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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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valley (이 상 제)
날 짜 (Date): 1999년 6월 23일 수요일 오후 07시 47분 35초
제 목(Title):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삶의 예술


이 글은 <3인칭 주어사용>과 유사한 효과를 가져오는 비파사나에 관한 글입니다. 
비파사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명상법으로, 매우 간단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소설<단>의 저자 김정빈씨도 비파사나로 참자신을 되찾았지요. 비파사나는 
염-관-화두의 3단계 수행체계에서 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비파사나에는 염법과 
화두법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호흡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염법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며, 觀이 내외부의 대상과 마음으로 향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들어가게 
되면 화두법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3인칭 주어사용>의 기술이 껄끄럽고 이상하게 여겨지는 분들은 자신의 호흡을 
觀하는 비파사나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From
http://bora.dacom.co.kr/~etnlage/v-art.html

The Art of Living : Vipassana Meditaion
삶의 예술 : 비파사나 명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와 조화를 추구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동요하고, 짜증이 나며, 부조화와 고통을 
경험합니다. ; 그리고 동요하며 고통스러워할 때 그 비탄은 자신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불안하게 만듭니다. 짜증스러움은 그 
사람주변의 공기를 물들입니다. 그와 접촉한 모든 사람이 초조하고 짜증스럽게 
됩니다. 분명 이것은 적절한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자신과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과도 
평화로와야 합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니까요. 사회안에서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수 있을까 ?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조화로우며 우리 주위와 조화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있을까 ? 
한사람이 동요합니다. 그 동요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하여 그는 고통의 원인, 그 
근본적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문제를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부정적인 마음이나 불결한 생각일 일어날 때면 사람은 동요하게 
된다는 것이죠. 부정적인 마음과 불순하고 불결한 정신은 평화나 조화와는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 이 또한 탐구를 통해 명백해집니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나는 
불행하게 됩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나는 내부에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원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장애가 생기면 또다시 나의 안에서는 긴장이 
생깁니다. 어떤 풀지못할 매듭을 만들기 시작하지요. 전 생애를 통해 원하지 않는 
일은 계속 일어나고, 원하는 일은 일어나기도 하고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매듭을 짓는 과정 또는 반응은 정신과 육체의 전 구조를 긴장과 부정성으로 
몰아가며 삶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한가지 방법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만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힘을 
개발해야 합니다.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고 내가 
요청할 때는 도움을 주러 와서 원치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원하는 일만 
일어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욕구가 항상 
충족되고, 그의 인생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바램대로 일어나며, 바라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들을 만났을 때 맹목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어떻게 하면 긴장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을까 ? 
어떻게 하면 평화와 조화속에 머물수 있을까 ?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과거의 현인들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이 생기고 
분노와 두려움 또는 부정적 마음이 일기 시작하면 가능한한 빨리 주의를 다른 
것으로 분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어나서 물 한잔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면 분노는 증가하지 않고 당신은 그 분노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또는 수를 세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넷... 또는 하나의 단어나 
구, 만트라를 반복합니다. 신의 이름이나 당신이 헌신하는 성인의 이름를 외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분산되고 어느 정도 분노나 부정적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해결책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 방법은 여전히 효과가 
있습니다. 이 방법을 실행함으로써 마음은 동요에서 자유로와 집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의식의 층에서만 효험이 있습니다. 주의를 분산시킴으로써 
실제로는 부정적 마음이 무의식속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의식의 
층에서는 똑같은 분노에 물드는 짓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표면에서는 평화와 
조화가 있지만 깊은 마음속에서는 억압된 부정적 마음이 휴화산처럼 잠복해 있어 
곧 격렬하게 폭팔할 것입니다.. 
내면의 진리를 찾는 또다른 탐험자들은 탐구를 좀더 진전시켰습니다. 마음의 
실체와 자신 내부의 문제들을 경험함으로써 그들은 주의 분산이 단지 문제로부터 
달아나는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도망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문제를 직시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날 때면 단지 그것을 관찰하고 직시하십시요. 
정신적인 동요를 관찰하기 시작하자마자 곧 그 동요는 힘을 잃기 시작할 
것입니다.. 천천히 그것은 물러나고 뿌리가 뽑힙니다. 
이것이 훌륭한 해결입니다. 관찰은 억압과 풀어해쳐놓기 양극단을 피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무의식속에 둔다는 것과 그것을 물리적 행위나, 목소리에 실어서 
행위하는 것 둘다가 완전한 근절책이 되지 못하며 더 많은 문제만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저 관찰만 한다면 마음의 동요는 지나가 버리며 그때 부정적 마음은 
소멸하고 동요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실질적인가 ? 보통사람에게 
동요하는 마음을 직시한다는 것이 쉬울까 ?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은 너무도 빨리 
우리를 덮쳐서 우리는 심지어 알아채지도 못하며 분노에 압도되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분노가 가라앉았을 때 
우리는 울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또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러나 
다음에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면 우리는 다시 똑같은 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후회한 모든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동요가 시작될 때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심층에서 시작되며 의식층에 다달았을 때는 나를 압도할 만한 힘을 
얻어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개인 비서를 고용해 화가 날때면 언제나 "주인님, 분노가 시작되고 
있어요."라고 말하게 해야합니다. 언제 이 분노가 시작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세명의 비서를 고용해 3교대로 시계 주위에 지켜서 있도록 해야합니다. 만일 내게 
그런 여유가 있고 분노가 시작되고 있다면 즉시 비서는 말할 것입니다.. " 오 
주인님, 보세요. 분노가 시작되었어요." 그러나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그를 
때리며 모욕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바보같은 놈아, 나를 가르치라고 너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 "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어떤 좋은 충고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지혜가 승리하여 그를 때리지 않고 대신 "고맙소, 이제 앉아서 나의 분노를 
관찰해야겠군."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이 가능할까요 ? 눈을 감고 분노를 관찰하려 
하자마자 즉시 분노의 대상--사람이든 사건이든 나를 분노하게 한 그대상--이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나는 분노 그자체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단순히 그 감정의 원인이 된 외적 자극을 관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단지 분노를 증폭시킬 것입니다 ;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킨 외적 대상과 분리해서 관념상의 
부정적 마음이나 감정을 관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진정한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심적 
동요가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마다 동시에 육체적인 면에서 두가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하나는 호흡이 정상적 리듬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부정적 마음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호흡이 격하게됩니다. 이것은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좀더 미묘한 관점의 다른 하나는 어떤 생화학적 반응이 육체 
내부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느낌입니다. 모든 심적 동요는 
육체의 내부에 하나의 느낌, 감각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실질적 해결책 입니다. 보통 사람은 마음의 관념적 동요상태--관념상의 
공포나 분노, 격정 등--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호흡이나 육체적 감각을 관찰하기는 쉽습니다. 이 두가지는 정신적 동요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과 감각은 두가지로 나를 돕습니다. 먼저 이 둘은 나의 개인비서 역할을 할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하자마자 나의 호흡은 정상적 작동을 잃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 보세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 그렇다고 나의 호흡을 때릴 수는 없겠지요. 
그 경고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비슷하게 감각도 나에게 뭔가 잘못되어 
가고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경고를 받은 나는 호흡과 감각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심적 동요가 지나가 버렸음을 알아챕니다. 
이 정신--신체적 현상은 양면을 가진 동전과 같습니다. 한쪽면에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이 있고, 다른 면에는 호흡과 육체의 감각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 어떤 심적 동요도 그 순간에 독특한 호흡이나 감각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호흡이나 감각을 관찰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정신적 동요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문제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마주대하는 것입니다. 그때 심적 동요는 강도가 약해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압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꾸준히 이를 
계속하게 되면 동요는 모두 사라지고 나는 평화와 행복속에 있게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아관찰의 테크닉은 내적, 외적인 두가지 면으로 우리에게 실체를 
보여줍니다. 전에는 내적 진리를 보지 못한채 열려있는 눈으로만 보았습니다. 항상 
불행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아냈었습니다. 항상 비난을 하며 외부의 실재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내부의 실재는 무시했습니다.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나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훈련을 통해 동전의 다른쪽 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호흡을 
자각하고 나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호흡이든 감각이든 간에 마음의 조화를 잃지않고 단지 그것을 관찰하는 
것을 배웁니다. 반응하기를 멈추고 비통함을 더이상 증폭시키지 않습니다. 그대신 
나는 심적 동요가 나타나서 통과해가도록 허용합니다. 
이테크닉을 연습하면 할수록 더욱더 빨리 부정적 마음으로부터 빠져나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점차 마음은 동요로부터 자유로와 집니다. 순수해집니다. 
순수한 마음은 항상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패와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찹니다. 
그들이 성공과 행복에는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삶의 패턴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평화와 행복을 파괴할 육체적 행동이나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는 평화와 조화를 동반해 침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영향을 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부에서 경험하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균형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배움으로써 
외부적 상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음을 배웁니다. 이 
분리상태는 세계의 문제로부터 도피하거나 무관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파사나 명상가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좀더 민감하게 되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서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짜증 섞이지 않고 사랑과 연민, 평정 
가득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는 타인을 돕는데 완전히 개입되어 있는 
신성한 무관심을 배움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타인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동안 자신의 평화와 행복도 유지합니다. 
이것이 붇다가 가르친 것입니다. 삶의 예술인 것입니다. 그는 결코 어떤 종교도 
주의(ism)도 가르치거나 설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어떤 의식이나 
맹목적이고 공허한 형식을 수행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내부의 실재를 
관찰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관찰하는 지혜가 생겨나면 그는 이 습관적인 반응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맹목적으로 반응하기를 그칠때 그는 진정한 행동, 진리를 보고 이해하는 균형잡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만이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현인들의 충고인 "그대 자신을 알라"입니다. 지적인 수준, 
생각과 이론의 수준에서만도 아니요, 자신이 듣거나 읽은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적, 추종적 차원에서 자신을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지식으로 
불충분합니다. 실질적 차원에서 실체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신체적 
현상의 실체를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동요와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에 대한 이 직접적 경험; 자아관찰의 이 테크닉이 소위 말하는 
"비파사나 명상"입니다. 붇다의 시대에 인도어로 '파사나'는 보통 평범히 열린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비파사나"는 보여지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정신--신체의 전체구조라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분명한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경험하게 되면 
맹목적으로 행동하기를 멈추게 되고 더이상 심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며 자연히 
옛날의 동요상태들도 사라져 있습니다. 모든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며 행복을 
경험합니다. 
비파사나 명상코스에는 3단계의 훈련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타인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하는 말이나 육체적 행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심적 동요를 증폭시킬 뿐인 그런 
언어와 신체적 행위를 계속하면서 마음의 동요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도덕성의 법전은 비파사나를 수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첫단계입니다. 살생을 하지말고, 도둑질과 간음, 거짓말, 마약투약 등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행동을 멈춤으로써 마음이 충분히 고요해져 진행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이 거친 마음에 대한 지배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대상인 
호흡에 주의를 고정하는 연습입니다. 가능한한 오랫동안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호흡운동이 아니므로 호흡을 조절하지 않습니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호흡을 관찰합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그대로. 이런식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이상 폭력적인 부정적 마음에 압도되지 않을 수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음을 집중하여 예민하게 하고 통찰력을 갖게 할 수있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삶을 살고 마음을 조절하는 이 두단계는 아주 필요하며 그 자체만으로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번째 단계인 마음의 순화를 거치지 않으면 
자기억압으로 이끕니다. 이 동요된 마음의 순화는 자신의 본성을 통찰하는 마음을 
개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비파사나입니다. 내부에 감각을 나타내 자신을 
현시하는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물질이라는 이 현상을 조직적이고 냉정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붇다의 가르침의 최정점입니다. 자아관찰을 통한 자아순화. 
이것은 누구나 수행할 수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통이라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질병이며 따라서 분리된 하나가 아닌 우주적인 치료를 
요구합니다. 분노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것은 불교도나 힌두교도의 분노가 아니며 
또는 기독교도의 분노가 아닌 것입니다. 분노는 분노입니다. 이 분노로 인해 
짜증이 날때 그것은 기독교도나 불교도, 힌두교도의 것이 아닙니다. 그 질병은 
우주적입니다. 따라서 치료도 우주적이어야 합니다. 
비파사나는 그런 치료법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평화와 조화를 존중하는 삶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조절하는 법을 개발하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의 실체를 통찰할 힘을 개발하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통찰력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데 말입니다. 비파사나는 
우주적인 길입니다. 
내면의 진리를 관찰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관찰하는 것은 실질적이고 
실험적으로 자신을 아는 방법입니다. 이를 수행함에 따라 심적 동요의 
비참함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거칠고, 외적이고, 피상적인 진리로 부터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 진리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이를 초월해 마음과 
물질을 넘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조건화된 상대성을 넘어서 진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동요와 불순함, 모든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는 진리인 
것입니다. 이 궁극의 진리에 어떤 이름을 붙이던 그것은 모든 이들의 최종목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궁극의 진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동요와 
비참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모든 이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 진정한 조화를 
즐길 것입니다. 



 
                If I dream about you it is illusory. If I see you it is real.
                But if I dream about your absence or I see your absence, there
                is no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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