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m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Buddhism ] in KIDS
글 쓴 이(By): croce (B.W.L)
날 짜 (Date): 1999년 3월 26일 금요일 오후 02시 33분 23초
제 목(Title): 이어서



자연의 흐름에도 주기가 있듯이 사람의 감정 역시 주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감정의 흐름을 관찰하듯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감정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람들도 비록 
적지만 없지는 않다. 
감정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평화 속에 머무는 일이다. 無心은 아예 마음이 죽어버린 상태를 
뜻한다.

 마음이 죽어버린 자들도 <배신감>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표현을 쓰는 것에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무심이란 것은 돌덩이처럼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죽는 것은 자아가 소멸되는 것이다. 즉, 주인노릇을 하면서 이런 저런 감정을 
만들어내곤 하던 마음 덩어리가 먹잇줄이 끊어져 절명한 것인데, 그 이후 무심의 
의식은 특정한 마음을 만들어내었다, 죽였다 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 마음을 
죽여놓고, 다시 이런 짓거리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무심에 도달한 개의식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연속적으로 모멘텀을 갖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체험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의도적으로 소멸당하기 때문에 목적이 달성되면 흐름이 끊어진다. 그리고 의식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작용으로 인해 그에 얽매이거나, 다시 
태어나는 등의 카르마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가 고백했던 <배신감>은 의식의 차원에서 내뱉어진 것이다. 

 라즈니쉬는 평소 크리슈나무르티를 비판해왔었고, 그의 <배신감>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했지만, 그 역시 인간에 대해 <가망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내 황금빛 유년기의 추억>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라는 글에서, 자신의 심경을 
내비추었다. 절망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만일 그에게 
아무것도 절망할 것도 없었다면 이런 쓸데없는 말을 했겠는가? 거기엔 분명 
무엇인가 <가망없는> 것이 있었고, 그는 그 <가망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절망으로부터 다시 
피어오르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에게 희망을 갖고 있다가 배신당하는 
것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희망을 버리고 시작하겠다는 뜻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의식적 차원에서의 <배신감>은 감정의 표현을 빌린, 
현상에 대한 관찰 결과일 뿐이다. 배신감이라는 인간적인 표현을 썼다고 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자만심의 발로로 해석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관점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라즈니쉬와는 달리 인간의 지성에 약간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머가 넘쳤던 라즈니쉬에 비해 지나치게 심각했던 것도 이를 
암시한다.



 

                                               I am master of my own destiny,
                        and I can make my life anything that I wish it to be.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