자신들의 신원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이러한 찾음은 실재 그 자체와 만나지 못한다. 바다는 항상 바다이다. 찾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파도는 항상 물이며 바다이다. 그들이 그것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아는 이가 진리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만 한다. 한 파도가 바다 속에서 떠올라 그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앎을 통해서 말할 것이다. '나는 바다이다. 나는 자유롭다. 그대 또한 똑같은 바다이다. 그대 또한 자유롭다'. 그 파도는 자비심으로 자유의 메시지를 전파할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 같이 그대도 존재한다. 그대는 이미 자유롭다'. 그대는 이름과 형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그대가 파도라고 상상했다. 신경쓰지 말라. 매일 잠을 잘 때 그대는 6-7시간동안 이름과 형상에 대해 잊어버린다. 그 망각을 잠에서 깨어난 상태까지 이어 보라. 그대가 이름이요, 형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려라. 그대는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감각도 아니요, 에고도 아니다. 그대 자신에 대한 이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잊어버려라. 그대가 잠자는 동안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왜 안되겠는가? 자, 지금 이 순간에 결심해 보라. 그대가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고 변하는 것은 무엇이나 한쪽에 젖혀 두어라. 왜냐하면 참된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실재가 무엇인지 찾아내라. 그대 내면 안에 참된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말할 수도, 볼 수도, 심지어 움직일 수조차도 없다. 그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으로 향해가라. 그리고 홀로 그것을 보라. 그대가 그렇게 하면 내면 어딘가에서 한 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내면의 동굴에 숨어사는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실재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그를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부터 단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왜 그대는 그를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 어딘가에서 무엇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에게 완전히 지쳐버리면 그는 그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희망과 욕망은 그대의 왕국을 덮고 있다. 이러한 창조 속에 있는 이는 누구인가? 진짜 '누구', 참된 '그대'는 전체이다. 진짜 '누구'는 모든 것이다. 이 '누구'는 공 그 자체이지만 그 내면 속에서 수많은 창조가 일어난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알게되면 부분도 계산을 초월해 있으며, 모든 표현을 초월해 있다. 그대는 표현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것'이다. 그대는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내밀하고, 너무나 신성해서 아무 것도 그대를 범한 적이 없다. 그대가 다른 무엇을 건드릴 때 그대는 오염된다. 그 다른 무엇은 무엇인가? '나'이다. '나'를 건드리게 되면 그대는 자만스러워진다. 이것은 정확한 말이다. 다른 말은 쓰고싶지 않다. 그대가 자존심을 일으키면 오만해진다.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나는 저것을 했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나는 저것을 원한다. 이것, 저것, 욕망과 희망, 이 모든 것들이 오만이다. 그대가 이 모든 것들이 아니라고 마음을 먹기만 하면 평화롭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파파지에게는 라마나 마하리쉬라는 구루가 있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구루로서 파파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는 자비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문을 열어놓았었다. 자신의 자유와 참된 본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침묵 속에 앉아있음으로써 모든 문제를 풀어 주었다. 그 침묵의 향기 속에서 모든 의문점들이 해소되었다. 그는 현재에도 나의 스승이며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함께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복이었다. 나는 그의 비천한 종이다. 누가 나를 찾아오든지 그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마하리쉬의 봉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시작한 일은 계속되고 있다.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가 켠 촛불은 계속 전해질 것이다. 항상 밝게 빛날 것이다. 결코 허비되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의 흐름을 이어가는 '어떤 사람'은 누구인가? 이 '어떤 사람'은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마음도 아니요, 육체도 아니요, 에고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며 결코 알려지지 않은 무엇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대가 그것 그 자체이다. 자신을 그밖에 다른 무엇으로 간주하지 말라. 그대가 그 빛이고 그대가 그 지혜이다. 그 밖의 다른 무엇인체 하지 말라. 그대 자신의 실재를 부인하지 말라. 그와 그대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는 침묵 속에서 말하고 가르치곤 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이 진리 그 자체라는 체험을 안겨 주었다. 이 진리는 존재라고 불리기도 하고, 앎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대가 그것이다. 러크나우에 식당과 책방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트상홀이 생겼습니다. 일일 프로그램이 뒤따라올 것입니다. 인디라나가르(Indiranagar)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체류하고 있습니다. 아쉬람과 같은 조직이 나타나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요. 그것이 참다운 사트상홀이라면 그 소식은 매우 기쁜 일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일들은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나는 수많은 영적인 단체들이 생기는 것을 보아왔었다. 이들은 후에 많은 문제들에 봉착했다. 이와 같은 일들이 계속될 때마다 많은 문제점들과 불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문제와 오해들이 생긴다. 많은 아쉬람들이 훌륭한 구루와 함께 시작하지만 후에는 항상 어떤 문제점들을 안게 된다. 리쉬케쉬, 하리드와르, 그리고 남인도에서 그런 아쉬람들을 많이 보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잃어버리고 나쁜 평판만 얻게 되었다. 사리사욕을 지닌 사람이 단체를 이끌어 가게 되면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낫다. 나는 그와 같은 단체를 만드는데 관심이 없다. 여기에서도 사리사욕이 앞서면 사트상을 끝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온 것은 불과 지난 2-3년밖에 되지 않는다. 나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는 나는 서양을 여행하고 인도에 돌아와 히말라야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나는 남인도를 잘 알고 있어서 그곳을 여행하기도 했었다. 최근까지 나는 러크나우에 산적이 없었다. 건강상의 문제, 즉 다리에 병이 생겨서 이제는 여기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잘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여행을 중지해 버렸다. 나는 그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여기에서 살 것이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보다는 명성이나 다른 것들에 관심을 보인다면 나는 결코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에 대한 참다운 열망을 지니고 온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여기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들을 풀어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자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나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 곳 사트상 바반(Bhavan)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이곳에는 전혀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간 있다. 하지만 후에 실정이 변할 수도 있다. 최근 누군가가 여기에 자신의 빌딩을 소유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거절해버렸다. 왜냐하면 그러한 건물, 그러한 시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곳은 공항이다. 여기에 있는 누구나 다 자신의 비행기가 뜨기를 기다리며 환승(煥乘)라운지에 서 있다.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여기에 머물 수 없다. 나는 공항 환승 라운지에 벽돌을 쌓고 싶지 않다. 왜 여기에다가 상주건물을 지어야만 하는가? 나도 떠나야만 한다. 나도 내 비행기가 떠나길 기다리고 있다. 이 집은 세를 내어 얻은 것이다. 어떤 좋은 사람이 매달 값을 지불하고 이 장소를 제공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그들이 봉사를 하는 한 나는 이 곳에 계속해서 올 수 있다. 지금 사는 집으로 나에게는 충분하다. 나는 거기에서 30-4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트상을 열곤 했었다. 거기에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최근에 많은 외국인들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식당을 열었다. 많은 방문객들이 시내 음식점의 인도양념을 넣은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식당이 열린 것이다. 인도식당에서 사용되는 기름들에 의해 일부 방문객이 탈이 났다. 그래서 이러한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식당을 열자는 제안을 받았다. 단지 여기 오는 사람들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의 건강상의 문제로, 나는 이 식당을 여는데 동의했다. 이 식당은 여기 오는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시작한 것이다. 헌신자들 자신들이 조리를 한 훌륭한 음식을 내놓고 있다. 유해한 기름과 향신료들을 쓰지 않는다. 또한 소금도 별로 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위생이나 요리수준도 좋다. 이 시설은 모든 방문객들에게 열려 있다. 여기에서 저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기심없는 헌신이 그대들의 모토가 되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대가 식당에서 채소를 다듬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예배이다. 이 곳 홀을 청소하는 것도 예배이다. 나는 명상과 바닥을 청소하는 것과 신발장의 신발을 터는 것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이타적일때 참된 명상의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궂은 일을 함으로써 그대는 자유, 그 자체를 성취할 수 있다. 일화를 하나 이야기해 보자. 한 성자가 아쉬람을 가지고 있었다. 새벽 5시만 되면 사람들은 그에게 오곤 하였다. 이 스승은 학식이 높은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시인었다. 그가 시편을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종이에 그것을 받아 적었다 헌신자들은 스승에게서 흘러나온 모든 시들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출판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완성되기 전에 성자의 방에 바람이 불어와 모든 종이를 흐트러놓고 말았다. 헌신자들은 시를 지어진 순서대로 출판하길 원했었지만 종이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았었다. 이 일이 일이 일어났을 때 정확한 시대 순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자에게 찾아오는 이백명의 사람 모두에게 물어보았지만 단 한사람도 정확한 순서대로 종이들을 재정리할 수 없었다. 마침내 성자가 말했다. "아쉬람을 청소하는 저 사람을 불러 오라" 아쉬람의 마당을 쓸고 외양간의 쇠똥을 치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가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며 사트상에 한번도 참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헌신자들은 왜 그에게 물어보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성자에게 그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성자는 말했다. "그가 아쉬람 내에서 지금까지 물어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가 아마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그를 성자 앞으로 데리고 왔다. 성자가 그에게 말했다. "지난밤 내방에 바람이 불어와 나의 시들을 적어놓은 모든 종이를 흐트러 놓았다. 배열순서가 뒤섞여 버렸다. 혹시 정확한 차례를 알고 있는가?" "예, 구루지(Guruji)". 그가 대답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저는 압니다.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지요. 구루지가 말을 하기 시작한 그날부터요. 저는 모든 시들을 알고 배열해야된 순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헌신자들에게 그의 지시에 따라 종이를 올바를 순서대로 놓을 것을 요청한 다음 시가 지어진 차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편의 시를 낭송했다.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시들이 지어지고 구술된 사트상에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헌신자가 성자에게 그 사람이 어떻게 모든 시들을 알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성자가 대답했다. "그에게 직접 물어 보라.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가 시들을 낭송할 때 나도 그대들만큼이나 놀랐었다." 그들이 그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저는 막노동꾼입니다. 글자도 모르지요, 저는 외양간에서 일을 해서 항상 더럽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여러분들과 같이 앉아있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의 한마디 한마디가 제게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한마디고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구루의 진심(眞心), 즉 싯구들이 떠오르는 그 자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했지요!" "저의 귀는 지금 구루의 진심 안에 있습니다. 구루지가 이 싯구들을 말할 때 저는 이 싯구들의 근원, 즉 구루지의 진심 안에 있습니다. 저는 지금 모든 것의 진심 안에 있기 때문에 오늘아침 여기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알고 있지요. 우주의 신은 모든 존재의 가슴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진심 안에 머무르면 이 신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신에게 알려질 때 누군가인 그 자신은 모든 존재 안에 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람과 같이 일해야만 한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의 일은 모든 세계에 이로울 수 있다. 일이 이기적인 것이 되면 혼란과 반목이 있게 된다. 자매가 자매끼리 다투고, 어머니가 자식과 다투게 된다. 오늘 여기에 세계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 모두는 세속적인 일들이 어떻게 벌어지며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까지 어떻게 다툼이 일어났는가 안다. 이러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슴에 사랑-진리에 대한 사랑,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담고 사트상에 와야만 한다. 사랑의 정신이 없으면 사트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대들이 사트상을 원한다면, 내가 이 육체에 있는 한, 봉사를 하기 위하여 헌신의 가슴으로 여기에 올 것이다. 나는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올 것이다. 하지만 그대들이 이 사트상이 계속되길 원한다면 잘 보살펴야만 한다. 그대들 모두는 절대적으로 이타적인 헌신을 해야만 한다. 오직 그때에만 일들은 잘 풀려나갈 것이다. 그대가 '나는 사트상 바반을 담당하고 있다'거나 '나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트상은 잘 되어나가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역할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일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그때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움이 돌아갈 것이며 나는 기꺼이 여기에 올 것이다. 나에게는 다른 할 일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트상으로부터 이로움을 얻는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항상 기쁘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을 볼 때 기쁘다. 이와 같은 일은 과거 어느 때에도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아마 그것은 그대 자신의 진아의 축복일 것이다. 그대 자신의 진아는 그대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여기에 모였다. 이것은 축복 받은 모임이며 우리는 그것을 진리를 통한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사트상이라 부른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도 낮지 않고, 아무도 높지 않으며, 하나로서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하며, 하나로서 우리는 경청해야 한다. ' 그는 이 나라 사람이다. 그녀는 저 나라 사람이다.'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나에게는 국경에 대한 개념, 어떠한 형식으로든 분할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나는 카스트, 종교, 혹은 정치적 이념에 바탕을 둔 차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자유스러워야만 한다. 여기에 오는 모든 사람들과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잡담을 하며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약 250여명의 사람들이 매일 사트상에 참여합니다. 저는 일전에 '군중이 있는 곳은 어디나 거짓이 있기 마련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트상에 모인 군중과 그 말씀은 어떻게 일치합니까? 나는 종종 '군중이 있으면 거짓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었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거짓이 나타나는데 군중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단 두 사람만 만나도 혼란 속에서 반목한다. 나의 말, '군중이 있으면 거짓이 있게 마련이다.'에 반증을 듣고 싶다면 그대가 군중 속에 있을 때 항상 행복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대는 입증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항상 군중 속에서도 행복하다는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람의 말을 내가 믿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군중이라 함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가.? '군중'은 마음 그 자체이다. 그대는 항상 사념들로 가득 차있다. 매 일초 일초가 사념들로 가득 차있다. 어느 누가 사념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는가? 이런 군중 속에서는 항상 거짓이 있게 마련이다. 사념, 감각, 인상, 대상,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라는 군중 속에서 누가 행복할 수 있는가? 꿈의 상태에서나,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서 사념이라는 빽빽한 군중으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60억 인류라는 군중 속에서 단 한사람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 모두는 다섯 가지 감각을 가지고 있다. 눈을 통해 보는 수많은 사물들, 귀를 통해 듣는 수많은 말들, 코를 통해 냄새를 맡는 수많은 것들, 손으로 만지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념과 말이라는 군중을 구성하고 있다. 단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상(像)을 만들기 위해 매초마다 눈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입력하는지 아는가? 셀 수 없이 많다. 일분에 혹은 그대의 일생동안 그대는 얼마나 많은 상을 흡수하는가.? 그야말로 셀 수 없을 것이다. 각각의 상들이 그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집단적으로 기억이라고 불리는 광대한 군중을 형성한다. 기억 속의 각각의 인상은 하나의 화신(化身)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상들은 그대에게 새로운 화신을 창조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죽음의 순간에 그대의 마지막 사념은 하나의 형상을 취할 것이며 그 형상은 그대 내생(來生)이 될 것이다. 군중과 군중을 거듭한다. 화신과 화신을 거듭한다. 그대는 결코 그것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잠을 잘 때도, 꿈을 꿀 때도, 심지어 죽을 때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대가 아파트에서 홀로 잠이 들어 꿈을 꾼다고 상상해 보라.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런 경우 문이 잠겨 있고, 침대에 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어디를 가든 그대는 군중을 피할 수 없다. 일급호텔에서도 피할 수 없다. 호텔 종업원들은 그대가 원치 않는 사람을 들여보내지 말도록 교육을 받았겠지만 그대를 사념이라는 군중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가 눈, 귀, 코, 손, 입을 통해 입력하는 수천 억의 대상은 다섯 개의 통로를 통해 들어온다. 오감(五感)이 군중의 원인이다. 이 오감으로 하여금 눈을 통해서 보는 것, 귀를 통해서 듣는 것, 코를 통해서 냄새 맡는 것, 혀를 통해서 맛을 보는 그것으로 향해 나아가도록 하라. 내가 그대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그대는 마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기에 마음이 없다면 보지도, 냄새맡지도, 맛을 보지도 못하며 음식을 즐길 수 없게 된다. 오직 마음만이 군중-오감과 수많은 대상-의 원인이다. 이 마음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사념들은 '나'와 동일한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 압축된다. 몸, 마음, 감각, 감각대상, 수많은 사념들, 객체를 보는 주체, 이 모두가 '나'이다. 과거, 현재, 미래, 이런 것들 또한 '나'이다. 그대는 군중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대가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홀로 있고 싶다면, 이 광대한 군중들을 만들어 내는 이 '나'가 누구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자, 이제 그대를 혼자만의 곳으로 데려가고 싶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이 '나'가 어디에서 올라오는가? 이 나의 근원이 혼자만의 공간이다. 안식과 평화와 사랑, 그리고 자유의 자리이다. 그대는 지금 여기에서 그곳에 갈 수 있다. 그대가 그것을 진정으로 원할 때 그것은 그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곳을 아주 급하게 찾기를 원한다면 찰나에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구한다면 그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계속해서 탐구를 미래의 어느 날로 연기를 하면 그것의 위치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그것은 내일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지금 존재할 뿐이다. 일상생활에서 평화는 없다. 어린 시절에는 무지가 있고, 젊었을 때는 정욕이 있다. 가정생활을 하게 되면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 인생의 어떤 시기이든지 그대는 유복한 삶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의지하게 되면 평화는 없다. 태어난 후 사람들은 수많은 병에 걸리기 일쑤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복을 받은 것이지만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만큼이나 복받은 것은 아니다. 가장 좋은 탄생은 건강, 좋은 분별력, 자유에 대한 거대한 열망을 지닌 탄생이다. 그대가 이런 것을 지니고 있다면 군중 속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군중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자유를 위한 탐구에 끝을 내고 기뻐하라. 자유로 가는 그대의 어떤 동반자도 필요 없다. 다른 동반자를 지니게 되면 항상 문제가 따른다. 여기 우리들은 한 가족이지만 이 가족은 삼사라에 속하지 않는다. 여러 외부인들이 와서 우리를 보고 말한다. '여기에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기에 천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생각이 하나면 우리는 하나인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데로 존재한다. 여기의 공통된 생각이 진리, 혹은 자유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유를 찾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러한 열망을 지님으로써 우리는 자유의 가족이 된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들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우리 모두가 그런 똑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린 더 이상 군중이 아니다. 그럼으로 내가 '군중'이라는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내가 '군중이 있는 곳에 거짓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대가 지금 당장 나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이해할 때까지 또 다시 여러 해를 보내야만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올바로 이해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그대가 군중 속에 있고자 한다면 그에 따르는 결과를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그대에게 사실을 전달할 뿐이다 이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번 말해보겠다. '군중이 있으면 거짓이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나에게 증명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 말을 할 것이다. 이 사트상을 운영하는데 각각의 역할을 가진 우리들은 사트상에 오는 사람들에게 천한 종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일들이 잘 풀릴 것이다. 전에 다른 영적인 단체들에서 이렇게 함으로써 일들이 결코 잘 풀린 적이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잘되어나간다면 그것은 이전에 없었던 첫 번째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단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다른 사람들의 결과를 잘 알고 있다. 그들 모두 실패해 버렸다. 이를 알면서 유사한 실험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도해야만 한다. 파파지의 헌신자인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파파지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파파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참된 헌신자는 나에게 물을 권리가 없다. 헌신자가 된다함은 헌신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헌신에 녹아들면 그대는 그것 그 자체가 된다. 참된 헌신자는 완전한 조복 이후에만 나타난다. 강이 바다로 흘러들 때 그 분리된 성질을 버리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자신의 독자성을 던져 버려야만 한다. 바다와 하나가 된 후 강은 '나는 강이다' 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독자성은 바다가 되었을 때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헌신자는 헌신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 대상 자체가 된다. 그가 신에게 헌신하면 그는 신이 된다. 신성이 헌신자의 진심에 머문다. 왜냐하면 헌신자는 신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헌신자와 신이 하나로 녹아들 때 나의 역할도 녹아서 사라진다. 그 자리에 아직도 나에게 어떤 역할이 남게 될지 나는 모른다. 옴, 샨티, 샨티, 샨티. END 자료의 출처:명상나라 http://z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