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yonho (Song) 날 짜 (Date): 1995년05월13일(토) 07시40분52초 KST 제 목(Title): 해설:야스퍼스와 포괄자 사상 야스퍼스의 포괄자에 대한 이글은 철학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얼마나 심오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동시에 철학이 본질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또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포괄자라고 지칭되는 이른바 제일원리는 원효스님의 일심(一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야스퍼스의 포괄자에 대한 태도와 원효스님의 일심에 대한 태도 사이에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으니 철학과 종교 사이에 놓여진 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괄자와 일심에 대한 비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시도한 바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야스퍼스의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글을 요약하는 수준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포괄자와 일심은 우선 그 본체에 있어서 거의 완벽히 일치합니다. 우선 그것은 일체만물이 그것으로 부터 나오는 그러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불교에서는 이를 각각 견분(見分)-상분(相分)이라고 함)이 나누어지는 대상적 사유(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지)로는 절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야스퍼스는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의 존재양식이 바로 실존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 다시 말하여 의식일반(즉 마음)으로서의 우리의 생명현상임에 다름아니라는 데에까지 도달합니다. 포괄자에 대하여 대상적 사유로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사실상 야스퍼스의 이 포괄자 사상도 무의미한 것이거니와 그는 이 사실을 철학적 사유의 파탄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철학적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럼으로써 포괄자를 인식하려고 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자기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자면 포괄자에 대한 이 사유의 목적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분열속에서 대상지 로써만 사유하던 우리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 비상도...'라고 그 자신의 저술의 한계를 명백히 선언하고 중간쯤에서 학문을 하는 것은 하루하루 [지식을] 증가시켜 나가는 것이지만 도를 닦는다는 것은 거꾸로 그것을 감소시켜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왜냐하면 이 의식의 변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수행해 온 대상지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 즉 반야는 대상지에 대한 반대말로서 전체적 파악을 의미합니다. ) 그렇다면 이 의식의 변화는 어떻게 해서 달성될 수 있느냐하면 야스퍼스에 따르면 그 방법은 "...규정적인 사유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극단에까지 수행함으로써, 우리를 이 사유의 속박에서 풀어 놓아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화두선(話頭禪)이라는 불교식 수행방법을 연상케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포괄자란 단지 간접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바로 종교와 철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야스퍼스는 " ...주관-객관의 분열을 넘어서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하나로 되는 경지, 즉 모든 대상성이 소멸하고 자아가 말소되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동양신비주의(서양에서는 이것을 신비주의라고 부르지만 동양에서는 하나도 신비로울 것이 없는 단지 개선된 생활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 사고방식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철학자에 머무르기를 원했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 머무르는 한 포괄자는 단지 존재에 반영된 암호문자의 해독, 이른바 형이상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야스퍼스는 주관-객관의 분열을 극복하고 포괄자를 인식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즉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본문의 마지막 단락(허무주의와 재생)에 간결하고도 의미심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인용하면 " 실은 기만적이었던 견고한 것들로부터의 추락은 부동(浮動)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심연으로 보였던 것은 자유의 공간이 되며, 외견상 허무인 것같이 보이는 것은 일변하여 그것에서 본래적인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그러한 것이 되는 것이다." 좀 쉽게 이말을 바꾸어 쓰자면 "우리가 지금 우리의 주관적 관점에서 견고하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객관적 실체들은 사실은 우리 자신의 기만적 사고에 의해 생겨난 착각일 뿐이며, 주관-객관의 분열이라는 대상적 사유를 극복하고 포괄자를 인식하면 그러한 비본래적인 객관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어 정말로 자유롭게 세상을 살 수 있다. 이 새로운 상태는 그전의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허무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이러한 상태에서 만이 우리가 우리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존재와 모순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며, 깜깜한 어둠인 것처럼 보였던 우리 자신의 울타리 밖은 이제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이 되는 것이다." 더 어렵나? :) 송 연호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