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sjyoun (예리큰아빠) 날 짜 (Date): 1999년 9월 8일 수요일 오전 12시 55분 10초 제 목(Title): 지명스님의 교리산책-노자의 선과 무 번호 : 12/4201 입력일 : 1999/09/06 14:08:25 자료량 : 75줄 제목 : 지명스님의 교리산책-노자의 선과 무 노자의〈도덕경〉을 읽다 보면, 많은 부분에서 선사들의 법어와 흡사 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노자의 무위(無爲) 도(道)는 선의 무(無)와 다 를 바 없다. 장자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노자와 장 자의 사상을 제대로 전한 적자가 바로 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표면적인 유사점도 많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근본에서 차이 점이 있다. 노자와 선에서 가르치는 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별해 보는 것은, 선의 무사상을 더욱 뚜렷이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유사점을 보자. 도덕경의 이런 말들을 들으면 선사의 설법이 아 닌가 하고 착각할 것이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 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으니.....”선의‘만법귀일(萬法歸一)’즉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참다운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붙여지면 이미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는 말로 〈도덕경〉은 시작된다. 또 “도는 볼 수도, 이름할 수도, 잡을 수도 없다”는 취지의 말도 나온 다. “사량분별로 배우는 학문은 배울 수록 늘어남에 비해서, 도는 닦을 수록 줄어들게 되니, 줄이고 줄이면 무위에 이르게 되고, 이에 이르러 하지 못함이 없게 된다.” 일체의 명칭, 개념, 사량분별을 끊고 사물을 보아야 존재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선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무사량(無思量), 무심(無心), 무위가 여기에 다 들어 있다. “형상이 없는 형상을 보고,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도덕경〉의 입장은 선의 것 그대로이다. “한 물건이 있어, 하늘보다 먼저 생겨나서, 고적 하여 소리와 형체도 없건만, 영원히 변함이 없으며, 모든 것에 두루하 니.....”라는 말은 선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어법이 아닌가. 무어라고 꼬집어서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고착화되어서 존재의 실상 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그르치므로, 선사들은 그것을 우주 법신 체, 진여, 무, 또는 한 물건으로 말하곤 하지 않던가. 노자는 무이면서 도 동시에 만물이 되는, 저 한 물건의 아이디어와 표현을 선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도덕경〉의 것을 조금만 더 보자. “무위로 행하고, 무사(無事)로 일을 하고, 무미(無味)로 맛을 보고.....” 〈도덕경〉은 무자의 잔치 판 으로 이루어졌다. 도는 무이고, 하나인 동시에 모든 것이요, 처음인 동 시에 끝이다. 선이 중국화된 인도의 요가 명상 수행법이라고 한다면, 선사들이 도덕경의 저 무자를 빌려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 른다. 노자와 선이 다 같이 무에 입각해서 사물의 실상을 보려고 하지만, 근본 목표점에서 천지간의 차이가 있다. 노자의 무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장애를 없애는 처세 철학적인 면이 강하다. 자신을 지우고 인위를 없이 한 것의 대표적인 예가 물이다. 물은 그릇에 가두면 그릇의 모양대로 바뀌어 지고, 낮은 곳으로만 흘 러내리고, 부드러워서 일체의 다툼이 없지만, 큰 바위를 부수어서 자갈 이나 모래로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사람도 무위 정신에 입각한 물과 같은 부드러움으로 크게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곧고 큰 나무는 재목으로 잘려 나가서 일찍 죽지만, 굽고 작은 나무는 그 무용(無用) 덕분에 오히려 오래 살 수 있다고 한 다. 선의 목표는 세속적으로 성취하거나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물질 만능주의를 떠난 새로운 각도에서 사물을 보고, 자신의 평화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생사로부터 해탈하고 중생을 구 하려는 것이다. 물론 무위의 이익이나 무위의 정치와 같은 도덕경의 실용적인 가르침도 선이 수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착생심(無着生心)’ 즉 “집착함이 없 이 세상을 꾸밀 마음을 낸다”는 입장에서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일 뿐 이다. 그것이 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선은 궁극적으로 노자가 말하는 부드러움과 난폭함, 이익과 손해, 성 취와 실패 등과 같은 모든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분별마저 초월하려고 한다. *발행일(1733호):1999년 9월 7일, 구독문의 (02)730-4488~90 <한장의 불교신문 한사람의 포교사> 기사제보Fax:(02)3210-01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