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daemul ()
날 짜 (Date): 1999년 12월  8일 수요일 오전 09시 43분 06초
제 목(Title): ramana maharshi


Satsang With Ramana Maharshi
  
 
 
 
진아자각과 진아무지
 

 스리 라마나는 가끔 구도자(spiritual aspirants)에는 세 부류가 있다고 말하였다. 
가장 진보된 사람들은 진아의 참된 성품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순간 바로 진아를 
깨닫는다. 그 다음 부류의 사람들은 진아자각(Self-awareness)이 확고해질 때까지 
얼마간 모색을 해야 한다. 세 번째 범주의 사람들은 진아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의 집중적인 수행(修行, spiritual practice)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스리 라마나는 이 세 가지 수준을 설명하기 위해 때때로 
연소(燃燒)의 비유를 들곤 하였다. 즉, 화약은 금방 불이 붙지만, 숯은 불을 
붙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고, 젖은 석탄은 오랜 시간 그것을 말리고 가열해야 
불이 붙는다는 것이다.
 상위 두 범주의 구도자들을 위하여 스리 라마나는, 진아만이 실재하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관념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그만 두기만 
하면 직접적으로, 분명한 의식 하에서,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 그릇된 관념들을 한데 묶어서 '비(非)진아(not-Self)'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진정한 자기(the real Self)에 대한 참된 체험을 여지 없이 가려버리는 , 
그릇된 관념과 착각들의 가공적인(imaginary)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된 착각은, 자기[진아]가 육체와 마음에 제한되어 있다는 관념이다. 자기가 
특정한 육체 속에 살아 있는 한 사람의 개인이라는 생각을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그릇된 관념들의 상부구조가 일거에 무너져 버리고 진정한 자기에 대한 분명하고도 
영원한 자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수준의 가르침에서는 노력이라든가 수행이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단지 
진아란 성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비진아에 대한 모든 제한적 관념들을 버리기만 
하면 본래 만재(滿在)해 있는 자각(the awareness that prevails)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문: 어떻게 하면 제가 진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고요함(stillness) 또는 평안(peace)이 깨달음입니다.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이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생각들을 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생각들은 자기[진아]를 비(非)진아와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비진아가 사라지면 진아만이 남습니다. 물건을 
치우기만 하면 빈자리는 그냥 나타납니다. 그 빈자리는 딴 데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문: 깨달음은 원습 소멸(vasana-kshaya)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이 
원습(原習, vasanas, 마음의 습성)이 여지없이 소멸되는 그 상태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 그대는 지금 그 상태에 있습니다.
  문: 그 말씀은 진아를 착파(着把, 꽉 붙듦)하고 있으면 원습들이 나타나자마자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까?
  답: 그대가 존재하는 그대로(즉, 진아인 그대 자신으로) 머무르면, 그것들은 
스스로 소멸될 것입니다.
  문: 어떻게 하면 진아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답: 진아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만약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면, 
진아는 지금 여기 없으며 획득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새로이 
얻은 것은 언젠가 잃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아는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바로 진아이며, 그대가 이미 그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지복에 넘친 상태를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無知, ignorance)가 계속 나타나서 지복 그 자체인 순수한 진아 위에 하나의 
막(veil)을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릇된 앎(wrong knowledge)이라고 하는 이 
무지의 막을 제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그릇된 앎이란 자기[진아]를 육체 및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그릇된 동일시가 사라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진아만이 남게 됩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깨달음은 공부인들간에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 자체가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로부터도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문: 해탈(mukti)에 이르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답: 해탈이란 미래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영원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 말씀은 옳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답: 그 체험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의 진아를 부정 할 수 
없습니다.
  문: 그것은 (저의) 존재(existence)를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답: 존재는 행복과 동일하며 행복은 존재하는 것(being)과 동일한 것입니다. 
해탈(解脫)이라는 말은 상당히 혼란을 일으킵니다. 왜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까? 
그대는 속박(bondage)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해탈을 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속박이란 없으며 해탈만 존재합니다. 왜 굳이 해탈이란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찾습니까? 
  문: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무지합니다.
  답: 그 무지만 제거하십시오. 그것이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해탈에 관한 
모든 질문들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해탈이란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며, 
그것은 지금 현재 속박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시실 속박이란 
없으며, 따라서 해탈도 없습니다.
  문: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의 섬광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서양인들의 
깨달음은 어떤 성질의 것입니까?
  답: 그것은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섬광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항상 존재하고 있는 의식을 깨달았을 때에만 그 깨달음이 
영원합니다. 의식(consciousness)은 실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합니다. 누구나 '내가 
있다(I am)'는 것을 압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깊은 잠 속에서는 의식이 없지만, 깨어있을 때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사람입니다. 잠자던 사람과 지금 깨어있는 사람 
사이에 바뀐 것은 없습니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자신의 육체를 의식하지 못하므로 
육체 의식(body-consciousness)이 없습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그의 육체를 
의식하므로 육체 의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차이는 육체 의식이 나타나느냐 
않느냐에 있을 뿐, 진정한 의식(real consciousness)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육체와 육체 의식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가라앉습니다. 결국 깊은 잠 속에서는 
아무 한계가 없으나, 깨어있을 때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가 바로 
속박입니다. '육체가 나'(The body is I)라는 느낌이 착각이며, 이 거짓된 '나'의 
느낌이 사라져야 합니다. 참 '나' (the real 'I')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 나타나지도 않고, 다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that which is)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며, 새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깊은 잠과 생시를 비교해 보십시오. 생시에는 육체가 
나타나지만 잠들었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육체보다 먼저 있었고,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남을 것입니다.
  '내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육체다'라는 그릇된 
생각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이 그릇된 생각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새로 생겨난 
능력도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단지 모든 위장물(camouflags)을 제거해 버린 그것일 
뿐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원초적인 상태의 존재(being in the 
pristine state)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말의 전부입니다.
  문: 우리는 깨어있을 때보다 깊이 잠들었을 때 순수 의식(pure consciousness)에 
더 가깝습니까?
  답: 잠, 꿈 그리고 생시의 상태들은, 그 자체 변함없는 진아의 위에 나타나는 
단지 현상(phenomena)일 뿐입니다. 진아는 어디까지나 단순한 자각의 상태인 
것입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진아와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런 질문도 할 수 있겠지요.
  문: 깨어있을 때보다 깊이 잠들었을 때 우리는 순수 의식에 더 가깝다고 흔히들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답: 그 질문은 '저는 깨어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을 때에 저 자신에게 더 
가깝습니까?'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진아는 순수 의식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진아와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원성이 존재한다면 그런 질문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순수 의식의 상태에서는 
이원성이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잠을 자고, 꿈을 꾸고, 깨어납니다. 깨어있는 상태(waking 
state)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잠들었을 때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으므로, 잠의 상태(sleep state)는 둔한 상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더 나아가기전에 이 점을 분명히 해봅시다. 그대는 잠자는 동안에도 
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문: 예, 그렇습니다.
  답: 지금 깨어있는 그대는 잠자던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 그렇습니다.
  답: 그렇다면 잠의 상태와 생시의 상태간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 연속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수한 존재의 상태(state of pure being)라는 것뿐입니다.
  (잠과 생시의) 두 상태간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생시의 상태에서는 사건들, 즉 육체, 세계 그리고 사물들이 나타나지만 잠 
속에서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문: 그러나 저는 잠들어 있을 때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답: 그렇습니다. 잠들어 있을 때는 육체나 이 세상(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저는 잠들어 있을 때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잠자는 동안에도 그대가 존재해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며, 잠자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기[진아]를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자신을 육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위의 세상을 보면서 생시의 상태는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잠의 상태에서는 
개인으로서의 그대가 없고, 따라서 육체나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둔한 
상태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세 가지 상태 모두에게 존재는 
연속되지만, 개인과 사물들을 연속되지 않습니다.
  문: 그렇습니다.
  답: 연속되는 것은 또한 지속적입니다. 즉, 그것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연속되지 
않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문: 그렇습니다.
  답: 따라서 존재의 상태는 영원하지만 육체와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영원하며 변치 않는 존재-의식의 화막(screen)위를 스쳐가는 현상들일 
뿐입니다.
  문: 상대적으로 말해서 잠의 상태가 생시의 상태보다 순수 의식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잠에서 생시로 넘어올 때 
'나'라는 생각[개인적 자아]이 다시 시작되며, 마음도 다시 활동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생각들이 일어나면서 육체의 기능들도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깨어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잠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전개되지 않으므로, 생시의 상태보다 순수 의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언제나 잠만 자고 있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첫째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잠의 상태는 반드시 다른 상태들과 번갈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잠은 진인이 누리는 지복의 상태가 아닙니다. 진인의 
상태는 영원하며, 다른 상태와 교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잠의 상태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각의 상태가 아니지만, 진인은 (이때에도) 항상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잠의 상태는 진인이 자리잡고 있는 깨달음의 상태와는 다른 
것입니다.
  더욱이 잠의 상태에서는 생각이 사라지고 개인이라는 의식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 상황에서는 어떤 노력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수 의식에 보다 가깝기는 하지만, 진아를 
깨닫고자 노력하기에는 적합한 상황이 아닙니다.
  문: 자신의 절대적 존재, 즉 범지(梵知, Brahma-jnana)를 깨닫는다는 것은 저 
같은 속인(俗人)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梵知: 지고의 실체인 
브라흐만에 대한 참된 知)
  답: 범지(梵知)는 얻을 수 있는 지식, 즉 그것을 얻음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리 포기한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대가 알고자 하는 진아는 진정 그대 자신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무지로 인하여 
그대가 까닭 없이 슬퍼하는 것은, 마치 열 명의 바보들이 한 명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우화(寓話)에서 바보 열 명이 작은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건너편에 
도착하자 전원이 무사히 건너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인원을 세었는데 다른 사람들만 세고 자기는 세지 않았습니다. '아홉 명 뿐이야. 
분명히 한 명이 없어졌어. 그게 누구지?' 그가 말하자, 다른 사람이 '정확하게 
세었나?' 하고는 이번에는 자기가 세어보았으나 역시 아홉 명뿐이었습니다. 결국 
열명이 다 세어 보았지만, 자기를 빼고 세었기 때문에 누가 세어도 아홉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홉 명 뿐이야. 그런데 없어진 사람이 누구지?' 그들은 
서로 물어 보았지만, 없어진 한 사람이 누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음 여린 사람이, '물에 떠내려간 것이 누구든, 우리는 그를 
잃어버렸어'하면서 울음을 터뜨리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울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이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바보들이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며 자기들이 몇 번을 세어도 아홉 명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 눈으로 그들이 열 명임을 확인한 행인은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모두 강을 건너왔으며, 열 명이 맞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내가 한 사람을 한번씩 때릴 
테니까 그때마다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하나, 둘, 셋 이렇게 소리내어 세도록 
하시오. 그러면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이 말을 듣자 바보들은 
'잃어버린' 동료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기뻐하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행인이 바보 열 명을 차례로 한 사람씩 때리는 동안 맞는 사람은 큰 소리로 
숫자를 세었고, 마침내 마지막 사람이 '열'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바보들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이구동성으로 '열 명이 맞구나'하면서 기뻐하고, 그들의 
슬픔을 가시게 해 준 행인에게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이 우화의 내용입니다. 열 번째 사람을 어디서 데려왔습니까? 그를 정말 
잃어버렸던가요? 열 번째 사람이 실제로는 거기 계속 있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슬퍼하게 된 원인은 진짜로 한 
사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으며,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고 단지 상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대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로 그대가 비참해 하거나 불행을 
느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무한한 존재(infinite being)라는 그대의 참된 
성품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다음, 그대가 하나의 유한한 중생(finite 
creature)이라고 생각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 저런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수행한다면, 그 수행이 그대로 하여금 그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대가 실로 무한한 순수 존재, 즉 진아임을 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항상 진아이며 오직 진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진아에 
대해 정말로 무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대의 무지는 저 바보 열 사람의 '잃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무지와 같은 상상적인 무지(imaginary ignorance)일 뿐입니다. 
그들을 슬프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무지입니다. 
  진지(true knowledge)란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의 무지한 무지(ignorant ignorance)를 제거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또한 그대의 성품에 지복이 더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복은 단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대의 진정한 본래적 상태로서 저절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대가 슬픔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진아를 알고 진아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대에게 이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문: 브하가반께서 아무리 가르쳐 주셔도, 저희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답: 사람들은 일체에 두루한 이 진아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삼척 동자라도 '내가 있다, 내가 한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줄 
압니다. 그러니 '나'라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며 '나는 철수다', '그는 영희다'라는 식의 느낌이 드는 
것은 오로지 이 '나'가 존재할 때입니다. 언제나 목전에 분명한 그 사람이 바로 
자기[진아]임을 알기 위해 촛불을 켜들고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진아와 다르지 않으며 그 안에 있는, 진아의 참된 성품(atma swarupa)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 그렇지만 그 상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습니까?
  답: 도달해야 할 목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성취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대가 
바로 진아이며, 그대는 항상 존재합니다. 진아에 대해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외에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을 본다, 혹은 진아를 본다는 것은 
단지 진아, 즉 그대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란 존재하는 
것입니다.(Seeing is being). 그대는 진아이면서, 진아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마치 이곳 라마나스라맘(Ramanasramam)에 있는 사람이, 
라마나스라맘에 가는 데에는 어떤 길들이 있으며, 그 중 어느 길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는 다만 그대가 이 육체라는 생각을 
포기하고, 외부의 사물들, 즉 비진아(not-Self)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포기하기만 
하면 됩니다.
  문: 에고 자아(the ego-self)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한 자기(the real 
Self)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답: 에고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인 반면, 진정한 자기[진아]는 
영원합니다. 그대는 실제로는 진아임에도 불구하고 진아를 에고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문: 어떻게 해서 그런 착각이 일어납니까?
  답: 그런 착각이 과연 일어났는지 살펴보십시오.
  문: 에고를 진아로 승화시켜야 합니까?
  답: 에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 그러면 그것이 왜 저희들을 괴롭힙니까?
  답: 누구에게 괴로움(trouble)이 있습니까? 그 괴로움도 상상한 것입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에고에게만 해당됩니다.
  문: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무지에 휩싸여 있습니까?
  답: 그대 자신을 걱정하십시오. 세상은 세상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대의 
진아를 보십시오. 만약 그대가 육체라면 이 거친 세계(the gross world, 물질적 
현상계) 역시 존재합니다. 만약 그대가 영(靈, spirit)이라면 모든 것이 영(靈)일 
뿐입니다.
  문: 그렇게 하면 그 개인에게는 좋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답: 먼저 그렇게 해보고 나서 그 질문이 나중에도 일어나는지 살펴보십시오.
  문: 무지(無知, avidya)라는 것이 있습니까?
  답: 누구에게 말입니까?
  문: 에고에게 말입니다.
  답: 그렇지요. 에고에게입니다. 에고를 제거하십시오. 그러면 무지는 
사라집니다. 에고를 찾아보면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진아만이 남습니다. 무지가 
있다고 말하는 에고지만, 막상 에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은 무지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들(sastras)은 무지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해서 씌어진 
것입니다.
  문: 에고는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답: 에고는 없습니다(Ego is not).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두 개의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까? 에고가 없다면 무지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대가 탐구해 보면, 본래 존재하지 않던 이 무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거나, 혹은 그것이 도망가버렸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무지는 에고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왜 그대는 에고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받습니까? 도대체 무지란 무엇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무지입니다. 
그러나 세간적 삶(worldly life)은 무지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무지는 단지 우리 (마음)의 무지일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아를 모르는 
것 혹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태양 앞에 어둠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분명하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진아 앞에 무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진아를 알게 되면 어둠도 없고 무지도 없으며, 아무런 
불행도 없을 것입니다.
  괴로움과 불행을 느끼는 것은 마음입니다. 어둠이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해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어둠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진아를 바라보면 무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문: 비(非)실재(the unreal)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비실재가 실재(the 
real)로부터 나올 수도 있습니까?
  답: 그것이 과연 나타났는지 살펴보십시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비실재 같은 
것은 원래 없으며, 진아만이 존재합니다. 그대가 만약 이 세계와 만물을 지각하는 
기초가 되는 에고를 추적해 들어가면, 이 에고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대가 
보는 이 삼라만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문: 진아를 알기가 너무 어렵도록 해 놓은 신(神)의 유희(遊戱, leela)가 
잔인하군요.
  답: 진아를 안다는 것은 진아가 되는 것이며, 곧 자기 자신으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눈을 스스로 보지는 못해도 자기의 눈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듯이,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대가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의 눈을 대상화(對象化)하듯이, 진아를 대상화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대는 대상화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대 자신을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진아는 결코 대상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아를 알려고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지각 능력이 없는 육체가 진아를 알 수 있습니까? 그대는 늘 그대의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막상 '나'에 대해서 물어보면 모른다고 
합니다. 그대는 진아이면서 어떻게 하면 진아를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신의 유희가 있으며, 어디에 그 잔인함이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이처럼 진아를 모른다고 하니까 경전에서 환(幻, maya)이니, 유희니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 저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답: 예,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도움입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는 다른 사람들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달은 존재(a realised being)은 
오직 진아만을 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금 세공인이 여러 가지 금붙이들이 모두 
금으로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면 여러 가지 형상과 
모양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육체를 초월하면 다른 것들은 그대의 육체 
의식과 함께 사라집니다. 
  문: 풀이나 나무 같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까?
  답: 그것들은 진아와 떨어져 존재합니까? 그것을 규명하십시오. 그대는 자신이 
그것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진아로부터 투사(投射)되어 
나옵니다. 그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생각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진아만 남게 될 것입니다.
  문: 이론적으로는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화막에 빛이 비치면서 
그림자들이 그 위를 지나가면 관객들은 한 편의 작품이 상영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도 작품의 일부로서 화면에 
나타나도록 한다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모두 화막 위에 놓이게 되겠지요. 
이것을 그대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진아인) 그대는 화막이며, 진아가 
에고(보는 자)를 만들어내고, 이 에고가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이 세상과 
그대가 지금 묻는 나무나 풀 등(보이는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것들이 모두 진아일 일뿐입니다. 만약 그대가 진아를 보게 되면 그대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이 진아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직 진아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 예, 저는 아직 이론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내용은 간명하고 
아름다우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답: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도 하나의 장애입니다. 사실 진아만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참된 성품은 해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항상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속박되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갖가지 힘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상태에 도달할 때에야 이해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항상 그렇게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러한 그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하나의 비유를 들면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방안에서 잠이 듭니다. 
꿈속에서 그는 세계 여행을 떠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숲과 들판, 사막과 바다를 
지나 여러 대륙을 전전하다가, 지치고 힘든 여러 해의 여행 끝에 이 인도 땅, 
띠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로 돌아와 이 아쉬람의 이 방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이 방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채, 누운 그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고생고생 하면서 이 방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내내 이 방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누가 '본래 자유로우면서도 왜 우리는 
속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내내 
이 방 안에 있으면서, 왜 그대는 자기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막과 바다를 지나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것은 모두 마음이며 환(幻)입니다.' 
  문: 그렇다면 범인[깨닫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도 불행하게도 왜 이러한 
유일무이한 실체에 대한 무지가 일어납니까?
  답: 범인(凡人, ajnani, 無知人)은 심장으로부터 일어나는 순수 의식의 빛이 
반사된 것에 불과한 마음만을 볼 뿐, 심장 자체는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밖으로만 향해 있어서 그 근원을 전혀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 심장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무한하고 무차별한 그 빛이 범인에게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항아리 속에 담긴 물이 무한정한 햇빛을 항아리의 좁은 한계내에서만 
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마음의 원습(vasanas), 즉 잠재적 습성이 
반사매체로 작용하여, 심장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체에 두루하며(all-pervading) 
무한한 의식의 빛을 잡아 가두는 것입니다. 이같은 반사의 형태가 바로 마음이라고 
불리는 현상입니다. 범인은 이 반사된 빛만을 보고 자신이 유한한 존재인 
개아(個我, jiva), 즉 개인적 자아라는 그릇된 믿음에 빠져듭니다.
  문: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답: 마음의 습(習)(vasanas, habits of mind)입니다.
  문: 마음의 습은 어떻게 극복합니까?
  답: 진아를 깨달음으로써 극복합니다.
  문: 그것은 하나의 순환논법입니다.
  답: 이같은 난점을 야기하는 것은 바로 에고입니다. 즉, 장애물을 만들어내고는, 
명백한 모순의 난관에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러한 질문들은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면 진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문: 이 마음의 속박이 왜 이렇게 집요합니까?
  답: 속박의 본질은 단지 '나는 실체와 다르다'라고 하는, 그릇된 파괴적인 
생각(the false, ruinous thought)일 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실체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물리치도록 하십시오.
  문: 왜 저는 제가 진아라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까?
  답: 사람들은 진아의 충만함(fullness)에 대한 기억과 망각을 이야기합니다. 
망각과 기억은 생각의 형태들(thought-forms)에 불과합니다. 생각이 있는 한, 
망각과 기억은 번갈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실체는 그것들의 너머에 있습니다. 
기억이나 망각은 무엇인가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 의존하는 무엇은 진아에게도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망각도 없을 것입니다. 기억과 
망각이 의존하는 그것은 바로 개인적 자아라는 관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찾아보면, 이 개인적인 '나'라는 것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나'란 환(maya), 곧 무지(無知, avidya, ajnana)와 같은 
의미입니다. 무지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 모든 영적인 
가르침들의 목표입니다. 무지는 자각하는 사람의 것이어야 합니다. 자각이 
진지입니다.(Awareness is jnana). 진지는 영원하며 본래적이지만, 무지는 
비본래적이며 비실재적입니다.
  문: 이 같은 진리를 듣고도, 왜 저희들의 의혹이 다 풀리지 않는 것입니까?
  답: 상습(常習, samskaras)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습이 
소멸되지 않는 한 의심과 혼동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의심과 혼동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며, 그러자면 그 뿌리들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 뿌리가 바로 상습입니다. 상습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른 수행에 의해 
무력해집니다.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그러한 수행을 많이 하게 함으로써 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합니다. 진리를 들음(sravana)이 그 첫 
단계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확고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성찰(省察, manana)과 
일여내관(一如內觀, nididhyasana, uninterrupted contemplation)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상습들은 그 씨앗이 불태워지고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은 진리를 단 한번 듣기만 해도 바로 확고한 진지를 
얻은데, 이런 이들은 진보된 공부인입니다. 초심자들은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문: 도대체 무지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답: 무지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무지는 전혀 실제적 존재성이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지(知, vidya) 뿐입니다.
  문: 그렇다면 왜 제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답: 상습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깨닫지 못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깨닫지 
못하는지 탐색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무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문: 그렇다면 목표를 설정하고 시작하는 것은 잘못이로군요.
  답: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목표는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에고로써 이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이 
목표는 에고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목표 안에 들어있는 것은 우리의 
탄생, 그러니까 에고의 탄생보다도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진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에고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진아를 에고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에고가 되고,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되며, 육체라 생각하면 우리는 육체가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온갖 
껍질(sheaths, 幻殼)을 짓는 것입니다. 물위에 비치는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립니다. 누가 그 그림자의 흔들림을 멎게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흔들리기를 그치면, 물은 보이지 않고 물에 비치는 빛만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에고와 그것의 행위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배후의 빛만 보게 
될 것입니다. 에고는 '나'라는 생각(the thought 'I')입니다. 그러나 참 '나'(the 
true 'I')는 진아입니다.
  문: 만약 그것이 관념을 포기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단 
한 걸음이군요
  답: 깨달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생각들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바로 
유일하게 실재하는 상태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자기[진아]를 
깨닫지 않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existence)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두 개의 자기(two selves), 즉 
깨닫는 자기와 깨달아지는 자기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진아(our Self)를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문: 생각들, 즉 마음 때문입니다.
  답: 그렇습니다. 이 마음이란 것이 우리의 행복을 가리웁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만약 주위에 이 세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깊이 잠들었을 때에도 그대가 존재했다는 것을 그대는 어떻게 압니까?
  문: 어떻게 하면 마음을 없앨 수 있습니까?
  답: 마음이 스스로를 죽이겠다는 것입니까? 마음은 스스로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대가 해야 할 일이란 마음의 참된 성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아를 추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아에 안주하면 마음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 해탈이 깨달음과 같은 것입니까?
  답: 해탈은 우리의 성품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탈을 바란다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늘에 
있던 사람이 제 발로 그늘을 나와 뙤약볕 아래에서 무더워 못 견텨 하다가 간신히 
그늘로 돌아와서는 '그늘이 얼마나 좋아, 드디어 그늘을 찾았어'하며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꼭 이런 식입니다. 우리는 실체와 다르지 않은데도, 
실체와 다르다고 상상합니다. 즉, 스스로 실체와의 괴리감(bheda bhava)[다르다는 
느낌]을 만들고는, 이 괴리감을 없애고 실체와 하나임을 깨닫기 위하여 엄청난 
수행(sadhana)을 하는 것입니다. 왜 구태여 괴리감을 상상해내고 다시 그것을 
없애려고 합니까?
  문: 그것은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스리 
브하가바따](Sri Bhagavata)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는 은총은 스승의 발에 묻은 
먼지에서 얻을 수 있다 했습니다*. 부디 저에게도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 
스승의 발에 이마를 갖다대면서 스승에 귀의하는 풍습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쓴 
듯하다)
  답: 그대 자신의 존재(being) 말고 무엇이 은총인가요? 그대는 존재와 떨어져 
있지 않으며, 존재가 바로 은총입니다. 그대는 지금 자신이 마음이거나 육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과 육체는 변해가며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변하지 
않으며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문: 저는 어두움 속에 있고 무지합니다.
  답: 그 무지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무지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무지를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의 그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는데, 
그것을 무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혜(wisdom)입니다.
  문: 그러면 왜 저는 벨로르(Vellore)에 있을 때에는 불행을 느끼는데 여기 와서 
스승님 곁에 있으면 평안을 느낍니까?
  답: 여기서의 그 느낌은 지복일까요? 이곳을 떠나면 그대는 불행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느끼는 평안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다른 곳에서 느끼는 
불행과 뒤섞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도처에서 그리고 오랫동안 지복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지복이 실질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영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 자신이 '존재하는 것'(being)이야말로 영속적입니다. 진아가 
되십시오. 그것이 바로 지복입니다. 사실 그대는 항상 지복입니다.
  진아는 항상 깨달아져 있습니다. 이미 그리고 항상 깨달아져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존재(existence)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가 곧 의식이며, 
진아입니다.
  만일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존재가 진아입니다. 그것은 이미 
깨달아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으려고 하는 그대의 노력은, 그대가 자신의 
진아를 깨닫지 못했다고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이란 없습니다. 진아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문: 그렇게 되는 데는 몇 년이 걸리겠군요.
  답: 왜 몇 년입니까? 시간이라는 관념은 그대의 마음 속에만 존재할 뿐, 
진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고가 나타난 뒤에 시간도 하나의 관념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아이며, 시간과 공간 없이도 
존재합니다.
 그대가 훗날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이 만약 진실이라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은 
깨닫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깨달음이 없다면 미래의 
어느 순간에 다시 깨달음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시간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깨달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릇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변할 수 없는, 
진실로 영원한 상태입니다.
  문: 예, 저도 그것을 때가 되면 이해하겠지요.
  답: 그대는 이미 그것(진아)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진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대의 안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그대 주위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그대의 안에 있습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값비싼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경황 중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목걸이를 어디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애가 타서 집 안을 다 뒤져보았으나 목걸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나 
이웃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다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한 친구가 그녀에게 
목을 더듬어 보라고 일러주어서, 그녀는 그 목걸이가 내내 자기 목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녀에게 목걸이를 
찾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예, 찾았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잃어버린 보물을 찾은 것같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녀는 목걸이를 정말 잃어버렸던가요? 그것은 내내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녀는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찾은 듯이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아 아닌 적이 
결코 없는데도 언젠가 진아를 깨달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 그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답: 하나의 목표가 있고, 거기에 도달하는 길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 목표, 즉 평안입니다. 우리가 평안이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문: 모든 책에서는 스승(Guru)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답: 스승들은 결국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스승은 그대가 
이미 갖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그대에게 주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이미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새롭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설사 새로 무엇을 얻는다 해도, 
결국 다시 잃게 될 것입니다. 온 것은 반드시 가게 되어 있으며, 항상 존재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스승은 그대가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새로운 
것도 그대에게 줄 수 없습니다. 진아를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우리는 항상 진아인데도 단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진아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면서 '진아(atma)가 어디 있나? 이것이 어디 
있지?' 하다가, 마침내 지견(知見, jnana drishti)이 열리면 '이것이 진아요, 
이것이 나다'하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지견을 얻어야 합니다. 일단 이 
지견에 도달하고 나면, 비록 세간에 섞여 살며 세간을 다닌다 해도 아무런 집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발을 신으면, 길바닥에 아무리 많은 돌이나 가시가 있다 
해도 걸을 때 발이 아프지 않습니다. 비록 눈앞에 산들이 나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견을 성취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본래적입니다. 자기 자신의 진아와 다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문: 그러한 본래적 상태는 이 모든 세속적 소견(worldly vision)이 사라진 
뒤에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것이 사라집니까?
  답: 마음이 사라지면 세계 전체가 사라집니다. 마음이 이 모든 것을 낳은 원인인 
까닭입니다. 마음이 사라지면, 본래적 상태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진아는 항상 
'나, 나'(I,I)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아는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진아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왜 그것을 찾습니까? 고인(古人)들이 말씀하시기를, 
'진지 속으로 소견을 흡수시키면 현상계가 곧 브라흐만임을 보게 된다' 하였습니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