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wwww (DD15러셀) 날 짜 (Date): 2000년 1월 4일 화요일 오후 10시 05분 42초 제 목(Title): u.g] 사고는 당신의 적 커버 페이지 사고思考는 당신의 적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가르침에는 - 가르침이라는 말을 당신이 쓰고자 한다면 - 저작권이 없다. 나의 동의나 그 누구의 허락없이 복제를 하든, 유통을 시키든, 번역을 하든, 곡해를 하든, 마음대로 취사선택을 하든, 당신이 원작자라는 선언조차도 원하는 대로 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편집자 주 내가 U.G.에게 그와의 토론을 담은 책을 내고자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사업상의 모험을 감행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당신의 동기라는 것이 만일 돈을 버는데 있다면.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를 혹은 다른 누구인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의 영적인 길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 책을 낸다면 당신은 끔찍한 실수를 하는 것이다. 영적인 길 같은 것에 대해서라면 난 조금치의 환상도 없다". U.G.의 말대로라면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인 나의 세속적 동기와는 별개로, 나는 이 인물이 그가 어떤 존재이든 간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느꼈다. 인류에게 줄 그 어떤 메시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가 한 말들을 마치 담뱃갑에 인쇄된 '성문화된 경고'처럼 느낀다. 그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독자에게 달려있다. 당신이 그가 한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U.G.가 당신에게 당신이 듣고자 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 2판 편집자 주 광범위한 대중적 요구에 따라 "사고는 당신의 적" 제 2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영적 탐구의 일종을 행한 모든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 책은 영혼, 정신 그리고 육체의 문제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시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뿌리깊은 질문을 겨냥했다. 2판 발행에 도움을 준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페닌슐러 대학의 J.S.R.L.N. 무르티 교수, 힐러리 죠제프씨 그리고 A.P. 프랭크 나로나씨에게 감사한다. 편집자는 이 책이 인도와 외국 그리고 많은 수혜자 사이에 폭넓은 독자를 확보하게 되길 바란다. _________ 이 책은 1985년부터 1990년 사이, U.G. 크리슈나무르티와 인도, 스위스, 오스트랄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다양한 질문자들간의 토론을 편집한 것이다. 가능한 한 토론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깨지 않았고, 텍스트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최소한의 편집만을 했다. 토론 참가자들의 이름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용서하기 바란다. 질문자들에 대한 확인은 대화의 흐름과 의미에서의 불필요한 이탈을 가져올 것으로 느껴졌다. 텍스트 본문에서의 어떤 잘못에 대해서도 책임은 전적으로 편집자의 몫이다. 이 책의 발행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의 고마운 역할에 대해서 감사를 표명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목차 ● K. 챤드라세카 (K. Chandrasekhar)의 시 "그는 U.G.가 되었다" 와 "시작을 위한 노트" 1. 정신도 영혼도 없고, 오직 육체 뿐 2. 당신의 목발을 버리라 3. 꿈꾸는 로봇 4. 번개의 충격 5. 사랑은 최후의 카드일 뿐 6. 우리는 재난을 향하고 있다 7. 환상의 끝은 죽음 8. 정글에서 길을 잃다 9. 죽음은 원자들의 자리바꿈 10. 성性은 육체에 고통스러운 것 11. 자연의 돌연변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뒤 커버 신神이나 각성은 지고의 기쁨, 무한의 행복이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무엇에 대한 당신의 기다림이 당신 문제의 근원이다. 변혁, 목샤(moksha), 해방 그리고 그 모든 잠꼬대들은 그저 영원한 행복이라는 똑같은 테마의 다양한 변형일 뿐이다. 육체는 오랫동안 중단 없는 기쁨을 취할 수가 없다; 파괴될 것이다. 허구적인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육체에 부과하고자하는 기다림은 심각한 신경계통의 문제이다. 나는 그 누구의 해방을 위해서도 노력하지 않는다. 당신은 스스로 해방되어야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말해야만 하는 것은 그렇게하라가 아닐 것이다. 나는 오직 이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영적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숨기고 신비화시킨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아마도 나는 당신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상태를 찾아 헤매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당신을 설득할 수는 있을 것이다. --- U.G. 사고는 당신의 적 그는 U.G.가 되었다 거기 있으라 빛! 신이 말했다 그러자 그곳에 완전한 어둠이 있었다. 거기 있으라 평화! 신이 말했다 그러자 그곳에 세계대전이 일었다. 거기 있으라 질서! 신이 말했다 그러자 그곳에 철저한 혼돈이 있었다. 당황하고 환멸을 느껴 신은 말했다 거기 있으라 신이 아닌 자! 그리고 순식간에 그는 U.G.가 되었다. -- K. 챤드라세카르 여기 나의 가르침은 없고, 앞으로도 결코 없으리라. '가르침'은 적합한 단어가 아니다. '가르침'은 어떤 방법이나 시스템, 테크닉 혹은 당신 삶의 방식에 변형을 가져오려는 목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의미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학습능력의 영역밖에 있다; 그것은 단지 내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그것은 그저 인간의 자연 상태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 생각의 음모만 남아있는, 당신이 또한 움직이고 있는 방식에 대한 묘사이다. 자연 상태는 자기 실현된 혹은 신을 인지한 인간의 상태가 아니다. 자연 상태는 도달하거나 경지에 이를 그 무엇이 아니다. 이는 존재에 의지를 작용케 할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 -- 그것은 살아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단지 생生의 기능적인 활동일 뿐이다. '생'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추상적인 그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은 사고의 개입 없이 자연적으로 움직이는 감각의 삶이다. 사고는 감각의 작업에 억지로 끼여든 침입자다. 사고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사고는 감각활동 밖의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감각 활동을 조종하고,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결과물을 이용한다. 당신의 자연 상태는 천국의 기쁨, 지복至福, 그리고 법열法悅의 종교적인 그 어떤 상태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종교적인 상태는 경험의 영역과 관계된다. 수세기에 걸쳐 시종일관 자신의 종교적 탐구로 사람들을 이끈 이들이 이런 류의 종교적인 상태를 경험했을 수도 있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 종교적인 상태는 사고思考이다 - 그렇게 되도록 존재의 상태를 사고가 유도하는 것이며 왔던 것처럼 그렇게 간다. 크리쉬나 의식, 붓다 의식, 크리스트 의식, 혹은 당신이 가진 그런 류의 무엇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여행하게 한다: 그들 의식들은 절대 이해될 수도, 담아낼 수도 없다. 더더구나 어떤 인간에 의해 부여된 표현일 수는 없다. 그 관례冠禮는 당신을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이끌 것이다. 거기엔 저기 위치한 오아시스가 없다; 당신은 신기루에 고착돼 버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도입부 노트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전적으로 과녁을 벗어날 지도 모른다. "내게 와서 듣고 내가 이해시키려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석함 없이 들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라고 U.G.가 말했기 때문에. U.G.에 따르면, 우리가 청각이 홀로 작용하도록 남겨둘 때, 거기 있는 모든 것은 소리의 진동일 뿐이라고 한다. 이 진동들이 고막을 통과하고, 두뇌를 움직이는 신경계로 이동되어 그가 '우리의 참조 지점(reference point)' 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에 따라 해석된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진동에 대한 우리 고유의 해석을 듣는다. U.G.는 말한다. " '여기 돈이 있습니다; 당근 500그램 주세요'하는 수준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전적으로 옳지만 이는 당신 관계의 한계, 누군가와 당신간의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다." U.G.가 말한 모든 것에 당신이 동의하든 안하든, 그에게 귀 기울이는 시도는 진정 값진 것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단어들은 마치 우리의 '참조 지점' 안에 우리가 믿고있는 모든 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고 으르렁대며 던져진 최루탄과 같다. 그의 성명은 파괴적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라즈니쉬를 들어 본 사람들 그리고 여타 영적 분위기에 길들여져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U.G.는 또 양자 물리학과 블랙 홀,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대해서도 토론한다. U.G.는 말한다. "나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자연의 운행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한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나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수용하고 안하고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서 있거나 떨어진다." 그의 말은 확실성이라는 견고한 고리를 가지고 있고, 사고와는 다른 근원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 사고의 가장 근본적인 것들을 흔든다. 종종 신에 대한 불경을 생각케하고 이단이라 말할 수도 있는 신, 사랑, 각성, 정신, 명상, 죽음 그리고 환생 같은 테마에 대한 그의 비평은 별개의 문제다. U.G. 크리쉬나무르티의 이야기는 스릴러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의 삶에서 하나의 에피소드는 어떤 조직적인 전후관계 없이 또 다른 에피소드로 옮겨간다. 49세였을 때, 그에게 급작스런 선회가 있었다. 그가 '재난'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무언가가 그에게 일어났다. '자연 상태'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곳에서, 그의 단어로 말하면, "인간이 말한 모든 것, 느낀 것, 혹은 본 것, 말하자면 인류의 유산 모두가 나 자신의 시스템에서 발아한 것이었다." 그러나, U.G.는 이것은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성인들의--진짜 같은 사기꾼들-- 웅변으로 뒤덮인 영적인 꿈의 나라를 찾고 있었다. 영적인 환경은 그의 배경의 일부였다. U.G.는 1918년 안드라 프라데쉬의 중산층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후 사망했다. 죽음의 침상에서 그녀는 아이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높은" 그 무엇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U.G.의 할아버지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수도적인 분위기에서 양육한다. U.G.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은 에피소드.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 명상을 하고 있는데 아이의 울음이 명상을 방해했다. 노인은 몹시 화가 나서 아이를 멍이 들도록 때렸다. 그 소동의 무자비함과 부적합성은 U.G.의 상처 입기 쉬운 감수성에 깊은 충격을 남겼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것이 명상과 관련된 무엇이라면, 명상 같은 건 쓸모 없는 짓이다." 그는 그의 종교적인 실마리를 던져버리고 집을 나가겠다고 위협했다. U.G.의 인생은 그 후부터 진실에 대한 실험이었다. 소위 영적인 인간으로 불리는 이들의 추상적인 견해 뒤에 있는 무엇을 발견하고자하는 충족시킬 수 없는 갈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지두 크리쉬나무르티와 라마나 마하리쉬를 포함한 다양한 스승들을 만나고 전통적인 명상수련을 행했다. 그는 '약속의 땅'에 이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의미들을 힘껏 연구하고 종국에는 희망을 잃고 극단의 절망에 빠졌다. 49세 생일, 그는 스위스 오버랜드의 울퉁불퉁한 봉우리와 푸른 계곡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다가왔다. "깨달음이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모든 곳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 탐구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해 본적이 없다. 깨달음은 존재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찾아다녔기 때문에. 나를 숨막히게 하고 나의 자연 상태밖에 나를 잡아두는 것은 탐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영적이라거나 정신적인 깨달음 같은 것은 없다. 영적이거나 정신적인 것 자체가 없으니까. 나는 전 생애동안 존재하지도 않는 무엇을 찾아다닌 지긋지긋한 바보였던 것이다. 나의 탐구는 끝났다." 예언자들과 영적인 스승들이 약속한 요정의 나라를 찾는데대한 그의 맹렬한 갈망은 다 타버렸다. 그 사건은 육체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에게 일어난 많은 육체적 변화는 의료관계자들과 주변 친구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 이후 그의 삶은 "내일에 대한 생각은 물론 과거에 대한 슬픔도 없는" 그곳에 있는 것이 되었다. U.G.에 의하면, 슬픔과 기쁨은 정신의 속임수로서만 존재한다. 육체는 둘 중 그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다. 육체의 유일한 관심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조우하는 나날의 도전에서 생존하는 것뿐이다. U.G.의 말은 수수께끼 같고 그가 없는 상태에서 듣거나 읽었다면 최고의 지성의 산물이거나 미친 사람의 장황한 이야기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경험의 가능성도 사라진다는 U.G.의 말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익숙하게 만든 그 논리적 틀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경험을 만드는 것은 바로 지식이고, 지식을 강화하는 것은 바로 경험이다. '지식'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식론적인 함축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식은 단지 이 물건이 의자거나 테이블 혹은 기쁘다거나 고통스럽다는 어떤 감정일 뿐이다. 사실 무언가의 이름 붙이기와 인식의 과정조차도 지식의 일부분이다. 그 모든 운영체계는 '사고'로 모습을 드러낸다. U.G.와 우리를 구별짓는 것은, 우리가 좋든 싫든 우리 사고 활동의 영역에 항구적인 저의가 있을 때, 사고 과정을 통하여 작용하는 이 지식이 U.G.에게 있어서는 클러치 풀린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이 다양한 모양, 색깔 그리고 크기 안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기계적인 연주를 한다. U.G.는 우리가 '나' 혹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계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이 항구적인 사고라고 한다. U.G.에게 있어서 사고의 계속성은 '뚝' 부러져 버렸다. 사고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해체된 방식으로 그에게 온다. 그는 경험에 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만 사고한다. 다른 한편으로 감각의 단순한 활동이 -자극과 반응의 연속성- 있을 때에만 사고한다. '나 자신' 혹은 '나'라는 환상을 주는 것은 계속적인 사고 활동임을 안 이래, U.G. 안에 '나 자신' 혹은 '나'라는 느낌은 없다. U.G.는 지식이라고 불리는 것이 육체라는 물질적 유기체에 대해 억압을 행사하는 것은 수백만 년의 잠재력을 가졌다고 한다. 사고의 형태로 작용하는 지식은 자연의 방식과는 대비되는, 자기 자신만의 자연과 유사한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사고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덧없는 본성을 '안다'. 자기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두려움은 문화, 문명, 종교, 정치, 다양한 훈련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엄청난 구조를 구축하도록 몰아간다. 인간 삶의 이 모든 현상들은 사고가 영구적으로 자신을 왕좌에 앉히려는 시도에 쓰이는 소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나' 혹은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수한 활동 속에서 영원성을 추구하는 사고 그 자체일 뿐이다. U.G.는 오직 어떤 기적이나 기이한 기회를 통해, 살아있는 유기체가 사고에 의해 창조된 왕국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에만, 육체는 그 놀라운 지성으로 인간 존재를 '자연 상태'에 '떨어지도록'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U.G.에 의하면, 누군가가 자연 상태를 찾도록 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의지작용이나 그 어떤 엄격한 훈련을 통과하는 식의 방식은 사용될 수 없다고 한다. 자연 상태란 경험 저편의 상태이다. U.G.는 종종 그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생겨났는가? 나는 모른다. 그것을 생겨나게 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모른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그는 그에게 생긴 일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종류의 것이고 자연 상태는 표현되거나 사고 안에 담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고 대화는 필요 없다". 이미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위 '자연 상태'라고 불리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물음은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을 찾아 헤매는 유한 존재들의 시각, 비 자연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평화와 행복은 우리 모두가 찾아 헤매는 것이다. U.G.의 '자연 상태'는 평화나 행복같은 무엇의 경험은 없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무엇은 우리의 편견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한 사람에대한 관점인 것이다. 그를 자연의 사기꾼 혹은 정신병자라 부르지만, U.G.의 현존이라는 회오리바람 가까이의 어느 곳에든 한번 자리해보면 당신은 아연실색하여 말을 이을 수 없는 상태에 남게 된다. 당신의 기대와 의견들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의 말이 샘솟는 근원은 무엇일까는 당신에게 의문인 채로 남게된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형상 아래에 설명을 허용하지 않는 그 무엇이 펼쳐져 있다. 프랭크 노로나 21/88 로디 콜로니 뉴델리 제 1장 정신도 영혼도 없고, 오직 육체 뿐 ─────────────────────────────────── 인간의 사고는 인간 육체의 신경학상의 결함의 일종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간 사고에서 나온 그 무엇이든 파괴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_________ 종교는 자비, 자선이라는 굉장한 물건을 발명해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사악하고 천박한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관대함을 주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세상의 불공평에 대한 책임 이 있다. _________ 사고는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능에 대립한다. _________ 모든 통찰력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든 간에, 오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찰력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한 것이 바로 사고'이기 때문에. 사고의 현상유지와 계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사고이기 때문에. _________ 사고는 우리가 영위하는 삶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나가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다. 사고는 당신들이 그 모든 생태학적인 문제를 만들어 내도록 한 원인이다. 그러나 지구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에 빠져 있다. _________ 거기 정신 같은 건 없다는 내 확신은 그 누구에게도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지만 어렵사리 전하려는 시도를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에 사용 중인 바로 그것이 위험 속에 있기 때문에. _________ 사고는 죽은 것이며, 살아있는 그 무엇도 절대 건드릴 수 없다. 사고는 삶을 움켜쥘 수도, 그 안에 담 을 수도 그리고 삶을 표현할 수도 없다. 사고가 삶을 건드리려 시도하는 그 순간, 사고는 삶의 살아있 는 특성에 의해 파괴된다. _________ ─────────────────────────────────── Q : U.G. 나는 거기엔 영혼이 없다는 당신의 혁명적이고 강경한 정수에 돌진해보고 싶습니다. A : 거기엔 자아도 없고, 나도 없고, 영혼도, 정신도, 마음도 없다. 그것은 이 모든 리스트를 떨쳐버린 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남은 무엇을 찾을 길이 없다. "당신이 기능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내게 묻는다는 건 매우 좋은 질문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수세기 동안 '나'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런 모든 종 류의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어떤 도구, 그것이 그저 사고 혹은 정신임을 강조하고자 함일 뿐이다. 모든 영적인 탐구에 관련된 것은 사고다. 그러나 당신이 자유로와 져야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일단 알고난 후, 이 질문들은 전혀 일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 가 그것을 알았는지, 나 스스로도 알아낼 길은 없다. Q : 당신이 우리에게 줄 답을 찾을 수 있다면,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 존재들은 그것을 알고자 합니 다. A : 내가 주는 답은 오직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능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 이다. 어떻게 그것이 기능하는 가가 내가 언제나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강조하고, 그리고 지나치게 강 조하는 것이다. 나의 관심은 어떻게 해서든 당신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당신의 시도 모두는 패배한 싸움이라는 것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Q :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기 오직 물질적인 육체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A : 그 말조차도 거기 있는 것에 의해 경험될 수 없다. 한번 모든 것이 당신의 시스템, 상태, "우리는 오직 물질적인 육신과 우주와 함께 남아있다--"에서 씻어 내려졌을 때, 그 말 또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Q : 하지만 저는 그 점에 대해 깊이 들어가보고 싶습니다... A : 당신이 내게 질문을 더 많이 쏟아 낼수록 우리 존재의 물질적 양상, 즉 우리가 믿도록 만들어진 것 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생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세계의 실체나 우 리 존재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내 말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무엇도 경험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지식을 통해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그 무엇 이든 효과가 없다. 그것은 패배한 싸움이다. Q : 당신이 인간의 본성에 비물질적 요소는 없다고 말할 때... A :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당신이 "인간 본성에 있어서의 비물질적 요소"라고 말할 때 정확히 무슨 뜻으로 말하는가? Q : 저는 현실의 물질적인 육체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A :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실체나 우리 존재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이(육 체) 구조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고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거기엔 사고가 없다. 현재조차도 없다. 거기 사고 같은 종 류의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내고자 한다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정확한 질문은, 다시 말하면, "사고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바로 사고가 거기에 있다는 가정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거기 서 당신이 찾게될 것은 모두 사고에 대한 것이지 사고가 아니다. 모든 사고에 대한 것은 문화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야할 아주 핵심적인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사 람들에 의해 주입되었다. 당신이 사고로부터 자유롭고자 시도하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주 핵심적인 것 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그리고 한번 이것이 당신을 강타하면, 사고는 도구가 아니고, 거기에 다른 도구는 없다는 것, 그리고 만일 다른 어떤 도구가 필요하다면 당신은 찾을 필요 가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다른 어떤 도구는 필요치 않다. 교육이나, 정확한 통찰력, 올바른 이것, 저것, 그리고 다른 또 무엇을 담고 있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매우 동일한 구 조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통찰력 있는 사고라고 말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은 장애물이다. 모든 통찰력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대단하든 간에, 무가치하다. 우리가 통찰력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한 것이 바로 사고이고, 사고를 통해 현상유지와 계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Q : 저는 그 부분을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의 물질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만일 내가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고, 그 유기체의 상호 연관적인 기능들을... A : 사실상 생리학자들이 우리에게 준 지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Q : 우리 자신에 대한 관찰을 말씀하십니까? A : 당신 자신에 대한 관찰같은 것은 없다. 당신 고유의 관찰은 당신이 가진 지식에서 나온다. 이 지식 은 생리학자들로부터 나온다. 이 지식은 의료기술과 관련되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어떻게 이 육체가 기능 하는지, 어떻게 심장이 기능 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그 많은 기관들은 어떤 지를 알아내려 애쓴다. 그들이 이미 발견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는 없는 무엇이다. Q : 당신이 말하는 건 그러니까 거기에 정말 즉각적인 혹은 직접적인 경험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A : 지식의 도움 없이는 그 어떤 경험도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그 무엇의 본질에 대해서도 경험할 방법이 없다. 내 말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경험적인 구조의 메커니즘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그 너머'는 아직 그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경험적 구조에 의 해 인정되거나 무시된다. 그것은 게임이다. Q : 다시 돌아가서, 나는 먼저 이걸 묻고 싶습니다. 거기에 촉각의 경험이 있습니까? A : 없다. 촉각이라는 경험조차도 오직 이런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신이 촉각이라고 부르는 것. 당신은 손가락을 이리로 가져와서 여기를 건드린다. (U.G. 의자의 팔걸이를 건드린다) 눈은 그것 을 보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이것을 건드릴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려고 여기를 손가락 으로 건드리는 누군가로서 그 운동이 해석되는 건 아니다. 눈은 말할 수 없고, 촉감은 그 어떤 이유로 도 해석되지 않는다. 당신이 의문을 제기할 때를 빼고는... Q : 나는 이런 추론을 해보는데... A : 눈은 그걸 바라본다. Q : 아뇨, 전 그걸 보고 있지 않습니다. A : 아니다. Q : 나는 느낍니다, 나는 느껴요... A : 그건 당신의 상상과 과거 경험의 체제 안에서 느껴지는 이 특수한 촉감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 바로 그 순간, 만일 당신이 그것이 약한 감촉인지 강한 감촉인지 또는 당신 손의 감촉인지 해석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둘을 분리하거나 그것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Q :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둘... A :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이 알고자하는 무엇에 대해 내게 질문을 한다고 가정하고, 당신이 가진 유일 한 지식은 여기 이 컴퓨터 (머리를 가리키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여기를 건드리면 튀어나 와서 나에게, 당신에게 말한다. 그 촉감은 내 옆에 앉아있는 친구의 가벼운 느낌이라고 해석된다. Q : 혼자 걷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산들바람이 부는 걸 느낍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 다만 바람은 내가 가는 길에 불고 있습니다. A : 당신이 당신 몸을 건드리는 산들바람을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Q : 저는 바람을 느낍니다. A : 느낌 또한 사고다. 당신이 바람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분리하는 순간, 그 감각 활동은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체계 안에서 해석된다. 나는 지금 당신은 바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당신 말은 당신이 가진 지식의 일부라는 것 그게 전부다. 그렇지 않고 당신은 바람과 육체 를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Q : 그러니까 당신은 새로운 경험같은 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A : 새로운 경험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러나 같은 것을 계속해서 다시 경험하고자 하는 요구는 기억의 전 메커니즘을 점차로 사라지게 한다. Q : 의식 안에서 기억이 작용 요인이 되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A : 나는 의식에 대해 묻는다. 우리가 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기억이니까. 당신은 당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 무언가의 의식이 된다. 그 지식은 기억 속에 고정된다. 그러므로 잠재의식, 무의식, 의식 층들 그 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한 모든 대화들은 사고 체계의 정교한 발명품이다. 이 영민함, 이 풍부한 창의력 을 통해 사고 체계는 계속성을 유지한다. Q : 깨어있음과 의식 사이의 어떤 차이를 두십니까? A : 깨어있음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깨어있음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가 아니 다. 거기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건 더 희박한 경우이고. 무엇보다도 먼저, 거긴 변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변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안 후,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그 어떤 도구나 깨어있음 을 당신이 이용하든 안하든 그것은 의미가 없다. 깨어있음은 두뇌 활동으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내가 항상 여기(자신을 가리키며) 물질적인 요 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묘사하려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것(쿠션을 가리키며)의 영 상, 이게 무엇이든 간에, 망막 위에, 그리고 그것에 이름 붙이는 작업을 하지 않고 경험하는 것"은 오 직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하는 교묘한 게임일 뿐이다. 당신은 이름 붙이기와 인식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 각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인식과 이름 붙이기는 하나이고 동일하다. 내가 그것을 이름 붙이든 아 니든, 당신이 인간이라는 혹은 저것은 쿠션라는 인식의 핵심은, 그 자체로 그 이름 붙여진 것이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내가 단어를 사용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다. 세상은 정상이다,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강조해 말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이다.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면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진력나는 토론을 하고 앉아 있는 철학자 들에게는 걸맞는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과 다른 그 어떠함이 있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신 은 세상은 정상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 언어로 묘사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있다 고 당신이 말하는 것조차도 거기에 분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 떻게 그 분리, 나눔이 생겨나는가이다. Q : 분리는 이원성의 진정한 시작입니다. A : 나는 결코 '나는 테이블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부조리하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건 거 기에 당신 고유의 자유 의지와 의지 작용에서 당신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외 부로부터의 요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당신은 "그게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고, 당신과 나는 우리 기억 속에 동일한 정보를 가지는 것이다. 당신이 불어를 혹은 영어를, 독일어를 라틴어를 사용하든 간 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지적된 핵심은 당신이 나에게 물은 그 테이블이다. 그래서, 나는 이건 테이블 이라고 말했고 그건 흰 테이블이다. 당신과 나는 동일한 정보를 가진다. 그 질문이 거기 없다면 나는 그걸 바라볼 시간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나 자신에게 그것은 테이블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런 사실이 내가 그 물건에 대해 '차별 없이 깨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 있는 것은 오직 망 막 위에 이 물체의 투영일 뿐이다. 이 상태를 내가 경험할 수 없을지라도 망막 위에는 물체가 비춰지 고 있다. 자극과 반응은 단일한 운동이므로. 거기에 깨어있음이 있다고 당신이 말하는 순간, 거기엔 이미 분리가 있다. Q : 왜 우리가 이 위치, 이 이원성, 이 분리 상태를 유지하는 거죠? A : 그것이 당신이 계속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렇지 않고는 당신은 종말을 향해 갈테니까. 당신 자신이 알고 있는 '당신', 당신 자신이 경험한 '당신', 그 '당신'은 거기에 존재한다. 만일 '당 신'이 거기 없다면,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른다. "앎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장이 아주 매력 적이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한번 당신이 앎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당신은 거기에 대해 말할 방 법이 없다. 그래서, 만일 내가 앎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질 필요에 대해 말하는 당신과 같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앎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미 앎의 일부가 된다 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사고는 수백 만년을 생존해 왔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기교를 알고 있다. 사고는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Q : 그러니까 사고는 실제로 이해될 수 없다는... A : 거기엔 사고라는 건 전혀 없다. 거기에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고는 전혀 없다. 당신은 거기엔 오직 사고만이 있고 사고자는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고는 여기(머리를 가리키며)에서 나오는 것 이 아니다. 사고는 외부로부터 온다. 당신 경험 구조의 체계 내에서의 감각 기관의 해석이 사고이다. 그리고 당신은 목표에 이르기 위해 그 사고들을 사용한다. Q : 사고에 대해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일련의... A : 아니, 당신은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스승이 아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컴퓨터 처럼 기계적인 것이다. 그건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과 관련된 정보 중 저장할 만한 (머리를 가리키 며) 것이 있는가를 찾으려는 기계적인 작용이다. "한번 보죠" "생각해 볼께요" 이것들은 단지 당신이 만들고 있는 상태지만 거기에 한발 더 나가는 활동은 없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생각도 없다. 당신은 거기 정보를 가져오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보라, 이건 우리가 가진 경탄할만한 도구 -단어 찾는 기계- 와 다르지 않다. 당신이 "준비" 버튼을 누 르면 그건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단어를 요구한다. "찾기", 라고 말한다. 그 찾기가 생각이다. 그건 기계적인 공정이다. 단어 찾는 기계나 컴퓨터 안에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관 련된 어떤 정보나 그 무엇이 있다면 컴퓨터 는 그것을 함께 입력하고 출력한다.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 저 이런 것이다. 아주 기계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고가 기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준비가 돼있 지 않다. 우리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는 모든 이미지가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건 아주 대단한 기계 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것(자신의 몸을 가리키며)은 살아있는 무엇, 삶의 특성을 이해하는 무엇이다. 육체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저 기계적인 반복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전류 에너지와 같은 생명 에너지를 수반하고 있다. Q : 인간 존재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상상력인데... A : 당신 육체의 전체를 경험했다는 생각은 바로 당신의 상상에서 생겨난다. 실제적으로 육체의 전체 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신 육체의 무게에 대한 당신의 경험은 중력 때문이다. 사고가 작용 하지 않을 때에, 때로 당신은 당신 육체의 무게를 경험한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때때로 느슨해진다. 당신이 가장 무거운 물체보다 더욱 무겁게 느껴질 때가 바로 그 때이다. 당신은 스스로 640 킬로가 나 가는 것처럼 느끼거나, 갑자기 공중에서 걷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은 몇몇 영적 용어에서 묘사되었었 고 지나치게 중요성이 부여되기도 했던 육체의 실제적 기능이다. Q : 그래서 이 상상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로워진 생각이 때로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떠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 풍요롭고, 더 쉽게 혹은 더 기쁘게 살 수 있다는 식의 가능성... A : 그건 효력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 Q : 그것이 사람들의 추론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게 할 기회를 가졌다면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A : 그것은 특정 범주에서 작용한다. 우리는 수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 하고 있다. 당신은 답을 가지고 가서 이것이 당신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때로는 특수한 수학적 혹은 과학적 문제의 해답을 찾는 조합과 변분, 그리고 모든 가능성이 고갈된다. 당신은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러간다. 당신이 다시 깨어났을 때 문득 답이 거기 있다. 이것은 기계적인 문제의 범 주에서만 가능하다. 사고는 살아있는 문제들을 푸는데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인간의 문제를 푸는데는 도울 방법이 없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사고는 여기(몸을 가리키며) 그 어느 것도 건드리지 못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거기의 그 무엇도 건드리지 못한다. 우 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할 지를 모른다. 당신은 비폭력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 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서 당신이 하게될 일은 절대로 알지 못한다. 모든 미래의 행위와 상황을 위 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우리들 문제의 원인이다. 모든 상황은 너무도 다르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지식으로 만든 우리의 준비상황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Q : 그러면 "살아있는 도전"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A : 모른다, 당신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Q : 당신은 새로운 상황을 만나고... A : 그건 도전이 아니다. 당신이 가진 것을 사용하는 부적절함, 당신 자신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상황 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도전 그 자체로 끝난다. 거기엔 문 제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답이 만일 진정한 답이 아니라면, 당신은 진정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실제, 당신이 문제를 가 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당신은 문제 없이는 살 수 없다. Q : 그건 맞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A :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거의 더 진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어야 한다. 그것이 훨씬 더 나은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더 나은'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 자연적인 방식' 이라고 하자. 우리는 특정의 위험으로부터는 자유롭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타고난 고 도로 발달된 구조를 사용하여 처리할 수 있다. 우리가 영적인 능력 -- 투시력, 초인적인 청력 등등-- 이라고 말하는 것을 동물들은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그것을 가지고 있다. 몇몇 경우에 서, 명상 기법이나 특수 장치를 통해 사고는 느슨해진다. 그들은 이 소위 능력이라고 불리는 것을 일 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아마 그 메커니즘이 동물의 경우보다 더욱 민감할 것이다.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어떤 규정된 상태도 만들 수 없다. 동물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당신은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모든 특수 장치, 당신의 탄생을 재 경험한다는 생각, 부활, 이것, 저것, 그리고 또 다른 것들- 이것들 은 완벽한 쓰레기다.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시점으로 되돌아갈 시도를 하는 중이고 당신 자신의 탄생 을 이 시점에서 경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의 탄생의 경험이 아 니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의 무엇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경험을 사용하고, 거기 색깔을 입히고 당신이 자신의 탄생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들의 '재탄생' 마케팅에는 훌륭하지만 거기엔 아무것 도 없다. Q : 인간 존재는 왜 땅, 공기, 물같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의 오만한 파괴자로서의 성질을 발전시켰 습니까? A : 지난번에 말한 대로, 우리를 둘러싼 것들 전체로부터의 이 분리, 그리고 만물은 인간의 이익을 위 해 창조되었다는 생각 그리고 인간은 이 지상의 모든 다른 종보다 더 고귀하고 위대하게 창조되었다 는 생각이 파괴의 원인이다. 사고의 강력한 사용이 파괴적인 것이다. 사고는 자기 방어적인 메커니즘 이다. 그러니까 사고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적이다 -- 종교적인 사고든 과학적인 사고든 혹은 정치적인 사고든 간에 -- 이 모든 것들은 파괴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적이 바로 사고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다. 우리는 사고를 사용하지 않고 이 세계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모 른다. 당신은 모든 것을 발명할 수 있고 당신 자신을 사고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속엔 '사고가 우리를 이 세계에 건강하고 지성적으로 기능하도록 돕는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용할 방법이 없다. 사고는 자기 영속성의 메커니즘이다. 사고는 통제하고, 틀을 만들고, 우리의 관념과 행동을 구체화한다. 관념과 행동 -- 이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관념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관념은 세대에 세대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 온 사고들이다. 사 고는 우리를 둘러 싼 삶과 조화를 이루며 살도록 우리를 돕는 도구가 아니다. 그 때문에 당신은 이 모 든 생태학적 문제, 공해 문제 그리고 우리가 발명해낸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조차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것이다. 탈출구는 없다. 당신은 내가 비관론자라고, 냉소적이라고 혹은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만든 그 실수들이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희망한다. 지구는 위험에 빠져있지 않다. 우리는 위험에 빠져있다. Q :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행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생존에의 욕구는 -육체의 죽음 그 피할 수 없는 소멸을 넘어 생존하고자 하는 이 욕구는 어디서 오는 겁니까? A : 당신이 당신 자신을 아는 방식이 종말에 이르기 때문에 생긴다. 당신은 60, 70 혹은 백살까지 살 것이다. 당신은 무수한 경험을 해왔다. 당신은 수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당신은 수 많은 것들을 완수 하고 손에 넣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없음(죽음) 뒤에 남는 것인가?" 당연히 우리는 '그 뒤'를 만들어 낸다. Q : 왜 당신은 우리가 의식이나 인간의 사고를 존속시키기위해 환상과 비현실을 허용한다고 생각하 십니까? A : 당신은 환상과 분리돼 있지 않다. 당신은 환상이다. 하나의 환상이 사라지면 언제나 또 다른 환상 이 자리잡는다. 왜? 환상의 끝은 바로 '당신'의 끝이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이다. 믿음의 끝은 거기 있 는 '당신'의 끝이다. "당신의 어제를 잊음"은 시적인 혹은 낭만적인 죽음이 아니다. 문화가 입력시킨 당신의 모든 것들을 씻어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육체의 죽음뿐이다. Q : 나는 환상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A : 그것은 또 다른 환상이다. 그것은 "보는 것이 끝이다"라는 환상이다. 당신 자신을 분리시키고 볼 수 있는 길은 없다. 본다는 것은 환상이다. 보는 자는 환상이다. 보는 자는 자신에게 말한다 "보는 것 이 끝이다", 라고.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보는 자는 끝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보는 자는 환 상이다. 나는 모른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보는 자는 환상이다. "환상 을 보는 것은 끝이다"라고 불리는 사고를 발명함으로써 보는 자는 타성을 모으고 계속한다. 당신이 무 언가를 '보고'자 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게되고 보는 자는 존재 속으로 들어오 며 그 봄을 통하여 계속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보는 것은 우리를 돕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 아무것도 끝난 것은 없다. Q : 우리가 지금 함께 이야기하는 것--- 이 대화를 통해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십니까? 그건 현 재 진행되는 이 상호 작용은 단지 물질적 교환 같은...? A : (웃음) 계속해서 이것을 반복하기는 정말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여기 앉아있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리고, 두 꼭두각시, 두 컴퓨터, 돌아가고 있는 두 개의 녹음기, 그것일 뿐이다. Q : 당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 당신의 말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 닙니까? A : 전혀. 당신은 듣지도 않았다. 청취의 예술 같은 것은 없다. 당신은 전혀 듣지 않았다. 듣는 것은 당 신의 관심사가 아니다. 당신은 해석한다. Q : 저는 그 부분에 대해 깨어 있습니다. 분명히 일종의 들음이 있습니다. 나는 문에 열쇠를 집어 넣 으려하고 그리고... A : 우린 "나는 그 부분에 대해 깨어 있고, 저것, 그리고 또 다른 것에도 깨어 있습니다"라는 식의 구 절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신이 '깨어있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행하고 있다면 당신은 모든 사람이 걸릴지도 모르는 알츠하이머 병을 얻기위한 길로 가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라고 어떤 잡지에서 읽었다. 그 병은 유명한 가수도 걸렸다. 그 이름이 뭐더라, 프랭크 시나트라. 당신 기록도 거기 있다. 시나트라는 젊다. 알츠하이머 병으로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을 수 있는가의 한 예로 시나트라를 들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 손에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열쇠 를 사용하고 문을 열어야 하는 지를 모른다. Q : 실제 당신이 말하는 바는 육체는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육체의 기능 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조화롭게 상호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A : 육체는 관심도 없는 것을 육체에게 가르치려는 우리의 관심이 문제의 원인이다. Q : 다른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 무엇을 말하려고? 이미 많은 말을 했다. Q : 당신은 분명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묻고 싶은 다른 것은 육체적 고통 혹은... A : 고통은 홀로 내버려두라. 통증이 있으면 당신은 진통제를 먹는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통증에 대해 신음하도록 놔두라는 것이다. 당신은 사실상 고통을 더 욱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라, 고통이 길어지면 나는 알약을 복용할 수 있고 일시적으로는 통증에 서 벗어날 수 있다. 거기 우리 자신과 타인들에게 우리가 고통을 견딜 수 있음을 증명해야할 특별한 주문 혹은 영적이거나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주제가 아니다. 우 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 고통을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육체보 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육체에 무엇이 좋은가를 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때문에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육체는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육체는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 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고와 육체 사이의 이 단순한 관련성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육체가 기능 하도록 오로지 기능적인 목적에서 기능하도록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는 유용성에 있어서 기능 적이다. 사고는 우리 이전에 자리한 그 어떤 목표나 문화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는 없다. Q : 고통의 물리적 목적 같은 것은 없습니까? A : 고통은 치료자다. 고통은 치유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편집증환자이며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 을 보는 데에 과도한 불안을 느낀다. 당신에게 가능한 도움을 받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 을 참으면서도 의사에게 가지 않은 기독교 성자처럼 괴로움을 견뎌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우리가 주어진 어 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억측일 뿐이다. 여기서 그만하고 그건 남겨두자. 당신이 여기 어떤 의미를 부여하겠다면 그렇게 하고. 아니라면 당신 은 그저 아닌 것이다. 나는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 그 누구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 신이 뭔가를 기억한다면 그건 이미 놓친 것이다. 내가 말하려 시도했던 것조차도 인간 의식 전부에 악 영향을 미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이다. Q : 저는 고통이 진정 치유자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에 반대의견을 가지진 않았습니다만 고통은 선천적인 겁니다. A : 고통은 거기 있다. 어떤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치유하려는 시도가 고통이다. 그러나 내가 가정하고 있는 것은 고통을 겪는 것에는 그 어떤 마술도 없다는 것이다. 도움의 손길이 고통을 좀 견 딜 만하게 만들 수는 있다. 그 어떤 종류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에 의미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Q : 당신의 무릎이, 등이 혹은 머리가 아프다면 그건 이미 거기에... A : 내가 말해도 되겠는가? 우리가 고통에 대해 지금 이 순간 토론한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다. 왜 냐하면 우리는 현재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으니까. 고통이 거기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토론했을 것이고, 일련의 행위가 이어졌을 것이다. Q : 예, 맞습니다. A : 특정 모델에 맞추라고 모든 이에게 강요되는 당신들의 가치 시스템은 인간의 질병, 인간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사고는 당신의 적 제 2장 당신의 목발을 던져 버리라! ─────────────────────────────────── 사고는 오직 문제를 발생시킬 뿐,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__________ 구루(guru)는 당신에게 모든 목발들을 던져 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당신에게 걷기를 요구하고, 당신이 넘어지면 일어나 걸으라 말할 것이다. __________ 인류가 스스로 만든 혼돈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곧 인간이 인간의 구세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다는 말이다. __________ 당신이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반복하는 순간, 당신은 누군가의 추종자가 된다. __________ 이들 구루가 시장 바닥에서 행하는 것은 당신에게 얼음과자를 팔거나 조금의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다. __________ 사고는 그의 탄생에 있어서, 그의 기원에 있어서, 그의 표현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행위에 있어서 대단한 파시스트다. 내가 '파시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며, 사고가 우리의 생각과 행위들을 통제하고 구체화한다는 의미에서이다. __________ 환생을 믿는 이에게는 환생이 있다. 믿지 않는 이에게 환생은 없다. 당신은 이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해야한다: "현재 환생하게 될 것이 무엇인가? 영혼, '나' 혹은 정신같은 것이 존재하는가?" 당신이 보거나 경험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만들어 낸 것이다. __________ ────────────────────────────────── Q : 먼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그 행복이라는 개념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행복에 관련된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A : 당신은 내게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다른 지각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사실상, 모든 경험,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든 간에, 경험은 감각의 범주에 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주요 문제 중 하나다. 도처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은 자아-의식을 최초로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종을 이 지상의 다른 종들로부터 분리시켰다. 나는 진화같은 것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졌다. 아마도 그 때에 사고가 탄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탄생에 있어서나, 기원에 있어서, 그 내용물에 있어서, 표현에 있어서 그리고 행위에 있어서 대단한 파시스트다. 내가 '파시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며, 사고가 우리의 생각과 행위들을 통제하고 구체화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사고는 아주 방어적인 메커니즘이다. 사고가 현재의 우리를 있게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고는 오늘의 하이-테크, 기술력을 가능케 했다. 사고는 우리의 삶을 아주 편안하게 만들었다. 사고는 또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사고는 대단히 방어적인 메커니즘이며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사고는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에 대해서는 저항한다. 우리는 마음같은 것이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혹은 나의 마음 같은 건 거기 없다. 사회나 문화 혹은 당신이 뭐라 부르든 그런 것들은 전적으로 사고 자신의 계속성과 현상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사고는 개인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거기엔 개인이라는 관념과 사고와 경험의 전체성으로부터 개인을 분리하고 구분하여 기능하는 것의 불가능함, 이 두 가지 사이의 투쟁이 있다. Q : 누가 우리를 특정의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까? A : 여기서 나는 사고가 자기 발생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싶다. 한발 더 나아가 묻고 싶다. "사고 같은 것이 있는가?" 그 질문 자체가 바로 우리가 사고같은 것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할 수도 없고 그것을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사고에 대해서 보는 것이지 사고 자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사고란 무엇인가?" -- 이 질문은 오직 거기 사고라는 것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을 영적 혹은 물질적 목표에 이르기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영적 목표를 '최상의'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우리가 기능하고 있는 문화는 유물론적인 목표보다 영적인 목표를 더 높은 단계에 놓는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고라는 도구는 물질이다. 사고는 나에게 있어서 물질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영적인 목표는 가치면에서 유물론적이다. 사고는 거기서 진행되고 있는 투쟁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 경험의 전체성은 우리가 개별화된 개성과 개별적인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실제 당신이 무언가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당신 고유의 육체가 되거나 당신 고유의 경험이 되어야한다. 우리 모두를 거쳐간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서 당신은 그것을 경험할 길이 없다. 다시 말해 사고는 기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존재가 이 지상의 다른 종들보다 더 존귀하고 위대하게 만들어 졌다고 믿도록 만들어졌다. 모든 창조물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우리의 생각에 책임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사고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파괴적이다. 자연의 법칙 혹은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우리가 발견한 그 무엇이든 파괴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아주 일부에 불과한 자연의 법칙을 발견했고, 그 이론들은 항구적으로 변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Q : 우리는 적어도 이 사고의 과정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A : 사고는 우리의 문화나 사회 혹은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그런 종류의 것에 의해서 우리 이전에 확정된 목표에 이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가 이것이다. 문화적 입력 혹은 어떤 사회가 우리 이전에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하는 목표라고 설정한 것, 이런 것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적이다. 사고는 오직 문제를 만들뿐이다. 사고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Q : 사고없음(無思考)이 요구된다는 것입니까? A :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고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사고 없음의 상태라고 불려지는 발명품조차도 우리 이전에 많은 영적인 스승들에 의해 도달해야할 목표로 설정되었고, 사고의 계속성을 유지하면서 사고가 없는 상태라고 부르는 수행을 하며,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 없음의 상태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이 수행에서 어떤 경험을 했든, 이것은 우리가 자유를 얻고자 하는 바로 그 대상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Q : "인과응보"라는 원인과 결과의 이론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것이 사고이거나 혹은 다른 행위이거나, 거기엔 반작용이 있고, 즉각적이지 않더라고 적어도 언젠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A : 그건 원인과 결과라는 생각이 발명한 사고다. 거기엔 원인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사건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이 모든 사건들을 연관지우고 우리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사건들은 독립적이다. 우리가 모든 사건들이 우리 삶에서 독립적인 사건임을 인정한다면 개인의 독자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유지하는 데 굉장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개인의 독자성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기억을 사용함으로써 개인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건 또 사고이기도하다. 이 기억의 혹은 독자성의 혹은 당신이 원하는 다른 무엇의 항구적인 사용은 에너지의 상당량을 소모하며, 삶의 문제에 직면할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시켜 버린다. 독자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방법이 있는가? 내가 말한 대로 사고는 오직 문제만을 야기한다. 사고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원론적인 생각을 통해 사고 그 자체를, 오직 그 도구를 날카롭게 할뿐이다. 모든 철학은 오직 이 도구를 날카롭게 하는 것일 뿐이다. 사고는 우리가 이 세계를 살게 하는 바로 그 핵심이다. 그러나 사고는 우리가 우리 이전에 놓여있는 목표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 목표는 사고의 도움을 통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언급한 행복에 대한 추구는 불가능하다. 영원한 행복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의 순간, 불행의 순간이 있을 뿐. 영원히 행복한 상태에 있고자 하는 요구는 육체에 대해선 적이다. 육체는 자기 감각 기관의 감수성과 신경계의 감수성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육체가 살아남는 관건이다. 우리가 영원한 행복이라는 불가능한 목표에 이르고자 노력하기 위해 사고라는 도구를 사용한다면 육체의 감수성은 파괴된다. 그래서 육체는 우리의 관심사인 -- 영원한 행복 영원한 기쁨 같은 것은 모두 제거해 버린다. 영원한 행복의 상태에 이르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Q : 당신은 지성과 지성을 날카롭게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A : 이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서. Q : 그렇죠. 그럼 어떻게 그것을 날카롭게 하지요? 누구의 도움으로? A : 반복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도구를 날카롭게 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사고의 사용을 영적인 목표가 아닌, 우리가 물질적인 가치로만 치부하는 것들에 한정시킨다면, 육체는 건전하고 지적인 방향으로 기능할 것이다. 유물론적인 철학이나 그런 부류의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사고는 영적인 목표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의미 혹은 인생의 목적, 불변성, 영원한 기쁨조차도 의도하지 않는다. Q : 우리는 탄생과 죽음에 관련된 -- 카르마, 행위, 반응 혹은 은행 예금 잔고처럼 우리와 함께남는 무엇, 거기에 부가되는 그 무엇 그리고 그 무엇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이런 것들이 다음 생生 혹은 뭐 그 비슷한 것들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이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이 이론에 어느 정도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반대하십니까? A : 나는 카르마나 환생과 같은 이론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믿음의 가장 근본에 대해 묻고자 한다. 믿는 사람에겐 환생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환생은 없다. 그러면 중력이나 다른 자연의 법칙처럼 어떤 자연의 법칙으로써의 환생같은 것이 있는가? 나의 대답은 'NO'이다. 당신이 환생을 믿고 안 믿고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환생의 문제를 풀기 위해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데 관심이 있고 "환생같은 것이 있는가?"라는 자주 반복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면 당신은 이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당신이 환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금 현재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 무언가가 있는가? 거기 영혼 같은 게 있는가? 거기 '나'라는 것이 있는가? 거기 정신 같은 것이 있는가? 당신이 거기서 무엇을 보든,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은 당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당신 지식의 전체성, 자아에 대한 지식, 환생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행운이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그 중심, '나'라는 것 혹은 자아 혹은 그것 자체를 경험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나에게는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1인칭 단수 대명사일 뿐이며, 거기서 자아 혹은 그 어떤 센터를 볼 수 없다. 환생에 대한 모든 생각은 오직 우리의 믿음의 근저에 세워진 것일 뿐이다. Q : 정신 작용에 있어서 정체된, 지체된 사람들이 점차 더 많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를 선천적으로 부여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A : 우린 항상 왜 기형아로 태어나는 아이가 있는가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져왔다. 환생은 그러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그런 사람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편리를 주었다. 환생은 인간 정신에의해 진화된 아주 흥미로운 이론이다. 그러나 현재 자연에 의해 생성된 기형의 교정을 위한 유전학적 연구나 미생물학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로서 설명이 가능하다. 왜 그 불행의 원인을 우리가 전생에 행한 끔찍한 짓에 두고자 하는가? 그런 종류의 믿음은 우리에게 대단히 편리하다. 우리는 현재 감내해야 할 엄청난 고통, 가공할 만한 무게의 가난, 기아, 그리고 붕괴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전생에 무언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식의 믿음은 아주 편리한 것이다. 이는 줄만한 답이 아니다. 그 믿음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 안에서 그저 피난처를 구하게 만든다. 그 믿음은 영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인간적인 무엇을 행한다는 이름 하에 우리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다. 환생에 대한 믿음은 지금 세계의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법을 요구하는 문제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면을 보게 할뿐이다. Q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항상 한가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구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신도 그 누구의 구루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쉬야(Shishya)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구루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 이 시대 시장에서 조잡한 물건을 팔 듯 혹은 사람들의 속기 쉬운 심성과 고지식함을 악용하는 소위 영적이라는 모든 구루들에 대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구루는 당신에게 우리 생존에 핵심이 되게끔 믿게 만들어진 모든 목발들을 던져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진실한 구루는 당신에게 "그것들을 던져버리세요. 컴퓨터화된 목발이나 환상적인 목발로 대체하지 마세요. 당신은 걸을 수 있습니다. 넘어지면, 당신은 일어날 것이고 다시 걸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들을 우리는, 전통은 진정한 구루라고 간주한다. 이들은 요즘처럼 시장 바닥에서 조잡한 물건을 팔지 않는다. 그건 사업이다. 성스러운 사업이 되었다. 나는 그 무엇도 단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당신의 문제해결을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하면 할수록 당신은 무력한 상태로 남는다. 이 무력함은 당신 문제에 대한 진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악용되고 그들은 당신에게 일종의 위안을 줄뿐이다. 사람들은 이 위안자에게 만족하고 스스로 문제에 직면하기 보다는 이 모든 것들 속으로 떨어져 버린다. Q : 동서양의 정신주의랄지 유심론은 현재 점차적으로 상호 입장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둘의 결과물들을 보셨습니다. 인간의 불행, 가치 상실, 지상의 모든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괴로움들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무엇입니까? 모든 이에게 원하는 무엇, 찾아야할 무엇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A : 이 토론을 시작할 때 우리는 모든 이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인, 미국인, 아프리카인 혹은 인도인 누구라도 거기에 관심을 가진다. 나는 이 목표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목표 달성에 관련된 물질적 문제(육체와의 투쟁) 때문에. 서양은 물질주의적이라 간주하면서, 영적 지도의 역할을 동양에서 찾고 있다. 그건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서양에서 오랜 기간을 살아보면, 당신은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사실 이 세계의 운명을 이끄는데 관심이 있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영적 문제에 대한 이들의 급작스런 관심의 원인과 구원자로서 동양을 택함은 약물같은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종류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들은 경험의 반복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도나 중국 일본등 다양한 종교적 체험의 주변을 맴돈다. 그들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기술 때문에 거기 끌린다. 실상, 일단 당신이 세계에 대해 이성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모든 물질적인 필요가 충족됐을 때, 자연스럽게 이 의문이 일어난다. "이게 전부야?" "이게 전부야"라는 그 의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때, 당신은 성스러운 사업을 하기 위한 거대한 시장을 만들게 된다. 그 시장 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기보다는 사람들의 속기 쉬운 심성과 고지식함을 이용한다.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류의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제기하는 이 모든 의문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답에서 파생된다. 현자, 성인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들이 이미 답해 준 이 질문을 왜 계속 제기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번 묻지도 않은 채.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준 답이 바로 인간 비극의 책임임을 인식하는데 실패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묻지 않는다. 답을 준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 스승에게 묻는 것.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혼란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건 바로 그 인류의 구원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말한다.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답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질문을 해야한다. 그러나 거기 어떤 답이 있을까? 이게 전부다. 거기서 stop. 해답은 인류를 위해 거기에 있다. 사회나 문화 혹은 당신이 부르고 싶은 명칭이 그 무엇이든 이런 것들이 스스로의 계속성과 현상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우리 모두를 유일하고 완전한 존재로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사고는 당신의 적> -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3장 꿈꾸는 로봇 ─────────────────────────────────── 개인의 유일성은 타인의 경험이라는 억압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표현될 수 없다. ___________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당신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 문화는 당신의 본질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야한다고 요구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 그 에너지가 해방된다면 산다는 것은 매우 단순해진다.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___________ 행복이나 기쁘게 느껴지는 다른 어떤 느낌을 지속적으로, 그 느낌 본래의 유효 기한을 넘겨 연장하고자 하는 시도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감수성을 파괴한다. ___________ 마음은 오직 감각에만 관심을 가진다. 실제, 마음은 감각에서 나온다. 자신의 계속성을 감각의 영역에서 유지한다. 그러나 육체는 자극에 반응하는 것 외에 이들 중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다. ___________ 사실상 어떤 문제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그 무엇이 문제다. ___________ 거기서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나'는 1인칭 단수 대명사이다. 나는 이것을 2인칭 단수 대명사와의 구별을 위해 사용한다. ___________ 완벽한 인간은 우리가 만들어낸 가치 시스템에서 탄생한다. 가치 시스템은 선보다는 악을 더 많이 가져온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행위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 존재는 유일하다. ___________ ─────────────────────────────────── Q : 당신은 라마나 마하리쉬와 함께 했을 때의 경험을 상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두뇌 과학은 뇌가 우리 생활의 모든 경험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뇌의 근간 어느 곳엔가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A : 내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시키려하는 것은 경험의 전체성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기억은 틀 안에 있다. 모든 것은 틀 안에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기능한다고 할 때 내 말뜻을 설명하자면 근본적인 한가지에 초점을 맞춰야한다. 어떻게 그 감각이 운용되는가하는 것이다. 하나의 플로피 디스크에서 다른 한 쪽으로 이미지를 전송할 때 기록되는 정보와 동일한 방식으로 자극을 기록할 때를 제외하고는 반응은 해석되지 않는다. 모든 반응의 연결은 없다. 각각 독립적인 틀이다. 수많은 상상은 실제적으로 거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려하는 우리의 시도와 관계된다. 내가 인도의 힐 리조트에 있을 때의 어떤 친구 예를 들어보자. 그 친구는 특정의 산 정상에 도달했을 때, 전 방위의 전망을 360도 각도에서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친구는 나를 정상까지 끌고 갔다. 마지못해, 망설이면서 나는 그 언덕 정상으로 나를 끌려 갔고 그가 전 방위의 360도 전망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하고자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상상의 물건으로 스스로를 농락하는군. 어떻게 이 자리에서 360도 전망의 경험이 가능한가? 나는 오직 180도를 볼 수 있다. 저 친구가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순수한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자신을 가리키며) 독자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감각 기관의 해석은 이미지 속에 문화적으로 입력된다. 나의 눈이 당신을 바라보지 않을 때, 이 기관(자신을 가리키며)은 당신이 어떠한지 그 이미지를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 문제는 우리의 상상력에서 나온 그리고 대개는 문화에 의해 거기 주입된 이미지의 창조에 있다. Q : 듣고 있습니다... A : 내가 말하는 건 두뇌 활동이 이 감각기관을 기억의 틀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기억은 영구적인 요소가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물체에 초점이 맞춰지고, 당신의 시신경이 활성화되면 망막에 이미지가 맺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 연구에서 체득되고 학교에서 생리학자들이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실상 당신이 그 실제의 경험을 원한다면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 그것은 당신이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 예는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한 수 많은 우리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들어봤다. 시신경이 활성화되면 이번엔 그 안에서 뉴우런이 활성화된다. 그 다음 틀은 선행한 틀과는 아주 다르다. 영화 카메라의 예를 들어보자. 영화의 카메라는 프레임 안에 생긴 일은 무엇이든 포착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내 손이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운동을 잡았다면 십여개의 다른 프레임이 이 손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스크린에서 운동을 보기위해 당신은 프로젝터라고 부르는 인위적인 장치를 사용해야한다. 그래야만 당신은 프로젝터의 도움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손의 운동을 본다. 소리는 영화 산업에서 두뇌활동이 하는 작업과 흡사한 것이다.소리는 해당 영상 프레임 뒤에 19와 ½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당신이 바라보는 영상과 소리 사이에는 19와 ½ 프레임이라는 갭이 있다. 정확히 마찬가지 방식이지만 사고는 매우 느리다. 틀 안에서 "거기 무언가 있다"는 것을 포착하면, 당신 눈은 어딘 가로 움직이며 다른 일들은 완전히 지워진다. Q : 저는 TV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거기 있는 영상들은 현실적으로 거기 없습니다. 그건 점의 집합에 불과합니다. 뇌에 영상을 집어넣는 것이 필요하지요. A : 뇌는 정확히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모든 것은 점이나 틀 속에 포착된 그림으로 기록된다. 누군가가 그것들을 보고 있다는 환상이 있다. 현실적으로 뭔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거기 없다.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내가 말하면 아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당신은 내가 말을 하도록 만드는 인자이다. 말하고 있는 사람은 여기 (자신을 가리키며) 아무도 없다. 거긴 아무도 없다. 아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이 존재방식이다. 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계적인 기능을 수용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 우리에게 그건 너무나 기계적이다. Q : 그러니까 당신은 독자성이나, 자기 동일시, 자아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까? A : 전혀. 거긴엔 센터가 없으니까. 거긴 영혼도 '나'도 없다. 거기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나'는 오직 1인칭 단수 대명사일뿐이다. 나는 이것을 2인칭 단수 대명사와의 구별을 위해 사용한다. 그게 전부다. 거긴 당신이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라든지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또한 나는 당신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당신이 자유로운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거긴 내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거나 깨닫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일들은 나 자신의 이미지와 내가 당신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의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이미지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와 관계된 것이다. Q : 당신은 세계를 여행했고,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왜 당신 주위에 모이고 왜 당신을 보러옵니까? A : 그들은 아직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방갈로르에서 이루어진 어떤 대화와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그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이다. 내게는 헌신하는 어떤 사람도, 제자도 추종자도 없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나의 추종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것들을 반복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말을 기억하고 반복한다. 그들이 진정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 그들을 조롱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무언가를 반복하는 순간, 그들은 누군가의 추종자가 된다. 어떤 기회에,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일은 일어났음을 대단히 강하게 주장했었다. 라마나 마하리쉬를 방문한 일에도 불구하고, 지두 크리쉬나무르티와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지두와 나의 사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깨달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누군가가 기대한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청중들 중의 한 친구가 "우리는 당신의 '...불구하고'라는 말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말이 부적절하다고 했다.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가 말했다. "우리 가 당신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즉,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든 당신이 행한 일들과는 상관없이 일어났고, 당신이 한 모든 일은 관계가 없다는 거고, 그러면 우린 당신에게 걸었던 유일한 희망을 잃게됩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신념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아직 느낍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믿음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바로 당신이 아직도 거기 서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하나의 환상을 다른 환상으로, 이 스승을 저 스승으로 바꾸는 것 말이다. 당신은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체하는 것 외에는 기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Q : 지두 크리쉬나무르티는 거기엔 권력도, 스승도 없고 길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이들은 그가 가야만 하는 곳이 어디이든 그가 택한 인생의 행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줄 인생의 행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A : 하지만 나는 내 삶에서 일정의 역할을 한 그 무엇도 제시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이 보는 것을 왜곡하는, 부정확한 것일 수 있다. Q : 왜 당신은 우리들 각자가 개별적이고 유일한 인생 행로를 가졌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어야 합니까? A : 모든 개인의 독자성은 스스로 표현될 수 없다. 타인의 경험이라는 억압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과 나는 이들 경험의 전체성에 의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 경험을 세계가 건전하고 지적으로 기능하도록 사용해야한다. Q : 그럼 당신은 지금 나를 만들고 있습니까? A : 당신은 나를 만들고 있다. Q : 당신은 지금 나를 만든다고요? A :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여기 나 자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당신이 여기(자신을 가리키며) 보는 것이 무엇이든 그건 당신의 고유한 창작품이고, 당신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투사이다. 난 당신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했는지 어떤지 모른다. 나는 당신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다. 여기 관련된 것은 오직 망막 위에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의 영상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진행되는 운동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해석은 없다. Q : 당신의 말씀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다가오는 매 순간에 있어서의 살아있음이라는 것입니다. A : 그런 말은 매우 오해하기 쉬운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상황 안에 스스로를 놓는다. 하지만 순간에서 순간으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육체다. Q : 알겠습니다. 육체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기능합니다. A :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정신"이 그 방식으로 살 수 없음을 안다. 정신의 생존은 반복되는 경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라는 지식의 계속성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당신은 항상 그 센터를 유지해야만 한다. 당신이 반복적인 과정, 동일하고 오래된 경험을 계속 다시 반복함,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순간에서 순간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상상을 통해 그 센터를 유지하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방법이다. 당신에게 순간을 살고 있다는 일종의 경험과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희망이다. 그러나 실제로 순간을 살수 있는 가능성은 거기 있지 않다. 정신의 관심사는 오직 계속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순간 순간을 살고있다는 관념, 무심無心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잠꼬대 같은 발명을 한다. 정신은 이런 장치들을 통해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안다. Q : 때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만큼 너무나 열중하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는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A :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건 당신의 열광은 일종의 '황홀경'이다. 그것은 당신이 더욱 열중하는 단계에 있고자 하는 경험이며, 당신은 거기 동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Q : 하지만 당신은 거기 사고의 틈이 없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A : 아니다. 사고는 거기 아주 많이 존재한다. 당신이 그것을 굉장한 경험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당신의 바램이 항상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어떤 음악가가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에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있는 작업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적인 주의집중이 요구된다. 그 몰입 자체에 대한 생각이 있을 때보다는 오직 몰입하고 있을 때,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가 훨씬 쉽다. Q : 나는 현실적으로 경험이 일어난 이후에나 경험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다음 그에 대해 숙고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매를 봅니다. 나는 매를 본 다음 그것을 생각합니다. "아, 나는 매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매를 보는 그 순간에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A : 그건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믿도록 만들어졌고 당신은 거의 그 상태를 인정하고, 당신이 어떤 것을 경험하는 동안 당신은 그에 대해 깨어있지 않다. 당신이 환기하는 그 실상, 당신이 그것을 매라고 부르던 뭐든 그 실제는 당신이 바로 거기 거기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사고없음(無思考)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많이 안다. '나'가 거기 없는 순간 말이다. 그러나 한번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한번으로 영원히 끝난 것이다. 당신은 그런 순간들과 연계될 방법도, 거기에 계속성을 만들어낼 방법도 없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는 그 상태에 당신은 경험에 대해 깨어있지 않으며, 당신은 깨어있게 되거나 아니면 경험이 지나가고 난 후에만 의식하게 된다. 그런 것이라면 모든 경험적인 구조는 한번에 그리고 모두 산산이 부서져야한다. 그것은 이 땅을 강타하는 지진과 같은 무엇일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무언가 변화가 일단 일어나고, 그후 유기체의 기능은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길을 갈 것이다. 유기체는 새로운 종류의 균형을 찾을 것이다. Q : 왜 우리는 바로 지금 살아있는 인간 존재로 여기 있습니까? A : 왜 우리는 "왜 우리가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하는가. 당신이 여기 있다고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여기, 내가 여기 있다고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지식이다. Q : 나는 여기 존재함에 대해 일종의 깨어있음을, 여기 존재함의 느낌이 있습니다. A : 느낌 또한 사고다. 우리는 느낌을 사고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끼고 싶어하지만 우리가 가진 지식의 틀 안에서 해석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느낌을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당신 자신에게 말하는 경우를 보자. 당신은 거기 행복이라는 느낌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행복이라고 부르는 상태, 그리고 다른 상태, 불행의 상태에 대해 당신이 가진 지식의 틀 안에서 지각을 포착한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자아라고 만들어진 거기 실재로서 당신 자신을 경험하도록 돕고 있는 그것도 바로 지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깨어있음'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찾아 쓰려 하지 않는다. 그건 오용된 것이다. 그건 닳아빠진 동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잘못된 뭔가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행위를 검증 받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이다. 때로 당신은 "나는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깨어있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깨어있음은 이 인간 유기체의 활동의 완전한 일부이다. 그 활동은 특별히 인간이라는 유기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生 -- 돼지나 개등 -- 의 형태에 존재한다. 고양이는 그저 당신을 바라볼 뿐이며 선택 없이 깨어있는 상태이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당신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깨어있음을 사용하는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깨어있음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활동 전체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음'은 쓰기 적합한 종류의 단어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저기 있는 나머지 것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당신이 앉아있는 의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당신을 의자와 분리하는 것은 당신이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다 -- "이것은 의자다" "당신은 의자에 앉아있다". 하지만 실상 당신과 의자라는 감촉 사이의 관계에 관련된 것은 감각이다. 반면 촉감은 '당신은 당신이 앉아있는 이 의자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의자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너무 부조리하다. 실제적으로 당신이 육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중력에 대한 견인력, 육체의 무게다. 중력의 견인력 때문에 당신은 육체의 실존을 느낀다. 나는 도입부 어딘 가에서 당신이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모든 것은 당신에게 영향을 준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의 본 뜻은 그것이 하나의 총체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당신이 경험할 수는 없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둘로 분리되는 순간 이것은 저것에 대한 반응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작용에 대해 당신이 가진 지식을 가져오는 것이고 당신 자신에게 이것은 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Q : 양자 물리학자들은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그 일부라고 말합니다. A : 그들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그걸 알아냈다. 인도에서는 형이상학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이들은 그 사실을 알았고, 거기 공간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공간은 이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당신들에게는 너무도 핵심적인 것이다. 공간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다. 한 과학자가 나를 찾아와 공간 같은 건 없다, 시간같은 것도 물질같은 것도 없다는 말에 대해 물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기억된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거기 공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방정식을 내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공간이 없다는 것이 당신 삶에서 하나의 실재라고 가정하면 (나는 항상 노골적인 예를 준다) 당신과 당신 아내의 관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문장들을 -- 거긴 관찰자가 없다거나 그 관찰자는 피관찰자이다 -- 나에게 던지면 나는 어려운 시간을 주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신학자, 형이상학자,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것에 대한 토론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매일의 실존과 우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단계에 침투하면 매우 어려워진다. 당신이 '관찰자는 피관찰자이다'라고 말하고, 아내와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자리에서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Q : 관찰자가 정말 피관찰자인 상황이 있습니까? A : 그것은 모든 관계의 종말이다. 끝난 것이다. 관찰자는 피관찰자라고 말하는 것은 지겹도록 반복되는 무의미한 말이다. 그들은 실제 그 경우에 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른다. 그때 모든 관계는 끝장나 버린다. Q : 우리는 그저 자동적으... A : 기억된 단어와 문장의 자동 반복. 이것은 우리가 기능하고 있는 방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Q : 당신은 그저 자동 인형입니까? A : 아, 나는 자동인형이다. 내가 나의 고유의 것이라고 부를 사고는 여기 하나도 없다. 이 컴퓨터(머리를 가리키며)는 특수한 주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고요하다. 당신이 이 컴퓨터(머리를 가리키며)를 작동시키고 있다. 이 컴퓨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는 것은 당신의 관심사다. 내게서 무엇이 나오든 그건 당신 것이다. 출력된 것을 당신이 무엇이라 부르든 당신은 거기서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Q : 그럼 나는 몽상가이고 당신은 꿈이군요. A : 당신은 나를 만들었다. 당신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 질문하고 있다. Q : 나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A : 그렇지 않고 어떻게 거기 질문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들이 답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Q :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A : ...그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답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들은 답을 준 사람을 한편으로 밀어버릴 결단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감정이 거기 영상 안으로 들어오고 당신은 답을 던져버릴 결단력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답을 준 그 누군가는 창밖으로 나간다. Q : 그 말에서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당신은 독립적인 개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A : 개인으로, 당신 자신으로 존재함.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 문화는 당신과는 다른 무엇이 되어야한다고 요구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의지, 노력- 낭비하고 있는지! 그 에너지가 해방된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우리 모두 세상 살기가 얼마나 단순해 질 것인지! 그건 그토록 단순한 것이다. <사고는 당신의 적> -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4장 번개의 충격 ───────────────────────────────────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것은 내가 한 모든 행위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 그것은 번개와 같은 충격 혹은 지진 같았다. 모든 사람이 이전에 생각했고, 느꼈고, 경험한 것 모두는 나의 시스템에서 씻겨 내려갔다. 이것은 그 어떤 노력이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게 가능하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원인을 초월한'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며 나는 내게 남아 있는 무엇을 알 방법이 없다. _________ 기억은 육체의 어떤 특정 영역에 위치하지 않음을 단언한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관계돼 있다. _________ 우리는 기억을 주입했고 뇌는 의도하지도 않은 것을 위해 기억을 사용한다. 이것이 알츠하이머 병이 증가일로에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_________ 우리는 그 어떤 위대한 목적으로 창조되었다해도 당신의 피를 빨고있는 모기와 다르지 않다. _________ 사람들이 말하는 초자아 혹은 더 높은 의식이라고 당신들이 일컫는 그 우주적 힘에 대하여 주장하는 이들의 그 어떤 표현을 당신이 수용했든 간에, 거기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하자. 모든 개, 고양이, 돼지, 소, 정원의 달팽이, 당신, 나, 모든 사람 그리고 징기스칸과 히틀러조차도 그와 동일한 것의 표현이다. 자연 혹은 우주적 힘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면, 왜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_________ ─────────────────────────────────── Q : 당신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대화를 듣고 있을 때인 당신의 49번째 생일. 1967년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에게 어떤 경험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걸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A : 나는 그 점에 대해 자세히 들어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최근 강조해 왔던 것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건 내가 한 모든 행위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건 안했건,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이 상태(자연 상태)로 이끌었다고 믿는 사건이 무엇이든 간에 그건 전적으로 관계가 없다. 핵심을 규정하고 나 자신에게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고,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것의 원인을 찾으려하는 건 지금 내겐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인과관계의 범주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은 '원인을 초월한' 것이라고 항상 강조하고,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Q : 그 '원인을 초월함'이란 그 일이 어떤 준비도 없이 일어났다는 뜻입니까? A : 그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마치 내가 선호하는 문장을 사용하자. "번개가 당신을 때리고, 번개의 충격이 당신을 때림"같고 당신에게 남겨진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당신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자 힘으로 찾아낼 방법이 없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나 한 걸까? 그러나 한가지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생애 전부를 통해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이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세웠던 목표는 --나 자신에 대한 앎, 신에 대한 앎, 변형, 근원적인 것 혹은 여타의 것, 깨달음조차도-- 모두 오류였고 알아야할 찾아야할 그 무엇도 거긴 없다.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와 지고자하는 바로 그 요구, 육체의 물질적인 필요조차도, 그저 사라졌고 나는 무無와 함께 남겨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던진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나는 실제로 의사소통할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엔 그 어떤 단계에서의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는 지성이다. 우리는 이 도구가 우리의 이해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음을 안다. 한번 그것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지성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거기엔 무엇을 이해하기위한 다른 어떤 도구도 없으며 당신은 이 난감한 상황에 남겨지고 이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기에 따라서 이렇게 단상에 앉아있거나, 이런 초대를 수락하고, 그 누구도 본적 없는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뭔가 말할 것이 있는 듯 시도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극히 뻔뻔한 짓이다. 하지만 내게 남겨진 특별한 그 무엇 -- 어떤 노력이나 의지를 통해 가능한 그런 의미의 특별함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사람이 전에 생각했고, 느꼈고, 경험했던 것은 나의 시스템에서 씻겨내려 갔다는 의미에서의 특별함이다. 당신은 내게 일어난 무엇이 실로 용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통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이런 종류의 상황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들은 오직 내게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원인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여기로 이끈 무엇을 찾는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이것은 원인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면 수용하고 이해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그들의 관심은 원인을 찾고 그들에게도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데에 있다. Q : 나는 때로 누군가의 깨달음에 대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관련해서, 1967년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A :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 갑자기 밝혀졌다. "왜 내가 쓸데없이 이 사람 얘길 듣고 있는거지? 그의 설명에서 내가 느끼는 건 내가 그와 똑같은 상태라는 것인데." 나는 스스로에게 내가 그 사람과 동일한 상태라고 말했다. 지두는 그가 설명하고 있는,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 임했던 것과 동일한 그 상태에 있으리라는 가정 하에서. "내가 평생 해온 게 대체 뭔가? 왜 여기 앉아서 저 사람의 얘길 듣고 있지?" 그리곤 나는 내 안에 빙글빙글 돌고있는 단 하나의 생각과 함께 걸어나왔다. 그건 소용돌이같은 거였다. "당신이 동일한 상태에 있음을 어떻게 아셨습니까?"라는 질문. 나는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다양한 상태의 묘사에 익숙하다. 나는 내 안에 그런 자극을 주려 노력했었고, 경험했고 그게 전부다. 그래서 이 의문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 의문 또한 사라졌다. 나는 자신에게 누구에게도 나의 감사를 표현하거나 고마움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내게 일어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 스승 혹은 저 스승에게 듣는 것 혹은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는 행위와는 상관없이 일어났다. 내가 이 모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무엇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알고자하며 나는 나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를 볼 수 없고 나 자신에게 내가 깨달은 사람이라거나 자유로운 사람이라거나 내 안에 굉장한 변화가 자리했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아주 자주 듣고 상업화된 이 문장을 사용한다. 그것은 "세탁 전과 세탁 후"의 무엇이 아니다. 내가 어딘가에 도달하도록 나를 도왔던 세탁 방식은 없다. 그것은 그저 사건이다. 나는 아직도 '사건'이라는 단어를 쓴다. 다른 누구에게 느낌을 주거나 그것에 대해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Q : 그것은 아무런 기억이나 사고 없이 세상에 막 나온 아이 같은 겁니까? 최초로 세상을 보려하고 모든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저 이해하고, 단지 그것을 경험하는 겁니까? 이런 게 당신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건가요? A : 아니다. 막 태어난 아기의 경험과 같은 종류라고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우린 그런 과정들 모두를 다시 거쳐 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모의 실험을 하고 경험해 보려하는 것이 그 무엇이든 간에, 그런 노력은 오직 우리가 현재 서있는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 현재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모든 종류의 경험의 산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 무엇, 우리가 그것을 재탄생이라고 부르든 혹은 우리를 신생아나 아이라고 가정하고 경험해 보려는 시도이든 이는 당연히 현재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의해 채색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아무 관계가 없고, 내가 말하려 노력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부활에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종류의 환상에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일본은 당신 뇌의 근간이 되는 특정 신경을 조작하여 당신 자신의 탄생을 경험하게 할 수 있는 어떤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경험 구조는 우리 탄생의 시간에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해왔다. 나는 항상 심리학자들, 특히 프로이드에게 물었다. 그가 탄생이 외상을 남기는 경험이라 주장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탄생은 외상을 남기는 경험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경험구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기들에게 있어서 경험구조가 작동할 때를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환경의 영향이 우리를 매우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나다. (나는 그런 것에 권위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경험구조는 그 자체의 기원과 자체의 표현에 있어서 유전학적인 것이다. 모든 것은 유전학적으로 통제된다. 만일 우리가 정말 개인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문화적 입력코드를 바꾸는 것을 통해서는 아니다. 우리가 정말 우리 안에 기능하는 유전자라는 부분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서 일것이다. 아마도 어떤 종류의 유전공학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인간 존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Q : 그럼 당신은 유전 공학을 지지하십니까? A : 아니다. 우리가 허용하고 있는 것들이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에대해 나도 마찬가지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일단 이 공학적 테크닉이 완성되면 이는 국가가 가지게 된다. 그후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기란 훨씬 더 쉬워지고 우리를 가련한 로봇으로 만들 것이다. (로봇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우리는 사실 로봇이니까) 국가는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행위하게 만들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위를 조작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엄청난 세뇌가 -사람들이 신을 믿도록 만드는데, 사람들이 특정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믿도록 만드는데- 필요하다. 반대로 어떤 종류의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도 우리는 모두 다시 세뇌해야한다. 그것은 매우 정교하고 긴 과정이다. 하지만 개인을 변화 시키기위해 유전 공학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가능한 길들보다 훨씬 빠르고 쉽다. Q : 우린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해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 분은 이 과정에 대해 어떤 기억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당신은 기억을 가지고 있나요? A : 지두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고싶지 않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생각도 없다. 나는 그가 그런 말을 무슨 뜻으로 했는지 모른다. 당신의 기억은 그 사건이후 매우 대단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직면해야하는 문제는 다르다. 우리는 기억을 많이 사용해 왔다. 나는 항상 (당신이 여기대해 의문을 가졌었을지도 모르고, 뇌심리학 분야의 전문가가 그걸 제기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대의 누군가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수용할 것이다) 뇌는 육체의 기능에 있어서 아주 미약한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고 말해왔다. 뇌는 모든 것의 창조자가 아니다. 뇌는 단지 반응기에 불과하다. 이 기억이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다. 기억의 문제를 연구하는 현대의 전문가들 중 누군가는 뉴우런이 무엇인지 같은 문제에대한 답을 내올 것이다. 나는 기억은 육체의 어떤 특정 부위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연관돼 있다. 나의 느낌은 우리가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문제에 맞설 인류 역사의 시점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뇌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닌 것에 사용할 목적으로 기억을 주입했다. 이것이 우리가 알츠하이머 병을 앓거나 당신이 뭐라 부르던 그런 병들이 증가 일로에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80년을 산 사람들, 둘 중의 하나는 이 병에 걸린다고 들었다. 최근 영국에서 그와 동일한 병에 관한 리포트를 냈다. 육십만 인구가 그 문제를 가지고 있다. Q : 뇌의 오용에 대해 말씀하시는군요 A : 기억의 오용. 기억을 본질과는 관련 없는 특정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기억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사회, 문화 혹은 다른 무엇들의 세계에 살아남기위해 기억을 사용해야 한다. 그 외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이것이 동일한 생존 메커니즘의 확장임을 알고 있다. 거기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Q : 손가락이 불타면 당신은 그것을 즉시 움츠립니다. A : 자동적이다. 거기에 기억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 인간의 육체가 기능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든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의 문화, 사회 그 모든 것에서 기억의 항구적인 사용은 핵심적인 것이다. 모든 교육은 기억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에 바탕을 두고 세워졌다. 내가 옆길로 비켜나가고 있는 것 같다. Q : 그렇습니다. A : 나는 항상 뛰고, 점프하고 도약한다. 내가 이해시키고자하는 이 점을 좀 더 얘기해 보자. 유감스럽게도 인류애는 그것 자체 이전에 완전한 사람을 모델로 준비되었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관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가치 시스템에서 탄생했다. 그 가치 시스템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행동 패턴에서 나온다. Q : 예수가 한 예가 될 수도... A : 예수, 부처 그리고 모든 위대한 스승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육체는 유일하다. 자연은 완벽한 존재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연의 관심사는 완벽한 종種을 만드는데 있다. Q : 만일 우리들 하나하나 모두가 유일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각성이라는 코드에도 적용되고, 그런 것이 있다면 또한 개인적이고 유일하게 그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A : 맞다. 그것이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이다. 각성한 사람을 조립 라인에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역사를 본다면, 스스로 영적인 땅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인도같은 나라조차도 오직 매우 적은 수의 각성된 사람을 배출했을 뿐이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장바닥에서 우리는 자기가 각성했다고, 이제 자신이 모든 이들을 각성시킬 차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이런 부류를 위한 시장이 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으므로. 하지만 실제적으로 깨달은 사람 혹은 자유인은, 만일 그런 이가 있다면, 다른 누구도 자유롭게 하거나 깨닫게 하는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유인이라는 것을, 그가 깨달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경험의 영역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같은 것은 없다. 당신이 새로운 장소에 간다고 가정하자. 당신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당신이 과거의 틀 속에서 보고 있는 그 무엇을 고정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새롭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오래된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거기에 진정으로 새로운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틀 속에 있지 않다. 과거의 전체성이 거대한 바람으로 그것을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Q : 당신은 결론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그 무엇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A : 그렇다. 당신은 내게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런 말들을 부조리와 넌센스쪽으로 밀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같은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 새롭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오래된 것이다. 이런 장치를 통해 사고는 오래된 것의 새로운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고, 사고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한다. 당신이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이런 말들은 아주 교조적인 단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신이 이전에 경험되지 않았던 무언가를 경험하려 시도할 때, 경험 구조의 모든 운동은 종말로 간다. Q : 당신의 지난 삶에 관한 몇몇 기사와 관련해서, 당신이 라마나 마하리쉬를 만나러 갔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내게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마하리쉬는 "그걸 줄 수는 있지만 당신이 받을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A : 유감이지만 그것은 모든 영적인 스승들이 준 전통적인 대답이다. 소위 나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기록된 것은 내가 현재 지금 느낀 것들을 멋대로 고쳐낸 변형이다. 어쨌든 내가 오늘 말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나는 내가 그 특정 순간에 느꼈던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과거의 그 경험을 현재적으로 다시 살려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그걸 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나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걸어나왔다. 그것, 한편으로 그것은 나의 생에 또 다른 국면을 결정한 것이다. 깨달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오래된 전통적인 접근은 나의 시스템에서 던져져 버렸다. 내가 종교와 관련된 책을 읽고, 철학, 심리학, 과학에 대한 학습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나는 서양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나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했다. 나의 근본적인 질문은 한가지였다.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하고, 이해하려 애쓰고, 학습하고 변화시키고자하는 이 정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왜 우리는 정신 구조의 전면적인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나는 거기서 정신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고, 정신의 변형 혹은 돌연변이는 홀로 내버려둔다." 이 문제는 항상 나를 괴롭혔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정신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인간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이런 질문에 답을 찾기위해 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오늘 가지고 있는 이 확신이 없었다.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확신은 그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지만 어렵사리 전하려 시도하고 있는 정신이라는 그 무엇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것이 위험 그 자체이고 당신은 그 가능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Q : 불교에서도 사고없음(無念)에대해 이야기합니다. A : 불교에서는 철학적 사고의 거대한 구조를 만들었다. 그들은 비어있음에대해 말한다. 그들은 공空을 이야기한다. 모든 불교 철학은 바로 '마음이 없음'이라는 기본 위에 세워졌다.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스스로의 느낌이라는 굉장한 테크닉을 만들었다. 명상의 모든 선禪적 기술들은 당신을 마음으로부터 해방시키려한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이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려 사용하는 바로 그 도구다. 마음은 당신이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해방하려 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번 기묘한 기회나 기적에의해, 그것이 당신에게 밝혀지면 당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위해 사용하는 그 도구는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엔 다른 도구가 없다. 그것은 당신을 번개의 충격처럼 때릴 것이다. <사고는 당신의 적> -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5장 사랑은 최후의 카드일 뿐 ─────────────────────────────────── 모든 것에 실패했을 때, 당신은 최후의 카드를 사용한다. 카드 한벌 중의 최고패,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__________ 결혼 제도는 관계에 대한 우리의 요구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오래 계속될 것이다. __________ 여권운동은 여성이 성적 욕구에 있어서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한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__________ "내가 그 관계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하는 단계가 아닌 그 어떤 관계를 당신의 측근과 사랑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당신 주위의 누군가와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존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은 분리와 소외로부터 길어 올린 것이다. __________ 다른 종種의 경우처럼, 성행위가 그저 그 자체로 남아있다면, 성행위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필요일 뿐이다. 스스로의 생존과 재생산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목적이다. 성性에 부가된 그 무엇도 살아있는 유기체와는 전적으로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그 자체로는 생물학적인 행위를 즐거움을 주는 운동으로 바꿔놓았다. __________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사고에서 파생되었다. 하지만 종교는 인류의 미래에대해 어떤 대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__________ 모든 체험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일 지라도, 관능성의 범주 안에 있다. __________ ─────────────────────────────────── Q : 사람이 어느 곳에서든 동일하다면, 사람들 사이의 그렇게 심한 차이는 왜 존재합니까? 나는 미국과 유럽에서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와 미개발국가들의 사람들이 직면하는 문제사이에 모순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약물, 섹스, 범죄가 문제이고 가난, 교육의 부재 그리고 영양 결핍으로 인한 죽음 등은 미개발국에서 문제가 됩니다. A : 그 차이는 서방 국가들에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산업혁명으로 이룬 기술적인 노하우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기술적인 노하우와 함께 혁명이 미국으로 갔고, 그들은 신의 풍요라는 그 땅의 자원을 개발했다. 당신은 여권없이 누구나 미국으로 갈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1911년 그들은 미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여권을 가질 필요를 만들었다. 1923년에는 이민법을 제정했다. 한번 당신이 특정 장소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권리를 세우면 그건 끝이다. (이건 하나의 예지만 모든 나라에 해당된다) 지상의 어느 땅이든 누군가가 상륙하고, 식민지화하면, 그곳에 자신의 권리를 세우고 모든 다른 나라가 그 땅에 도달하는 것을 막게 된다. 미국인들은 이 같은 권리를 세웠다. 국가가 발전하도록 돕고 그들이 가진 것들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신의 풍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고유의 자원처럼 나머지 세계의 자원도 계속 개발하고 있다. 현재에도 물론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포기하려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연성은 정확히 인도나 러시아나 미국이나 아프리카나 동일한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정확히 동일하다. 모든 문제는 인간의 사고에의해 다양한 구조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거긴 인간 육체의 어떤 신경학상의 문제가 있다. (나는 정확한 말을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의 사고는 인간종 내부의 이 신경학적인 결함에서 생겼다. 인간 사고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파괴적이다. 사고는 파괴적이다. 사고는 방어적인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자기 주위의 경계를 세우고 스스로 보호하기를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 또한 이 지상에 선을 그리고 그 선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확장한다. 당신은 이 경계선이 사라지리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 입장을 견고히 한 사람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래 전 세계 자원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만일 그들이 쫓아내겠다는 협박을 당한다면 그들이 하게 될 일은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모든 파괴적인 무기들은 여기 오직 그 독점권을 지키기위해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만들어낸 이 모든 무기들이 과다하다는 것과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날이 올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적을 파괴할 수 없는 그 지점에 이르렀다. 우리의 공생을 유지시키고 있는 이것은 테러의 일종이고, 오랜 세기에 걸쳐 설교되어온 사랑도 형제애도 아니다. 이 말은 인간 의식층에 침투되어야한다. (나는 '의식' 혹은 '인간의 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의식 같은 것은 거기 없으므로. 나는 이 단어를 오직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 인간 의식층으로의 침투가 이루어질 때까지, 즉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웃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사랑이나 형제애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그 시점에 와 있다고 확신한다. 어느 때 어디에서든 당신은 당신의 적 혹은 당신의 이웃보다 우세할 수 있다. 당신은 아직은 당신이 수 세기동안 쥐고있던 것에 대한 훈련을 계속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당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모든 유토피아는 실패했다. 모든 해악은 인간의 종교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인간의 종교적인 사고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모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는, 당신의 법적 구조조차도, 인간의 종교적인 사고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세기에 걸쳐 축적되었고, 인간의 종교적 사고의 근본이 되는 이런 경험 시리즈를 씻어버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엔 하나의 신념을 또 다른 신념으로, 이 환상을 저 환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Q : 선진국들은 전쟁이 없다면 그들이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느 곳에도 승리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저기 소규모 전투가 있고 어디에서나 엄청난 폭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몇몇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기 때문일까요? A : 그렇다. 사고는 폭력적이다. 사고에서 나온 것은 그 무엇이든 파괴적이다. 당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같은 모든 근사하고 낭만적인 구절들로 그 사실을 은폐할 수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름 하에 최근의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잊지 말라. 하지만 우리는 지금 폭력은 답이 아니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점에 있다. 그래서 테러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교회, 사찰, 그리고 이런 모든 종류의 것들을 날려버리는 테러리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당신의 이웃을 파괴하려는 것은 당신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테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인식은 보통 사람도 공유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인간 유기체가 기능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모든 세포는 자기 고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다. 세포는 자신의 생존이 연결된 다른 세포의 생존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세포간의 협동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는 모든 유기체가 생존할 수 있는 방식이다. 세포는 유토피아에 관심이 없다. 당신의 근사한 종교적인 관념에도 관심없다. 세포는 평화, 천국의 기쁨, 지복, 혹은 그런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생존이다. 그것이 그의 관심의 전부다. 세포의 생존은 연결된 다음 세포에 종속돼 있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생존은 우리 이웃의 생존에 종속돼 있다. Q : 당신이 무엇을 말하든, 나는 인류 생존의 유일한 길은 마음속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A : 아니다. 전혀. 사랑은 분리, 나눔을 의미한다. 당신 안에 나눔이 있는 한, 분리가 있는 한 당신은 당신 주변을 나누게 된다. 모든 것에 실패했을 때, 당신은 최후의 카드를 사용한다. 카드 한벌 중의 최고패,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전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종교조차도 인간을 폭력과 다른 기타의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관념, 새로운 사고, 그리고 새로운 믿음을 찾으려는 시도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당신은 이 지구에 어떤 종류의 인간 존재가 있기를 바라는가? 완벽한 존재를 모델로 한 인간 존재는 완전한 실패작이다. 그 모델은 여기 그 무엇도 관계가 없다. 그 모델에 맞추라고 모든 이에게 강요하는 당신의 가치 시스템이 인간 질병, 인간 비극의 원인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당신은 가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당신의 또 다른 가치 시스템으로 대체하게 될 테니까. 공산주의 국가처럼 종교에 부정적인 사람들조차도 다른 종류의 가치 시스템을 만들었다. 혁명은 그 무엇의 종말도 의미하지 않는다. 혁명은 단지 우리 가치 시스템의 변경일 뿐이다. 또 다른 혁명에의 필요는 계속될 것이다. 방법이 없다.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할 근본적인 질문은, 어떤 종류의 인간 존재를 원하는가이다. 인간 문제에 대한 그 유일한 답은, 만일 답이 있다면, 새로운 관념, 새로운 개념, 혹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육체 안의 화학작용에 있어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유전 공학을 완성하고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면 이 기술을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을 전쟁으로 몰고가기 쉽고 그들은 두 번 생각함도 없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세뇌해서는 안된다. 애국심이나 사랑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세뇌는 세기를(예를 들어) 필요로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세뇌작용에는 세기가 걸렸다. 공산주의자들이 국민에게 신을 믿지 말도록 세뇌하는데 십년이 걸렸다. 그러나 유전 공학으로는 이런 종류의 세뇌과정이 필요치 않다. 단 한번의 주사로 인간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쉬울 것이다. Q : 서방세계에서 논의되는 것은 사람들이 아주 행복하고, 변화된 것에 완전히 만족하는 무엇에 대해서입니다. 법적 규제와 인간 권리에대한 존중, 자유 경제 시장, 표현의 자유 등과 같은. A : 당신은 정말로 미국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굶주린 자에게 표현의 자유, 숭배의 자유 그리고 언론의 자유는 무슨 의미인가? 굶주린 자는 신문을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공산주의 시스템에서는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쉼터를 제공하긴 한다. 이들 나라에서 이젠 그들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 나라엔 지금 예전의 서방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업이 더 많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모델은 아니다. 모든 시스템은 서방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 자원의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법들은 항상 힘이 되어 돌아왔다. 당신은 법률가니까 판사가 내린 결정은 항상 힘이 되어 돌아옴을 알 것이다. 최종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힘이다. 우리 모두는 판사의 결정에 복종하는데 동의한다. 당신이 복종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당신에게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것은 폭력의 사용이다. 그래서 모든 악한들은 무리를 이루고 그들에게 유리한 법적 구조를 만든다. 그들이 타인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의 도움으로, 힘의 도움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어 현재 이라크에 대한 봉쇄령이 내려진 것을 당신은 무슨 권리에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국제법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다. 당신은 법률가니까 알 것이다. 미국이 그라나다같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점령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도 한번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한번도 거기에 봉쇄령을 만들지 않았다. 나는 국제법과 그 법적인 구조에 날인한 적이 없다. 당신에게 유리하면 할수록, 당신은 법에 대해 말한다. 법이 실패했을 때 당신은 힘을 사용한다. 그렇지 않은가? Q : 인간 존재의 특정한 다른 관습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A : 당신은 법률가니까 아마도 현상유지를 위해 거기 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그러므로 당신은 현상유지에 반대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Q : 법적 영역에서 상이한 철학파들이 있습니다. A : 그것은 오직 신학적인 토론일 뿐이다. 당신은 모든 신학자들이 --신은 이것이다, 신은 저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목적론적인 그리고 우주론적인 논의를 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이 참조하고 있는 이 모든 다른 법률 학파는 신학자들의 토론과 다르지 않다. Q : 결혼과 가족 제도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 결혼 제도는 관계에 대한 우리의 요구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날까지 혹은 더 오래 계속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소유의 문제다. 내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인도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 땅의 경제적으로 독립된 여성들 조차도 술고래 남편에게 소유되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남편은 매일 그녀를 때리고 일요일에는 더 심했다. 많은 케이스를 안다. 나는 소유가 가장 중대한 요소라고 일반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관계의 근본은 "이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이다. 그것이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이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한 최후까지 관계를 원하는 것이다. 결혼 제도는 어떻든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두 존재 사이의 관계의 문제뿐 아니라 아이와 재산이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결혼제도는 절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재산과 아이들을 결혼제도에 계속성을 부여하기 위한 핑계로 사용할 것이다. 문제는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 얽혀있다. 이 구식 결혼제도에 대한 대답과 관련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수 많은 커플이 나에게 와서 그들의 문제를 말한다. 미혼이거나, 결혼하지 않은 커플들. 당신이 그들의 스토리를 듣는다면..., 당신은 그 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은 아직도 동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혼하지 않은 커플은 결혼 한 커플보다 더 끔찍하다. 대답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관계를 성립시키고자 하는 한, 이 문제는 남아있을 것이다. 아마도 수정되거나, 조건에 따른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권운동 지도자가 (나는 노골적이고 잔인한 남자다) 나를 찾아 왔다. 그녀는 내게 "여성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나는 당신 편이다. 당신의 권리를 위한 싸움에 있어서는. 그러나 당신이 성적인 필요에 있어서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는 한은 당신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 문제에서 파생된 다른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은 성적 필요를 바이브레이터를 사용함으로써 만족시킬 수 있다 -- 이건 다른 문제다. 그러나 당신이 남성에게서 성적 필요의 충족을 원한다면 당신은 자유롭지 않다." Q : 당신은 가족은 해답이 아니라고, 결혼하지 않는 관계도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어떤 제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A : 인류의 참상에 대해 이런 제도들도 책임이 있다. 이들 제도를 수정하거나 변화시킬 방법은 없다. 인도에서는 현재 초기보다는 이혼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그 옛날에는 내가 아내와 혹은 아내가 나와 이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은 훨씬 쉽다. 변화한 조건은 우리 관념의 변화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에 대한 쉽고 단순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Q : 남성과 여성의 관계 그리고 가족관계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무정부 상태가 되지 않을까요? A : 결혼이라는 참상(웃음)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면 좋다. 그러나 그것은 비참한 상황이다. 당신들은 그 제도 속에 행복하지 않다. 완전한 무정부 상태는 행해지고 있는 상태라기보다는 존재하고 있는 상태다.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는 행위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상태다. 그러면 우리는 무정부 상태를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당신이 말하고 있는 무정부 상태는 우리가 굉장한 노고를 들여세운 제도의 붕괴다. 이들 제도들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믿음으로 세운 제도의 붕괴다. 그래서 우리는 제도 본래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Q : 가족이 없다고 가정할 때, 당신은 구 세대와 어린이들의 미래 전망에 대한 염려가 없으십니까? A : 그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사회다. 정부가 그들이 행해야할 것을 행하지 않았을 때 왜 당신은 세금을 내야 하는가? 약속의 이행은 각 개인의 책임이다. 문제는 당신이 이들 개인을 권력의 자리에 앉혔을 때, 거기 그들의 권력을 타인들과 공유해야할 기회가 적을 때 발생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거대한 파괴의 무기를 제공한다. 이런 전망을 제시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정부의 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나를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파괴되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한다면 나는 말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를 전혀 믿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는 말은 인간을 위협하고 제도를 위협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안녕, 나는 말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데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신은 선거를 통해 그들을 선출했다. 당신은 권력의 자리에 그들을 앉혔고 유감스럽게도 그들에게 최고의 파괴용 무기를 주었다. 그들은 당신과 나를 향해 그 무기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현재 당신의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종종 부탄이 인도를 침공한다면 인도는 자신을 방어할 길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부탄은 어떤 힘있는 국가의 후원이 없다면 인도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꼭두각시인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돈을 방어에 쓴다. 무엇에 대한 방어인가? 나는 개인의 구원에도 인류의 구원에도 관심이 없다. Q : 당신은 국가의 세금 수집에 대해 말했고 국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안전을 주기위한 모든 일을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A : 나는 이 땅 위의 그 누군가가 굶주려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은 무얼 합니까?'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세계 운영이라는 비즈니스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 나라 혹은 이 나라를 지배하는 비즈니스에 그들 스스로를 맞췄다. 현재 인도 인구의 40%가 기아상태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당신은 어떤 변명을 하겠는가? 그건 영적인 문제도 인간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추종자들을 기아 상태에 놓아둔 비인간적인 일이다. 종교는 자선이라는 대단한 것을 발명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당신은 발명을 멈출 수 없다. 당신은 특정 개인이 행한 자비로운 일에대해 누군가에게 노벨상을 준다.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우리를오늘에 이르게 만든 가장 해롭고 천한 일이다. 모든 존재는 먹을 것을 공급받을 권리가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관대하다. 우리는 이 세계의 불공평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 나에게 "당신은 그래서 무얼 하셨습니까?"라고 묻지 말라. 나는 여기 사람들에 대항하여 개혁운동가로 서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규정했다. 당신이 그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지도자가 아니라 그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 국민들에게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 불량배들을 바꾸라. 나는 누군가에게 이 정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말하는 비즈니스 구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이 정부와는 전혀 함께 달리지 않는다. 내가 가진 비즈니스를 그들에게 말하는 것, 그것이 당신이 정부에게 제시할 방법인가? 이것은 정부의 능력, 그 역할을 있게한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정확히 지금까지 해온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Q : 하지만 당신은 국가가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A : 일차적인 것, 국가는 모든 이에게 양식을 공급하고, 옷을 입히고, 잠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Q : 그렇게 많은 재산과 국가적 수입을 가진 스위스같은 나라에서조차도 에이즈나 자살자의 숫자가 막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 그건 다른 문제다. '에이즈'라는 단어로 무슨 얘길 하고 싶은가? 병의 일종으로서의 '에이즈'? Q : 예, 에이즈라는 병이요 A : 그건 우리가 만들어낸 실수다. 실험 중의 하나가 잘못된 것이다. 동성애자들을 탓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그 병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다. 신문에서 그걸 읽었는가? 나는 신문에 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인도에서 니잠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에이즈로 죽었다: 그렇다. 그 사실은 그 사회잡지 안에 있다. 니잠은 결국 그의 아내가 에이즈로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을 나는 모른다. 누군가는 수혈과정에서 그랬다고 한다. 나는 모른다. 나는 그 기사를 읽지 않았다. 나는 내 의견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아주 시시한 사람이다. 그건 상관 없다. 나는 이 세계의 다른 사람들처럼 정보 입력이 잘돼있다. 나는 세상을 이해했다. 고맙다. 우리는 병에서부터 신성神聖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많이 이해했다. <사고思考는 당신의 적>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6장 우리는 재난으로 향하고 있다 ─────────────────────────────────── 지금까지 그토록 오래 전 세계 자원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만일 그들이 쫓아내겠다는 협박을 당한다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구라도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진 모든 파괴적인 무기들은 여기 오직 그 독점권을 지키기위해 있다. ____________ 우리는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는 자신의 적을 파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우리의 공생을 유지시키는 이것은 테러의 일종이며, 오랜 세기에 걸쳐 설교되어온 사랑도 형제애도 아니다. 상호파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인간 의식층에 침투해야한다. 인간 의식층에 이를 때까지,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웃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거기 어떤 도움도 없다고 생각한다. ____________ 모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는, 법적 구조까지도, 인간의 종교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____________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힘이다. 당신에게 유리하면 할수록, 당신은 법에대해 말한다. 법이 실패했을 때 당신은 힘을 사용한다. ____________ 나는 이 땅 위의 그 누군가가 굶주려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내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계를 운영하는 비즈니스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 나라 혹은 이 나라를 지배하는 비즈니스에 그들 자신을 맞췄다. 그들에게 부과된 역할을 행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지도자에게가 아니라 그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힌 국민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____________ 부유한 국가들은 그들이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그들의 소유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할 것을 강요받을 경우 그들이 할 일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이 잃게 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____________ ─────────────────────────────────── Q : 이 삶과 관계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 이해하고 당신 안에 변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요구는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고자 하는 요구의 원인이다. 그것은 하나이고 동일하다. 당신이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당신이 듣고 있는 사고는 당신 스스로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을 둘러싼 세상에도 또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여기(자신을 가리키며) 있는 것과 이 세상에, 나의 외부에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당신은 거기에 선을 그려 경계를 설정할 방법이 없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를 창조한 것은 문화라는 것이다. 문화는 스스로의 현상 유지와 계속성을 유지할 유일한 목적으로 우리를 만들었다. 그런 의미로, 나는 그 어떤 개인도 본 적이 없다. 동시에 그 동일한 문화는 우리에게 거기에 무언가가 있고, 당신은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자유의지 같은 것이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실제적으로 거기 자유의지는 전혀 없다. 인식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매우 파괴적인 무기이며, 우리의 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고가 오직 문제만을 발생시키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다. Q : 사람들은 구루를 찾아가고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종교적인 텍스트를 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한편으로 밀어 버립니다. 왜 그러십니까? A : 내 요지는 거기 아무것도 변화되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시장 바닥에 있는 이들 구루들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에게 얼음 과자같은걸 팔거나 조금의 위안을 제공할 것이다. 당신은 내가 당신 문제에 대한 그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나의 관심은 거기 실제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라는데 있다. 우리는 세기에 걸쳐 우리에게 제시된 해결책들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다. 그것들이 진정한 해결책이었다면 문제는 오래 전에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해결책이 아니라면 다른 해답이 없고, 풀어야할 문제도 없다. Q : 포괄적인 변화가 유럽 전역과 소련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나타난 이 새로운 시나리오에서 인도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요가를 가르치고 다른 많은 매혹적인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러 서방으로 왔던 구루들은 아마도 이 상황의 수혜자가 될 수 있겠지요. A :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실제로 러시아에 아무런 이득도 아니며 세상에 대해서도 아무 이득이 없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그들이 갑자기 아니면 적어도 소련 연방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공산주의 정부 시스템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그 틀 안에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대신, 그들은 다른 어느 곳을 헤매고 있다. 인도가 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방 국가들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공산주의 철학, 이데올로기 혹은 소련 정부 시스템의 완전한 실패는 유감스럽게도 진공상태를 만들었다. 나는 러시아 정교회가 그 상황의 혜택을 입을 것이 걱정된다. 거기서 멈춘다면 더 많은 위험이 있다. 서방 국가에서 사람들의 믿기 쉬운 심성과 고지식함 위에 번창한 이 모든 숭배는 러시아로 똑바로 향할 것이며, 사람들을 착취할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피해야할 것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를 통한 착취 혹은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수출하는 것은 피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왜 미국이 유기적으로 자란 감자칩을 러시아에 수출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못 찾겠다. 아주 분명한 한가지만 이야기하면, 그 이유는 당신들의 민주주의도, 언론의 자유도 혹은 이들 국가들이 주장하는 무수한 다른 것들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에서는 코카콜라 러시아에서는 펩시 콜라이며 또한 맥도널드 햄버거다. 서방 국가들이 그들 나라에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그들은 개입하고 착취하기 위한 시장을 만들었다. 이 말은 나를 찾아오는 과학자나 심리학자들에게도 한다. 사실상 그들 또한 한계에 이르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 - 심리학이나 현대 과학의 영역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틀 안에서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불행히도 그들은 인도에서 베단타쪽으로 눈을 돌리고, 종교적인 대답을 찾기 위해 일본으로 중국으로 간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들은 그 어떤 대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도의 가장 뛰어난 유산이 인도를 도울 수 없다면 어떻게 신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를 도울 것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인도가 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 어떤 공헌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강하게 느끼는 바다. 적어도 당신은 서방이 다른 나라들에게 줄 하이테크와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방 기술력의 도움을 통해 아마도 몇몇 나라를 부유하게 할 무슨 일인가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거대한 천연 자원을 가지고 있다 - 석유, 금, 다이아몬드 그리고 여타의 것들. 하이테크와 기술력은 거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도는 그들 나라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나는 인도가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완전한 혼란이다. 수세기를 거쳐 지녀온 인도의 위대한 유산을 느끼고, 칭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도는 유감스러운 혼란 속에 있다. 나는 인도가 서방에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신이 그건 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나는 나의 의견으로 그 누구를 누르고자 하지 않는다. 의견에 그칠 뿐이다. Q : 세계에 일고있는 급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특히 유럽과 러시아에서, 나는 그 변화가 오래된 종교의 부활임을 발견합니다. A : 당신이 말하는 종교적인 부흥의 기운은 서방 국가들에도 있다. "예수께로 돌아가자" "인도의 유산으로 돌아가자" "이슬람으로의 회귀", 이것으로 돌아가자, 다른 저것으로 돌아가자, 그런 모든 것. 나는 이슬람의 확장을 걱정한다. 이슬람의 확장은 이슬람 세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에서 또한 굉장한 세력이 돼가고 있다. 한번 그들이 성전 "지하드"를 선언하면 주변으로 파급된다. 우리는 그 문제에 어떻게 대항할 지를 알 수 없다. 나는 최후의 심판 날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빠른 시일 내에 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슬람은 세계 속에 가공할 힘이 되고 있다. Q : 나는 미국과 유럽을 방문했었습니다. 많은 축제와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는 중이라는 기대가 정치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갑자기 중동의 위기를 발견합니다. 세계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 모른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운에 맡겨볼 수는 있다. 이런 단어를 사용해도 된다면 그건 다가오는 만물의 형상에 대한 바라보기같은 것이다. 나는 확실히 모른다. 그 누구도 모른다. 그 문제에 대해서, 무슨 일이 생길지. 내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여 말하고 싶은 한가지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뒤집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재난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의 사고와 사고에서 발생한 모든 것들이 우리 인류의 적이며 그것을 대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그런 인식이 실제 생기리라는 희망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종교적인 부흥은 진정한 답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종류의 인간을 이 지상에 원하는가?"라고 느낀다. 유감스럽게도 서양이든 동양이든 문화는 우리 이전에 완벽한 존재의 모델을 세웠다. 그 모델은 인류에게 이익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끼친 인류의 종교적 사상가들의 행위에서 정형화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이런 사상가들의 종교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사고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이 원한다면 약속이행에 실패한 시스템의 틀 안에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종교적인 사고는 오늘날 우리의 문제에 어떤 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마음속에 지녀야할 두 가지는 하이테크와 기술력이다. 이것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유전 공학과 미생물학의 이해는 당신이 원하는 인간 존재의 종류를 연구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우리가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두뇌는 신경학적으로 많은 영역에서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나 매우 파괴적이다. 사고는 방어적인 메커니즘이다. 사고의 관심은 오직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현상유지와 세대에 세대를 거쳐 우리를 지나간 지식의 계속성을 유지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Q : 가난과 교육의 부재같은 미개발국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A : 교육이나 교양같은 것이 인도의 문제에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인가? 신문을 읽고 이를 통해 미디어가 세뇌를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교육된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인도에는 아직도 현대인에게 감염되지 않은 농부들이 있다. 그들은 유일한 무엇이다. 나는 모른다. 최근엔 한번도 그 마을을 방문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진정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그 의미로의 교육받은 사람,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의미의 교양은 사실은 사람을 교육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할머니의 예를 들어보자. 내 할머니는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서명을 하고 어떻게 읽는 지는 알았다. 나는 아드바이타(advaita)에 대해 마드라스 대학의 교수들에게서 보다 더 많은 것을 그 분께 배웠다. 그 분은 교육받은 여성이 아니었고 깨달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아주 실제적인 여성이었다. 그분은 인도의 위대한 문화에대한 모든 것을 아셨다. 교양을 쌓기 위해 대중을 교육하는 것은 진정한 답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되는 미디어라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권력이 정부 손안에 있다면 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또, 당신이 미국의 예를 든다면, 그들의 소위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미디어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 둘은 마찬가지다. 모른다. 나는 많은 의견을 표현하고 있다. Q : 당신이 말하는 것은 현재의 기술적 과학적 변화만이 이 세계에 유일한 답이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A : 그렇다. 하지만 한가지를 말해야만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달성한 것은 모두 지상의 제한적인 수의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하이테크와 기술력의 도움을 통해서였다. 진실을 말한다면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자원으로 120억의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이테크나 기술력의 도움이 아닌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원만으로. 그럼 왜 50억 인구가 가난과 비참함 속에 있는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책임이 있고 가난은 높으신 신의 저주같은 것이 아니다. 부유한 국가들은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자신의 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부유한 9개국, 산업화된 9개국이 여기 앉아서 그들 방식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세계의 천연자원 모두를 포기할까? 강요당하지 않는 한은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이 잃어버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해도 말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평화주의자로서 여기 앉아 있는 이 사람(한 사람을 가리키며)조차도 자신의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을 지키기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나는 그를 전혀 믿지 않는다. 그는 싸울 것이다. 그는 오늘 평화주의자인지 모르지만 내일, 만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다면, 최고의 친구인 나조차 죽일 수 있다해도 놀라울 것은 없다. Q : 당신은 낙관론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A : 그 말은 -낙관론자와 비관론자 사이의 차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단지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적당한 방식일 뿐이다. 낙관론자는 포기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삶의 방식으로서, 고유의 사고 방식으로서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게 전부다. 그는 그 삶의 방식과 사고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힘에라도 호소할 것이다. Q : 나는 최근 몇 년간 당신이 말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A : 나는 여기 자화자찬하며, 스스로에게 혹은 당신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었다"라고 말하기 위해 앉아있는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어쨌든 고맙다. 제 7장 환상의 끝은 죽음 ─────────────────────────────────── 우리가 제기하는 모든 의문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답에서 나왔다. __________ 어느 곳 어느 때인가, 인간을 둘러싼 삶의 전체성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는 자아의식이 인간내부에 발생했다. __________ 육체에서 뇌의 기능은 오직 자신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물질적인 유기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지각 활동과 함께 항구적인 간섭을 통하여 육체의 감수성을 파괴하고 있다. __________ 육체에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유일한 죽음은 환상의 종말, 공포의 종말,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종말이다. __________ 자연에는 돌연변이가 너무도 많다. 당신이 그것을 복제하고자 한다면 길을 잃을 것이다. __________ 사고는 죽은 무엇이며 절대로 살아있는 것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사고가 삶을 건드리려하는 순간, 그것은 삶의 살아있는 특성에 의해 파괴된다. __________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거기 있다.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획득하고 모아들인 모든 것은 육체의 거대한 지성과는 조화될 수 없다. __________ ─────────────────────────────────── Q : 당신 이야기를 듣거나 당신 책을 읽으면 거기엔 자아도, 영혼도 그 무엇도 없다고 말한다는걸 느낍니다. 당신 말씀은 삶 전체가 감각에 의해 경험된 것같은 물질적 형태 속에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A : 우리를 둘러싼 삶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분리가 아닌 것. 그것은 하나의 신호 단위다. 명확한 말을 만들 수는 없지만, 어느 곳에선가, 인간을 둘러싼 삶의 전체성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는 자아의식이 인간 내부에 발생했다. (우리는 거기 진화같은 것이 있는지 어떤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것은 우리의 일방적인 추측이다. 우리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수용한다. 그 사람들은 특정의 것들을 관찰했고 진화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었다.) Q : 그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삶은 오직 육체를 통해서,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육체는 인간 존재의 전체를 담고 있다는 의미이십니까? A : '삶'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아무도 삶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모른다. 그리고 정의를 내려야할 것도 없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도 우리의 일방적인 억측일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거나 경험하려는 무엇은, 삶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도움을 통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고는 죽은 무엇이다. 사고는 절대로 살아있는 무엇을 건드릴 수 없는 무엇이다. 사고가 삶을 건드리려하는 순간, 삶을 포착하고 삶을 담아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사고는 삶의 살아있는 특성에의해 파괴된다. 우리가 삶이라는 단어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는 살아있음이 아니라 살아가는 상태인 것이다. 살아가는 상태는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싼 삶과의, 우리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과의 관계다.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다. 그 관계는 실제로 근본 관계가 아니며, 관계는 삶과 함께 하는 무엇이 되고자하는 우리의 욕구에서 파생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도, 삶과 함께 하는 무엇으로 만들고자하는 그 어떤 시도도 소득 없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삶과의 관계를 형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Q : 우리가 삶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A : 지금 이 순간 내가 우리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는 추정을 하거나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일부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게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를 둘러싼 삶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무엇이며 이 분리 혹은 나눔을, 그 단어를 써도 된다면,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사고다. 사고는 물질이다. 그러나 그 물질은 오랫동안 거기 머물 수가 없다. 그 물질은 다시 에너지의 일부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 우리 일부에서, 사고의 일부에서 계속성을 유지하기위한 이 요구는 우리가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반복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이 인공적이고 표면적인, 존재하지도 않는 이원성二元性을, 우리의 삶과 우리를 둘러싼 삶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Q : 사고는 뇌의 일부로 간주됩니다. 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육체와 정신 사이의 투쟁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A : 그것은 오직 우리의 일방적인 억측일 뿐이다. 나는 사고가 자연스럽고 자생적이라는 말이 왜곡된 추정임을 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 사고는 오직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뇌는 진정한 창조자가 아니다. 뇌는 그저 콘테이너일 뿐이다. 육체에 있어서 뇌의 기능은 오직 물질적인 유기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 감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고는 감각기관과 함께 항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육체의 감수성을 파괴한다. 투쟁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감수성을 유지하려는 육체의 필요와 감각적인 활동의 틀 안에서 모든 감각을 해석하려는 사고의 요구 사이에는 투쟁이 있다. 나는 감각적인 활동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 혹은 당신이 뭐라 부르든 그것은 이 관능성에서 나왔다. 정신의 모든 활동은 본래 물질적이다. 육체의 활동은 그것을 둘러싼 자극에 대한 반응인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육체 사이의 근본적인 투쟁이다. Q : 그러면 당신은 정신, 뇌는 실제로 물질적이지 않은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인가요. A : 나는 뇌의 활동으로부터 분리된 정신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Q : 뇌는 비물질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얘기십니까? A : 감각활동은 그런데 관심이 없다. 감각 활동은 정신이 관심을 가지고 요구하는 그 어떤 경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감각활동은 소위 말하는 영적인 경험조차도 관심이 없으며 천국의 기쁨, 지복, 무한같은 종교적인 경험, 그리고 행복에도 관심이 없다. 행복은 육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 무엇이다.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기쁨도 언제나 거부당하는 것 중의 하나다. 육체는 행복을 모르며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Q : 행복은 오직 사고의 속성, 감각적인 경험입니다. A : 행복은 문화적으로 입력된 것이다. 행복같은 것이 거기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을 추구함은 문화적 입력사항이며 우리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알고있는 평범한 욕망일 뿐이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고, 어느 곳의 인간존재이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행복, 당신이 그 단어를 쓰고 싶다면, 행복은 여타의 다른 감각과 동일하다. 사고가 스스로를 행복의 감각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순간, 그 감각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본래의 유효기간보다 더 길어지기를 원하는 욕구를 그 안에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그 어떤 감각, 얼마나 대단할 지라도, 그 얼마나 큰 기쁨을 줄지라도 그것은 육체에게 거부당한다. 감각을 본래의 유효기간보다 늘이고자 하는 것은 감각 기관의 감수성과 살아있는 유기체의 감수성을 파괴한다. 이것이 거기서 일어나는 전투이다. 당신이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절대로 불행할 수 없을 것이다. Q : 육체의 모든 심리학적인 요인과 특성을 제거해 버린다면 당신은 인간 존재와 동물사이의 차이가 없다는 얘기십니까? A : 전혀 없다. 우리는 동물과 같다. 우리는 그 어떤 위대한 목적으로 창조되었는지 몰라도 당신의 피를 빨고 있는 모기와 다르지 않다. Q : 인간 존재와 감각 중심의 동물 사이에 그 어떤 명백한 차이도 없습니까? A : 지구의 다른 종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 낸 것은 바로 사고이다. 우리가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사고이다.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모든 문제의 책임은 사고에 있다. Q : 물론,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생존으로 불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고는 사람이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아닌가요? A : 조금전 내가 말한 대로 다른 종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 낸 것은 사고다. 사고의 도움, 그것은 다른 종들보다 더 오래 생존하고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줄 수는 있다. Q : 당신은 왜 우리가 이 환상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렇게 주장하십니까? A : 환상은 고집한다. 만일 환상이 종말을 맞으면 임상학적인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이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환상을 포기하면 그 자리에 항상 대체물을 놓게 된다. Q : 왜죠? A : 그렇게 해야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을 극복한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기에 있는 유일한 죽음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같은 것은 없다. 죽음은 환상의 종말, 공포의 종말,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종말이다. Q : 이제 지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육체의 자연적 지성이 있습니다. 육체가 상호 연관적으로 기능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육체의 지성. 그러나 육체의 지성이 물질적인 것들외에 기능하는 어딘가 영역이 있습니까? A : 없다. 당신은 육체가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육체는 그 무엇도 배우고자하지 않는다. 육체의 생존에 필요한 지성은 이미 거기 있다. 우리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획득했다. 사고를 날카롭게 다듬고 항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이 지성을 획득했다. 그 지성의 도움으로 우리는 다른 종들보다 오래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성의 획득은 우리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모든 구조의 파괴 원인이다. 우리를 다른 종들보다 더 오래 살도록 만든 사고의 산물, 획득된 지성이라는 그 현실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Q : 그 말은 우리가 가진 지성을 다른 동물의 지성과 구별할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까? A : 아마도 우리의 육체 기능과 뇌 기능은 동물들의 경우보다는 더 진화했을 것이다. 이 말이 우리가 다른 종들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진화했다는 말이 사실이라해도, 인간의 육체는 그 구성요소가 분해되었을 때 당신의 피를 빠는 모기나 저기 있는 나무와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정확히 동일한 것이다. 구성요소의 비율은 아마도 다른 것들의 경우와 비교할 때 덜하거나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육체에 80%의 물을 가지고 있고 나무들 안에도 80%의 물이 있으며, 이 혹성의 80%는 그렇다. 이것이 내가 우리는 원자의 우연한 집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죽음이 자리한다면 육체는 자리바꿈을 하고 이들 원자는 우주 안에서 에너지 레벨의 유지를 위해 사용된다. 이를 제외하고는 육체에 죽음 같은 것은 없다. Q : 인간의 뇌는 나무 같은 것들 보다는 더 민감하지 않을까요? A : 민감성의 문제라면 아마도 저기 있는 개가 오늘 나를 포함한 우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간 존재보다 훨씬 더 지성적일 것이다. Q : 아마도. A : 동물들은 무엇도 변화시키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우리 안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요구는 문화적으로 입력된 사항이다. 변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물음이다. 근원적으로든 어떻게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는가? 나는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 "거기 무엇이 있는가? 거기 실존이 있는가? 거기 자아가 있는가? 거기 '나'가 있는가?"를 찾아야한다. 나의 대답은 "NO"이다. 본 것, 느낀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만든 것이다. 자아의 지식, '나'의 지식, 세대에 세대를 거쳐 우리에게 이어져온 실존에 대한 지식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문화적 입력이다. Q : 여기 우리 둘, 두 개인 간의 의사소통이 있지 않습니까? A : 당신은 우리 사이에 의사소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어떤 의사소통을 하려 했는가? Q : 아닙니다. 핵심적으로는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A : 아니다. 당신과 내가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이 도구를 사용하는 한은 그 어떤 이해도 불가능하다. 당신은 항상 나의 모든 말을 당신이 가진 지식의 틀 속에서 해석하고 있다 - 그것을 나는 당신의 참조 지점이라고 부른다. Q : 우리가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기 물질적 혹은 심리학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A : 관계는 이미 거기 있다. 나에게서 당신을, 당신에게서 나를 분리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다. 지금 우리는 관계의 일종을 다른 레벨에서 형성하려하고 있다. 하지만 지식은 그 일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며, 다른 도구는 없다. 지식이 도구가 아니라면 그 어떤 도구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어쨌든 이해하는 것이 생겼다. 이해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해다. 어떻게 그 이해가 내 안에 생겼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걸 알 방법이 없다. 나는 거기 다른 도구는 없고,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거기 이해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실상을 알기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는 없다. Q : 거기 영혼 혹은 자아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많은 구루들이 있습니다. A : 알고있다. 그것이 라마나 마하리쉬같은 성인조차도 사람들이 그에게 온갖 종류의 질문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같은- 성가시게 굴 때 "나는 누구인가?"라고 한 이유다. 나는 누구냐는 의문조차도 지성적인 의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어떤 '나'와 우리가 모르는 본성이 있다는 두 사실을 전제로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그 본성을 찾아내야만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나'는 1인칭 단수 대명사일 뿐이다. 나는 나로부터 당신을 구별하여 의사 소통하려는 단순한 목표로 사용하는 '나' 이외의 것이 거기 있는지 찾는 데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나'와 '당신'을 말한다. Q : 육체의 의식... A : 육체의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실용적인 목적에서, 존재하지 않는 육체의 의식이 되도록 하는 단 한가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이다. 당신이 가진 그 지식없이는 당신 고유의 육체를 만들고 그것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나는 바로 그 의식이라는 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잠재의식, 무의식 다른 단계의 의식 그리고 의식의 더 높은 단계 그것들을 홀로 내버려 두라. 나는 거기 의식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이것의 (의자 팔걸이를 건드리며) 의식이 되었다. 오직 내가 이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 건드림은 나에게 지식의 틀 안에서 내가 해석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건드림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감각이 여기 작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믿게끔 만들어진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눈은 당신 손의 동작을 보고 있고, 활동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거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가를 관찰하는 것 일 뿐. Q : 하지만 당신은 느끼고... A : 아니다. 느낌 또한 해석이다. 느낌은 우리가 가진 지식을 거치지 않고는 그 건드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그것에 대해 가진 지식을 거치지 않고는 이것이 '부드럽다' 혹은 '딱딱하다'는 사실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당신이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Q : 이해됩니다. 하지만 그건 저에겐 당신이 거기를 건드렸을 때 육체 안에서 또한 감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A : 아니다. 그 감각은 촉각을 통과한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뉴우런의, 혹은 당신이 부르고 싶은 그 무엇의 활동에의해 해석된 것이다. 그 때 당신은 '그것이 부드럽다 딱딱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 건드림은 단순한 건드림이 아니라 느낌의 하나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속여넘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위에 겹쳐 놓여있다. Q : 촉각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 촉각이 순수하게 심리학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당신의 일부에서 나오는 반작용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Q : 어떤 일부입니까? A : 그것은 물질적 반응이다. 그것은 해석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육체의 기쁨일 것이다. 나는 모른다. 그것이 기쁨의 반응인지 순전히 건드림에 대한 물질적인 반응인지 찾아낼 방법이 없다. 사람들이 내게 "왜 웃으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그건 단지 자극에 대한 다른 반응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이 모든 단순한 동작들을 행하며 "왜 손을 움직이는가?" "왜 그렇게 많은 동작을 취하는가?" 하면서 주의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합당하게 표현되고 있지 않음을 당신이 느끼기 때문일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말을 이 동작들과 함께 돌아본다. 그것은 오직 의사소통의 형태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방식으로 천천히 언어를 발달시키기 시작했다. 아직도 당신은 당신이 사물과 의사소통 할 수 없다고 느낀다. 당신 친구에게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아서 의사 소통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이들 다른 동작들을 가져와서 타인과 의사 소통하려는 바를 강화하는 이유다. 인도인들은 어떤 종류의 동작을 가지고 있고, 미국인들은 다른 종류의 동작을 취한다. 아마도 이들 동작들이나 손의 움직임들은 유전자를 통해 형성되는 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직후, 곧바로 남편과 이혼했고, 이들은 20년간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소년의 동작이 그녀 남편의 동작과 똑같다는 얘기를 했다. 물론 이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 얘기인지 모르지만, 이들 동작조차도 유전자를 통해 전달되었다고 미약하게나마 추측해 본다. 우리는 유전자의 어떤 부분이 관여하는 지,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세대에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지 모른다. Q : 결국은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우리 내부의 모든 것은 오직 물질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A : 나는 그걸 알 방법이 없다. 육체의 분리라는 관념과 순수한 물질적 반응에 관하여 말하는 것조차도 어쩌면 오해하기 쉬운 것인지 모른다. 나는 정말 모른다. Q : 당신은 유물론자이십니까? A : 모른다. 사람들은 나를 유물론자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내가 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무신론자라고 부르기까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무신론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어떤 상표를 붙이는지는 관심이 없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것은 나에게 한 조각의 차이도 만들지 못한다. 나는 당신을 설득하거나 그 무엇으로 이기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다르게 변화해야할 것이 없음을 본 후, 당신에게 남겨지는 것은 당신이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고유의 이유로 나를 틀 속에 맞추려하고, 수천 가지 다른 점을 만든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고思考는 당신의 적>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8장 정글에서 길을 잃다 ───────────────────────────────────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당신의 거창한 종교적인 관념 -평화, 희열, 지복, 혹은 그런 여타의 것들에 관심이 없다. 유일한 관심의 자신의 생존이다. __________ 사회 혹은 문화는 우리 이전에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할 목표로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적을 만들었다. __________ 미래의 모든 상황과 행위에대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우리 문제의 원인이다. 온갖 상황은 너무도 다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준비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우리를 돌발하는 상황에 맞설 능력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원인이다. __________ 조립 라인에서 깨달은 사람들을 생산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__________ 우리의 문화나 문명 모두는 살해와 살해당함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다. __________ 우리는 정글에서 길을 잃었다. 거기서 벗어나기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거기엔 어느 날엔가 어쨌든, 우리가 이 정글에서 나갈 수 있다는 위조된 희망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그때까지 그대로 서서 사태가 발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을 뿐이다. __________ 두뇌는 오직 자극에 반응하는 반응기일 뿐이다. 교육과 문화를 통하여 우리가 뇌에 주입한 메커니즘은 우리 자신을 창조자라고 믿도록 만들었다. __________ "어떻게 사는가?"하는 물음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능과는 전적으로 관계가 없다. 유기체는 이미 내내 살아가고 있다. __________ ─────────────────────────────────── Q : 당신은 인류가 정원의 달팽이보다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부분에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 거기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세대에 세대를 거쳐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졌거나 그 믿음을 수용했다. 우리는 원대한 목적으로 이 지구의 다른 여타 종들보다 더 고귀한 목적으로 여기 존재한다는 믿음 말이다. 나는 우리가 여기 정원의 달팽이 혹은 당신 피를 빨고있는 모기보다 더 원대한 목적으로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진화같은 것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진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다고 우리가 믿게 만들었다. 이 혹성에 있는 동물종들을 관찰해 볼 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전에 존재했던 종 50%와 오직 한 종, 인간만이 존재한다고들 말한다. 진화에 대해 말하는 이들은 그런 사실을 우리가 믿도록 만들었다. 식물을 고려해 볼 때, 이 혹성에 기존에 존재했던 식물 종의 50%만이 남아 있다. 인간종이 멸종해 버린 다른 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존하고 계속 살아가고, 다른 종보다 더 오래 이 지상에 인간 종을 유지하게 하는 것 그것은 사고다. 우리가 다른 종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고다. Q : 사고가 그것을 가능케 했습니까? A : 그러나 사고는 우리의 적이다. 사고는 우리의 적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우리의 신념, 희망 혹은 믿음같은 그저 희망에 의거한 사고일 뿐인 느낌들이 우리를 유지시킬 것이다. Q : 어떻게 사고가 우리를 다른 종보다 오래 살수 있도록 도왔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장애가 될 수 있습니까? A : 사고는 방어적인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보호하는데 관심이 있다. 우리는 사고의 계속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사고를 사용한다. 사고로부터 나온 그 무엇이든 자체의 본성을 방어하는 것이다. 사고는 우리를 둘러싼 삶을 보호하는데는 관심이 없다. 반대로, 사고는 우리를 삶의 단일성에서 분리시키고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화에서 분리시켰다. 사고는 우리를 이 지상의 나머지 종들로부터 소외시켰다. 사고는 우리에게 우리가 무언가 다르고, 모든 것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관념을 주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혜택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있고 우리가 이 혹성에서 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관념을 주었다. Q : 자연의 혜택을 유지하면서 이런 관념들없이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A : 나는 매우 자주 사고는 그 자체의 태생에서, 그 자체의 내용물에서, 그 자체의 표현에서 그리고 그 자체의 행위에 있어서 파시스트라고 주장한다. 사고는 아주 공격적이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바로 그 요구는 사고의 계속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사고는 이타적이고, 자연에 대한 지식의 목적은 오직 자연의 법칙을 알려는 호기심이라는 식의 모든 대화는 허세다. 사실상의 동기,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욕구 뒤에 있는 것은 이 혹성에 있는 다른 모든 형태의 삶을 소비하여 인간 종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Q : 우리가 그런 종류의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인간 종은 무엇이 될까요? A : 아마도 우리는 멸종위기에 처할 수 있고, 자연은 더 나은 인간 종을 이 혹성에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누구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구의 인간 종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동물들이 하지 않는 그 무엇을 행할 것이다. 한 형태의 삶을 소비하면서 다른 형태의 삶이 생존하는 것은 자연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관념 때문에 다른 종을 죽인다. Q : 우리는 또한 하나의 관념을 위해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A : 물론, 그리고 우리는 다른 것들도 죽인다. 그러나 이런 양상은 다른 형태의 삶에서, 이 혹성의 다른 종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이해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관념으로 죽인다. 우리 문화와 문명의 근본 토대는 살해와 살해당함이라는 관념 위에 세워졌다. 첫째는 교회와 모든 다른 종교적인 기관으로 상징되는 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국가로 상징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죽고 죽인다. 우리 문화의 모든 토대는 죽고 죽임의 관념 위에 세워졌다. Q : 우리는 진실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문화의 근본은 조화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라고 말합니다. A :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어쨌든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도록 한 사고와 그 결과에 이르도게 만든 의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는 식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 신념, 나는 이것이 잘못 자리매김한 것이라 주장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 도구, 사고가 현재 우리가 맞서있는 문제의 해결을 돕고 더 나은, 더 행복한 삶을 이 지상에 만들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Q : 파괴의 길로 향하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A : 당신이 발견한 모든 것은 파괴의 타성을 강화한다. 모든 것, 그 발견의 뒤에 있는 추진력은 사고의 계속성과 현상 유지를 목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Q : 인간 종이 적당한 시기에 이를 인식할 가능성은, 변화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그것이 변화과정이라면- 있다면 어떤 종류의 변화여야 할까요? A : 나는 기회가 적거나 전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운명지어졌다. 당신도 안다. (웃음) 내가 초반부에 말했듯이, 우리는 정글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는 이 사태를 피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직도, 어쨌든, 거기 이 정글에서 나갈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으리라는 위조된 희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때까지 그대로 서 있을 뿐이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둘 수밖에 없다. Q : 어떻게 우리가 그때까지 그대로 서 있습니까? 아직 그대로 서 있도록 하는 의지는 무엇입니까? A : 당신은 그때까지 서 있을 수 없다. 영원히 길을 잃으리라는 공포 때문에 당신은 그때까지 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글에서 나갈 수 있는 그 젠장할 방법'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같다. Q : 당신은 그때까지 이렇게 그대로 계십니까? A : 물론. 아마도 당신에게는 이 모든 잔인함의 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고 뛰어 넘어야 할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 삶은 고유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당신을 사회와의 불화로 이끄는 건 전혀 아니다. 당신은 그 무엇도 변화시키고자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변화하려는 요구는 당신의 소외에서 나온다. 한번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요구 또한 거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간 육체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배우거나 아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거기 있다. 육체는 거대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획득하고 모아들인 모든 것은 육체의 지성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Q : 육체의 지성과 말입니까? A : 그렇다. 육체의 지성. 그는 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 그리고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하나는 인간의 뇌는 우리의 관심 분야인 문화가 우리에게 부과한 것과 그에 따른 관념화와 지적활동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뇌는 당신이 놀랄 만큼 너무도 둔하다. 뇌는 그 어떤 종류의 그 어떤 경험에도 관심이 없다. 관심을 두는 것은 육체가 지성적이고 건강하게 기능하도록 돕는 역할에 대해서일 뿐이다. Q : 뇌가 말입니까? A : 그렇다, 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뇌를 자연이 의도하지 않은 곳에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뇌는 창조자가 아니다. 뇌는 오직 반응기다. 뇌는 자극에 반응한다. 우리가 교육과 문화를 통해서 거기 주입한 메커니즘은 우리에게 뇌는 창조자라는 믿음을 갖게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의 그 무엇도 자생적인 것은 없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고는 항상 외부에서 온다. 그리고 뇌는 오직 이 감각을 해석할 뿐이다 -해석은 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뇌는 그 어떤 영적인 경험 혹은 정신이 관심을 가지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거기서 정신 같은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정신은 오직 관능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적인 경험은 그 자체의 본질상 물질적이다. 영적인 경험에 -천국의 기쁨, 연민, 진실, 실재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것들-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정신일 뿐이다. 그러나 이 육체, 이 살아있는 유기체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 오직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Q : 뇌가 육체의 지성과 함께 창조되었다면, 사고와 관련되어 있는 창조성은 무엇입니까? A : 당신이 말하고 있는 창조성은 전적으로 생生의 창조성과는 관련이 없다. Q :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자연 속에는 창조성이 있습니까? A : 자연속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창조성'은 -언어, 사고의 창조성, 이것의 창조성, 저것의 혹은 다른 무엇의- 없다. 삶은 그 어떤 모델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우리가 창조적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은 모방, 이미 거기 있는 것의 복사다. 그건 중고품이다. 당신은 자연이 창조한 것은 어느 선까지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자연에서 그 어떤 설계도조차 본적이 없다. 어떤 설계도가 됐건 거기 이미 있던 것은 세포 안에 이미 있다. 거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단일 세포 안에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유전적으로 통제된다. Q :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까? A : 우리가 우리 내부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떤식으로든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준다. 당신은 그 희망 안에 살고, 그 희망 안에 죽는다. Q : 변화가 가능합니까? A : 어떤 종류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는가? 변화는 물질적 세계에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루터기 모양의 코가 싫다고 하자. 당신은 성형외과에 갈 수 있고 매부리코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매부리코를 갖는 것이 유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성형의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한 일이다. 한편으로 유전 공학을 통해서는 행동 패턴의 변화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사물의 본성이나 자연의 작업에대한 이해에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 특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내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내가 말하는 바를 수용하고 안하고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의 말은 스스로 유지되거나 떨어져나가 버린다. 나는 생물학자, 심리학자 혹은 일반적인 과학자들조차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이 나의 말을 옆으로 밀어놓고 이것은 완전히 쓰레기라고 말한다해도 내 안에서는 좋다. 우리 시대의 누군가는 어쨌든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Q : 그럼, 그 누군가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합니까? A : 발견은 사고의 틀 안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발견 같은 것은 거기 없다. 발견은 잘못된 단어다. Q : 잘못된 단어요? A : 당신은 당신이 이미 알고있는 것을 경험한다. 반면 거기엔 경험같은 것은 전혀 없다. 새로운 경험 같은 건 없다. 과학의 영역에서 소위 획기적인 발견이라는 것은 실제로 획기적인 발견은 아니다. 뉴튼 물리학의 예를 들어 보자. 그 원리는 수세기 동안 아주 훌륭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양자量子도약을 만들어내기위해 그 이론이 장애물이 됨을 증명한 것은 바로 그 뉴튼 물리학이다. 내가 이 말을 써도 된다면. 어쨌든 아인슈타인같은 누군가는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하고 주도권을 잡는 행운을 가졌다. Q : 그가 정말 다른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A : 실제로는 다르지 않다. 당신이 이전에 있었던 무엇과 당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무엇 두 가지를 연결시키지 않는 한은. 거기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핵심이 전혀 없다. 과학자는 이들을 연결시키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관심을 가진다. 그렇지만 발견은 아무 가치도 없다. 뉴튼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의미를 가지지도 가치를 갖지도 않는다. '상대성의 원리'라고 발견된 우리가 가진 지식(그보다는 아인슈타인이 가진)과 비교해서 말이다. 물론 뉴튼 물리학자들은 아직도 사람의 과학적인 사고 틀 안에서 가치를 가진다. 어쨌든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감탄하고 그들에게 노벨 상이든, 뭐든 그런 종류의 영예에 빛나는 상을 부여했다. 왜 그런지 아는가? 이들의 발견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은 기술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발견같은 것은 거기 없다. 순수과학같은 것은 거기 없다. 나는 교조적인 말들을 많이 만들고 있는 것 같지만 나의 말은 스스로 수용되거나 떨어져 버릴 것이다. Q : 하지만 거기엔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A : 당신은 왜 거기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는가? 거기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거기엔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로부터 진행된다. Q : 당신은 당신이 만물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계기가 된 어떤 경험을 분명히 가지고 계십니다. 어떻게하면 그럴 수 있습니까? 당신의 경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A : 나는 아주 자주 '그 안에 비틀거리며 들어감'이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내 발견의 여행이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든 내게 일어났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도구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이 도구는 무언가를 이해하기위한 진정한 도구가 아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이해하기위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구는 지성임이 분명하고 그 외의 다른 도구는 없다. 모든 발견은 단지 진보일 뿐이다. Q : 지성의 진보... A : 지성을 날카롭게 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지성은 내 삶의 살아있는 문제들을 이해하는데도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성은 도구가 아니며 거기 다른 어떤 도구도 없다는 이해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분명해졌다. Q : 인간 존재는 이해하기위한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A : 이 도구 외에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는 없다. 이는 교육 혹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이해를 위한 다른 어떤 방법의 근본토대 모두를 끝장내 버린다. 거기엔 이해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거기 현실 같은 것은 없다, 궁극의 실재를 홀로 내버려두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당신은 무언가의 실재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 많은 실재- 경험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무엇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Q :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과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A : 동일한 것의 계속적인 반복 경험 과정이다. 그것이 우리가 언젠가는 환상적인 무엇, 새로운 경험을 하리라 희망하면서 태어나는 이유다. 당신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무엇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것은 과거 경험 메커니즘의 일부로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Q : 지루하십니까? A : 권태는 오직 당신이 거기 더 흥미롭고, 더 의도할 것이 있고, 당신이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Q : 그럼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지... A : 거기 존재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Q : 어떻게 당신은 이 권태에서 벗어나셨습니까? A :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 안에 비틀거리며 들어감'이라는 문장을 사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것을 그 누구와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찾아오고 내 얘기를 듣고 내가 이해시키려 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 누구도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거긴 당신이 해석없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해석자는 당신이라는 참조지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사고와 경험 그리고 당신 이전에 존재한 모든 형태의 삶에 대한 느낌의 총체성의 산물이다. 사고는 오직 자신의 계속성과 현상유지에만 관심이 있다. 사고는 그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사고가 원하는 변화는 오직 그 변화라는 것이 사고의 계속성, 사고의 현상유지에 있을 때만 관심을 둔다. 사물은 항구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자신의 현상유지를 방해하게 될 것은 그 무엇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참조 지점은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해석함으로써 강화된다. Q : 하지만 그러면 완전히 고착상태가 됩니다. A : 당신은 당신 자신의 족쇄를 강화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그 덫에서 나오고자하는 당신 내부의 그 어떤 시도도 수용하고자 하지 않는다. 거긴 방법이 없다. Q : 그럼 우리는 우리가 고착된 상태를 수용해야합니까? A : 수용한다는 것은 당신이 고착되어 있고 무언가를 하는 것에 지긋지긋해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아무 의미도 없다. Q : 그럼 우리는 삶에 목적을 가져야 합니까? A : 왜 우리가 목적이나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왜? Q : 왜냐고요? 당신은 내 질문을 이해하고 계십니다. 왜 우리가 그래야합니까? A : 당신은 나에게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느냐고 말했다. 왜 거기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전적으로 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능과는 관계가 없다. 유기체는 항상 살아가고 있다. 유기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묻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에 부과돼 있다. Q : 의미를 찾는 것은 부조리합니까? A : 틀림없이 당신은 어떤 의미도 이해하지 않는다. 당신은 삶의 그 어떤 목적도 이해하지 않는다. 분명히 당신은 이해하지 않는다. (웃음) 나는 당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말한다. 내게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주 바보스럽고, 의미없고, 너무나 부조리한 일이다.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다. 생활의 문제는 아주 피곤한 비즈니스가 된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느낌과 함께 살기위하여, 우리의 관념과 함께 살기위하여. 달리 말하면 생활은 우리가 그 안에 던져놓은 가치 시스템이다. 당신은 가치 시스템이 허위라는 것을 이해한다. Q : 아무데나 달라붙는 풀같이... A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잘못된 가치 시스템에 맞추려 한다. 그것이 당신을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이 당신을 왜곡하고 있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당신은 자신을 그 틀 혹은 가치 시스템에 맞추는 비즈니스에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Q : 어떻게 우리가 가치 시스템이 허위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까? A : '어떻게'는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알아내기를 원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Q : 질문하는 걸 말씀하십니까... A : 그것은 알기 위하여, 알기 위하여, 그리고 알기 위하여라는 타성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 질문 "어떻게?"라는 이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는 당신이 알기를 원한다는 의미다. 당신 자신이 경험한 당신으로서의 '당신'은 대체 무엇인가? 당신자신이 당신에대해 알고 있는 그 '당신'은 우리를 스쳐간 지식의, 타성의 산물이다. 당신은 이것이 매우 지성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질문의 답을 얻고자하는 당신의 요구는 지식의 타성을 어떻게 보탤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Q : 그러면 그건 속임수군요. 우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A : 사고는 질문함으로써 자신을 강화 할 수 있음을 안다. 그것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거기엔 개인은 절대 없다. 문화, 사회 혹은 당신이 뭐라 부르기를 원하든 그런 것들이 오직 사고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당신'과 '나'를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당신이 개인이 되어야한다고 믿도록 만들어진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신경과민 상태로 만든다. 거기엔 개인이나 행동의 자유같은 것은 없다. 나는 운명론적인 철학 혹은 그 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우리 자신을 가치 시스템에 맞추려는 요구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문제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에너지는 문화와 사회, 혹은 당신이 뭐라 부르기를 원하든 그런 것들, 가치 시스템의 틀 안에 당신을 맞추려는데 소모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문제와 직면할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켜버린다. 그러나 살아있는 문제들은 아주 간단하다. Q : 어떤 의미에서? A : 이 세계에 살아남는 것은 당신도 알다시피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거기 필요한 것은 그저 가치 시스템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를 가치 시스템에 맞추려는 노력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Q : 당신 자신에게 가치 시스템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A : 나는 사회와의 불화 속에 있지 않다. 당신은 이 사회와 투쟁하고 있는 것같다.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안에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 후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어한다. 당신도 알지만 그 문제는 관계의 문제다. 그건 단지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이를 포함하여 당신 주위의 그 무엇과도 그 어떤 관계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일 뿐이다. 당신이 관계에서 벗어나려할 때를 제외하고는.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분리 혹은 소외에서 길어 올려진 것임을 안다. 우리는 나머지 창조물들로부터, 우리를 둘러싼 나머지 삶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우리는 모두 개인적인 틀 속에서 산다. 우리는 "이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는 수준에서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한다. 우리는 우리 소외의 결과물로써 만들어진 이 공허함을 채우는데 타인을 이용한다. 우리는 항상 이 비어있음, 이 공허를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일종의 관계를 통해 채우기를 원한다. 그것이 실제 문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관념, 사람, 우리가 쥘 수 있는 그 무엇,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우리는 개인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의 어떤 의미있는 관계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당신은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긴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거긴 실체같은 것은 없다. 나는 세계의 실체를 사회가 나에게 부과한 대로 수용해야한다. 나는 당신을 '여성'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을 '벤취'라고 부르고 이것을 '쟁반'이라고 부른다. 다른 방식으로는 이 세계에서 건강하고 지성적으로 기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오직 이 세계를 건강하고 지성적으로 기능하게하려는 목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 당신이 이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고자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유용하고, 도움이 되고, 의미있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고思考는 당신의 적>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9장 죽음은 원자들의 자리바꿈 ─────────────────────────────────── 다른 혹은 더 나은 방향으로의 진보, 변화, 진화하는 운동은 없다는 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거기 있는 무엇은 엄청난 것이다. __________ 이 행성이 오직 예수와 부처 그리고 모든 다른 스승들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끔찍한 세계일 것이다. __________ 혁명은 오직 우리 가치 시스템의 재평가를 의미할 뿐이다. 모든 것이 자리 잡은 후에 그들은 다시 혁명을 하려할 것이다. 혁명은 기본적으로 수정된 동일함의 계속성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저지른 잔혹함이란! __________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슨 목적입니까?"라는 질문은 삶의 살아있는 특성에게 거부당한다. 당신은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 __________ 환생에대한 믿음은 당신들이 소위 말하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나온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메커니즘과 동일한 것이다. 몇몇 이유에서 이 메커니즘, 그 사고의 운동은 종말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만일 죽음 뒤에 무엇이 있다면, 당신이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당신은 지금 죽어야만 한다. __________ ─────────────────────────────────── Q : 당신과 나는 어떻게 다른가요? 지각 작용에서? 아니면 어떤 차이도 없나요? A : 내가 당신과 다르다는 사고는 절대, 절대로 내 머리에 들어있지 않다. 나는 당신과 다르고, 나는 당신과는 다르게 기능한다고 당신에게 말하며 당신을 분리시키는 것은 사고다. Q : 알고자하는 목적으로 생각을 통해 생각할 때를 제외하고는... A : 그렇다. 당신은 알고자 한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엄청난 지성을 가진 컴퓨터와 같다. 녹음기가 기능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내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지요?" 녹음기는 절대로 질문하지 않는다. 녹음기에 필요한 것은 거기 있는 에너지가 전부다. 작동을 위해 전기가 필요할 뿐이다. 육체의 에너지는 삶의 표현의 일종이다. 에너지는 이미 거기 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질문한다. 내가 당신과 다르다는 사고는 내 머릿속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당신이 나에게 "당신은 나와 다릅니까?"라고 물을 때, 당신과 나를 분리하는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은 이미 거기 컴퓨터 안에 존재한다. 그 컴퓨터는 나에게 당신은 여성이고 나는 남자다, 당신은 나보다 더 지성적이다라고 말한다. 이 모든 일련의 관념은 컴퓨터에 입력되고 출력된다. 당신의 질문은 거기 있는 지식에서 나온다. 여기(자신을 가리키며) 이 컴퓨터에 저장된 지식 말이다. 여긴 지금 두 대의 컴퓨터가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기능의 일부가 아닌 요소로 해석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당신이 여기(U.G. 안에)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이유다. Q : 그러면 내가 분리를 만들고 있습니까? A : 당신은 분리를 만들고 있다. 우리를 분리하는 것은 바로 그 질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거기 질문은 없다. 모든 질문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해답에서 나온다. 이것들은 진정한 질문이 아니다. Q : 그럼 현실적으로 우린 침묵을 지켜야만 할까요? A : 당신은 침묵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의 게임이다. 침묵을 통해 그들은 무언가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필요치 않다. Q : 지성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단어가 당신에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A :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우리가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다. Q : 아 그럼, 당신 안에는 많은 지성이 있습니다... A : 나는 당신이 나보다 더 지성적임을 인정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배경과 유전적 차이 때문일 뿐이다. Q : 그럼 더 높은 지성같은 것이 있습니까? A : 당신은 나보다 더 지성적이다. 그것은 측량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나보다 더 지성적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특정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성을 증명하려거나, 변화시키려하거나, 수정하거나, 더 낫게 만들거나하는 그 어떤 시도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지성이 없다면 당신에게 남겨진 것은 굉장한 무엇이다. 지성이 없는 상태의 당신과 함께 남겨진 그 무엇은 스스로를 당신의 지성 혹은 무엇과 비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가 저능아의 수준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수용'은 단어가 아니다. 다른 혹은 더 나은 방향으로의 진보, 변화, 진화하는 운동은 없다는 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거기 있는 무엇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유일하다. 모든 개인은 유일하다. 자연은 완벽한 종을 만들었지 완벽한 개인을 만들지는 않았다. Q : 자연이요? A : 완벽한 종을 만들었다. 완벽한 개인은 아니다. 완벽한 개인은 인간의 종교적인 사고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전에 예수와 부처와 모든 종교적인 스승들의 모델을 주입했다. 이 행성이 오직 예수와 부처 그리고 모든 다른 스승들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끔찍한 세계일 것이다. Q : 끔찍하고 잔인할 것입니다. A : 온 지구를 오직 장미라는 한가지 종류로만 채우는 것처럼. 그곳은 끔찍한 장소가 될 것이다. 교육이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이 이런 일이다. Q : 그러면 개인은 완벽하지 않지만 종은....? A : 모든 인간 존재는 다르다. 그게 내 말의 전부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다.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아무도 없다고! 나는 생리학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모든 이들을 정형화된 틀 안에 집어 넣으려하고, 최대 공약수를 만들려한다. 당신은 항상 그들을 교육하려하고 가치 시스템에 맞추려한다. 그 가치 시스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자연적으로 혁명이 일어난다. 재구성에 관한 모든 생각은 오직 오래된 가치 시스템의 재평가일 뿐이다. 혁명은 오직 우리 가치 시스템의 재평가를 의미할 뿐이다. 그건 동일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자리를 잡은 후에 그들은 다시 혁명을 하려할 것이다. 개선된 것은 없다. 아니면 아주 미약한 진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수정된 동일함의 계속성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저지른 잔혹함이란! 혁명이 이 모든 잔혹보다 진정 더 가치있는 것인가? 당신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당신은 동일한 시스템, 동일한 테크닉으로 돌아간다. 그럼 대체 혁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Q : 죽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죽음은 무엇입니까? A : 자연 속에 죽음같은 것은 없다. 오직 원자의 자리바꿈일 뿐. (웃음) Q :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A : 자연 안의 에너지 균형은 몇 가지 이유로 유지되어야만 한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죽음은 오직 거기 우주 안에 에너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원자에 대한 필요가 있을 때에 일어난다. 죽음은 오직 원자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이 유기체는 태어나는 특정의 시간을 알 수 있을 뿐, 특정한 죽음의 시간은 알 방법이 없다. 또한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죽음은 모른다. 살아있는 유기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탄생, 죽음 그리고 모든 것들- 여기(자신을 가리키며) 존재하지 않는다. Q : 그럼 당신 말씀은 당신이 살아있거나 죽어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까? A : 알 수 없다. 당신이 내게 "당신 살아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살아있다고 말해야한다. 그 질문은 살아있는 인간 존재의 기능, 행동, 그리고 관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념이다. 당연히, 당신이 내게 "당신 살았어요 죽었어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주 잘 살아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 질문은 인간 존재의 행동 패턴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 모두를 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할 방법은 없다. 사고는 죽은 것이다. 사고는 살아있고, 맥박이 뛰는 무엇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Q : 그럼 사고는 경험할 능력이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려 한다는 것입니까? A : 능력이 없다. 사고는 그 과정에서 불타버릴 것이기 때문에.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건드리면 당신은 끝이다. 사고는 건드리고자 하지 않는다. 사고는 그걸 가지고 놀기를 원한다. 장갑을 끼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Q : 육체는 사고 없이 이해하고 있습니까? A : 심장은 지금 혈액을 펌프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심장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가?"를 묻지 않는다. 그저 기능한다.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묻지 않는다. 내게 그 질문은 의미가 없다.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목적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살아있는 특성을 제거한다. 당신은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 Q : 사후의 삶이 있습니까? A : 내가 말하는 그 무엇도 사람들에게 그리 관심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내게 환생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믿는 이에겐 있고, 믿지 않는 이에겐 없다'라고 답한다. 그건 멋진 대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믿음이니까. 당신이 "중력같은 자연의 다른 법칙들처럼 환생 같은 것이 있습니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면,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고, 분명히 "NO"일 것이다. 그것은 중력과 같은 정도의 자연의 일부는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고자 한다면 있는 것이다. 그건 다른 문제다. 환생에 대한 믿음은 소위 죽음이라 불리는 것 이후에 계속될 무엇에 대한 당신의 요구에서 나온다. 사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자 하는 메커니즘과 같은 것이다. 정확히 동일한 이유에서 당신은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고의 메커니즘, 사고의 운동이 종말에 이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을 본적이 있다. 그래서 거기 센터가 있다는 믿음, 거기 영혼이 있다는 것, 거기 영이 있다는 식의 그 뒤에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당신은 지금 죽어야한다. 그 질문 혹은 종말에 따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죽음은 바로 지금 여기 생겨날 것이다. 임상적인 죽음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 죽으면 사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전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스스로 살아있는지를 알 방법이 없기 때문에. Q : 당신은 환생을 믿는 이들은.... A : 믿음은 꺼져버려야 한다. 믿음의 끝은 죽음이다. Q : 그럼 죽음은 모든 믿음을 끝냅니까? A : 하지만 당신은 한 믿음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하나의 환상을 또 다른 환상으로 대체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전부다. Q : 나는 다른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A : 대답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웃음) <사고思考는 당신의 적>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10장 성은 육체에 고통스러운 것 ─────────────────────────────────── 분명히,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사랑스러운 사건, 사랑스러운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애정 깊은 관계를 만들기위해 쏟아 붓는 에너지의 양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그것은 전투요, 전쟁이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항상 전쟁을 준비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곳에 평화가, 영원한 평화가, 혹은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리라고 희망하면서. 당신은 이 전투에 지치고, 불만스럽지만 그 끔찍하고 사랑이 아닌 관계를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__________ 사랑이 두 개인 사이의 완벽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세우는데 실패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증오이다. 증오가 아니라면 혐오이다. __________ 성행위, 만일 그것이 다른 여타 종의 경우처럼, 다른 여타 삶의 형태처럼, 본질로만 남는다면, 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필요일 뿐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생존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신이 성에 부과한 그 어떤 의미도 살아있는 유기체와는 전적으로 관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을 당신이 성적활동이라고 부르는, 본질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그것을 쾌락을 주는 운동으로 만들어 버렸다. __________ 당신이 여기에, 러시아에, 혹은 다른 어느 곳에 있든 한가지, 이 지상의 그 누구나 모두가 원하는 것은 고통 없는 기쁨, 단 한순간의 불행도 없는 행복을 가지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유기체는 기쁨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한 것 뿐이다. __________ 당신은 그 무엇과도 살아있는 접촉 안에 있지 않다. __________ ─────────────────────────────────── Q : 사랑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A : 아, 세상에! (웃음) Q : 나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하는 말을 압니다. A : 거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Q : 모르겠습니다. A : 나도 모른다. Q : 사랑엔 다른 무엇이....? A : 사랑엔 둘이 있어야한다.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리고 누군가 다른 이는 나를 사랑한다. 분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틈새에 다리를 놓으려는 것이다. 끔찍하고 의미없고, 뭔가를 요구하고 있는 이 틈새에, 이들 두 개인 사이에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는 환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다리를 놓으려는 것이다. Q : 어찌됐든 그 사이에는..... A : 어찌됐든 그 사이에는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개를 사랑한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리고 여타 등등. 내가 아내를 사랑하든 말든, 조국을 사랑하든 말든, 혹은 개를 사랑하든 말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모두 웃음) 이것은 아주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은 거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조국을 사랑하고,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하고, 그 사이에 전쟁은 없다. Q : 그러면 사랑은 없습니까? 사랑은 또 다른 사고입니까? A : 그렇다. 사고가 만들어 낸 것이다. Q : 육체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까? A : 육체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거긴 분리가 없다. Q : 거기 있는 모든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A : 당신은 내가 당신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주길 원한다.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건 정치적인 인터뷰가 아니다. 교묘히 둘러대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떤 멋진 외교적인 답변을 주려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사랑을 요구하는가? Q : 음, 인간 존재의 사랑에 대한 요구는... A : 분명,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사랑스러운 사건, 사랑스러운 관계로 만들고자 한다. Q : 그러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느끼게 만드는 건..... A : 우리 관계를 사랑스러운 것으로 만들기위해 쏟아 붓는 에너지의 양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그것은 전투요, 전쟁이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항상 전쟁을 준비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곳에 평화가, 영원한 평화가, 혹은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리라고 희망하면서 치르는 전투다. 당신은 이 전투에 지치고, 불만스럽지만 그 끔찍하고 사랑이 아닌 관계를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당신은 희망하고 꿈꾼다. 언젠가는 사랑만이 있을 것이라고.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그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는가? 최근의 전쟁에서의 사망자 모두를 더한 만큼보다 많다. 어떻게 당신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Q : 그 어떤 사람에게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 : 물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 여성들, 아이들 그리고 도움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존재하겠는가? Q : 아뇨. 훌륭한 이웃도 있습니다. 당신이 아는. A : 그렇다, 그렇다. 당신이 아는. (모두 웃음) 사랑이 두 개인 사이의 완벽하고 이상적인 관계를 세우는데 실패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증오다. 증오가 아니라면 혐오, 무관심 혹은 또 다른 단어가 뭐가 있는가...? 나는 어휘력이 빈약하다. Q : 그걸로 충분합니다... 성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단지 재생산 기능 아니면 그 외 다른 의미가 있나요...? A : 성행위, 만일 그것이 다른 여타 종의 경우처럼, 다른 여타 삶의 형태처럼, 본질로만 남는다면 성은 단지 생물학적인 필요일 뿐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생존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신이 성에 부과한 그 무엇도 전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을 당신이 성적활동이라고 부르는, 본질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그것을 쾌락을 주는 운동으로 돌려버렸다. 나는 쾌락을 주는 운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고의 도움으로 원하는 그 어떤 시간에나 성행위를 갖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Q : 그럼 성은 사고가 우리를 세상의 나머지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의 하나입니까? A : 다시 따분한 얘기군. 우리는 책을 써야하고 -사랑의 기쁨, 카마수트라, 그 외 모든 종류의 책- 그것을 흥미롭게 만들어야 한다. 동물에겐 원하는 시간에 언제나 성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동물은 성을 오직 재생산에만 사용한다. 동물은 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은 그들 고유의 종을 재생산하려는 목적일 뿐이다. 동물의 경우 성은 쾌락을 주는 운동이 아니다. 쾌락을 주는 운동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것을 단죄해야한다, 그러면 성적으로 문란해진다, 혹은 영적인 성취를 위해 성을 방편으로 사용하라는 식으로 말하는데는 관심 없다. 그건 아니다. Q : 그럼 당신은 성을 통해서는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A : 성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매우 단순한 기능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성을 대단한 무엇으로 만들었고 성욕을 통제하는데 집중했다. 그 다음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굉장한 무엇으로 만들었다. 모든 상업주의는 성과 관계돼 있다. 당신은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성이 고유의 자리에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Q : 성이 매매되는 것은... A : 그렇다. 분명히. 난 반대하지 않는다. 나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단지 우리가 단순한 생물학적인 기능에 불과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단죄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성은 거기 있다. 사랑의 표현으로서 성을 상정하는 당신의 말은 내겐 아무 의미가 없다. Q : 그럼 사랑과 성행위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나요? A : 없다. Q : 그건 정말 곤혹스럽군요! 세상의 대부분이 성이 없는 사랑은 마치 차가운 악수같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A : 그건 아주 편안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성이 내가 말한대로 오직 생물학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된다면, 그건 그렇게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성을 그 자체로 내버려둔다면, 성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성은 자기 고유의 자리로 갈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궁극의 쾌락 외에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을 -신, 진실 그리고 실체- 발명해낸다. Q : 그것은 목적이기도 합니까? A : 당신이 여기에, 러시아에, 혹은 다른 어느 곳에 있든, 이 지상의 그 누구나 모두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고통 없는 기쁨, 단 한순간의 불행도 없는 행복을 가지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유기체는 기쁨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할 뿐이다. Q : 유기체는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고요? A :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Q : 알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A : 알고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기쁨을 줄만한 감각은 유기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기쁨을 주는 감각이 생겨나는 순간, 그 기쁨을 더욱 더 길게 연장하고자 하는 요구가 생긴다. 유기체에 굉장한 차질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항상 행복하고, 오직 기쁨이거나 기쁨을 줄 감각 그리고 그 어떤 고통도 없는 상태를 가능하게 하고 싶어한다. '엑스타시'같은 특정 약물을 이용하면 가능하겠지만, 얼마 동안이나 가능하겠는가? Q : 그런 것들을 허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A : 장기적인 안목에서 그것은 육체의 감수성을 파괴한다. Q :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A : 당신은 그 무엇과도 살아 있는 접촉 안에 있지 않다. Q : ... 그럼 사고는 우리를 자연의 방식에서 분리합니까? A : 그렇다. 자연의 방식에서. <사고는 당신의 적> 오늘 마지막 11장을 올립니다. 절대부정의 길을 가든, 대긍정의 길을 가든, 우리 는 한 길위에 서 있습니다. 번역의 미숙함으로하여 U.G.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부질없 는 마음. 어차피 언어는 오해 그 자체이므로. 오늘은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 -Sophia 사고思考는 당신의 적 U.G.라 불리는 사람과의 정신을 뒤흔드는 대화 제 11장 자연 조화의 장난 ─────────────────────────────────── 가치 시스템은 '당신'을 만들었고 당신이 거기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방법은 없다. 당신이 스스로 이 가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기위해 무슨 일을 하든 이는 그 시스템의 타성을 강화할 뿐이다. __________ 당신이 사고없음(無思考) 혹은 평화로운 상태에 있기위해 사고를 통제한다는 생각조차도 사고에의해 만들어진다. 몇몇 아주 작은 경험,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고없음 상태를 통해서 사고는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__________ 의식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높은 의식, 초의식, 우주 의식을 홀로 내버려두라. 이 모든 개념은 사고에의해 만들어졌다. __________ 지식은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물질적 기능은 어떤 이미지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소위 심리학적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은 생물 조직 안의 어디에도 없다. 눈은 카메라와 같다. 당신이 무언가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다른 쪽으로 돌리면, 거기 있는 모든 것은 초점이 맞춰지는 곳에서 제거된다. __________ 모든 시간 관념, 연대기적인 시간에 대한 개념조차도 모두 임의적인 것이다. 모든 측정은 임의적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일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을 만큼만 수용할 뿐이다. __________ 당신이 당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파괴하려 한다면 당신 또한 그들과 함께 파괴될 것이라는 공포가 우리를 이 짧은 현재나마 공존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건 사랑, 축복, 숭배 혹은 종교적인 사고가 아니다. __________ ─────────────────────────────────── Q : 나는 당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A : 아주 자주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한다. 그러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건 내가 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 나의 삶에 대한 얘기를 쓰고 있는 전기 작가 몇몇은 내가 한 일,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알고 매우 불안해한다. 이런 종류의 상태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도록 나를 도운 것, 어떤 사건의 순간에 한 추측, 사건 혹은 내가 오늘 있는 자리로 나를 밀어 넣은 내 삶의 해프닝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가치있는 일도 진실한 무엇도 아니다. 당신은 이 말을 인정해야한다. 당신이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해도 문제될 건 없다. 이전에 무슨 일이 생겼든 내게 무슨 일이 생겼든 그것 이전의 나의 삶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내가 지금 기능하고 있는 방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말할 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기 오늘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다. 내일은 다른 어딘가에서 나의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모레 나는 영국으로 갈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 이후에 대해서 나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나는 공인이다. 당신이 내가 24시간 하는 일을 보기를 원하는 그 순간 나는 여기 있다. 내 자신의 사적인 생활은 없다. 당신이 U.G.가 뭘 하는지 보고자 하는 그 어느 때라도, 그 특정의 시간에, 특정의 상황 안에서 당신은 나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말할거리는 없다.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건 그것은 내가 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건 이런 이유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왜 내가 말하는 그 특수한 것이 모든 이에게가 아니라 내게 일어났는지를 찾아내는데 관심을 둔다. 당신은 인과 관계를 형성하고 이런 종류의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이 모두에게 가능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조립 라인에서 생산되거나 재생산될 수 없는 무엇이다. 자연조화의 장난이다. Q : 하지만 우리는 U.G.안에 있는 자연의 장난을 아는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A :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조차도 당신에게 의미가 없다. 당신은 그것을 거기 남겨둘 뿐이다. 자연 안에는 수 많은 기형이 있다. 당신이 그것들을 복제하려 한다면 당신은 길을 잃을 것이다. 당신은 이전과 동일한 상황에 있다. 자연 조차도 이 육체는(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쓸모가 없다고 한다. 자연은 그것을 버렸다. 자연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적으로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재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Q : 그럼 당신은 자연에게 버림받았습니까? A : 그렇다. 자연에 의해 버려졌다. 당신은 어떻게 이것을 모델로 만들려하는가? 선善을 위해 버려야만했던 모든 버려진 사람들을 우리는 모델로 만들었다. Q : 얼마나 많이? A : 모른다. 아마도 당신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Q : 버려졌던 사람들... A : 모른다.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해 말하는데 관심이 없다. Q : 하지만 이 모든 관념들에 -시대를 거쳐간 종교적, 영적인 관념들- 대해선 어떤가요? 당신이 따로 아시는 어떤 전통이 있나요? A : 한가지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관계했던 그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나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이 틀릴 수 있나요?"라고는 묻지 말라. 아니다. 그건 핵심이 아니다. 나는 왜곡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기능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기능하는 방식의 존재 상태가 그 무엇이든 나는 그것과 관계되기를 원했고, 그리곤 싸웠고, 격렬하게 싸웠다. Q : 싸웠었다고요? A : 그것이 나를 지금여기 있게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말을 거부할 방법은 없다. 모든 종교적 전통들이 당신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 그것이다. Q : 무엇이 나를 만들었다고요? A : 가치 시스템이 '당신'을 만들어냈다. 당신이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신이 스스로 이 가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기위해 무슨 일을 하든 이는 그 시스템의 타성을 강화할 뿐이다. 가치시스템은 그 순간 내게 전혀 없었던 것들 중의 하나다. 내가 조금전 말했던 것은 사고는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사고를 통제하고, 구체화하고, 가치시스템에 넣기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를 통해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신이 사고없음 혹은 평화로운 상태에 있기위해 사고를 통제한다는 생각조차도 사고에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고는 자신의 계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몇몇 아주 작은 경험,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고없음의 상태를 통해서. Q : 사람들이 말하는 보다 차원 높은 의식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A : 그런 것이 있다면 당신 자체가 그것의 표현이다. 자연이나 그 무엇, 어떤 우주적 힘, 그런 것이 이 세계에 있다면,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 다른 이들을 도와야하는가? 어떤 필요도 없다. 만일 거기 그런 것이 있다면, 당신은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런 누구처럼 그것의 한 좋은 표현이다. 당신이 바라보는 모든 개, 모든 고양이, 모든 돼지, 모든 소들, 저기 정원의 달팽이, 당신, 나 그리고 모두들, 징기스칸과 히틀러 역시도 그것의 동일한 표현이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동일한 것의 표현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 이외의 다른 채널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그것의 표현이다. 나는 의식 그 자체를 묻는다. 거긴 의식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높은 의식, 초의식, 우주 의식을 홀로 내버려 두라. 이 모든 개념은 사고에의해 만들어졌다. 오늘 아침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개념이다. 당신은 오직 지식의 도움을 통해 사물을 의식하게 된다. 나는 내게 스쳐간 당신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만 당신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말하는 당신은 여성, 당신은 지적인 여성 그리고 당신은 예쁜 여성 -이 모두는 지식의 일부다.) 그게 아니면 나는 당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는 내가 당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당신을 볼 방법이 없다. 눈은 오직 카메라처럼 작용한다. Q : 그럼 당신이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그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까? A : 지식은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물질적 기능은 어떤 이미지도 만들 방법이 없다. 소위 심리학적 이미지라고 불리는 것은 생물 조직 안의 어디에도 없다. 눈은 카메라와 같다. 당신이 무언가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다른 쪽으로 돌리면, 거기 있는 모든 것은 초점이 맞춰지는 곳에서 제거된다. Q : 나는 사라집니다. (웃음) A : 당신은 사라진다. 눈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저 사람을 혹은 의자를 혹은 초점이 맞춰진 그 무엇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내게 "저 여자 예쁘지 않니?"라고 묻는다면, '예쁜'은 단어이지 이미지가 아니다. 이해하는가? "그녀는 아주 '예리하다'". 또 다른 단어다. 나는 단어로 당신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단어-그림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 그 물질적 이미지는 완전히 부재한다. 소위 심리학적 이미지는 생물 조직 안의 어디에도 없다. 눈은 카메라와 같다. 당신이 무언가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다른 쪽으로 돌리면, 거기 있는 모든 것은 초점이 맞춰지는 곳에서 제거된다. 그리고 거기 있는 컴퓨터는(그의 머리를 가리키며) 오직 단어-그림이며, 소리일 수 있다. 요즘은 컴퓨터에게 명령하고 있다. 컴퓨터는 억양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컴퓨터는 거기서 조금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인도인은 인도 억양으로 말한다. 컴퓨터는 억양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요즘 당신은 컴퓨터를 타이핑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가 여기 이 컴퓨터(자신을 가리키며)에 등록되는 방식이다. 단어-그림은 여기 있다. 그것은 내가 준 모든 것. 단어- 그림이다. 내가 당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다면 나는 어떤 이미지도 만들 수 없다. 눈이 당신에게 초점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나의 내면의 이미지를 만들 방법이 없는 것처럼 나는 당신이 누구를 닮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문제가 되기를 그만둔다. "나는 굉장히 지적이고 예쁜 여성을 만났거나 보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의 딸이 가끔 묻는다. "보세요. 내가 당신의 딸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누군가 내게 "저 애가 누군가요?"하고 물으면 나는 "내 딸입니다?"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전적 의미의 단어다. Q : 그것이 우리 시스템이 있는 곳입니다. A : 우리가 가진 이미지는 단어에 부과된 것이다. 그것이 정말 문제다. 물리적 이미지는 빨리 꺼져버려야한다. 당신이 그렇게 하기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단 한가지도. Q : 물리적이라는 건 뭡니까: 물질은 무엇입니까? A : 당신도 모른다. Q : 아니, 저는 당신께 묻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설명하시겠습니까? A : 내가 사용하는 동일한 단어로. "이것은 나의 손이다." Q : 그럼 무엇이 물질입니까? 근본 물질은 무엇입니까? A : 거기 물질은 없다. 물질은 사고다. 당신이 무언가 딱딱한 것을 건드릴 때, 촉각은 이것은 딱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U.G. 의자 팔걸이를 건드리며) 일단 당신이 지식을, 과거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은 딱딱하다고 말한다. 사고는 여기 공간을 만들고 내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지식을 만든다. Q : 물질은 무엇입니까? A : 물질은 무엇인가? 정의를 원하는가? 사고는 물질을 만든다. Q : 그것이 내가 의문을 가지는 부분입니다. A : 그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다. Q : 그렇다면 우리가 사고를 제거하면 물질 또한 제거됩니다. A : 나는 정의를 내리는 데 아무 흥미도 없다. 거기 있는 건 에너지이기 때문에. Q : 우리는 물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물질은 사고에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고하지 않는다면...? A : 사고는 물질이다. Q : 사고를 가지지 않은 개는 어떻습니까? A : 개들은 아마도 사고의 일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아주 얽혀있고 복잡하게 되었다. Q : 사고, 인간의 사고가 물질의 일부로서 존재합니까? A : 거기 사고는 없다. 당신 안에 사고가 있는가? Q : 물론 우린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A : 아니다, 사고가 있는가? 아주 초반부에 내가 뇌는 창조자가 아니라고 했다. 사고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온다. 당신은 특정의 소리(천둥소리 같은)를 뉴우런이라는 기억의 도움으로 해석한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이것은 천둥소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거기 있는 모든 것은 정보다. 사고는 무엇인가? 우리는 당신이 알고자 하는 사고가 거기 있으리라는 추측 때문에 이 질문을 한다. 그러나 거기 있는 것은 오직 사고들에 대한 정보일 뿐이다. 모든 정의는 정보다. "사고는 물질이다."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Q : 그 말은 "사고는 물질이다"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까? A : 전혀 의미없다. 나는 사고는 왜 물질인가를 설명했다 왜냐하면... Q : 물리학자들이 당황하지 않을까요? A : 우리는 물리학자들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거기 사고같은 것은 없다, 물질로서의 그 무엇은 없다, 공간같은 건 없다 그리고 시간같은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과 공간 연속체는 무엇인가? 그런 연속체는 물리학자들을 위해 필요하다. 아니라면 그들의 모든 연구는 무너져 내린다. 공간이 있는가? 아니다. 공간은 없다. 당신이 공간을 경험할 방법은 없다. 공간을 만드는 것은 사고다. 공간에 대해 당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신이 공간을 경험할 길은 없다. 당신은 거기 사고가 없다고 말하고 거기 공간이, 물질이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당신은 사고를 만든다. 그 다음 사고는 공간을 만들고 그 다음엔 공간을 경험하고 공간을 포착하고 그것으로 뭔가를 하기 위한 거리를 커버하려는 필요가 생긴다. 그래서 그 다음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없다. 거기 있는 유일한 시간은 임의의 것이다. 여기는 오후 11시이고 다른 어느 곳은 다음 날 오전 11시다. 우리는 12시간을 뒤에 두고 있다. 당신이 인도로 여행을 한다면 당신은 하루를 잃어버리거나 하루를 얻을 것이다. 모든 시간 관념은 연대기적인 시간에 대한 개념조차도 모두 임의적인 것이다. 모든 측정은 임의적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일할 수 있을 만큼만 수용하며 그것이 전부다. 한 어린 소년이 어떤 남자에게 "왜 2 더하기 2는 4이어야만 해요?"라고 묻는다. 그 남자는 4개의 사과, 4개의 망고열매, 4개의 오렌지, 4루피를 가져온다. 소년에게 말할 것이다. "난 그런 건 관심이 없다. 1이 없다면 2가 없고, 2가 없다면 1은 어떻게 되니?" "나한테 그런 질문은 하지 마라"고 남자는 말한다. 그건 우리의 수학, 기하학의 종말이다. 나는 2 더하기 2는 4라는 것에 동의한다. 당신이 내게 4달러를 요구한다면 그걸 세서 당신에게 줄 것이다. 4루피든 4루블이든 그 특정의 시간에 내가 있는 나라에 달려있다. 산수의 영역에서조차 항상 참조지점이 있다. 누군가 특정한 물건의 가격을 어림잡을 때,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친숙한 통화의 의미 속에서 생각한다. 사물의 가치에 대해서조차도 참조지점이 있다. 그 참조지점은 달러나 루피 혹은 파운드 같은 것이다. 물질이 있는가? 공간이 있는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공간 경험의 불가능함 같은 것에 대해 물리학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식은 더욱 아니다. 사고가 없다면 당신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분리할 길이 없다. 당신이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고다. 거기엔 '당신'은 없고 공간 혹은 물질 혹은 시간같은 것을 경험하고자하는 요구가 있다. 사고는 또한 시간없음(無時間)의 개념을 만들었다. 모든 성취는 시간 안에 있다. Q : 이 모든 사고들은 어디에서 옵니까? A : 사고들은 도처에 있다. 우리 모두가 기능하고 있는 영역에는 사고가 있다. 그런데 답이 아주 명료하지는 않은 한 가지 의문이 (나는 스스로에게 이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나 자신에게 그 의문을 제기하는 의미도 없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관심도 없기 때문에) 있다. 사고가 세대에 세대를 거쳐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고 또한 유전자를 통해 전달되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내가 모든 지식은 오직 우리 교육의 양식, 형태, 크기, 그리고 정도를 통해 전달된다고 믿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유전자를 통해서 지식의 영역은 더욱 확장된다고도 믿는다. 현재 과학자들은 언어 학습 능력뿐만 아니라 언어가 유전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Q : 과학자들이 유전공학에서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 찬성하지만 그것이 국가에 의해 통제된다면? 그들은 연구의 성과물을 사람들이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어떤 일을 수행하도록 만들기위해 사용할 것이다. 지금 당신은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 그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게 하고, 전쟁터에 나가게 하고 총을 사용하게 한다. 신에 대한 믿음 혹은 무신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사람들을 세뇌하는데는 10여년이 걸린다. 하지만 유전학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약을 먹이거나 살해할 뿐일 것이다. 유전학에서 조차도, 그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 문제다. 그때부터 죽이는 일은 더욱 간단해진다. 당신은 살인자를 부를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죽이는데 문제를 느끼겠지만 그 다음부터 당신은 총처럼 행위하고 삶을 죽인다. 그것은 사고 없는 행위가 된다. 우리 모두가 묻고 관심을 가져야할 근본적인 물음은 '이 행성 위에 어떤 종류의 인간 존재를 원하는가? 어떤 종류? 인간 존재가 어떠하기를 바라는가? 당신의 대답은 어떤 것인가?' 이다. 당신이 원하는 바는 사고가 사람들을 교육하는 과정을 통해서 보다는 유전학의 도움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믿도록 만들고 다른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데는 많이 세월이 걸린다. 알콜중독의 성향이 있다면 흡연의 성향, 도둑질하는 성향이 있다면 그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성향을 가진 이에게 도덕적인 무엇을 가르치고 읽을 거리를 주는 것보다는 개인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가르치고 도덕적인 무엇을 심는 데는 몇 해가 걸린다. Q : 그렇다면 변화는 생물학적인 조작을 통해 가능합니다. A : 하지만 유전학에서 획득된 지식이 있을 때, 혹은 당신이 뭐라고 부를지 하여튼, 그것은 국가에게 귀속될 것이다. 우리는 곤경에 처해 있다. 어쨌든 국가라는 보호자는 그들 자신을 위해 이 연구를 진행한다. Q : 국가의 기능이 그런 식으로 될 것이라는 것입니까? A : 그럴 것이다. 국가는 그것을 통제할 것이다. Q : 적어도 어딘가에서는... A : 그렇다. 모든 곳에서. 왜 '어딘 가에서는'인가? 당신들이 하지 않아도 다른 어떤 나라가 할 것이다. Q : 당신 말씀은 유전 공학을 통해 새로운 종의 진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A : 진화같은 것이 있는가? 나는 그것조차 의문이다. 다윈은 우리 모두를 잘못된 괘도로 밀어 넣었다. 다윈은 획득 형질은 세대에 세대를 거쳐 전달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100여년 동안 우리를 다윈을 믿었다. 백여년 동안 우리는 또한 굉장한 사기꾼 프로이드의 이론을 믿었다. Q : 하지만 천여년 동안 진화의 믿음은 허용되었습니다. A : 지금 모든 것은 우리가 발맞출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든 곳에서 동시적으로 알 수 있다. 여기 무슨 일이 있는지 방글라데시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시간이라는 결정 인자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도움을 통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Q : 하지만 그건 진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A : 그렇다. 그것은 진화가 아니다. 그것은 시도와 실수의 과정이다. 당신은 동일한 것을 완벽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어제, "TV 50년"이라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았다. 나는 이런 TV쇼를 50년대 초반에 보았다. 우리가 오늘 본 것과 비교하면 그때의 것은 낡고 원시적으로 보인다. Q : 인간 종이 어떠하기를 바라십니까? 말씀하실 수 있다면... A : 나는 영혼의 수호자나 뭐 그런 것으로 선택되지 않았다. Q : 아닌 건 압니다만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방식같은 걸 .... A : 나는 정확히 있는 그대로를 원한다. 당신은 거기에 대해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당신과 싸우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아질 수 없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는 혼란을 초래한다. 당신이 행위하면 거기 폭력이 있다. 당신이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사고를 사용하는 한은 거기 폭력화하는 경계선이 있다. 그런 식으로 폭력이 되는 영역이다.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려는 당신의 시도가 거기 전쟁을 발생시킨다. Q : 잊고 있었습니다. (웃음) A : 세상에게 변화하라는 명령을 내린 건 누구인가? Q : 당신은 우리가 파괴를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있습니까..? A :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미래는 이미 여기 있다. Q : 어떤 의미에서? A : 현재 안에. 어떻게 그것이 다를 수 있는가? 내가 말했던 대로, 전쟁을 통해 당신은 이 세상에 평화를 만들 수 없다. Q :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A : 그럼 아마도 당신은 우리가 우리의 적과 함께 살아남을 상황을 강요하게 될 지점으로 갈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모든 세포의 생존은 그 다음 세포의 생존에 달려있다. 내가 무언가를 파괴하려할 때 나는 또한 그것과 함께 파괴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있다. 당신이 당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파괴하려 할 때 당신은 그들과 함께 파괴될 것이라는 이 공포가 지금 우리를 공존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사랑, 축복, 숭배 혹은 종교적인 사고는 아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영구히 존재해야 하는지 말해보라? 왜, 무엇을 위해? Q : 그게 문제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A : 왜? 왜 우리는 이 질문을 하고 있는가? Q : 아마도 영원히 존재하지 못할 것이므로... A : 우리는 관계없다.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지키기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가? 우리는 자연 안의 모든 것을 생태학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생태학적 문제를 악화시켰다. 당신은 우리가 하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배기가스에 반대한다면서 그 자신은 차를 모는 자들은 보자마자 눈에 띄는대로 쏴버려야 한다. 그들 또한 일조하고 있다. 그런 자들을 믿지 말라! 모든 생태학자들, 그들을 믿지 말라. Q : 그들은 관심이 없기 때문인가요? A :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Q : 자연을 보존하는데 관심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A : 아무도 관심 없다. Q : 당신조차도? A : 나는 관심을 가질 마지막 사람이다. 나는 달라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Q : 그건 모두 너무 냉혹합니다, 선생님! A : 그건 냉혹하지 않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냉혹하다 하는가? 그것은 오직 그것이다. 현실 그대로. 냉혹은 전혀 아니다. 당신은 그 단어, 환상적인 문장을 쓰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냉혹이라 말한다. 이 순간 이것을 보라. 정말 굉장하다! (둘 다 바다를 본다)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다음 순간 나는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거기 바다처럼 아름답다. 아마도 더 아름다울지도! 내가 아름다움에 대해 가진 이 모든 관념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거긴 경이로운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변화시키기위해 행동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다. 만물은 고유의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자연은 변하고 있다 - 어느 곳에선가의 화산 폭발 그리고 어느 곳에선가의 지진.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지진학자들은 정확하게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지진이 발생하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Q : 소행성이 우리에게 부딪힐 때는... A : 왜 그 모든 것들을 걱정하는가? -"누가 이 세상을 창조했는가?" "우리는 왜 사는가?." 이 모든 것들을 형이상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 남겨두자. Q : 아마도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일지도? A : 우리는 종말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Q : 그렇습니다. 나는 종말을 맞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종말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A : '여기'에 올 종말은 없다. Q : 그럼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나요.... 나는 종말이 매우 걱정됩니다. A : '차이'라 말하지 말라. 종말을 맞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말이 오기를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종말은 올 것이다. 종말 그 자체를 어쨌든,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 그 이후조차도 보존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추측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Q : 예, 이해하겠습니다. The end of "Thought is Your Enemy" translated by Sophia@chollian,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