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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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limelite (깜찍이중독)
날 짜 (Date): 1999년 11월 10일 수요일 오전 01시 39분 58초
제 목(Title): 갈]김경환/ 법륜스님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호연지기) <TCMAB106-47.spli> 
날 짜 (Date): 1999년 11월  9일 화요일 오전 07시 58분 05초
제 목(Title): 김경환/ 법륜스님 


사람과 세계 -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법륜 스님 

깨달음은 주체적 삶, 창조적 실천의 출발점 




김경환 

64년 생, 83년부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고 [양천신문] 취재부 차장역임, 현재 
월간 [말] 취재부 차장. 

르포집 [열린사회]에 참여했고 [또 하나의 투쟁]과 [권영길과의 대화]를 지었음 


 

 

옛날에 어떤 사람이 도를 얻겠다고 발심하여 출가를 했다. 큰 절에 들어가 3년 간 
공양주를 한 다음 스님이 되었다. 조석 예불을 드리고, 가사 장삼을 법도에 맞춰 
입고, 기도와 참선도 몸에 익혔다. 계율도 열심히 지켰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도가 열리지 않았다. 스님은 깊은 산에 들어가 7년을 정진했다. 그러나 두발로 
일어섰다고 할 만한 것은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폭설이 내려 산 전체가 눈에 잠겼다. 땔감도 떨어지고, 
양식마저 바닥나자 30리 떨어진 마을로 내려가게 되었다. 양식과 장작을 얻어 
산으로 돌아가려는데 또 폭설이 내려 도저히 형편이 닿지 않았다. 날도 풀리고 
눈이 좀 녹자,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암자에 도착해 보니 댓돌 위에 
신발이 한 켤레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을 보는 순간 스님은 자책감이 들었다. 이 
추운 겨울에 양식도 땔감도 없이 며칠을 지냈을 터이니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냉기가 서려 있으리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의외로 더운 열기가 
가득했다. 깜짝 놀라 방안을 살펴보니 구석에 한 스님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땔감 없는 암자의 방안에 열기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곤하게 자는 객을 
깨울 수가 없어서 법당으로 가서 삼배를 올렸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삼존불 
중 하나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스님은 비로소 의혹이 풀렸다. 의혹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스님은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객스님의 멱살을 잡고 "네가 그래도 부처님 밥을 먹고사는 명색이 
중인데, 어떻게 불상을 갖다 땔감으로 쓸 수 있느냐"고 야단쳤다. 그러자 객스님은 
"목좀 놓으시오, 아주 급한 일이 있소" 하더니 신발도 안 신고 부엌으로 뛰어갔다. 
부지깽이로 열심히 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스님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도대체 뭐하는 거요?" 

"사리를 찾아야지요." 

이 말에 스님이 비웃으며 말했다. 

"목불(木佛)에 무슨 사리가 있다고." 

재를 뒤지던 객스님이 태연스레 말했다. 

"그럼, 나머지도 마저 갖다 때야겠네." 

온 정열을 바친 7년 수행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던 그는 이 소리에 번갯불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불상으로 불을 땠다고 화가 잔뜩 난 이유는, 7년간 경배한 
목불을 마치 살아 있는 부처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객스님이 사리를 
찾는다고 하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모순을 드러냈다. 불상이 나무토막이라면 무엇 
때문에 법당에 모셔 놓고 절을 하는가. 필요한 곳에 써 버리는 것이 훨씬 유용하지 
않겠는가. 그는 마침내 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가난하게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결국 덮어쓰고 있는 것을 깨 버리거나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수많은 상호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바로 그 모순을 극복하고, 미혹과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바르게 보는 것이 진리의 길이다. 그것이 불교이고 부처다. 마음 속에 
세워 둔 관념과 착각이라는 이름의 목불을 쪼개서 불쏘시개로 써 버리는 것이 
구도자가 가야 할 길이다. 

법륜 스님은 진정한 불제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통일된 하나로 보고 있다. 소비주의에서 상생의 삶으로, 개별적 
단독자에서 내가 세계의 일부라는 연기적 세계관으로, 혁신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그는 미래사회의 진정한 주체, 깨달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삶을 목표로 
쉬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정토회 지도 법사이자 사단법인 '좋은 벗들'과 사단법인 
한국 JTS(joint together society) 이사장인 그는 북한동포를 비롯해 제3세계의 
기아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환경을 개선하고 공동체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를 만난 날은 1백일 법문을 시작한 지 81일째 되는 6월 2일 오후였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1백일 동안 부처님의 삶과 미래사회의 인간형에 대해 강론하고 
있다. 법문은 신라시대부터 유래한다. 사회가 혼란할 때 훌륭한 고승 1백명을 
모셔서 왕과 대신들이 말씀을 들었다.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마음을 
정화시키고 맑아지면 백성들이 다 편안해진다. 이것이 백고좌법회의 유래다. 그 
정신을 본받아서 법회를 연 것이다. 오전과 오후 두 차례 세 시간씩 하는 법문에는 
약 4백여 명의 불교 신자와 일반인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 하루도 빠짐없이 법문에 정진하고 계시는데, 주로 어떤 내용을 갖고 말씀을 
하십니까. 

"불교사상이 지난 2천5백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이 되어 왔는지, 어떤 
경우에 많은 지지를 받았고 어떻게 변질이 되었는지, 새로운 불교운동은 왜 일어 
왔는지를 주로 살펴보고 있어요. 이런 것을 다루는 이유는 오늘의 불교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새롭게 일어나려는 불교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 것인지, 
그것이 일어날 때 어떤 어려움이 닥칠 건지를 예측할 수 있지요. …이제 불교가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지요. 새로운 불교는 과거의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모순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때 가능할 수 있어요." 

― 과거 불교의 경험에서 새로운 불교를,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모색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불교가 갖는 긍정성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과거의 낡은 불교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이 있어요. 
옛날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과학적인 방법론이 우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유용하게 등장했어요. 그러니까 과거의 잘못된 불교만 비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비전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제 종교를 넘어서 다른 철학이나 과학에 
대한 검토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자연과학て사회과학을 배타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긍정점을 수용하는 종합적인 
관점이 필요하지요. 불교로부터도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 스님은 오랫동안 불교의 역사와 부처님의 사상을 가르쳐 오셨는데,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긍극적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행복이 뭐냐?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냐. 
지위가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하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 분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괴롭다거나 
뭐가 필요하다고 얘기해 본 적이 없어요.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왕들이 많았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갖춘 사람들이 왕이지 않습니까. 그런 왕들이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사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괴로움을 호소합니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봐야지요." 

석가모니 부처는 성불한 뒤 45년간 다 떨어진 옷 한 벌만 걸치고 맨발도 다녔다.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기근에 허덕이면 함께 굶주렸고, 마을 사람들이 
말먹이로 허기를 달래면 함께 말먹이를 먹었다. 부처가 부처인 것은 금빛 찬란한 
옷, 삼십 이상 팔십종호라는 찬란한 몸매, 타고난 웅변과 위엄 때문이 아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중생과 함께 했고, 중생 스스로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에 
부처인 것이다. 


소비주의의 노예에서 삶의 당당한 주체로 


5월 22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서초동에 있는 정토회관 1층에는 수많은 
불교신도들이 법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불상 앞에 앉아 참 행복을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는 이는 이현주 목사였다. 좌중은 시종 웃음바다였다. 법륜 스님이 
강연을 갈무리하면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늘 우리를 위해 좋은 말씀을 해주신 목사님을 위해 찬송가 하나 부릅시다." 

익숙한 것처럼 신도들은 큰소리로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불렀고, 할렐루야 소리가 
법당을 울렸다. 매우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종교의 벽이 허물어지고, 나와 너의 
벽이 허물어질 때 더불어 사는 삶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세상에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같습니다.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인간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점을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소비주의 문명입니다.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기준으로 
선진て후진, 발전て비발전, 진보て 퇴보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자연고갈과 환경파괴를 피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이러한 소비주의적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전망을 찾기 어렵습니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이웃과 다투지 
않고, 높은 지위를 획득하지 않고도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부처님의 삶은 우리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 결국 인간이 변화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인류역사상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연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쥐가 좋은 줄 알고 쥐약을 먹지만 결국은 죽게 
되지 않습니까. 자각이 있었다면 먹지 않지요. 우리는 환상을 쫓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자각을 하고 나면 아무런 미련도 생기지 않습니다. 자각을 통해 
혁명적으로 자기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적인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운동은 없어서 못 입고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안 입고 안 먹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가지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희생이 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는 운동입니다. 하루 하다가 죽으면 그만큼 행복하고, 이틀 하다가 
죽으면 그만큼 좋을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 삶의 당당한 주체가 되는 운동입니다." 

― 스님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기본적인 물질생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자각만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얘기를 해보지요. 노동해방의 관점에 대한 것인데, 지금까지 노동해방의 
목표는 적은 시간을 일하고 많은 임금을 쟁취하려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노동은 영원히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을 하는 것은 
대가를 기대하는 하나의 행위란 말이에요. 노동을 하지 않아도 그 대가를 준다면 
누구나 일 안하고 받으려 할 거예요. 돈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기 때문에 
노동의 행위가 비주체적이란 말이에요. 자기 육신의 행위, 자기 삶의 행위에 대해 
이미 종속적 태도라는 거죠. 예를 들어 디스코 걸은 3만원 받고 흔들고 우리는 
3만원 주고 흔들잖아요. 똑같이 흔드는데 디스코 걸은 가능하면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건 왜 그런가.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는 겁니다. 돈이 주체가 아니고 자기가 주체가 되면, 
시간이나 대가의 제한이 없어집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밤을 새든, 힘이 
들든, 몸이 아프든 즐겁습니다. 노동이 놀이화되는 것이 진정한 노동해방입니다." 

그의 노동해방관은 독특했다. 더 많이 얻는 것은 결국 노동자를 더욱더 노동에 
얽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이것이 노동해방의 
전제조건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어요. 과거 농민사회에서는 국민의 90%가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국민의 10%만 노동을 해도 생활의 불편이 없는 
사회가 되었잖아요. 이렇게 바뀌었을 때 노동의 개념이 바뀝니다. 자기가 취직을 
하면 그 회사가 평생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것을 저는 노예근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농민문제를 전근대적인 토지문제로 해결하려는 것과 
같은 거예요. 20세기 방식으로 21세기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대원군식 
개혁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돈을 주고 실업을 구제하는 식으로는 절대 노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저는 파트타임이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자에게 좋은 거예요. 의식주를 간단하게 해결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잖아요. 회사에 목을 매달고 살 이유가 뭐가 있어요. 왜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하느냔 말입니다. 그것은 '가정부로 써 주세요, 노예로 써 
주세요'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은 노동에서 풀어 주려고 하는데 노동자가 
거부하고 있어요. 세상이 전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인간해방을 실현해 낼 
거냐. 20세기 혁명은 제도개혁이었지만 미래사회는 의식의 혁명입니다. 이제는 
스스로의 해방을 통해서 혁명에 도달해야지요." 

의식혁명, 그는 이 대목에서 노동운동에 대해 따가운 비판을 가했다. 노동자들이 
이기심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뼈아픈 각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 긍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제도개혁은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의 
운동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정의감을 가질 수 있지만 절대적인 정의감은 될 수 
없습니다. 재벌과 노조가 싸울 때는 노조가 정의감이 있다고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것일 뿐이지요. 1백만원 받는 우리 노동자들이 1백10만원 
달라고 싸우면서도 북한동포가 굶어 죽는 데는 1만원도 내놓지 않습니다. 
이기집단이라는 말이에요. 이기집단이 이기집단이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을 해야 
문제를 풀지, 정의를 위한 사도집단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지요. 
정의라는 것은 균형감각인데 그것이 깨진 상태라는 거예요. 우리 노동자들이 
제3세계 노동자에 대해서는 가장 보수적입니다. 지금은 3D 업종에 종사하니까 
그렇지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할 세력이 노조 
아니겠어요? 지구적인 정의와 남북간의 정의를 생각할 수 있어야지요. 나는 
노동자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각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연기법과 공사상이 미래사회의 세계관 


노동과 놀이의 통일, 이것을 그는 수행이라고 설명했다. 갈등과 괴로움이 생길 때 
그 원인을 안에서 찾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자기 개조를 위해서는 네 가지 상,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상견(常見)과 단견(短見), 즉 절대주의와 허무주의를 없애야 한다. 아집이나 
고정관념, 낡은 의식으로부터의 해탈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의 고통을 해소시키려고 수행을 따로 하는데, 사실 일과 수행은 
하나입니다. 세계는 나와 떨어져 있는 객관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일부입니다. 나와 
너를 나눠서 보지 않고, 내 삶과 세계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이 편안해지기 
위해서 세계를 개선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사상입니다. 공의 실현은 바로 불이(不二),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20세기의 해방은 바깥의 제약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예가 노예제도를 
철폐했다고 해서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가 철폐된다고 해도 노예의식은 
남아 있습니다. 제도보다 의식의 해방이 더 중요한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에요. 이제 해방의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피해의식을 갖고 저항하는 
해방에서 피해의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넘어가야지요." 

여러 가지 꽃이 모여 하나의 화단을 이룬다. 각자의 다양한 개성이 모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 시기와 질투를 넘어 사랑을, 대립과 경쟁을 넘어 화합을, 투쟁과 
전쟁을 넘어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는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연기법이다. 미래사회는 연기법에 의한 세상이 될 것이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연기(緣機) 사상입니다. 세계에는 개별적 
단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연관되어 있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저는 연기사상이 가장 중요한 현대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개별적 단독자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어요.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연도태를 자연의 원리이자 법칙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보면 네가 죽어야 내가 살고, 네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하다는 
관점이 됩니다. 하지만 연관된 하나일 때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게 되잖아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최상의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세계관의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물을 잘 못보고 있는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 인류가 그 동안 개별적인 인간의 집합으로 세계를 이해했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밖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주 좁았기 때문에 전체의 연관고리를 보지 
못했던 거지요. 독립된 개체의 집합인 것처럼 착각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립자에서 저 우주까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났고 인간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식은 
자연에게도 고통을 주고 타인에게도 고통을 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이룬 
혁명의 결과가 또다시 파괴의 대상이 되잖아요. 처음부터 사물의 출발점을 잘못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옳은 것과 그른 것, 너와 나라는 
것은 다 자기에게 사로잡혀서 생겨난 관념일 뿐이지요. 약이라는 게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약효도 나고 독성도 나타날 뿐이지요. 공사상의 
관점을 가져야 각기 다양한 것을 통합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에게 필요한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나 하기에 달렸다" 


우리 인류는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라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 가지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연기법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는다. 둘째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 셋째 무아て무소유て무아집을 수행의 지표로 삼는다. 

― 인간이 정말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인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자기가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됩니다. 그 의식의 덩어리가 다시 사물을 보고 들으면서 다시 
의식에 작용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거지요. 처음 담배를 피웠을 때는 분위기나 
외부의 환경이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면 외부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도 피우잖아요. 인간이 환경에 의해서 규정을 받는다는 말은 옳은 얘기예요. 
하지만 규정을 받는다고만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객관적인 조건이 
개선되어야 그에 따라 인간도 개선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지요. 누가 개선할 
거냐? 개선할 주체가 없잖아요. 자각한 인간만이 외부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어요." 

― 주체는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각한 주체는 어디서부터 실천을 해 나가는 겁니까. 

"나로부터 나간다는 거예요. 우리는 환경과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지요. 그러나 
의식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담배 피우는 습관이 담배를 피우게 하고, 
그 습관이 다른 사람까지 흡연가로 만드는 거예요. 계속 습(習)에 의해서 끌려가는 
거지요.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면 멈출 수가 있지요. 
그때 습을 바꾸는 실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어요.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미 업이 된 것은 자기 하기 달렸다는 말이에요." 

― 불교는 늘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주관주의나 
개인주의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실천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합시다. 성폭생의 책임은 당연히 그 남자에게 있지요. 그런데 저 남자한테 내가 
당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그 여성은 영원히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내가 그 남자로부터 아무런 피해를 입은 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더 
이상의 영향을 받지 않지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면 몸이 더럽혀진다는 남성 
중심의 종속성으로부터 성피해가 오는 것이지 육체로부터 피해가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몸은 공이기 때문에 성폭행을 당했다고 더럽혀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했다고 해서 신성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자각해야 
성피해로부터 깨끗하게 벗어날 수가 있지요." 

―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한다면 상황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형을 만들어 내고, 그 
남자의 행위는 정당화되고 마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 남자를 처벌해야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피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자신의 문제라는 겁니다. 성적 피해의식을 만든 게 누구냐? 바로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 남자가 어떻게 하랴. 그 남자가 그 여성에게 순간적인 고통을 주었지만 
그 이후로 그 남자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똑같은 남자와 키스를 하는데 내가 좋아서 하면 사랑하는 게 되고 그 
사람이 싫어하면 성추행이 되잖아요. 사랑하는 것도 내가 만들고 성추행도 내가 
만든다는 겁니다. 결국 성폭행의 피해는 그 남자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인데 그렇다면 그 생각을 놓아 버리면 그만이지요." 

― 개인이 자각해라, 깨달음을 얻어라, 그러면 바뀔 것이다 라는 방식이 어떻게 
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입니다. 당장 현실적인 불평등의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성폭행을 당했을 때 나는 당한 바가 없다고 확실히 해야지요. 그리고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신분을 탁 밝히고 고발을 해야지요.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건강한 상태로 떳떳하게 나서야지요. 엉덩이를 
만졌다고 이불밑에서 머리 싸매고 울어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못이든 칼이든 갖고 다니면서 콱 찔러 버려야지요. 그러면 그 
남자에게 얻어맞거나 창피를 당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개선을 위해서 그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 나갈 때 적으로부터 제약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걸 억울해 하고 분해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노예근성이지요." 


한 생각 돌이키면 세상이 달라진다 


그는 개인의 자각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자각을 
통해 자신의 문제에서 자연히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 괴로움 때문에 옵니다. 남편 때문에 괴롭다, 자식 
때문에 괴롭다, 돈 때문에 죽겠다, 몸 아파 죽겠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괴로움을 
누가 만들었느냐. 다 자기가 만든 거잖아요. 이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이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요. 남편한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으니까 미워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괴로워져요. 자기가 괴롭잖아요.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자기 괴로움이 없어져요. 술을 마시고 
들어왔을 때 이놈의 원수야 또 술 쳐마셨냐 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아 오늘도 일이 있어서 술 한잔 하셨구나 하면 마음이 편하잖아요. 자기 마음이 
편해지면, 집안도 편해지고, 집안이 편해지면 여유가 생겨서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리게 되지요. 전에는 북한동포돕기니, 환경운동이니 하면 '나도 힘든데 돕기는 
뭘 도와' 했는데 관심을 갖고 동참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회적 실천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게 되지요." 

한마음 돌이키는 것이 불교사상의 핵심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그 한 생각 돌이키는 
데서 만중생의 스승이 되었고, 원효가 그 한 생각 돌림으로 해동의 스승이 되었고, 
이차돈이 그 한 생각 돌림으로 죽을 수 있었고, 서산대사가 칼을 휘두를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 제도와 인간관계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님은 제도의 
개혁보다 개인의 자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인간은 변할 수 없느냐. 세상이 변하지 않아도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이 환경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존재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가가 나올 수 없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가 없지요. 인간은 환경에 물들어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그것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받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자각을 통해서 모순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것은 꼭 제도개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서 해결이 가능하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1백% 
해결이 되겠느냐. 이 문제를 고려해야 되겠지요. 환경 속에서 사는 인간은 
경험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세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주로 내가 바르게 사는 것이 우선이고, 특히 불교에서는 내 마음을 
바르게 닦으면 된다는 쪽이 강하다. 반면 사회운동에서는 사회적 조건인 
정치て사회て경제て문화て자연 환경을 좀더 좋게 바꾸려는 사회개혁, 즉 새로운 
사회건설이 강조된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사회운동가들은 새로운 사회 건설에 
주력했고, 종교가들은 마음을 닦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법륜 스님은 수행과 
이상사회 건설을 따로 보지 않는다. 

― 무엇을 자각해야 한다는 말씀인지요. 깨달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불교에서 말하는 자각은 어떤 개인의 행복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가 말하는 자각은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다, 나와 세계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물질적인 추구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거예요. 나와 타인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니까 당연히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지요. 그게 구조를 깨뜨리는 방식이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방식이든 관심을 갖게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 주위를 개선하려고 합니다. 개인의 
자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거예요." 

그가 환경운동과 북한동포돕기, 제3세계 기아 구제활동에 적극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으면 자신도 고통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북한 동포돕기 운동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계신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가 90년대 초반부터 고구려て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러 매년 중국을 다녔어요. 
95년도에 중국에 갔을 때는 대홍수를 만났습니다. 그때도 많은 중국사람들이 
북한이 식량난으로 어렵다,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나 그때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인도에서 사업하고 있을 땐데 '북한이 아무리 어려워도 
인도보다야 낫겠지' 하고 외면했는데 96년도에 그 얘기를 또 들었어요. 특히 
어린애들이 발육이 안된다고 안타까워 하면서 얘기를 했는데도 믿지를 않았어요. 
그러다가 국경에 가서 한 어린애를 봤어요. 완전히 비쩍 마른 아이였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하고 땅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쪽 중국에는 음식이 풍부하고 
강 저쪽에는 아이가 굶주리고 있고 내 호주머니에는 돈도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분단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귀국해서는 모든 힘을 동포들을 
위해서 쏟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북한동포를 지원하면서 많은 탈북자들을 만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기아가 어느 정도 심각한 상태입니까. 

"우리는 난민 1천6백94명을 두 가지로 조사했습니다. 그들 직계 가족들이 얼마나 
사망했느냐, 이것은 아주 작은 단위지요. 그 직계가족들의 사망률이 28%로 
나왔습니다. 이 사망률을 북한 전체 가족에게 적용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조사한 사람은 대부분 노동자들이거든요. 북한의 소위 상류계층,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최소 3백만에서 최대 5백만이라 보고 있고, 그래도 
굶어죽는 것에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보는 농민들 6백만, 이들 9백만 내지 1천1백만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인구는 1천3백만 정도입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넘어오는 
난민의 생활수준은 일반 노동자보다는 좀 낫습니다. 그렇게 보면 약 3백50만 
정도가 죽지 않았나 싶습니다." 

―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견해를 밝혀 주시지요. 

"북한의 식량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할 정도지요. 2백만이 굶어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는 균형적인 시각을 갖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더 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 차원에서 보자면 남한 정부가 더 정당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봐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정권 수립에 있어서 정통성을 가졌다고 지금도 계속 그걸 
중심에 놓고 문제를 바라보는 것도 잘못이고 지금 남한 정부가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역사적 정통성을 외면하고 문제를 풀어도 안된다는 겁니다. 북한이 적이 
아니라 민족의 내부라는 인식을 갖고 분단의 장벽을 넘어가야지요. 우리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지난 50년간 국민들의 의식 속에 심어진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없애는 일입니다. 통일은 분단의식을 여는 것에서부터 가능해지기 때문이에요." 

― 민간통일운동을 하시면서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겁니까. 

"민간의 한계가 뚜렷하지요. 지난 50년의 역사 속에서 민간통일운동은 정부의 
극우적인 반공통일과 맞서면서 친북적인 것으로 비쳐졌지요. 그리고 실제 북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통일운동의 주류가 엄청난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북한이 어려움에 처하면서 급격히 힘을 잃어 갔지요. 그 
외에는 저처럼 종교나 시민운동 영역의 통일운동이 있지요. 그런데 이것 역시도 
정부가 더 진보적으로 나가면서 자기 자리를 못 찾고 있지요. 민간통일운동은 
새롭게 재편되지 않으면 별로 기대할 바가 없다고 봅니다." 


옳다 싶으면 세상을 활개치고 가라 


다만 현재에 집중하라, 그리고 깨어 있으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서초동에 번듯하게 자리한 정토회관에는 수행과 일의 통일을 통한 
보살행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 회관도 신도들이 돈을 내고 노력을 
들여 건립한 것이다. 정토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의 삶은 공동체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실험이 되고 있다. 

― 정토회는 어떤 단체입니까. 

"정토회는 불교에서 출발한 단체입니다. 그러나 스님 중심이나 재가자 중심이 
아니고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같이 모여 활동하는 승속의 차별이 없는 
단체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 어떤 세상이 아름다우냐? 첫째 
마음을 맑게 가지자. 그러면 인생이 행복해 진다.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경쟁과 투쟁이 사라지고 좋은 벗의 사회가 된다. 적게 
소비함은 자연파괴를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지구를 아름답게 가꾸자'는 세 가지 
모토를 갖고 있지요." 

― 상근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정토회 살림은 어떻게 꾸려 나가십니까. 

"여기는 활동비 개념 같은 것이 없어요. 예를 들어 누구의 사업을 누가 해 주면 
대가가 있지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자기가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 
두면 됩니다. 나도 여기에 대표로 있을 뿐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어요. 
이곳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요. 누구에게나 생활조건은 똑같고 대우도 그렇게 
합니다. 제3세계의 중간생활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요. 사실은 최저생활로 가야 
하는데 아직은 못하고 있지요. 여기서 생활하다가 어려우면 나가서 직장 다니고, 
직장 다니다 마음에 안 들면 들어와서 같이 살고, 집이 있는 사람은 집에서 
출퇴근하고, 없으면 여기서 살고, 모든 것이 자유롭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사법계(事法界)다. 이른바 
현상의 세계다. 예를 들어 배를 타고 바다에 고기를 잡거나 놀러 갔는데 고기도 못 
잡고 뱃놀이도 못하고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쓰다가 시간을 다 
보내거나, 배가 뒤집어져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와서 건져 
주는 인생이다. 둘째 이법계(理法界)다. 이른바 본질의 세계다. 방파제를 막아 
놓고 그 안에 들어가 고기잡고 뱃놀이를 즐기는 형상이다. 바람도 없고 파도도 
치지 않으니 고요하다. 그러니 이곳에서 빠져 죽을 일은 없다. 어찌 보면 참 좋은 
세상인 것 같지만 평생 방파제 안에 갇힌 신세다.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다. 차별현상과 본질세계가 둘이 아닌 세계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데도 고기도 잡고 뱃놀이도 한다. 
돛대를 잘 이용해서 바람이 부는 방향을 적당히 조절하여 파도를 타면서 더 잘 
논다. 파도치고 풍랑이 치는데도 빠지지 않으니 훌륭한데 물에 빠지면 안된다는 
생각은 남는다.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다. 이것은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물에 빠지지 않으면 배에서 낚시하고 물에 빠지면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주어 온다. 이 사람에게는 '물에 빠져야 한다,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분별이 끊어졌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세계라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네 
번째의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 공동체도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당연히 충돌과 갈등이 생기겠지요.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나갑니까. 

"자기를 돌이키고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토론을 하지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정토회에 50명이 같이 사는데 빨래를 할 때 한꺼번에 세탁기를 
돌리거든요. 그러면 옷이 섞여서 못 찾는 일이 생깁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 해서 토론이 벌어졌는데 누가 옷에 이름을 쓰자고 제안을 했어요. 해결책은 
그것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뭐 애들이냐 옷에 이름까지 쓰게 해서 기분 
나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 절반 있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절반은 
쓰고 절반은 안 쓰지요. 그러면 50%는 개선된 거잖아요. 이름 안 쓴 사람들은 쓴 
사람들 덕분에 편의를 본 셈이지요. 이렇게 해서 빨래를 할 때마다 공지를 하지요. 
좀 더 씁시다. 그러면 더 쓰지요. 그래도 안 쓰는 사람들이 있는 데 그건 할 수 
없지요. 옷을 구분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누가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음식의 간도 여럿이 살다 보면 문제가 되지요. 그러면 또 토론을 해서 
제일 싱겁게 먹는 사람한테 맞추지요. 짜게 먹는 사람은 소금을 넣으면 되니까." 

― 많은 사람들은 모여 사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나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데요. 정토 
공동체의 경험을 들려주십시오. 

"그래도 같이 사는 게 여러 모로 편리하지요. 밥도 빨래도 다 한꺼번에 하니까 
개인의 수고를 덜 수가 있잖아요. 그런 장점이 있는 반면에 해결해야 할 것도 많이 
있지요. 잠자리도 불편하고 개인에게 충분히 지원을 할 수도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돈이 생기면 그런 일에 먼저 쓸 거냐. 아니라는 겁니다. 대중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준 돈을 우리 생활을 개선하는데 쓴다면 다시는 돈을 
주지 않습니다. 이건 도덕성의 문제지요. 필요한 것은 개인이 집에서 가져오거나 
우리가 노력해서 복지를 위해 쓰고 신도들이 낸 돈은 절대 우리를 위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지요. 인도를 위해서 낸 돈은 인도를 위해서 써야지 활동비로 
쓸 수는 없지요. 그런 것이 정해져 있으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이 정도로 
일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우리는 뭘 믿는 것도 없고 우리의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옳다 싶으면 같이 가는 것이지요. 그것도 평생 하자는 
것도 아니고 3년만 하자는 겁니다." 

정토회에서는 3년 이상 일할 수 없다. 다시 하려면 결의를 새로 세워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기득권을 없애기 위해서다. 자기를 돌아볼 시간을 
갖고 세상에 나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 스님이 활동하시는 단체 중에 제이티에스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단체입니까.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하고, 병든 자는 치료 받아야 하며, 배우지 못한 어린이는 
배워야 한다는 것이 취지입니다. 이것은 모든 민족과 인종, 종교를 초월해서 
혜택을 받아야 하며 모든 민족て인종て종교를 초월해서 함께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같이 만나서 함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서 함께 한다(Joint Together 
Society)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출발했지만 종교의 틀을 넘어서 활동하고 있어요. 
출발은 한국에서 했지만 인도와 미국에 공식적인 조직이 있고 중국과 북한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계획은 올해 안에 방글라데시나 미얀마 난민들쪽으로 
영역을 넓힐 생각입니다." 


죽어 가는 개구리에게서 깨달음을 얻다 


속세의 나이로 올해 마흔 일곱. 사회적 실천가나 사회운동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그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는 이렇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불교에 입문하기로 결심했지요. 중학교 때부터 불교학생회를 
하거나 고적답사반 활동을 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지요. 절에도 열심히 
다녔지만 중이 될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저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분황사에 갔다가 주지 스님을 만났어요. 그분의 법문을 듣고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알았어요. 동학이며 신라시대며 일본에 대한 민족주체의식 
같은 좋은 말씀을 듣고 감동했어요.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늘 찾아가면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그러면서 불교가 내가 추구하는 과학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오히려 더 넓게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뭐 인생이 허무하다든지, 좌절을 겪었다든지 해서 머리를 깎은 
것이 아니지요. 내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갈 거냐를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요." 

학교도 그만둔 채 그렇게 절에서 한 2년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주지 스님이 
부르시더니 한 20년 세상에 나가 복을 지으라고 했다. 지혜는 있지만 복이 없어서 
명이 짧고 구설수에 오를 팔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에만 전념했다. 직장생활 하는 목적이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불교활동에 전념하다가, 활동비가 부족하면 다시 
직장생활을 하는 등 몇 번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아르바이트와 학원강사를 하면서 포교활동을 해 나갔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얘기도 해 주고, 농민운동에도 
관여했다. 그러다가 79년에 끌려가서 고문도 당했고 광주사태가 나면서 잠시 
미국에 머물기도 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불국사에서 지도법사로 활동했다. 

그에게 재가자 법사의 포교활동을 인정하는 포교사 자격이 주어진 것은 
82년부터였다. 그것도 80년 이후 기독교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종단에서 재가자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미국 원각사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후 82년부터 불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사회문제에 대한 약간의 인식이 있었기에, 포교활동을 하면서 인권문제 같은 것을 
이야기하다 보니 젊은이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특히 지방이다 보니 금방 소문이 
났다. 결국 불국사로 모종의 압력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나마 포교활동조차도 
못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활동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데,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의 기본모순은 민족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권 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때도 이런 얘기를 많이 했지요. 민주화가 당면 
과제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근본문제는 민족모순이라는 거지요. 촌놈이 북한정권과 
남한정부의 수립과정 같은 것을 얘기하니까 초기에는 비난을 좀 받았지요. 소위 
말해서 마르크스 사상의 문외한이,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는 자가 민족주의를 
얘기하니까 못마땅했겠지요. 그러다가 80년대 중반에 엔엘피디(NLPD) 노선이 
등장하면서 민족문제가 일반화되었어요." 

그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79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출근을 
하려는데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다짜고짜 그를 끌고 갔다. 그가 끌려간 곳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무조건 두들겨 패더니 누구의 이름을 대라고 
했다. 그 사람은 그가 수원에서 농민교육을 받을 때 만났던 사람이었다. 다른 
교육생의 이름도 마저 대라고 했다. 생각나지 않았다. 심하게 얻어터지면서 
자술서를 쓰고 또 썼다. 처음 썼던 내용과 틀리면 얻어맞는 일이 반복되었다. 

피가 줄줄 날 정도로 세게 밧줄로 묶더니 욕탕으로 끌고 갔다. 문턱에 척추가 
닿도록 눕혀 놓고 육중한 남자가 맡 타듯이 올라탔다. 척추가 부러질 듯이 아팠다. 
그러더니 야구 방망이로 발바닥을 때리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은 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얼굴에 
두꺼운 수건을 덮어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앞이 환해지더니 영화 스크린처럼 어떤 영상이 
펼쳐졌다. 

개구리 한 마리가 바위에 부딪혀 벌벌 떨며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어릴 때 그가 
패대기친 개구리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10년 동안 불경을 읽으며 생명의 소중함을 
떠들고 다녔는데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개구리의 
영상이 나타난 순간 '너 같은 인간은 일찍 죽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마침내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연기의 
법칙에 대해 크게 깨달았고,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불교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신 셈인데, 종교적인 방식이 사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일단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주의가 
망하고 흥하고 상관없이 사물을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둘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불교적인 깨달음, 불교 철학이겠지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실천에 대한 합리성의 뒷받침이랄까 구조적인 해결책을 
제공해 준다고 보고, 종교는 실천력과 직관력을 주지요. 저는 종교에 큰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각성은 존중하지만 종교제도나 시스템은 함부로 말하자면 
미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비합리적인 환상 속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인 탐욕과 무지에 휩싸여 있지 않습니까. 종교를 성역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구리니까 그런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성역이라고 이름 붙일 이유가 없지요. 
불교든 기독교든 다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면 모르지만 행태에 있어서는 다 
소비주의의 화신들 아닙니까.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부처님 
하나님을 찾는데 그런 종교에서 사회적인 비전을 찾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척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지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자는 삶입니다. 적게 자면 정신이 맑아지고 육체가 
건강해지고 적게 쓰면 마음이 편합니다. 옷이 많으면 아침에 나갈 때마다 어느 
옷을 입어야 할 지 신경을 쓰게 되지요. 그러나 옷이 한 벌 밖에 없는 사람은 
아무런 번뇌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선 부부간에도 서로 가지려고 다투지 않습니까. 
적게 가지려고 마음을 먹으면 부부간에 다툴 일이 없어지고 이웃간에 다툴 일이 
사라지지요. 그러니까 개인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관계가 부드러워지고 
그것이 환경을 적게 파괴하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 문화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고통에 찬 땅, 즉 예토(隸土)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정토(淨土)이다. 정토, 깨끗한 세상, 맑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대승불교에서 수행과 이상사회 건설은 하나다. 그는 마음을 바로 
닦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마음을 닦고 중생구제를 
함께 한다, 상구보리하와중생이다. 이것이 보살행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오, 고통받는 이웃을 구제하는 길이 성불의 지름길임을 
깨달은 사람, 그가 바로 보살이다. 보살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대중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이다. 

보살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다는 간절한 서원을 지니게 되는가. 고(苦), 괴로움과 
고통이다. 화중생연화,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너무나 
가슴을 아프게 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 아픔과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온몸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깨닫고 실천하고, 새롭게 깨닫고 
운동하는 일생의 반복을 통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은 맑고 밝아질 
것이다. 종속에서 주체로, 부자유에서 자유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이 
공덕의 수행이다. 우리가 그러한 길을 가고자 할 때 법륜 스님은 영원한 벗으로 
함께 할 것이다. 화엄경의 한 구절이다. 

"보살에게 있어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는 
세계다." 




법륜 스님 


정토회 지도법사 ,불교환경교육원 이사장, (사)좋은 벗들 이사장, (사)한국 
제이티에스 이사장 

지은책 

[실천적 불교사상] [금강경 이야기(상て하)]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미래문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 [번뇌 속으로 세상 속으로] [우물에서 바다로 
나간 개구리] [민족의 희망찾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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