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6월23일(금) 07시10분32초 KDT 제 목(Title): 불교와 기독교 (마광수) 불 교 와 기 독 교 -마 광 수 돌이켜 세계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요, 투쟁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대개 이 커다란 전쟁들은 모두 이념의 분쟁 때문에 일어났다. 영토 문제나 식량 문제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적도 많지만, 그것은 대개 국부적인 것에 그친다. 특히 십자군 원정을 비롯하여 1/2차 세계 대전등 서구의 대전쟁은 모두 이념의 차이 때문에, 혹은 적어도 이념의 차이 를 핑계로 하여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동서 냉전도 결국 이데올로기 의 분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념의 문제는 결국 종교의 문제로 귀착한다. 따라서 세계의 역사는 종교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전쟁은 되풀이 되고 있다. 중동의 이스라엘과 아랍 국 가간의 전쟁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도 종교적 이 념의 차이 때문에 치뤄지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란도 회교국가이고 이라크도 회교국가인데, 서로가 기를 쓰고 싸운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기독교에 있어서도 신/구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겪었었다. 비록 같은 종교라 할지라도 소신이 다르다 보면 금새 원수로 변하고 만다. 그릇된 이념들이나 신념이 얼마나 역사를 참 혹하게 망쳐 놓았는가를 단적으로 증면해 주는 것이 바로 중세기의 암흑 시대 인 것이다. 신념은 올바른 것일 때는 좋으나 만약 잘못된 것일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 만큼 커다란 해악을 인류에게 끼친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 여러 종교간의 이념적 갈등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진리요, 다른 종교는 모 두 사교이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교도라고 단정해 버리는 편협성은, 우리 민족의 단일/정통성조차 파괴해 버리기 십상인 위험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적 위화감과 이질감은 특히 어떤 종교의 교리에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집착하는 데서 빚어진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큰 종교 집단은 역시 불 교와 기독교일 것이다. 그 밖에 유교를 꼽을 수도 있겠으나, 그 배타성에 있 어서는 불교나 기독교보다 훨씬 덜한 까닭에 크게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다. 불교와 기독교는 유심론과 유신론, 범신적 세계관과 유일신적 우주 관, 윤회의 긍정과 부정 등 여러 모로 그 교리가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를 미신시 하기 쉽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와 불교는 그토록 상반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일 까? 물론 내가 신학이나 종교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하기엔 아직 조심스러우나,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나는 요즈음 많이 느낀다. 제일 먼저 그 유사성을 꼽을 수 있는 것이 석가와 예수 의 존재이다. 석가는 태어나자 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 다고 한다. 예수도 항상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두 성인은 다 같이 자신의 존재에 자신만만했 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의 해석에 따라, 불교는 다신교 또는 무신론적 유심철학이요, 기독교는 유일신교라는 가장 커다란 차이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 즉, '유 아독존'의 '아(我)'를 석가라는 개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인간' 또는 '중생'으로 볼 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모든 중생 또는 인간은 지극히 존 귀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실유불성(悉有佛性)'의 의미와 아주 잘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실유불성이란 모든 중생은 다 부처라는 것이니, 확실히 '유아독 존'의 '아'가 부처님 개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유아독존'의 '아'를 부처님 개인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한다면, 불교는 한낱 개인숭배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는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아들'이라는 비유를 썼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 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여호와 신을 부 르게 하셨다. 그러면 예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 가 된다는 말이 된다.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도 다 하나님의 아들이 니 예수는 우리의 형제가 되고, 좌우지간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진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 예수가 자신은 곧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다시 발전하여, 모든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 된다. 석가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나 예수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표 현이나, 다같이 '인간은 지극히 존귀하다'라는 뜻에선 같은 것이다. 다만 예 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유대교 전통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하나의 방편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아들'이 라는 상징적 표현에 결부시킨 것이 다를 뿐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불교 이론과 흡사한 점이 많다. 성부/성자/성신이 일체라는 것은, 불교에서 법신(法身)/화신(化身)/보신(報身)이 일체라는 교리 와 아주 흡사한 이론이다. 법신은 불법 그 자체, 즉 우주의 원리라는 뜻이니 성부, 즉 하나님(우주의 주재자)의 의미와 상통한다. 화신은 법이 인간의 육 신으로 화하여 나타난 석가모니를 말하는 것이니, 성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와 맞아 떨어진다. 또한 보신은 불법의 보응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뜻이 성신(또는 성령)에 의해서 시행된다는 기독교의 이론과 흡사하다. 특히 요즘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등의 저서가 출간되면서, 불교와 기 독교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성서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 해, 신약성경에서 수수께끼로 되어있는 예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행적이 차츰 밝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확실한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현재 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예수는 인도와 티베트 등지로 유학하여 불교의 교리 를 배우고 왔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이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많은 제자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티베트의 불경 가운데는 <이사경>이라는 것 이 있어 인도에서의 예수의 행적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는 불교의 심오한 교리와 유태교의 교리를 합치시키고, 거기에 자신의 예지력 을 첨가하여 새로운 종교혁명을 일으킨 셈이다. 종교란 그것이 발생된 지역의 전래신앙이나 그 지역의 풍토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니 육식을 위주로 하는 유목민족의 종교인 기독교(또는 유대교)와, 채식을 위주로 하는 농경민족의 종교인 불교(또는 힌 두교)는 그 표상의 양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를 논할 때 그 나라의 정신적 문화적 풍토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들사람 얼>이라는 글에서, "모든 신화는 요컨대 하나다.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서로 통했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참 으로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신화와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만큼, 모 든 종교의 교리도 결국은 하나인 것이 아닐까? 즉,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것, 모든 만물은 존귀하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나, 표현은 다를지언정 행동 목표는 같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유교의 '인(仁)'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탕자(蕩子)의 비유'가 있는데, 이 비유는 불교의 <법화경>에 나와 있는 '궁자(窮子)의 비유'와 흡사 하다. '궁자의 비유'는 아버지가 왕인지도 모르고 거지처럼 거리를 헤매다니 던 아들이 결국 자기의 아버지에게 발견되어 영광의 왕자의 지위에 오르게 된 다는 얘기다. 여기서 '아버지'의 상징이 하나님이든 불법(佛法)이든 간에, 인 간이 자신의 존귀한 가치를 모르고서 미망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 고 있다는 점은 결국 같다고 하겠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정은 하나 님의 사랑도 되고 부처의 자비도 된다. 예수가 말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불교의 "공즉시색( 空卽是色)"과 통하는 말이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 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은 보시(布施)를 강조한 말로서 불교와 그 속뜻이 통한다. 지금까지내가 살펴본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이 너무나 피상적인 것인지 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부터는 종교간의 분쟁이나 대결보다는, 서로간의 상합 (相合)과 상수(相需)를 도모하는 쪽으로 종교인들은 다 같이 노력해야 될 것 이다. 대동단결과 화합--이것이야말로 우리 종교계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실천 과제이다. (1985.5)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989 自由文學社)> 에서 발췌 --,--`-<@ 매일 그대와 아침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잠이 들고파.. Till the rivers flow up stream | Love is real \|||/ @@@ Till lovers cease to dream | Love is touch @|~j~|@ @^j^@ Till then, I'm yours, be mine | Love is free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