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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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6월02일(금) 04시06분29초 KDT
제 목(Title): 습관의 두 방향


  물리학회 때문에 좀 바쁘다가 와 보니까 새로운 글이 거의
없이 아주 썰렁하군요.  그래서 하나비에다가 제가 
써 놓은 것이나마 한 번 가져다 놓겠습니다.
제목의 두가지 습관이란 원래는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유전(流轉)과 환멸(還滅)이라는 두개의 훈습을 말하는 것인데
그냥 눈에 띄는 신심명과 성경에다가한번 적용해 보았습니다. 

Posted By: yonho (Song) on 'Religion'
Title:     습관의 두개의 방향-신심명과 성경
Date:      Tue May 30 18:17:37 1995


지도무난(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유혐간택(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단막증애(旦莫憎愛)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  통연히 명백하니라.

호리유차(毫釐有差)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천지현격(天地懸隔)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욕득현전(慾得現前)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막존순역(莫存順逆)  따름과 거스름을 두지 말라.

위순상쟁(違順相爭)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시위심병(是爲心病)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불식현지(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도로염정(徒勞念靜)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원동태허(圓同太虛)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무흠무여(無欠無餘)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양유취사(良有取捨)  취하고 버림으로 말리암아
소이불여(所以不如)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막축유연(莫逐有緣)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물주공인(勿住空忍)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盡)  사라며 저절로 다하리라.

       --------------해설-------------------------

  제목이 별로 잘 붙여지지 않아서 신심명과 성경이 두개의 습관의 방향을

각각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둘다 똑같이 두가지를 모두

이야기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둡니다.


  신심명(信心銘)은 중국 수나라 때 중국 선종의 3대 조사인 승찬스님의

글입니다.  위의 해석은 성철스님 법어집에 있는 것을 옮겨 왔는데

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철스님이 조목 조목 자세히

설명을 하셨지만 뭐 다 베껴 쓸 수는 없고 대신 제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특히 성경을 기초로 하여 한번 해설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원래 글은

위와 같은 댓구가 73개 있는데 시간 관계로 그중 10개만 써 봤습니다.



  제가 신심명을 처음 접한 것은 오래 전에 라즈니쉬가 영어로 번역,

해설해 놓은 것이었는데 제일 첫 구절의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great way is not difficult
  for those who have no preference.

본문을 다 읽어 볼 필요도 없이 짐작할 수 있지만 신심명은 두괄식 문이라서

바로 이 첫 구절이 핵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낭야각이라는 스님은

신심명의 주석을 부탁받았을 때 처음 네 구절(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만 큼지막하게 쓰고 나머지는 전부 주석으로 처리해 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자만 도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상대적인 차별이

없는 절대 평등이고 그 경지에 도달하려면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하는

상대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그 첫 구절들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택(preference), 즉 이원론적인 선택이 없는 것이 도라고

한다면 거꾸로 말해서 도가 뭔지 모르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은 상대적인

선택의 연속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하루 하루 생활을

되돌아 보면 사실 우리 자신이 세워 놓은 판단 기준에 따라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더럽고 하는 선택을 하며 우리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추구해 나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러한 이원론적이고 상대적인 사고 방식의 시작이 바로

원죄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라는 것이 원죄로 말미암은 타락한 세상과 그로부터 원죄

이전의 상태로 복귀, 즉 구원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은

따라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과 원죄를 극복

하려고 하는  노력의 표본인 예수님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예수님으로 대별되는 두개의

삶의 형태는 나를 기준으로 하는 상대적인 분별을 추구하는 삶과

그 반대로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는 절대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죄를 짓고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되기전의 인간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성경이외의 것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아무리 읽어보아도 하나님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구절대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모습, 즉 아담과 이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아담과 이브는

원죄를 저지르기 전의 그 아담과 이브여야 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눈이 두개고 코가 하나고 ... 하는 물질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때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성품이라고 이해해야

옳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아담과 이브의 성품(정신상태)는 선악과를

먹은 것을 분기점으로 질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으며 사실 이 선악과를 먹는

사건이 인간의 본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원죄를 저지르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곧 하나님의 모습)은 선과 악을 구별

하지 않는 그러한 것입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선과악으로

대표되는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어떠한 것도 다 선이며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아담과 이브가 사는 곳은 낙원이 아닐래야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선악 미추를 구별하기 시작하였을 때 아담과

이브는 이제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절대적인 가치로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세상을 대상으로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게 되는 분별대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신과

인식대상으로서의 객체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한 인간은 사물의 단편, 즉

자신에게 의미를 가지는 면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인식되는 사물의 가치는 인간의 가치관의 어느 지점에 존재할 것이고 사물은

인간에게 그만큼의 가치밖에는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이 행복이라는 개념을 가지기 시작하는 때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세상은

행복과 불행이라고 하는 기준으로 판단되는 가치만큼을 가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일어나는 일들은 불행이라고 하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많은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이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예컨대 기독교인들은 영생을 갈망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망과 영생이 별개의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 영생은 결코

올 수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 사실은 우리 자신들에 의해 저질러진 원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사람이 성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가 바로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면 낙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사고의

방향을 비이원론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이나 사고 방법의 획득이 아니라 지금까지 습관이 들어온 사고

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러한 크나큰 포기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속물적 근성, 즉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포기하고 진리인 하나님을 기준으로 사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의 표현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간절한

기구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말씀하지 않음이 없지만

인간이 그것을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취사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적인 취사선택만 하지 않는다면 사실 더 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가 에덴의 낙원입니다.  에덴이 어딘가에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주 끝까지 찾아가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나와 듣는 하나님, 또는 말하는 하나님과

듣는 나를 분리시켜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카테고리만 하나 더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상이란 것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은 우상에 다름아닙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일은 자신의 판단기준을 과감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체도 객체도 모두 사라진 선악과 이전의 상태에 다름아닙니다.


  아담과 이브의 삶과 예수님의 삶은 신심명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간택을

하며 사는 것과 그것을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 극단의 중간쯤 어딘가에서 한쪽을 향해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점점 간택을 하는 습관을 키우는 삶과 점점 간택을 버리는 습관을

키우는 삶의 두 방향중에서 어느 한쪽 방향을 따라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삶과 초세속적인 삶은 그 두 극단의 상태에서 사는 삶이라기 보다는

똑같은 지점에 있더라도 어느 방향을 향해 가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바꾸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방법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참선도 하고 절도 하고 염불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별개의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님은 이제 자명합니다.  그 모두는

자꾸만 대상을 만들어 온 우리 삶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신도 무슨 소린지 모르는 소리를 한참 써 놨는데 이제 다시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서 신심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울 것입니다.

시간이 나면 원문을 전부 소개하고 싶지만 글쎄...


사족: 선악과를 먹은 것이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인데 이건 구렁이 담넘어가는 것이다.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이세상이 창조된 날짜까지 계산하는 사람들이 왜 선악과의 의미를

은근슬쩍 넘어갔을까?  안그래도 바쁜데 이것 가지고 논쟁할 여유가

없으니 뭐라고 걸고 넘어져도 대답을 안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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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nho Song
        yonho@nayo.um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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