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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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6월28일(수) 07시57분04초 KDT
제 목(Title): 계율의 의미.


  이것 저것 바빠서 그동안 글을 쓰고 싶어도 못쓰고 있었는데
최근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기적이 몇번 발생한 것을 이용해
한번 또 분별심을 내 보았습니다.  키즈의 이 불교란에도 마찬가지
지만 하나비의 종교보드에도 불교에 관한 글을 찾아보기가 무척
힘들어서 같은 글을 동시에 붙입니다.  혹시 하나비에서 똑같은
글을 보더라도 책망하시지는 마시기를.

5계:
 1. 불살생(不殺生): 살인하지 말라.
 2. 불망어(不妄語): 거짓말하지 말라.
 3. 불사음(不邪淫): 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4. 불투도(不偸盜):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5.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말라.

10계명(Ten commendments):(출애굽기 20장)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가라사대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것은 불교와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계율, 즉 지켜야할 금지 조항들이다.
오계나 십계명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어째서 그것들이
'금지조항'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살인을 하지 말라거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거나 하는 것은 종교를 떠나서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반드시
지켜지지 않으면 안되는 최소한의 규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왜
그러한 조항들을 지켜야 하는가는 일견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회적인 규칙들을 당연히 그 한 부분으로서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오계와 십계명의 대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의 처음 네가지, 즉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것도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위에 던져진 질문의 더 중요한 의미는 그러한 금지조항들이 종교의
본질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이다.  즉 종교적 삶을 사는 것과 금지조항들을
지키는 것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질문은 당연히 종교적 삶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먼저 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에대한 대답은 필자의
앞의 글들에서 나름대로 시도해 보았거니와 요약컨대 세속적인 삶이 스스로를
한정짓고 구속하는 삶이라면 종교적인 삶은 인간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삶이다 라고 대답하는 정도로 여기서는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대충 이렇게 요약한 내용에 토대를 두고 다시한번 계율의 의미를 새겨보면
일견 어떤 금지조항이 존재한다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소한 필자가 오래전에 받은 느낌은 그러했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것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얽매여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해서는 안되고 저것은 해도 되고 하는 식으로 한정을
지어놓는다는 것은 무척 서투른 짓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금지조항에 해당하는
것들이 악으로 분류된다면 이것은 결국 아직 상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불교의 경우 출가자에게 주어지는 이른바 구족계는
비구계가 250, 비구니계가 480개로서 이것을 다 지키고 산다는 것은 행동
하나 하나를 얽어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율과 관련하여 또한가지 의문은  그러한 금지조항을
지키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오계중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 빼놓고는 나는 어느 것 하나도 자신있게
지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나마 불살생이란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면(사실 이것이 본래의 의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지키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하물며 구족계를 다 지키는   
것은 출가자라고 하여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힌트는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왈, ... 귀찮아서 생략...
  子曰

    육십이 이순  칠십이 종심소욕 불유구
    六十而 耳順  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을 세우고
  마흔에 모든 사리에 의혹하지 아니하고
  쉰에는 천명을 알고,
  예순에는 소리를 듣되 어기고 거스름이 없으며,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일을 쫓아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게
                  ^^^^^^^^^^^^^^^^^^^^^^^^^^^^^^^^^^^^^^^^^^^^^^^^^^^^^
  되었다."


  이 마지막 구절은 계율을 지키는 최고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의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마음의 경지를 표현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외부의 것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마침내는 사물의 당연한 연고를 알게 되었는데 그 도리대로 사는 것은
마음에 따르고 거스름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까지 되고 나면
드디어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도 볍규를 어기지 않게 되었다.

  바꾸어  이야기를 하자면 종교의 목표는 계율을 억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계율을 억지로 지키려고 바둥대는 것은 또하나의 굴레만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삶이란 분별선택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며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었을 때 계율이란 있으나 마나 한 것에 불과하다.
그때는 그냥 필요하면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그만둘 뿐이다.  여기에 이르면 사실
더이상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별적인 논리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때로 기행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이 의도된 조작이 아닌한
우리의 가치관으로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억지로 계율을 지키려고 바둥대는
것보다 더욱 서투른 짓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첫번째 질문, 즉 계율이 종교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에
대한 위의 답은 아직 반밖에 주어지지 않은 셈이다.  왜냐하면 '종심소욕
불유구'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수행자들에게 있어서도 계율은 역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도 계율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지만 특히 불교에 있어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종교적 수행의 한 방법으로서 강조되어 왔다.  다시 말하자면 계율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궁극적인 경지를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므로써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운데에 한 단계를 더 집어 넣어서 설명하자면 계율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계율이 지켜지는 그러한 상태는 분별집착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극복했을 때 비로서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곧 분별집착을 버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계율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구속하는 하나의 분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분별을
버리게 하는 모순된 성격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집착하는 것에 대한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을 반성
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에게 이익되는 것만 하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고정
관념의 결과이기도 하며 또한 그로인해 고정관념을 더욱 높이 쌓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축적해온 상대적인 판단기준에 비추어 우리에게
이익된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우리의 울타리 속에 넣어두고 그것들만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가르치는 것은 상대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했을
때 그 울타리밖에 있는 것들도 똑같이 가치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해서
살고 있는 이 상대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울타리 밖에 있는 것들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를 지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쳐진 사고의 균형을
억지로라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흉내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상대적 사고를 극복한 사람들의 행위를 흉내냄으로써 그 세계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 그 근저에 깔린 가정인 셈이다.

  이렇게 해석했을 때 계율을 아무리 잘 지켜도 그로인해 마음의 변화, 즉
상대적인 사고방식에서 절대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임이 이제 명백하다.  이것은 계율을 하나의 도그마로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중대한 경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위의
해석에 따르면 계율을 단순히 금지조항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인간의 사리사욕에 부합되는 행동을
금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능동적으로 하도록
하는 권장사항도 계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의 자비라든가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계율을 지키는 것과 그 의미에 있어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에 있어서의 계율의 정의는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것을 악계라고 한다)뿐만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도록 권장
하는 것(선계)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특히 대승불교에 와서
이른바 보살계라고 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표현되었는데, 이는 다음 세가지를
말한다.

  1. 섭율의계(攝律儀戒):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
  2. 섭선법계(攝善法戒): 좋은 일을 힘써 하는 것.
  3. 섭중생계(攝衆生戒): 뭇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


  이제 대충 계율이 종교의 본질과 관계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 과연 계율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답은 위의 논의에 비추어 거의 자명하게 주어진다.  종교적인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정확하게 지킨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계율이 규정하고 있는 내용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테두리 안에 넣어서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계율의 참뜻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가치를 판단하는 분별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한 계율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셈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인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것들을 지켜야 하는지, 즉 어떤
행위가 계율에 어긋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논쟁한다는 것은 위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판단은
이제 각자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술을 먹고 담배를 피는 것이
옳바른 일인가 아닌가는 스스로의 마음에 대고 물어 볼 일이다.  물론 그것들이
가지는 사회적인 의미도 고려하여야 하지만 종교적 삶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는 사실상 술을 먹고 담배를 피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우리 자신의 삶을 어떠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왕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술과 관련하여 한마디.  불교에서는 죄를 그
성격에 따라 본질적으로 죄가 되는 것(성죄-性罪, 이를 금하는 것을 성계-性戒-라
한다.)과 성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차죄-遮罪, 이를 금하는 것을
물론 차죄-遮戒-라 한다.)으로 구분한다.  예컨대 불살생은 성계이고 불음주는
차계인 셈이다.  그래서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억지일까? ^_^
조선후기-구한말의 스님중에 경허라는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한국 불교의
중흥조라고 불리는 이 스님은 때로 술을 벌것게 마시고 개다리를 하나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한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 행위가
마음에 전혀 걸림이 없다는 면에서 오히려 억지로 술 안마시고 고기 안먹으려고
버둥대는 것보다 백번 나은 것이 아닐런지.  그런데 때로 영웅호걸이 주색잡기에
능하다고 주색잡기에 능한 것으로써 영웅호걸인 체 할려고 하는게 우리 중생들이
아닌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족 같은 질문을 하자면 왜 분별집착을 버린 상태에서는
굳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 규범을 필연적으로 지키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상 종교적으로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 또는 그리로 나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정말로 사회적 통념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질문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힘들다.  앞서 예를 든 경허스님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종교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순교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그 시대, 그 지역의 사회적 규범을 어겨가면서 종교적 신념을 고수했던 사람들이
아니였던가!   종교적 가르침이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상식이라는 것이 대아가 아닌 소아에 기준을
두고 판단하는 사고방식인 한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은 대국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더 이익이 되는 행위일 것이다.   여기서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이익이며, 그것은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을
종교가 지향하는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판단되
어야 할 것이다.


   송 연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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